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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이종상(李鍾祥·71)을 만나기로 한 날 서지문 고려대 교수가 신문칼럼에서 그의 그림에 독설(毒舌)을 퍼부었다. "동네 아낙이나 주막집 주모(酒母) 역으로 나오면 알맞을 얼굴"이라는 것이다. 졸지에 주모로 지목된 이종상의 작품은 5만원권에 나오는 신사임당(申師任堂) 초상화다.

이종상의 그림은 전에도 구설에 올랐다. 신사임당 진외가(陳外家)인 강릉 최씨 문중(門中)에서 같은 그림을 두고 "기생 같다"고 했다. 그들은 한국은행의 설명을 들은 뒤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뉴스를 몰고 다니는 사람을 인터뷰할 때 기자는 신이 난다.

5000원권의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5만원권의 신사임당을 그린 것으로 유명해졌지만 이종상은 가장 많은 표준영정을 그린 국내 화가다. 악성(樂聖) 우륵, 광개토대왕, 장보고, 원효대사, 윤관과 강이식 장군이 그의 붓질 아래에서 얼굴을 찾았다.

하지만 이종상을 '영정(影幀)화가'의 틀 속에 가두는 것은 '아인슈타인=원자폭탄'이라 외우는 것과 같다. 그는 이당 김은호(金殷鎬) 월전 장우성(張遇聖)으로 내려오는 한국화의 적통(嫡統)이자 현대판 진경(眞景)산수의 1인자이며 서울대 미대를 대표하는 미술계의 '권력'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작업실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한번도 언론에 공개한 적이 없는 작업실"이라며 일행을 안내했다. 멜빵 달린 낡은 청바지 차림의 그가 오르는 계단 곳곳에는 값을 알 수 없는 작품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이 옷이 대학 때부터 입어오던 작업복"이라고 했다.
 

▲ 이종상 화백이 무대막 작업을 하던 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스승 이당 김은호가 남긴 신사임당 초상화를 고증을 거쳐 다시 그렸다.―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글 읽어보셨지요.

"그 딱한…. 자기 전공이 중요하면 상대 전공도 중요하게 여겨야지요. 내 그림을 실물로 본 적도 없으면서 개인 느낌만으로 그런 글을 쓰는 것은 교양인으로서 삼가야지요. 화폐를 그리 모독했으니 그분에게 돈이 갈까요? 평생 돈이 아쉽게 살 것 같은데요."

―현재 통용되는 화폐 초상화를 두 번이나 그렸으니 돈에 대한 느낌도 다르겠지요.

"화폐는 30~50년간 쓰이는 국가의 공유재산이자 문화가치인데 우리는 소유와 저축에만 관심을 갖지요. 화폐에는 국민의 자존심이 담겨 있어요. 제가 유럽 가서 충격을 받았어요. 그 나라들의 화폐는 전부 예술적 가치를 지녔어요. 장군이나 정치가뿐 아니라 문화, 예술, 음악가가 등장하는 게 부러웠습니다. 신사임당 화폐는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자신합니다."

―기생이나 주모를 그려본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자꾸 기생이니 주모니 하는데 신사임당은 나혜석보다 훨씬 더 개방된 인물이었을 겁니다. 요조숙녀와는 거리가 먼 신여성이었을 겁니다."

―화백의 그림을 두고 왜 그런 말들이 나올까요.

"원래 신사임당 초상화는 스승인 이당이 그린 겁니다. 당시 최씨 문중의 독촉이 심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5만원권에 들어간 신사임당은 이당의 초상화에서 얼굴 부분만 따온 것이고 머리와 복식(服飾)은 고증을 받아 다시 작업한 것입니다. 얼굴도 그대로 모사한 게 아닙니다. 눈동자를 또렷이 했고 입술 윤곽도 선명하게 했지요. 이당 작품에 서양식 음영법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도 후회하셨어요."


▲ 5만원권 화폐에 들어간 이종상의 작품‘신사임당 초상’―김은호의 신사임당을 제자인 이 화백이 손봤다는데 5000원권의 율곡 초상도 원래 김은호 선생이 그린 초상화를 이 화백이 손본 거지요?

"5000원권 율곡 초상을 그릴 때 저는 30대였습니다. 100원 동전에 이순신 장군을 그린 월전이나 1000원권에 퇴계 이황(李滉)을 그린 이유태 선생 같은 선배들이 많았어요. 율곡 초상도 원래 김은호 선생이 작업하다 쓰러지는 바람에 제가 맡게 된 거지요. 이당은 '율곡의 선비 기질을 살리다 보니 빈티가 나고 하악(下顎·아래턱)이 너무 좁게 그려졌다'고 자기 그림을 못마땅해했어요. 지폐 속의 율곡과 신사임당은 병중(病中)의 스승이 제자의 손을 빌려 그림을 수정한 것으로 봐야지요."

―5000원권을 맡은 건 이당이 지명했기 때문인가요?

"화폐 화가는 자기가 원하거나 추천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한국은행에서 치밀하게 내사를 다해놓지요. 저는 당시 어렸지만 순종의 어진(御眞)을 그린 조선시대 마지막 화원(畵員)이었던 이당에게서 수업을 받았지요."

―5000원권의 율곡을 이 화백이 그리기 전에 서양에서 그렸지요.

"이당이 와병하자 영국 델라로사(社)에 의뢰했어요. 그런데 영국에서 평면 그림을 옆으로 돌리면서 양코배기 율곡을 그려온 거예요."

―이번 5만원권은 언제 의뢰가 왔습니까.

"2007년입니다. 화폐를 그리는 화가는 원래 '내가 그렸다'는 말을 하면 안 돼요. 5000원권도 제 입으로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운보 김기창 선생이 기자들과 이야기하다 발설한 거지요."

―화폐 초상화를 그릴 때 신경 쓸 일이 많지요.

"아내에게도 알리면 안 됩니다. 작업에 최소 5~6개월이 걸리는데 초상집도 가면 안되고 안 좋은 병에 걸린 환자를 문병 가서도 안 됩니다. 부부가 합방(合房)할 수도 없어요. 악귀를 쫓기 위해 온종일 향을 피워놓습니다. 금전적인 문제를 일으켜서도 안 됩니다. 이당도 그 점을 제게 강조했어요."

―화폐 초상화를 그리면 보수를 많이 받습니까?

"그렇지는 않고요. 화폐 초상화를 그린 사람은 손만 만져도 돈이 들어온다는 말이 있지요. 언젠가 한국은행에서 5000원권 2장을 묶어 발행한 적이 있어요. 아는 이가 그 돈에 사인을 해달라고 졸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게 45만원에 팔렸다더군요. 지금도 제 집에 돈에 사인해달라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요. (그 말에 기자와 사진기자는 화백의 손을 덥석 잡고 한참을 만졌다.)

―우리 역사에 진영(眞影)을 남긴 경우가 거의 없지요. 그렇다면 초상화는 창작이라는 말이 되지요.

"창작이지요. 김은호 선생은 생전에 '신사임당 초상화 의뢰를 받았을 때 사임당이 현몽(現夢)했다'고 했어요. 저는 현몽한 적은 없지만 위인의 얼굴을 그릴 때면 취재를 많이 합니다."

―어떤 취재를 했는데요.

"우륵 초상화를 그릴 때 옛 고령가야와 탄금대를 돌며 가야금 명인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들이 24시간 가야금 소리를 들어보라고 해 테이프를 하루 종일 틀어놓았어요. 그 영향을 받았는지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딸이 결국 국립국악원 가야금 수석이 됐어요. 원효대사를 그릴 때는 스님을 모델로 삼았는데 아무리 해도 백정 같은 얼굴이 나오는 거예요. 동국대 이기영 박사를 칠고초려 끝에 만나 여쭤보니 '기신사상'을 공부해보라는 겁니다. 그 인연으로 동국대에서 학사부터 박사까지 했지요."

―동국대도 다녔습니까?

"제가 서울대 교수 시절 동국대에서 철학석사학위를 하려고 했는데 딱지를 맞았어요. 문학사 학위가 있어야 하는데 저는 미술학사였잖아요. 교무과에서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벌게졌지요. 동국대 철학과 3학년에 학사 편입해 철학박사까지 했습니다."



이종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이당 김은호다. 이종상은 서울대 미대 2학년 때인 1960년 4·19 직전 서울 종로구 와룡동 이당의 집을 찾았다. 'ㅁ 자'집에 들어섰을 때 30여명의 나이든 화가 지망생들이 대청에 무릎을 꿇고 이당이 넘겨준 그림본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당의 집은 후소회(後素會)의 본부였다. 후소는 공자가 자로에게 남긴 말로 '회사후소(事後素)'를 줄인 말이다. 아름다움은 인간이 인품의 바탕을 만든 후에야 할 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거기서 이종상은 말로만 듣던 조선화를 본격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이당의 집은 풍경이 어떻든가요.

"화가 지망생들은 화장실 두루마리보다 약간 큰 화선지 두루마리를 기둥에 매달아 놓고 화조와 병풍, 사군자(四君子)를 모방하고 있었지요. 선생이 내려준 체본을 완벽하게 모방할 때까지 연습하는, 전이모사(傳移模寫)라는 겁니다. 말로만 듣던 도제교육의 현장을 그때 처음 봤습니다."


―이당을 찾아가니 뭐라든가요.

"꾸벅 절하니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해요. 답을 하니 '아! 그거 배워야지. 그런데 어려워'라고 하셨어요. 그러더니 막 웃으면서 '오래 살고 볼 거야. 우리 집 문턱을 서울대학생이 넘어온 건 처음이야'라고 했습니다."


―공짜로 배웠습니까?

"제가 대학시절 사정이 어려워 서울역 앞에서 노숙도 하고 동대문 시장에서 양말 떼다 해무청에 팔아 생계를 이을 때였어요. 선생님께 사정을 이야기하니 레슨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오히려 낙관 돌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선생님께 얻었지요."


―맨 처음에 무엇을 배웠습니까.

"조선시대에는 견(絹)을 썼지요. 견에 씨줄 날줄이 있는데 그 위에 아교를 입혀요. 서양화에서 캔버스를 흰색으로 칠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아교 위에 색이 묻습니까?

"아교 위에만 그리면 유리에 붓글씨 쓰는 것과 똑같아요. 아교가 굳으면 그 위에 명반(明礬)을 씌웁니다. 그림이 완성된 뒤에도 명반을 씌워 고정시켜야죠. 우리가 신운(神韻)이 감돈다고 하잖아요. 바로 명반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만 7~8개월을 배워야 해요."


―우리 초상화에는 표정이 있는 얼굴이 없지요.

"육리북채(肉理北彩)라는 게 있어요. 우리 초상화는 자세히 보면 점(點)을 여러 번 찍어 선(線)이 됩니다. 육리는 말 그대로 피부 바로 밑에 있는 얼굴의 근육을 말합니다. 그래서 무표정한 것 같지만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 나오지요."


―북채라는 건 뭡니까.

"북채는 배채(背彩)라고도 하는데 우리 초상화는 2장의 그림을 붙이는 걸 말합니다. 앞장에는 음양을 평면적으로 그리고 뒷장에 육색(肉色)을 입혀 붙이는 거지요. 그런 초상화는 영락없이 진짜 비단을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고 얼굴도 살아 있는 사람처럼 혈기가 돌지요."


―이당에게 언제쯤 칭찬을 받았습니까.

"제가 잘 그린 것 같다고 자랑했더니 '틀렸어. 아직 멀었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자네 인품은 어디다 넣었나'라고 하시더군요. 인품이라는 게 눈에 안 보이는 거잖아요. 머리와 영혼에 있는 거지요. 그게 바로 배채의 원리예요."


―이당을 두고 친일(親日)했다는 비판이 있지요.

"왜정시대 선전(鮮展)에 참여한 걸 두고 그런 말들이 있지요. 당시 일본 화풍이 물밀듯이 몰려들어올 때였어요. 그런 식으로 친일파로 분류하면 친일파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 화백을 두고도 이당의 제자이니 친일화풍이 있다고 한 교수가 지적한 글을 봤습니다만.

"제가 광복될 때 7살이었어요. 제가 이당에게 배운 게 친일이라면 제게 배운 서울대 미대생들도 전부 친일파라는 말입니까?"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이종상의 집은 갑부였다. 원예학을 전공한 아버지와 고등여고를 졸업한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로 그가 태어난 뒤, 사과 개량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사업에 성공해 서울 후암동으로 이사왔다. 큰집에 흑석동에 별장까지 있었고 자가용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세는 6·25 직전 아버지가 39세로 요절하면서 일거에 기울었다. 고래등 같은 집과 별장은 회사 부하들이 가로채고 때맞춰 전쟁이 터지면서 후암동 삼광초등학교에 다니던 그는 졸업장도 받지 못한 채 고향 예산으로 피난가야 했다.


―어느 정도 부자였습니까.

"제가 유치원을 다녔을 정도였으니까요. 어려서부터 보약도 많이 먹어 체구가 컸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6학년이었던 형이 친구들에게 맞으면 대신 싸웠을 정도니까요. 아나운서 변웅전이 제 유치원 친구예요."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더니, 그렇게 집안이 단번에 기울 수 있습니까.

"제가 전쟁 통에 며칠 동안 어머니와 형을 잃은 적이 있어요. 어쩔 수 없이 깡통 들고 구걸하고 다녔습니다. 명동극장 앞에 있는 한 음식점 아주머니를 잊을 수가 없어요. 다른 식당에서는 밥 속에 김치, 고춧가루 든 것을 한번에 엎어주는데 그 분은 꼭 밥과 반찬을 따로 주셨어요."


―고향에서도 고생을 많이 했겠네요.

"어머니가 광주리 장사를 하면서 '내가 도둑질, 서방질만 빼고 할 수 있는 일 다해서 가르치겠다'고 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졸업장 없이 보문중에 편입하게 된 것도 어머니 덕이었어요. 당시 광주리 팔던 집이 보문중학 이상복 선생 댁이었는데 사정해서 입학을 허락받은 겁니다."


―외가 쪽도 집안이 좋았다면서 도움을 받지는 않았나요.

"제가 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 팔았어요. 집에 나무를 져다 주고 나오는데 그 댁 남편이 저를 부르는 거예요. '자네 부친 함자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더군요. 아버지 이름을 들은 그 분이 '아이쿠, 어쩌다 이 꼴이 됐는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옛 부하였습니다. 그 분이 쌀 한말을 줘 무거운줄도 모르고 즐거운 마음에 집으로 가져갔어요."


―어머니께 효도를 했군요.

"웬걸요, 어머니가 노발대발하시며 '도로 갖다 드리고 나무 값만큼만 받아오라'는 겁니다. 울면서 새벽까지 다시 길을 걸어 돌려드리고 왔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집안에서 미술을 했으니 철이 없었던 겁니까?

"아버지가 그림을 좋아했어요. 예산에서 유명한 이응로 화백이 아버지보다 몇살 위였는데 두 분이 친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막내는 화가 시키라'고 했어요."


―대전고에서 본격적으로 미술반 활동을 했지요.

"하루는 대전여중 학생들이 저를 보고는 킥킥대며 코를 막고 지나가요.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우셨어요. 제가 '여학생들이 코를 안 막는 학교가 어디냐'고 여쭈니 대전고라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악물고 공부했어요. 영어 ABC도 몰랐는데 경복중에 다녔던 형님에게 영어 알파벳 써달라고 해 무작정 외웠지요."


―고교 졸업 직전까지 건축과를 지망했다고 들었습니다. 막판에 전공을 바꾼 이유가 있습니까.

"당장 취직할 수 있고 그림까지 그릴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아 건축과를 지망했는데, 당시 대전고 교장으로 박관수 박사가 부임했어요. 그 분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은사입니다. 박 교장님은 저희들만 보면 '앞으로 문화의 시대가 온다'며 '취미와 직업이 다른 시대는 지났다'고 했어요."


―교장의 말 한마디에 결심을 바꾼 겁니까?

"독일에 유학 갔던 그 분 따님이 대전에 온 적이 있어요. 아주 미인이었는데 저희들에게 차를 한잔씩 대접했어요. 독일에서 무슨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니 미술사를 전공한다는 겁니다. 저는 미술사라는 전공이 있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미모에 넘어간 것이군요.

"어머니께 제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잘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생전에 아버지도 같은 말씀을 했거든요."


―대학에 진학해서도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서울역에서 주로 노숙했습니다. 외가 쪽 친척들이 서울에 많이 있었지만 남에게 폐끼치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이 계속 걸리는 거예요. 고생은 했지만 당시 노숙자, 노동자들이 다 제 모델이 돼줬습니다. 나중에 국전에 출품할 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원래 서양화를 하다 동양화로 전향한 이유가 있습니까.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온 선생님이 계셨는데 제 그림을 보더니 '파리에서 30년 전에 유행한 그림이잖아. 일본 예술사조와도 비슷하고'라고 했어요. 청계천 헌 책방을 뒤져 일본 잡지를 찾아봤는데 사실이었어요. 그날로 유화 물감이며 모든 도구를 공터에 모아 놓고 불을 질렀어요. 그 덕에 소방차까지 출동했습니다. 벌금까지 냈어요."

이종상이 대학생 시절, 국전은 미술학도들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국전은 독특하게 운영됐는데 3년 연속 특선을 하면 추천작가가 되고 7년간 쉼 없이 작품을 내면 초대작가가 된다. 심사위원은 초대작가를 3년 이상 해야 할 수 있다.


3연속 특선을 못하면 10년 내에 6번 특선을 해야 하고, 거기서도 실패하면 평생 15번 특선을 해야 하는 식이었다. 당시 대학 재학시절 특선은 신문 사회면에 날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종상은 3학년 때 '장(匠)'이라는 작품을 시작으로 3연속 특선을 하게 된다.


―'장'이라는 작품은 요즘의 노동화(勞動畵) 같아 보입니다.

"예전부터 대장간이 등장하는 그림에는 민중봉기라는 뜻이 숨어 있는 거예요. 제 작품도 혁명을 촉구하는 뜻을 담은 겁니다. 제 작품의 등장인물은 모두 대학생 또래들이에요. 심사위원들이나 군인들은 몰랐지만 친구들은 '너 이런 그림 그리면 붙잡혀간다'고 걱정해주곤 했어요."


―그런 류의 작품으로 잇따라 국전에서 특선을 했지요?

"그 뒤로도 비슷한 작품으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상과 1962년과 1963년 국전에서 내각수반상, 문교부장관상을 받았어요. 그와 동시에 추천작가가 됐지요."

―타도의 대상으로 여겼던 군인들로부터 상을 받고 보니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처음에는 젊은 혈기에 혁명을 한다고 했는데 상을 받고 나니 점점 동화가 되더군요. 빨리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작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건 혁명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아니라 고구려 관련 논문 때문이었지요?

"제가 60년대 말 쓴 논문이 1972년 발간된 한국민족문화논총에 실려있어요. 내용은 우리 그림의 근원은 고구려 벽화에서 나왔으며 수묵화가 아니라 채색화가 우리의 근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고구려를 거론하면 빨갱이로 여겼어요. 남영동 분실에 끌려갔습니다."


―어떻든가요.

"의자 두개, 욕조 하나 빼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냥 저를 방에 두고 나가더니 조사관이 계속 바뀌면서 계속 같은 질문을 하는 거예요. '왜 오셨죠?'라고요. 나중에야 그게 정말 무서운 고문일 걸 알았어요."


―어떻게 풀려났습니까.

"그 사람들이 난수표를 찾는다고 '수표를 빨리 내놓으라'는 겁니다. 저는 진짜 수표인줄만 알고 '수표 벌써 바꿨는데요?'라고 하니 막 웃어요. 엉터리를 잡아온 걸 나중에야 안 것이죠. 흑석동 화실에 돌아와보니 천정이고 방바닥이고 싹 다 뜯어버렸어요. 그래서 당시 그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학부 졸업 후 서울대에서 강사를 하다 교수가 됐지요.

"서울대 교수시절 제 꿈이 2개였습니다. 미술관 짓는 것과 박사학위 만드는 것이었는데 다 이뤘습니다. 동국대 대학원 다닐 때 주변에서 '저 친구, 출세하려 한다' '명함에 박사학위 박으려고 한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요."


―김병종 서울대 교수가 쓴 글을 보니 수업 첫날 벼루를 준비하지 못해 선생께 쫓겨났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고생했던 분이 왜 가난한 학생 가슴에 못을 박은 겁니까.

"그래서 오늘날의 김병종이가 있는 거예요. 김 교수는 당시 서양화를 해야 할지 동양화를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제가 그러지 않았으면 서양화를 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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