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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발표를 지켜보며...

by 문경수 posted Mar 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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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면 아내가 발표할 차례다. 구대칭 중력장을 발표 중인 임석희 씨를 보니 내심 걱정이 앞선다. 출산을 앞둔 터라, ‘마지막 발표 기회니까 잘 해보겠다.’던 아내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부담을 느낄까봐 잘하라는 내색도 못했다. 발표가 시작됐고, 준비한 내용을 천천히 설명하는 아내의 모습이 캠코더를 통해 비춰졌다. 집에선 곧잘 외워 설명하던 부분도 긴장을 했는지 그냥 넘어간다. 지켜보는 20분이 20년 같이 느껴졌다. 아내를 처음 독서클럽에 데려온 날이 떠올랐다.


 


2005년 9월 무렵, 결혼을 석 달 앞둔 우리는 전국일주를 감행했다. 10년 연애 끝에 결혼이지만, 서로를 알고 싶은 갈증은 더해져만 갔다. ‘그렇게 오래 사귀고도 할 말이 남았냐’는 주위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이킹과 캠핑을 하며 제주를 시작으로 통일 전망대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같이 걷고, 밥 먹고, 노래하고, 산을 넘었다. 20일간의 여정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함께 독서클럽에 나가는 거였다.


 


결혼 전 인사를 빌미로 어렵게 독서클럽에 동행했다. 아내의 첫 반응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라는 말로 일축했다. 원탁에 둘러 앉아 생소한 강연을 듣는 거부감과 발표할 수도 있다는 부담감에 손사래를 쳤다. 전형적인 떨림증이었다. 예전처럼 내가 듣고 와 자신한테 이야기 해달라고 했다. 이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참여를 독려했다. 우선 책 읽는 지루함과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소리내 읽기’를 시작했다. 한 사람이 읽다가 틀리면 다음 사람이 읽는 방식이었다. 첫 선정도서는 이동선 사장님이 결혼선물로 준 ‘잘먹고 잘사는 법’이다. 실용적인 책인지라 쉽게 읽혔다. 혼수품으로 TV를 구입하지 않은 것도 일조를 했다. 더불어 책에 나온 배경이 되는 곳을 직접 가보기로 했다. 한 밤 중 미시령에 올라 황동규 시인의 ‘미시령 큰바람’을 읽었을 때는 아내뿐만 아니라 나 역시 책 읽는 즐거움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공석중인 현장 스케치를 맡은 것도 큰 전환점이 됐다. 사진을 전공했지만 써볼 기회가 없던 차에 전공도 살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부담도 줄어 독서클럽 문턱에 한 발 더 내딛었다. 모임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렌즈를 통해 바라본 토론회 분위기를 얘기했다. ‘오늘은 누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누가 않나오셨네’, ‘어느 위치에 찍으면 사진이 잘 나온다.’는 말까지 자신의 느낌을 표출하기 이르렀다. 온통 내 책 밖에 없던 서가에 아내의 책이 한두 권씩 꼽혔고, 어디를 가든 책부터 챙기는 습관이 자연스레 만들어 졌다.


 


사실 아내가 발표까지 하리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었다. 호주탐사를 다녀온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왜 아이를 빨리 안 갖느냐’는 어른들 성화를 만류하고 함께 호주에 가기위해 가족계획을 미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함께 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현장에 가서 보고 느낀 점도 많았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공부하는 재미를 마음껏 누렸다. 이를 계기로 별에 대한 관심의 밀도가 증가했고, 탐사경과 발표를 준비하며 난생 처음 사람들 앞에서 발표란 걸 해봤다며 큰 자신감을 얻었다. 무엇보다 호주탐사에서 오자마자 아이를 갖는 기쁨도 맛봤다.
 
거실 한 컨에 천문모임 발표를 준비한 아내의 흔적이 보인다. 지저분해 보인다며 치우려는 아내를 내가 말렸다. 아내의 공부한 흔적을 오래 두고 보고 싶었다. 이제는 내가 아내의 공부 모습을 보며 반성을 하게된다. 이번 발표는 아내의 학습욕구와 호기심을 살려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어제 저녁 첫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양자’로, 둘째 아이 이름은 ‘역학’으로 짓자는 농담에 서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하다. 독서클럽과의 접속은 단순히 부부가 함께 하는 취미를 갖으려는 게 아니다. 서로가 품고 있는 호기심과 학습 욕구를 깨워주는 것이다.


 


멋진 밥상을 차려준 100북스의 공부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쓰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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