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우주+뇌과학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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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7 03:43

아내의 발표를 지켜보며...

조회 수 3336 추천 수 0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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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면 아내가 발표할 차례다. 구대칭 중력장을 발표 중인 임석희 씨를 보니 내심 걱정이 앞선다. 출산을 앞둔 터라, ‘마지막 발표 기회니까 잘 해보겠다.’던 아내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부담을 느낄까봐 잘하라는 내색도 못했다. 발표가 시작됐고, 준비한 내용을 천천히 설명하는 아내의 모습이 캠코더를 통해 비춰졌다. 집에선 곧잘 외워 설명하던 부분도 긴장을 했는지 그냥 넘어간다. 지켜보는 20분이 20년 같이 느껴졌다. 아내를 처음 독서클럽에 데려온 날이 떠올랐다.


 


2005년 9월 무렵, 결혼을 석 달 앞둔 우리는 전국일주를 감행했다. 10년 연애 끝에 결혼이지만, 서로를 알고 싶은 갈증은 더해져만 갔다. ‘그렇게 오래 사귀고도 할 말이 남았냐’는 주위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이킹과 캠핑을 하며 제주를 시작으로 통일 전망대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같이 걷고, 밥 먹고, 노래하고, 산을 넘었다. 20일간의 여정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함께 독서클럽에 나가는 거였다.


 


결혼 전 인사를 빌미로 어렵게 독서클럽에 동행했다. 아내의 첫 반응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라는 말로 일축했다. 원탁에 둘러 앉아 생소한 강연을 듣는 거부감과 발표할 수도 있다는 부담감에 손사래를 쳤다. 전형적인 떨림증이었다. 예전처럼 내가 듣고 와 자신한테 이야기 해달라고 했다. 이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참여를 독려했다. 우선 책 읽는 지루함과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소리내 읽기’를 시작했다. 한 사람이 읽다가 틀리면 다음 사람이 읽는 방식이었다. 첫 선정도서는 이동선 사장님이 결혼선물로 준 ‘잘먹고 잘사는 법’이다. 실용적인 책인지라 쉽게 읽혔다. 혼수품으로 TV를 구입하지 않은 것도 일조를 했다. 더불어 책에 나온 배경이 되는 곳을 직접 가보기로 했다. 한 밤 중 미시령에 올라 황동규 시인의 ‘미시령 큰바람’을 읽었을 때는 아내뿐만 아니라 나 역시 책 읽는 즐거움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공석중인 현장 스케치를 맡은 것도 큰 전환점이 됐다. 사진을 전공했지만 써볼 기회가 없던 차에 전공도 살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부담도 줄어 독서클럽 문턱에 한 발 더 내딛었다. 모임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렌즈를 통해 바라본 토론회 분위기를 얘기했다. ‘오늘은 누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누가 않나오셨네’, ‘어느 위치에 찍으면 사진이 잘 나온다.’는 말까지 자신의 느낌을 표출하기 이르렀다. 온통 내 책 밖에 없던 서가에 아내의 책이 한두 권씩 꼽혔고, 어디를 가든 책부터 챙기는 습관이 자연스레 만들어 졌다.


 


사실 아내가 발표까지 하리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었다. 호주탐사를 다녀온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왜 아이를 빨리 안 갖느냐’는 어른들 성화를 만류하고 함께 호주에 가기위해 가족계획을 미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함께 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현장에 가서 보고 느낀 점도 많았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공부하는 재미를 마음껏 누렸다. 이를 계기로 별에 대한 관심의 밀도가 증가했고, 탐사경과 발표를 준비하며 난생 처음 사람들 앞에서 발표란 걸 해봤다며 큰 자신감을 얻었다. 무엇보다 호주탐사에서 오자마자 아이를 갖는 기쁨도 맛봤다.
 
거실 한 컨에 천문모임 발표를 준비한 아내의 흔적이 보인다. 지저분해 보인다며 치우려는 아내를 내가 말렸다. 아내의 공부한 흔적을 오래 두고 보고 싶었다. 이제는 내가 아내의 공부 모습을 보며 반성을 하게된다. 이번 발표는 아내의 학습욕구와 호기심을 살려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어제 저녁 첫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양자’로, 둘째 아이 이름은 ‘역학’으로 짓자는 농담에 서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하다. 독서클럽과의 접속은 단순히 부부가 함께 하는 취미를 갖으려는 게 아니다. 서로가 품고 있는 호기심과 학습 욕구를 깨워주는 것이다.


 


멋진 밥상을 차려준 100북스의 공부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쓰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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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로 2008.03.07 03:43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부러운 생각에 눈물이 핑 돕니다. ㅠㅠ^^*
    제가 늘 바래왔던 부부상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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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보미 2008.03.07 03:43
    아내의 공부한 흔적을 오래 두고 보고 싶은 마음...
    너무 멋있으신거 아니예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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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록 2008.03.07 03:43
    결혼 전에 독서로 만났던 부부도 얘 키우고, 살림에 찌들다보면 책이 멀리해진다는 류의 내용을 본적이 있는데, 우리 문경수 부부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공부하는 멋진 부부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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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윤경 2008.03.07 03:43
    참..아름다운 부부....음..."역학"이는 그럭저럭 그렇다지만..."양자"는 좀....혜영씨 건강한 아이 출산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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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영 2008.03.07 03:43
    아...............................................저도 이런글 정말 써보고 싶어요
    검단산 정상에 가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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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원 2008.03.07 03:43
    제가 보기에 지난 천문 모임 발표에서 가장 박수를 많이 받은 발표는 박혜영 회원님의 발표였습니다. 박혜영 회원의 첫 번째 발표, 두 번째 발표.. 그리고 지난 모임에서의 발표까지 모두 본 사람들은 박수도 모자라 환호성까지 보냈습니다. 예전처럼 떨린다며 가슴을 치기는 커녕 이제는 여유가 생겨 조크와 유머가 폭발했습니다. 발표자료도 내용도 너무 좋았습니다. 마지막에 홀가분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아~ 끝 났 습 니 다."라고 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너무 행복해 보였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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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수 2008.03.07 03:43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네요. 십여녀전 문경수회원과 박혜영 회원이 처음 만났던 일부터 주욱 회상되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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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석희 2008.03.07 03:43
    혜영씨 발표는 정말 멋집니다. 수식을 진행하는 저의 경우엔 긴장과 진지함 일색인 반면, 혜영씨는 여유로움 그 자체였지요. 두 분 다 느을~~~ 행복하세요~!!!
    아가가 나중에 별 공부할거라고 한다면, 이건 다... 엄마/아빠의 우주에 대한 사랑덕택일터이니,...
    나중에 우리가 애기한테 증인 해 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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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원 2008.03.07 03:43
    저도 천문우주소모임 2회 발표 때부터는 시간에 쫓기듯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1회 <태양의 핵> 발표 때는 여유가 있었는데, 여유를 다시 찾아야 겠어요.
    다른 회원님들의 발표를 보고 많이 배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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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철 2008.03.07 03:43
    아름다운 부부의 진심어린 사랑이 촉촉히 배어나오는 글입니다. 이 아름다운 부부가 내가 주례를 섰다는 것이 다시금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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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영석 2008.03.07 03:43
    박성일 원장님과 강신철교수님의 아버지 시리즈, 이정원씨의 아들 사진시리즈 그리고 문경수씨의 아내 시리즈로 우리 100권독서크럽 공간이 우리들의 마음을 전하고, 실리는 따뜻한 광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쓰고 통하는 통풍의 광장, 마음이 통하는 통심의 사랑방.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이 더욱이나 좋습니다. 수년전 독일에 간길에 마침 그곳 튜빙겐에서 교환교수를 하던 교수님과 저녁식사 후 산책 길에서 본 느티나무 아래 나무의자에 앉자 맥주 마시면서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던 독일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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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현 2008.03.07 03:43
    이 글은 아무리 읽어도 따듯합니다. 아마 글 속에 진실한 사랑이 가득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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