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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랑이야기를 좋아한다. 사고방식이 구식이어서 그런지, 요즘처럼 열정적이고

중독적인 사랑이야기보다는 천천히 진행되는, 시간의 선상에서 그려지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때로는 오해나 미움으로 찾아오는 위기도 한번쯤

거쳐 가슴이 저릿해지는 물리적 현상도 느낄 수 있게해주는-난 정말 그런 장면들을 보면

가슴의 '저릿함'을 느낀다- 그런 사랑이야기가 좋다. 나이 서른도 훌쩍 넘겼고, 결혼도

한 지금까지도 구시대적 사랑이야기를 접하면 가슴이 뛰고, 그런 감정의 여운이

오래가는건 왜일까. 주책맞게.



'오만과 편견'은 '엠마'나 '센스 & 센서빌리티'의 제인오스틴의 가장 출세작이며,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 세 작품 중에서 남녀간의 사랑에서 오는 여러가지 감정들에 가장 공감이

가는,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의 사랑이야기였다.



책을 영화화한 경우, 보통 책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영화를 보게 되는데, '오만과 편견'은

영화-영화라기보다는 시리즈-를 먼저 보고 책을 나중에 읽은 경우다. 책은 여러가지

문고판 중 가장 정확하게 번역되었다고 평가받는 민음사의 오만과 편견을 읽었다.



처음으로 접했던 시리즈물 '오만과 편견'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배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마크다시로 분했던 콜린퍼스였다. 훤칠한 키에 냉랭한 시선과

표정, 제목처럼 '오만'함을 그 자신의 분위기만으로도 그대로 보여주는, 하지만 그 카리스마에

거품물고 쓰러지게 만드는 매혹적 인물.. 그리고 책을 읽었는데, 읽고 나서 과연 책에서

묘사하는 미스터 다아시의 모습을 콜린 퍼스 아닌 다른 사람이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워킹타이틀에서 젊은 배우이자 모델인 키이라 나이틀리를

엘리자베스 베넷 역으로 내세워, 영화 '오만과 편견'을 제작했다. 그래서 영화로도 보았다.

드라마에 반해 책을 읽고, 책이 주는 또다른 매력과 보다 섬세한 묘사에 매료되어

다시 보게 된 영화는 전작 두 작품이 주는 만큼의 감흥을 주지는 못했지만, 원작자체를

너무나 좋아하기에 젊은 배우들의 신선함과 워킹타이틀 특유의 유머, 그리고 현대 영화들이

제공하는 풍부하고 예쁜 영상을 대하며 나름대로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감상했다.



제인오스틴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글로 훌륭하게 풀어내는 사람이 있을까.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소설 모두 '사랑'이라는 테마와 그녀가 살았던 빅토리아왕조

시대의 귀족계급이라는 한정적인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다양한

형태, 다양한 방식, 다양한 감정들의 사랑이 표현되고 있으니 말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제인오스틴의 소설을 '찻잔문화', 즉 귀족여성들의

하릴없이 향유하는 시간때우기 소설로 저평가하곤 하지만 만약 그녀의 작품들이

언급했듯 사랑이나 귀족들 자체에만 촛점을 맞추었다면 몰라도, 제인오스틴의 진정한

미덕은 열등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상으로 대표되는 시대적인 풍토를 넘어서서

당당하고 지혜로운, 당시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여성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내가 본 소설속의 사랑, 귀족은 시대가 가지고 있는 풍속 또는 문화를 적절한

언어로 버무리고 그려내기 위한 모티브가 되어줄 뿐이며 진정 포인트는 '여성상'이었던거다.



그림으로 치자면 김홍도나 신윤복의 맛깔스런 풍속화와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그들의 풍속화들이 저급한 '키치'와는 격이 다른 것처럼 제인오스틴의 고전소설들은

'Chick lit(chick literature)', 즉 '섹스&시티'나 '악마는 프라다를...'들 처럼 요즘

젊은 여성들의 사랑과 문화를 트랜디하게 묘사하는 값싼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소설 속 엘라자베스 베넷은 확실한 자기 주관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상황과 환경에 순응하기

보다는 환경을 만드는 입장인 동시에, 타인의 환경에 대해서도 편견을 가지기 보다는

개방되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와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미스 빙리가

집 꾸밈이나 테이블 커버, 그리고 우아한 걸음걸이 등에 열중하는 반면 엘리자베스는

독서에 열중하고, 자신을 포장하는 위선보다는 잘났든 못났든 있는 그대로를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을 택할 줄 아는 지혜로움을 갖추고 있다.

소설이 쓰여진 시대가 빅토리아 왕조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런 여성상을 상상하고

생각해낸다는 것자체만으로도 작가의 사상은 이미 몇 세대를 뛰어넘어 현대에 맞물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섹스&씨티'에서 내가 가장 혐오하는 캐릭터인 샬롯은 '현대'라는 언어를 대표하는

뉴욕에 사는 전문직 여성임에도 조건 좋은 남자와 만나 풍족한 삶을 누리는것을

목적으로 사는, 현대인이지만 빅토리아시대의 사고방식을 가졌으니 전자와 비교가

될법 할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뒤틀리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엘리자베스 베넷의 당당함 속에는

자기보다 지체가 높은 귀족들을 일단 오만한 속물로 놓고보려는 편견이 있는데,

사실 그런 편견들도 심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열등감에서 오는 의식적 당당함으로

표출될 수 있을 터, 여주인공, 혹은 작가 또한 아무리 시대초월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이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어찌되었건, 오만하게만 느꼈던 미스터 다아시 내면의 따뜻함, 배려, 과묵한

사랑으로 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교만을 깨고 엘리자베스와의

사랑을 이루는 과정까지의 이야기는 내게는 몇 번을 읽고 보아도 즐겁고, 짜릿하고

한편으론 '너무 부러운' 경험이었다.



이 훌륭한 고전을 현대의 시점으로 풀어나간 것이 '브리짓 존스의 일기'다.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바가 없다.

대대로 영국 명문학교인 이튼을 졸업한 집안의 자손으로 자신 또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는 겉보기엔 매우 냉정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어보이는 마크 다아시. 아마

'다아시'라는 성도 고전에서 빌려온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인물로 분한 배우 또한

예전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역을 했던 콜린퍼스가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현대판

오만과 편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그 외에도 여주인공 가족들의 속물적인 모습들이나 상류층 친구 커플들의 결혼에

대한 생각들로 비추어지는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형태들도 오만과 편견에서 드러나는

귀족계급의 상류지만 저급하고 고루한 사고방식을 답습한 듯 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주인공의 모습이다.

오만과 편견에서의 엘리자베스 베넷은 '지혜로움'의 화신으로 표현된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가녀리다.

그러나 브리짓 존스는 '소설 속의 인물'로밖에는 생각될 수 없을 것 같은 엘리자베스를

보다 현실에 있을법한 모습으로 교체되었다. 너무 대조적이라 조금은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들긴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뚱뚱하고 생각없이 말을 내뱉기도 하며 엉뚱하다.



이렇게 극단적인 두 여성을 똑같은 캐릭터의 과거와 현재의 미스터 다아시가 모두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당당함'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 '당당함'이라는 말 또한 시대적 관점에서 조금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더불어 '단점'을 애써 감추기 보다는 그것마저도 솔직하고

담백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통적인 측면이 바로 '당당함'이 아닐까.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여성 모두가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리고 남자를 매료시킨

가장 큰 매력이 아마 그 당당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숭과 가증스러움으로 점철되는 소개팅식 작업은 그 향기가 짧게 발산되고 금방

사그러들지만 자신의 내면이 말과 행동을 통해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이야말로

오래도록,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지만 진실하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여자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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