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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찬/위즈덤하우스/‘06.3.5.2321시 숙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애독하셨다는 책이다. 대륙과 해양세력 각축장에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길을 제시하였다. 제시보다는 과거를 분석한 내용이 더 많다. 요즘 들어 우리나라도 진보와 보수, 종교, 지역 등 여러 갈등요소가 많은데 자기집단의 이익이 아닌 국가의 차원에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 제1장 코리아의 흥망에 대한 보고서

❍ 1. 코리아 흥망의 5가지 조건

- ‘운명’은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 ‘필연 속의 자유’이다. 따라서 새로운 운명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의 ‘필연성’을 통찰해야 한다.

- 코리아의 흥망에 대한 다섯가지 조건

① 문명과 무력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다 : 새로운 문명은 새로운 무력을 낳고, 이 둘이 결합 되어 세계패권국가가 등장한다. 역사에서 융성했던 시대는 문명과 무력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 시대였다. 반면 쇠망의 시대에는 이 핵심을 꿰뚫어 보지 못학, 방황하고 적대했다.

② 진취적인 비전을 널리 공유..: 문명과 무력의 핵심을 파악하고, 국민의 절실한 요구를 결집할 때 생겨난다.

③ 통합으로 구심력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 우리의 가치, 우리의 정체성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④ 학습과 창조로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이다 : 지난 40년간 한국의 성공은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을 열심히 배우고 익힌 결과이다. 그러나 학습만 있고 창조력이 없다면 선진국으로의 질적인 도약을 할 수 없다.

⑤ 힘의 근원인 국민과 함께하는 것이다.

- ‘문명’과 ‘야만’, ‘무력’과 ‘정치력’이라는 이 네가지 개념은 인류 최초의 문명 탄생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질서를 분석하는 데 강력한 도구가 된다.

❍ 2.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 20세기 세계제국 미국에는 키신저와 브레진스키, 19세기 세계제국 영국에는 디즈레일리 같은 전략가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1천4백 년 전, 세계제국 중국의 수ㆍ당 시대에는 배구(裴矩)라는 전략가는 수ㆍ당 양 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논리는 바로 “중국과 주변국의 관계는 태양과 뭇별의 관계와 같기에 복속시켜야 한다”라는 것이다. 키신저는 마치 어떤 ‘자연법칙’에 따르는 것처럼 새로운 세계질서를 추구하는 국가가 등장한다고 말한 반면 배구는 태양계의 자연법칙처럼 ‘세계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

- 패권국의 힘

① 세계패권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태양의 형성과정과 유사하다. 세계패권국도 예외 없이 형성 초기에는 주변에 있는 각종 세력과 선진의 지식들을 포용하고 결합하며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빛’을 발했다. ‘단단한 힘’은 과도한 군비 증간에 의한 국가적 피폐, 전쟁, 기술 이전 등에 의해 소모되며 ‘부드러운 힘’은 오만함이나 다른 나라의 주장에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행동, 편협한 국익접근방식 등에 의해 소모

② 태양이 태양계를 만들듯, 패권국은 세계체제를 만든다. ③ 태양계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듯, 패권체제 또한 생명주기를 갖고 있다. 태양의 일생처럼, 패권이론에서는 패권국의 일생을 세계대국..... 세계전쟁 등 네 단계로 구체화

⑴ 세계대국이다.

⑵ 비정통화의 단계이다. 질서 유지를 위해 만든 국제기구가 부실해지고 에너지가 고갈. 세계대국의 지나친 주도적 역할이 다른 강대국들을 자극해 관습적으로 인정된 이전의 지배적 권위가 소멸하기 시작

⑶ 탈집중화의 단계:로, 권력이 좀더 분산된 다극구조로 이행한다.

⑷ 대결 구도가 확연해지면서 패권승계투쟁이 일어나는 단계이다.

④ 태양계 내의 행성들이 자신의 위성을 갖듯이 패권국이 아닌 패권 도전국 또는 지역 강국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이 있다.

- 태양계의 지구와 같은 나라가 세계역사에도 있었다. 필자는 그 대표적 사례가 중국 중심의 세계체제에 있었던 ‘세종시대’의 조선이라고 생각한다.

- “코페르니코스는 우주의 중심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옮기자 여태까지 아주 복잡하게만 보이던 운동들이 태양 위에 올라서서 본다면, 모든 행성들이 원 궤도를 그리며 이동하는 모습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는 것을 발견.”

❍ 3. 코리아의 상공에서 부딪치는 4개의 힘

- 서양세력과 왜구, 그리고 통일일본이라는 3자가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대륙세력에 대항하는 해양세력이 성립





- 여기서 A, A', a, a'는 그 순서대로 국력의 강약과 영향력의 크기를 표시한 것이다.

- 대륙세력 내에서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가르는 만큼이나 뚜렷한 분단선이 존재한다. 이 선은 근대 이전에는 만리장성이 그 기준이었고, 근대 이후에는 중국과 러시아제국(소련)의 국경선이 그 경계이다.

- 해양세력 내부의 세력관계에서 바로미터가 되는 것은 류큐(현재의 오키나와)ㆍ대만ㆍ필리핀ㆍ싱가포르 등이다. 이 네 지역을 장악하는 나라가 해양패권을 장악했다.

- 고구려가 XA(수ㆍ당)를 견제하기 위해 XB(돌궐)와 동맹을 맺으려고 노력한 것을 제외한다면, 코리아는 일관되게 XA와 문명적 유대감을 보였다. 이는 XA와 농업문명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반면 야만으로 생각한 XB에 대해서는 적대하거나 마지못해 굴복했다. 요ㆍ금ㆍ원ㆍ청이 그 대표적 경우이다.

- 역사에서 나타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세력관계는 앞의 그림과 같은 전선도로 표시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우선 일곱 가지의 유형이 나타난다.

① 제1유형 : 북위 38도선은 대륙과 해양의 대분단이 지나가는 선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팽팽할 때 나타난다. 1백 년 전 일본과 중국 및 러시아의 힘이 팽팽했을 때 서로가 분할을 요구한 선. 4백 년 전 도요토미는 중국과의 강화교섭 때 남도 4개 도를 요구했는데, 이선의 이남에 해당. 1천3백 년 전 고구려를 멸한 중국의 당은 38선(예성강) 이북을 차지. 2천1백 년 전에는 이 선을 경계로 이북에는 ‘조선’이, 이남에는 ‘한국’이 존재했으며, 한무제는 38선 이북에 있었던 조선을 멸하고 사군을 설치.

② 제2유형 : 북위 37도선, 곧 금강을 경계로 한 선이다. 고구려의 최대 남하선이며, 충주의 중원고구려비가 그 표식이다. 1597년 정유재란 시 일본군은 조ㆍ중 연합군에 의해 이 선에서 저지되었다.

③ 제3유형 : 낙동강선, 또는 낙동강 유역이다. 야요이문명, 그리고 야마토와 일본국을 만든 사람들이 이 지역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시대에는 왜관이 있었다. 해양세력에게 이 선은 일종의 불후퇴 방위선이다. 한국전쟁과 정유재란이 대표적인 예이다.

④ 제4유형 : 대한해협을 기준, 코리아 전체가 팽창적인 대륙세력의 영향권에 놓이는 경우. 이때 일본은 심각한 안보상의 위협에 처한다. 이 경우는 코리아를 장악하는 세력이 동아시아 전체에 패권력을 가질 때만 성립. 7세기 후반 당이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했을 때, 일본에는 비상이 걸렸다. 13세기 말에는 몽골이 고려를 점령하고, 고려를 바탕으로 일본을 두 차례 침공. 17세기 초반 청나라가 조선을 점령했을 때, 일본은 몽골 침략이 재현될 것을 두려워했다. 이때 도쿠가와의 일본은 조선에 화약 등의 군수품을 지원하고 원군을 보낼 것을 제안. 그후 19세기 말 일본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은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하는 것.

⑤ 제5유형 : 북위 39도선, 곧 대동강을 기준으로 한 선. 37도선과 상반되는 세력관계에서 성립. 신라와 당의 전쟁 결과 신라는 대동강 이남을 차지. 한편 해양세력은 대륙세력과의 패권 경쟁에서 우세할 때 대동강 이남을 요구. 임진왜란 때는 도요토미가 평양을 점령하고 중국에게 대동강 이남의 지배를 주장.

⑥ 제6유형 : 청천강 이북에서 두만강 유역에 이르는 선. 도요토미의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이 선까지 진격. 이 선에 이르면 곧 대륙세력이 반격. 명이 항왜원조를 내걸고 10여만의 군대를 파병, 두만강가의 여진도 공식적으로 대일 참전의사. 한국 전쟁 때는 중공군이 항미원조를 내걸고 1백만 대군을 파견.

⑦ 제7유형 : 제4유형과는 반대로 코리아 전체를 팽창적인 해양세력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때 요동과 산둥 반도를 점령, 러일전쟁 때는 만주에서 혈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통해 중국 대륙으로 침략.

⑧ 제8유형 : 대륙세력 및 해양세력과 자주적인 외교관계. 고려전기, 조선 전기가 이에 해당한다.

⑨ 제9유형 : 코리아가 주변국에 적대적이지 않도록 공동보호 혹은 중립화되는 것. 갑신정변 뒤 패권국 영국이 제기한 중국과 일본의 공동보호론,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미국이 제기한 4대국 신탁통치론이 대표적.

❑ 제2장 중국의 대륙패권과 코리아의 선택

❍ 1. 중국문명의 탄생과 조선문화권의 성립

- 초기 문명단계에 있었던 고대인들이 국가의 양대 기능을 전쟁(방어와 정복)과 제사(유대와 통합)로 인식.

- 대규모 노동력의 조직 필요성은 문명의 모태였던 ‘거대한 하천유역’이라는 자연조건 때문이다.

-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의 시조 우가 치수로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제1차적 통합수단이 제사. 씨족간의 유대를 더욱 강화시키는 제사는 잉여생산에 따른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을 막고 노동력을 조직하는 데 효과. 제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사회통합의 중심이 될 수 있었고, 이는 곧 통치권의 장악으로 연결. 조상신과 자연신의 성격을 겸한 상제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점을 쳤고, 점복을 위해 문명의 핵심인 문자(갑골문자)가 발전. 사회통합을 위한 제사와 점복을 위해 발명된 문자는 또다시 사회통합을 강화. 제2차적 통합수단은 권력과 부의 분배. 제3차적 통합수단은 천명사상. 천명사상은 그때까지 제사와 혈연의식으로 유지된 정치적 결속을 더욱 보편적인 규범의식으로 강화. ‘덕과 능력’에 의한 왕조의 창건과 ‘세습’에 의한 왕조의 유지라는 모순적인 성격을 결합. 제4차적 통합수단은 각종 정책과 제도, 그리고 무력.

- 모든 조직에서 내부적 통합과 외부적 확장은 밀접한 관계를 갖지만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문명의 필연’이다. 결국 청동문화에 필수적인 원료 산지와 각종 문명적 이기들의 교환 범위가 바로 상ㆍ주가 거대한 정치적 통합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경제적 요인이었다. 한편 문명권 밖에 있는 주변 집단들도 문명생활에 참여하려는 욕구가 발생했다. 외적으로부터의 보호뿐 아니라, 선진문명권에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 왕권은 토지와 잉여생산물을 수탈했다.

- 건국신화 : 중국의 건국신화는 3황5제와 하의 우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큰 하천을 중심으로 한 농경생활과 연관되어 있다. 여와와 복희가 뱀(용=하천의 굴곡모양)의 모습을 하고, 신농의 머리는 소의 모습이며, 우는 치수사업을 전개했다. 반면 단군신화는 강이 아니라 산을 주무대로 하는데,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도읍을 정한 곳이 바로 산과 나무(태백산 신단수)이다. 그리고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고, 산 중심의 문화를 표상하고 있다. 일본은 바다 중심의 문화를 갖고 있다.

- 무덤양식인 고인돌 : 북방식, 남방식 고인돌의 분포지는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의 분포지와 거의 일치할 뿐 아니라 미송리식 토기와 무문토기의 분포지와도 연관된다.

- 요서지방과 산둥지방이 중국문명과 조선문화가 중첩되는 지역이다.

❍ 2. 중화체제는 어떻게 움직였는가

- 하나는 ‘이적=금수 동격론’이다. 다른 하나는 ‘화=이의 인성동질론’이다. 태생적으로 동이인 조선은 상나라 제후 기자의 후예이고, 서융은 요 임금의 신하 사옥의 후예, 북적인 흉노는 우 임금의 후예인 순유의 후손, 남만인 월도 우 임금의 후예라는 것. - 특히 주목할 점은 춘추시대에 공자가 느꼈던 문명적 위기의식이, 거란ㆍ여진ㆍ몽골이 중국을 정복하는 시기에 주자를 비롯한 송의 지식인들이 느꼈던 위기감과 일치한다는 것. 그리고 만주족에 의해 정복된 조선과 명의 지식인도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나아가 19세기 청ㆍ조선ㆍ일본의 지도층이 서양세력에게서 느꼈던 위기감도 같은 맥락

- 중국의 세계질서는 서주시대,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의 봉건적 질서 속에 이미 그 맹아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때 사대, 자소, 조공, 책봉과 같은 중화체제의 기본 개념들이 모두 등장한다.

- 내신 : 중국의 직접적인 지배질서에 포함된 관료ㆍ왕ㆍ후를 의미한다.

- 외신 : 왕이 한편으로는 황제의 신하로서 중국의 예법을 따르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나라를 독자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조선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 절역의 조공국 : 중국으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중화체제에 편입시킬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나라

- 인대국 : 인접해 있는 대등국으로서 적대국이다.

- 중국과 외신국의 관계는 조공책봉관계로 불린다. 그 내용을 군사외교, 정치, 경제, 의례ㆍ문화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① 첫째, 군사외교적 측면에서 중국과 외신의 관계는 오늘날의 수직적 동맹관계와 유사하다.

② 둘째, 조공국의 수장은 정치적으로 천자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는 대가로 관작을 받는다.

③ 셋째, 경제적 관계에서 조공국은 조공ㆍ청구(중국측의 공납 요구)ㆍ특수공물(처녀ㆍ말ㆍ매 등) 등을 바쳐야 했고, 이에 대해 중국은 회사했다. 관시를 통해 교역이 이루어지고 경제제재, 추징 등도 이루어졌다.

④ 넷째, 의례ㆍ문화적 관계는 중국측의 강요 정도에 따라 내정간섭으로 발전할 수 있다. 조공국은 세자나 왕비를 정할 때, 신하의 작위나 추숭시 중국의 승인을 받았다.

❍ 3. 한 제국, 조선과 동북아패권을 다투다

- 흉노와 남월, 조선과 서역을 정벌한 한무제는 세계패권체제를 완성 - 문명과 야만, 무력과 정치력을 구사하면서 등장한 중국인들은 한족으로 통칭. 이들은 자신의 이념과 제도에 따라 세계를 변모시키기 시작. 당시 유일한 문자였던 한의 글자가 동아시아세계로 전파, 한문에 의해 외교문서가 작성되고 문명생활이 이루어짐

❍ 4. 중국의 분열과 고구려 소천하

- 중국에서는 거의 370년 만에 통일적인 패권체제가 다시 성립되었는데, 코리아에서는 왜 3국의 분열이 계속되었을까?

① 낙랑군ㆍ대방군이라는 중국의 식민통치기구가 코리아의 세력 통합을 막았다. ② 4,5세기 경 북에서는 중국계가, 남에는 백제ㆍ신라ㆍ왜가 연합해 고구려를 압박함으로써 코리아의 통일을 막았다.

③ 고구려에게 통일의 최대 호기는, 북으로 북위와 국교를 수립해 북방을 안정시키고(462) 남으로 백제 수도 한성을 점령해 개로왕을 죽인 475년 이후부터 백제와 신라가 다시 부흥하는 500년 이전가지의 약 30년간이었다. 백제ㆍ신라ㆍ왜 등 남부동맹세력의 결사 항전이 그 이유일 수 있다. 고구려의 천하에 복속한 것에 만족함으로써 그 명맥은 유지하는 ‘고구려의 천하관’ 때문일 수도 있다. 고구려의 국력의 한계 때문일 수도

④ 6세기에 들면서 백제에서는 무녕왕과 성왕이 국력을 회복한다. 신라는 500년에 왕위에 오른 지증왕 이래, 법흥왕, 진흥왕대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⑤ 6세기 중반 고구려는 대내외적인 위기에 직면한다. 북에서는 북제가 552년부터 고구려를 압박했다. 말갈족이 고구려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남에서는 551년에 신라ㆍ백제 동맹군이 고구려를 쳐 한강 유역을 점령했다. ⑥ 신라가 진흥왕대에 백제를 한강 하류에서 몰아내고 한강 유역 전체를 차지함으로써 코리아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 고구려는 독자 연호를 사용했고, 군주의 호칭을 가, 간에서 왕, 대왕, 태왕으로 계속 높였다. 그러나 호칭을 황제나 천자로까지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외교군사적 필요성으로 맺어진 중국과의 조공책봉관계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황제 또는 천자라는 호칭을 사용할 정도로 왕권 혹은 국가권력이 충분히 강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44년 이후 흉노는 중국의 적으로 남게 되는 동흉노와, 훈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세계의 적이 될 서흉노로 갈라졌다. - 프랑스의 역사가인 르네 그루세는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북방 유목민족이 중국에 동화되는 과정을 게르만족이 로마화되는 과정과 비교한다.

❍ 5. 중국과 코리아의 동북아 패권전쟁

- 통일중국의 위협에 대해 고구려가 취한 정책

① 적극적인 대중 외교정책이다. ② 국방 강화책이다. 고구려는 중국 기술자를 매수해 새로운 병기를 제작하고, 성곽을 정돈했으며, 병력을 확충하고, 식량을 비축했다. ③ 선제공격으로 적의 연합전력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598년 고구려는 말갈을 동원해, 고구려에 속해 있다가 수에 귀속한 거란의 요서지역을 선제공격했다. 백제가 수에게 ‘백수연합’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④ 대 중국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당시 중국의 도전국이었던 돌궐제국과 연합을 시도했고, 이때 돌궐의 계민카간을 방문한 수 문제와 고구려의 사신이 마주침으로써 ‘고구려ㆍ돌궐 연합’에 대한 수의 위기감이 더욱 증폭되었다.

- 시랑(현재의 차관급)이었던 배구는 고구려왕이 직접 황제께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해야 하며,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려 땅은 본래 고죽국으로 주대에는 기자에게 봉했고, 한대에는 3군으로 나누어 통치했으며, 진대에도 요동을 통치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에 신속하지 않고 별도의 외역으로 되어 있다. 선제(문제)께서 불쾌히 여겨 정벌했으나 실패했다.

- 중국은 고구려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대내외적인 정책을 수립한다.

① 대내적으로는 608년 황허와 회수를 잇는 운하를 개척해 611년 완성 ② 북에서 수도 장안을 위협하는 돌궐을 한편으로는 공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열시켜 복속 ③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나섰고, 이에 양제는 긍정적으로 답했다.

- 동아시아에서 강대한 통일제국을 이룬 지 30년도 안 된 세계패권국이 지역패권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망한 경우는 이것이 유일하다.

- 수에 이어 당에서도 요직을 차지한 시중(총리격) 배구와 중서시랑 온언박이 ‘전쟁추진론’을 고집했다. 전쟁추진론의 근거로는 수 양제에게 주장한 ‘중국영토론’을 기본으로 하되, 이전의 ‘문명론’ 대신 ‘복속론’과 ‘제국질서론’이 등장했다.

-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 주국 낙랑군왕 신라왕, 대방군왕 백제왕이 중국 식민지명을 붙여 책봉

- 돌궐은 태종에게 탱그리카간의 칭호를 헌상했다.

-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 대비해 세 가지의 정책을 편다.

①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천 리의 장성을 수축하여 중국의 침략에 대비 ② 백제와의 연합으로 당의 배후인 신라를 공격 ③ 태자를 직접 중국으로 보내 공물을 바치고, 631년에는 ‘고수전쟁’에서 전사한 중국인들의 유골을 돌려주는 등 당의 침략 의지를 약화시키려고 했다.

- 당 태종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이유로 영토획득, 고수전쟁 패배의 복수, 고구려의 쿠데타 징벌, 세계제국의 질서 확립 등 네 가지를 들었다.

- 당 태종이 2차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실패하자 중국은 새로운 전략을 수립

① 일종의 ‘국력고갈정책’이었다. “이제 만일 1개 사단병력을 보내 그 국경선으로 교대로 침략해서, 그들로 하여금 출동에 피곤하고 쟁기를 놓고 보루에 들어가기를 수년간 계속하면, 천 리가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떠나서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전략이다. 이후 20년간 고구려는 장기 소모전에 시달리고 국력은 피폐해졌다.

② ‘백제 공격 우선론’이다. ③ ‘당ㆍ신라 군사동맹’을 질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 6. 일본의 화려한 수사, 누추한 고립

- 고구려가 당과 신라에 의해 망한 뒤인 700년, 당제국은 자신의 세계질서에 포함된 나라를 ‘동으로는 고려(신라), 남으로는 진랍국, 서로는 파사ㆍ토번 및 견곤도독부, 북으로는 거란ㆍ돌궐ㆍ말갈’이라고 하고, 이 외에는 당의 세계와는 단절된 지역, 즉 절역이라고 선언한다. 696년 거란의 반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나라를 세웠는데, 처음에는 ‘동’을 의미하는 진이라는 국호를 썼다. 그러나 712년 당에 조공했을 때, 당의 현종이 오늘날의 톈진ㆍ당산 지역에 있었던 한의 ‘발해군’을 전혀 관계없는 진에 억지로 갖다 붙여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책봉함으로써 발해국이 된다.

- 673년 조카를 누르고 천황이 된 천무는 전후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상했다. 일본은 코리아에서의 세계전쟁 종식을 계기로 ‘중국과 대등한국가’로 스스로를 정립하고, 그 결정판으로 701년 대보율령을 반포했다. 자신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해였다고 할 수 있다.

① 대보율령의 특징은 ‘소국’ 일본이 ‘제국’ 인 당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 천자ㆍ천황ㆍ황제ㆍ폐하 등 당제국에서 쓰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 ② 일본의 역사를 ‘코리아와 독립된 일본’,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관점에서 완전히 새로 슨다. 이때 편찬된 『고사기』, 『일본서기』등의 역사책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코리아’와 ‘중국’을 염두에 두고 목적의식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조합한 일종의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③ 669년의 견당사 파견 이후 33년간 종적을 감추고 있었던 왜는 이때 완전히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났다. 바로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꾼 것이다. ④ 일본, 특히 일본의 천황을 중심으로 세계를 재배치하고 일본을 태양으로 삼아 하나의 소태양계를 상정한다. 필연적으로 내부의 이적뿐만 아니라 외부의 조공국을 찾아 나서는데, 코리아의 국가들이 그 대상이 된다. 700년부터 779년까지 80년간 신라는 21회, 일본은 16회 사절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렇게 빈번히 사절을 교환했지만, 일본은 ‘천황국’으로서 신라를 한 단계로 아래로 취급했고, 신라는 일본을 대등국으로 취급함으로써 외교 문제가 자주 발생했다.

-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발생하는 코리아와 일본의 외교 문제는 9백 년 뒤 도쿠가와시대에도, 1천1백여 년 뒤 메이지유신으로 천황이 등장한 이후에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이는 코리아가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은 데 비해, 일본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 당시 당 조정이 설정한 일본의 국제적 지위는 최하위였는데, ‘토번-돌궐ㆍ돌기시-신라-해ㆍ거란-발해ㆍ남조-일본ㆍ호밀ㆍ식약ㆍ리빈’의 순서였다.

- 고구려는 코리아 전체에 영향력을 확장하고, 고구려를 중심으로 소천하를 형성했다. 이때 왜국에는 찬ㆍ진ㆍ제ㆍ흥ㆍ무라는 왜 5왕이 등장했다. 이들은 남북조시대였던 당시에 남조인 송에 조공하고 관작을 요청했으며, 코리아의 남부에 대한 군사권을 주장했다.

- ‘도독 왜ㆍ신라ㆍ임나ㆍ가라ㆍ진한ㆍ모한6국 제 군사’라는 칭호만 인정했다.

- 수십 년간 계속된 왜 5왕의 주장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① 왜가 진한ㆍ모한 등의 한국들과 임나ㆍ가라 등 낙동강 유역의 소국에 대해 군사권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유역은 왜의 중계무역항으로 번성했다. 약 1천 년 동안 1백만 명 이상의 코리아인들이 일본열도로 집단 이주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이들 지역은 군사적 지배권과는 무관하게 왜와 정치경제적ㆍ사회문화적으로 친화성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진한과 모한은 당시 존재하지 않는 국가였고, 임나ㆍ가라 또한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나라들

② 왜는 신라에 대한 군사권을 계속 주장했고, 중국의 남조는 이것을 인정.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발전한 나라이고, 특히 5세기에는 거의 고구려에 종속되어 있을 정도로 약했다. 그리고 신라는 5세기에 송뿐만 아니라 중국의 다른 나라들에도 조공을 한 적이 없었다. 국제외교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③ 백제에 대한 것이다. 왜왕 진이 백제에 대한 군사권을 처음으로 주장했을 때, 왜왕은 송에 의해 ‘안동장군’ 이라는 호칭만이 인정되었다. 이에 비해 백제는 그로부터 20여 년 전에 이미 그보다 한 단계가 높은 ‘진동대장군’으로 공인되어 있었다.

- 안동ㆍ진동ㆍ정동 장군 그리고 대장군이라는 호칭은 중국이 평가한 주변국의 군사력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왜왕이 군사력을 무시하고 코리아의 남부에 대해 일방적으로 군사권을 주장한 것은, 현실적인 요구가 아니라 ‘소제국’의 허상 추구였다. 결국 왜는 478년 중국이 이미 고구려에 부여한 ‘개부의도삼사(종3품)’ 라는 지위를 ‘자칭’ 하는 것을 끝으로 중국에 대한 사절 파견을 중단했다.

- 천황이 ‘천하=일본’을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국가체제, 곧 고대 천황제국가가 성립되었고, 701년 대보율령의 반포로 완성되었다. - 베트남에서는 왜 군주가 중국 황제에게는 신속하며 자신을 왕으로 낮추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며, 자신의 이름까지도 중국용과 국내용으로 구분

- 한제국의 성립 이후 16세기 서양이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생산되는 각종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법만이 있었다. 하나는 ‘조공’이고, 다른 하나는 ‘해적’이었다. 일본은 조공의 시기 외에는 해적의 길을 택했고, 이로써 중화세계에서 ‘불량 국가’로 취급되었다. 결국 일본은 절역의 조공국이 됨으로써, 19세기 대영제국식의 ‘화려한 고립’이 아니라 ‘누추한 고립’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중국과 대등한 천황제국가’를 추구함으로써, 비록 당시 세계의 어느 나라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화려한 수사’를 펼칠 수 있었다.

❍ 7. 고려의 탁월한 선택 - 문명을 취하고 야만을 막다

- 거란과 여진이라는 ‘야만’은 바로 눈앞에 있었고, 한족의 송이라는 ‘문명’은 바다 건너편에 있었다.

- 고구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코리아의 모든 왕조들이 서적 수입을 조공무역의 제일 관심사로 삼은 것이다.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습속은 서적을 매우 좋아하여 문지기, 말먹이 따위의 집에 이르기까지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향당이라 불렀다. 자제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삼국시대에 이어 통일신라기에도 모든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고자 했다. 사람의 성과 이름, 땅의 지명으로부터 법률ㆍ정치ㆍ경제ㆍ교육ㆍ문화ㆍ의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중국을 모방하고 익혔다.

- 당의 국학에는 당제국 주변의 50여 개 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태반이 신라인이었다. 또 외국인전용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의 80퍼센트 이상이 신라인이었다.

- 고구려에서 ‘구’자를 뺀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가 5세기 중반 이후 2백 년 가까이 사용해온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 거란에 대한 정책 : 소손녕은 “너희 나라는 신라에서 일어났고, 고려의 땅은 우리의 것인데, 너희가 침범했다. 또한 우리와 땅을 맞대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라며 침공의 이유를 밝혔다. 요는 서희가 결의에 차 있고 논리에 합리성이 있었기 때문에, 조공 관계 강화, 조공로 확보를 조건으로 청천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280여 리를 고려가 차지하는 데 동의했다.

- 여진에 대한 정책 : 금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요를 격파한 뒤인117년 배후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고려에 새로운 외교관계를 제안했다.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는 동생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우리는 할아버지 때부터 한쪽에 자리 잡아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아 조심스럽게 섬겨왔다” 주전파와 주화파의 논쟁에서 결국 주전파가 승리하고, 이에 따라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했다. 한편 송은 ‘세력균형상’ 금과 연합하지 말라는 고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부상하는 금과 연합해 쇠퇴하는 요를 협공했다. 그 결과 1125년 요가 멸망했으나, 곧바로 금에 의해 송이 위태로워졌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금정책을 둘러싸고 제2차 전략 논쟁이 벌어졌다. 이자겸과 척준경이 금이 요를 멸망시키고 송을 굴복시킨 현실을 들어 ‘주화=사대’를 주장했다.

- 금에 대한 정책을 둘러싸고 전개된 고려 내부의 전략 논쟁은 5백 년 뒤 여진족이 세운 후금(청)에 대해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 고려가 군사력을 온존한 상태에서 조공 관계를 맺음으로써 양국은 이후 1백 년간 평화를 유지했다. 반면 조선의 광해군과 인조는 고려와는 달리 무력의 준비와 그 시기에서 전혀 전략적이지 못했고, 결국 삼전도의 수모를 겪게 된다.

- 1127년, 금은 송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시키고 휘종ㆍ흠종 두 명의 황제를 포로로 잡아갔다. 이로써 회수를 경계로, 남북이 송과 금으로 나뉘게 된다. 금과 송은 1126년에 ‘숙질관계’가 되었고, 1142년에는 ‘군신관계’가 되어 송이 금에게 조공했다. 중국의 한족국가가 이적의 야만국에게 신하국으로서 조공을 한 것은 역사상 처음

- 몽골이 침략 상대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나라의 왕실과 지속적인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고려가 유일

① 고려의 저항과 지형상의 한계. 여섯 차례나 대규모의 공격을 받고 국토가 초토화되면서도 30년간이나 굴하지 않았다. 삼별초는 13년간이나 항쟁을 계속. 이런한 끈질긴 항전이 고구려가 수ㆍ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명성과 합쳐져 몽골의 지배욕을 약화. 고려의 국토는 평지가 아닌 산지였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몽골 기마병이 활동하기에는 불편했다. ② 고려의 전략적 가치이다. 몽골은 일본과 남송을 정복하는 데 고려의 힘이 필요 ③ 원종의 뛰어난 정치외교력. 고려 세자 왕전은 쿠빌라이가 칸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쿠빌라이가 수도인 카라코룸에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를 찾아 나섰다.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 밖의 나라로서 당 태종 이래로 황제가 친히 정벌하여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돌아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기뻐했다. 원종은 원의 세조 쿠빌라이와 굳게 형성된 인간관계를 토대로 고려의 주권 유지, 개경환도, 몽고군의 철수, 고려인 포로의 송환 등을 요구했고, 세조 쿠빌라이는 파격적으로 이 요구를 수락. 이후 원종은 고려 태자와 원의 공주를 결혼시키도록 원에 요구했고, 이것이 성사되어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 8. 세종, 위대한 조선문명의 시대

- 몽골의 세계제국은 조선 건국과 관련해 고려에 두 가지의 유산을 남겼다. 하나는 고려인의 세계 인식과 활동 폭을 제국 전체로 확장했다는 점이다. 요동 인구의 태반이 고려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또 하나의 유산은 송나라의 성리학(주자학)이 고려 후기 신진 지식인들의 대표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성리학은 불교 및 도교와의 사상투쟁 속에서 성장하여 대단히 철학적이고 체계적인 우주관을 담고 있었고,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었다. 조선은 주자성리학을 국교로 만들었다.

- 요동만 확보한다면 고구려시대의 영토를 거의 모두 회복할 가능성이 있었다. 요동에는 수많은 고려인이 살고 있었고, 몽골세력은 후퇴하고 있었다. 명은 진격하지 않았고, 여진과 거란도 무력한 상태였다.

- 코리아의 운명은 무엇인가?

① 첫 번째 위기는 1388년 명은 현재의 평안도지역이 원나라가 동녕부를 설치한 지역이므로 다시 철령위를 설치해 지배하겠다고 통고했다. 회군의 가장 큰 이유는 군사력이 약한 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과 왜구의 침략에 대한 우려였다. ‘대명 전쟁론자’는 패배했다.

② 두 번째 위기는, 명이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의 표전이 무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핑계로 정도전을 명으로 압송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남은을 죽였다. ‘대명 전쟁론자’가 또다시 패배했다.

- 조선의 운명은 몽골제국의 첫 번째 유산(요동지역의 고려인)을 토대로 요동을 점령하기 위해 세계패권국가 명과 한판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운명은 당시 동아시아세계의 보편 문명으로 간주된 중화문명의 이상을 조선의 특수한 현실에 완전히 실현하는 것이었다.

- 세종의 노력

① 세종은 천민, 곧 ‘국민 개개인이 하늘의 백성’이라는 개념을 국가 운영에 완전히 구현. 세종이 재발견한 천민은 ‘천자의 백성’도, ‘천황의 신하’도 아니다. 왕토왕민에 나오는 ‘왕의 백성’도 아니다. 말 그대로 ‘하늘의 백성’이다. 그래서 관노비에게 30일간의 산전휴가와 1백 일간의 산후휴가를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남편에게도 30일간의 육아휴직을 주게 했다. 여진인 등 외국인도 천민이었다. 이 점에서 세종은 인류를 문명과 야만으로 구분하는 중국세계의 화이사상을 뛰어넘었다.

② 세종은 세계적 보편성과 코리아의 특수성을 통일. 중국문명에 매몰되지 않았고, 코리아의 것에만 집착하지도 않았다. 『향약집성방』과『의방유취』,『농사직설』과『칠정산내외편』은 모두 당시 세계패권국 중국과 조선의 지식을 집대성해 통합한 것. 음악에서도 아악(중국 음악)과 향악(조선 음악)을 동시에 사용케 했다. 세계의 말과 글을 연구해 찾아낸 보편성을 토대로 주역과 성리학에서 찾아낸 우주만물의 기본원리를 적용했다. 정음을 통해 인간의 기본 도리를 밝히는 삼강오륜을 익힐 수 있고, 법률을 읽어 부당한 처벌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각종 기술ㆍ전문 서적을 읽어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③ 법고창신과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문물을 창조했다. 『고려사』를 편찬할 때, 대일통주의에 빠져 있었던 중화론자들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용했던 황제 등의 용어를 그대로 쓰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중국적인 기자와 조선적인 단군을 동시에 받들고, 조선건국자들에게 타도의 대상이었던 우왕ㆍ창왕ㆍ공양왕에 대한 기술도 당시의 호칭 그대로 하도록 했다. 당시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이 빠져 있었던 ‘기자조선-신라-고려’의 정통론이 아니라, ‘단군ㆍ기자조선-삼국-고려’의 정통론을 주장했다.

④ 상호존중과 관용을 통해 민주적 토론과 협력적 파트너십을 전 기간에 걸쳐 발휘했다. 4군6진을 개척할 때는 “김종서가 없었다면 내가 이 일을 못했을 것이고, 내가 없었다면 종서가 그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음악에 대해서는 박연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말했다. 과학기술에서는 이천ㆍ이순지ㆍ장영실 등이 그의 파트너였고, 훈민정음 창제 때는 아들 문종이, 해석과 보급에는 정인지 등이 파트너였다. 명나라의 황제들이 환관과 비밀경찰을 통해 가장 폭압적인 황제독재체제를 완성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세종의 방식은 중국문명과는 확연히 다른 ‘코리아문명’의 전형이 된다.

⑤ 모든 사람과 사상에 대해 포용. 토지실결수와 수세실결수가 조선5백 년 역사상 가장 높았고, 최첨단의 무기와 막강한 군사력으로 4군6진을 개척함으로써 국토도 확대. 농학ㆍ약학ㆍ천문학 등 과학기술의 발전도 최첨단을 달렸다. 1983년에 편찬된 일본의 과학기술사사전에 의하면, 15세기 전반기 전 인류의 과학업적은 코리아가 29건, 중국이 5건, 일본 0건, 그리고 동아시아를 제외한 세계의 나머지 지역이 26건이었다. 조선의 지배ㆍ지식층은 세종이 살아 있을 때도 세종을 이해하지 못했고, 세종이 죽은 뒤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거의 모두가 세종의 정신을 버렸다. 조선의 사대부와 선비들은 중화문명에 중독되어, 주자학에 대한 교조주의자가 되거나 중화사상에 대한 원리주의자가 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한족에 의한, 중국에 근거한, 유교적 예법체제를 위한 중화체제’를 태양처럼 따르고 그 속으로 조선을 일체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세종은 ‘조선인에 의한, 조선에 근거한, 인간적 문명체제’를 만들려고 했다.

-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대표로 집현전 학자들이 먼저 반대론을 편다.

① 우리 조선은 건국 때부터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해, 이제 비로소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가 되었는데,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② 예부터 중국 안에 풍토는 다르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고, 오직 몽고ㆍ서하ㆍ여진ㆍ일본과 서아시아 국가들이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야만족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다.

③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속된 말이나 모두 중국에서 통용하는 글자를 빌어서 사용하기에, 이두로 인해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상당히 많고 학문을 일으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다. ④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살이에 원통함이 많습니다. 언문으로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⑤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모든 관료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해도 오히려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중국 황제의 꾸짖음에도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해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 세대 뒤에 나타난 성인에게도 의혹되지 않은 연후라야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⑥ 동궁(문종)이 비록 덕성이 갖추어졌다 해도 성현의 학문을 더 공부해야 하는데, 정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언문에 모든 시간과 정력을 집중해 학업에 손실이 됩니다.

- 세종은 두 발은 코리아에 두고, 두 눈은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문명을 바라보며, 살아 있는 하늘백성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반면에 중화교조주의자들은 두 눈은 중국에, 두 발은 자신의 기득권에 두었다. 그리고 ‘중화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주는 만족감에 도취되어 이카로스처럼 중화체제의 태양을 향해 나아갔다. 세종은 코리아를 태양계의 지구로 만들었으나, 중화교조주의자들은 코리아를 태양계의 수성으로 만들었다.



❑ 제3장. 대륙과 해양의 패권경쟁과 코리아의 방황

❍ 1. 몽골 세계제국과 해양제국의 등장

- 몽골제국은 중화문명ㆍ이슬람문명에게는 재앙이었고, 그 밖에 있었던 서구문명권에게는 행운이 되었다.

- 1276년 몽골인들이 남송을 뒤엎은 뒤로 중국은 과거의 역동성을 결코 되찾지 못했다. 명이 들어서자 ‘천하 만민’을 추구했던 중화사상이 ‘한족의 폐쇄적 민족주의’로 위축된다. ‘천하 세계’로 확장할 수밖에 없었던 중화체제가 정화의 대규모 원정을 끝으로 ‘쇄국체제’로 변해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였다. 진취적이고 포용적이었던 이슬람문명이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저항적인 문명으로 변화된다. 이슬람도 몽골제국 이후 그 이전의 역동성을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 몽골제국이라는 거대한 태풍이 당시 지구상에 존재했던 세 개의 세계, 즉 중화세계와 이슬람세계, 그리고 동유럽세계를 강타하고 지배하고 있을 때, 오직 서유럽세계만이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 유럽은 이제 화약과 인쇄술, 나침반과 항해기술을 알게 되었다. 유럽의 무역상들과 사절, 장인, 선교사 들은 이슬람인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몽골인들이 만들어놓은 편리한 역참을 통해, 그리고 당ㆍ송ㆍ원 시대의 무역상들이 만들어놓은 해로를 따라 유라시아의 동쪽으로 끊임없이 넘나들었다. 전 지구적 세계로 일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 근대의 서유럽문명, 곧 자본주의 문명은 몽골제국에의해 중화세계와 이슬람세계의 역동성이 사라진 곳에서 배태되었다. - 명나라는 ‘자신의 가치’에 따라 무역체제를 조공체제로 바꾸고 사적인 무역 거래를 종식시켰다. 남해 원정을 끝내자 중국은 거대한 함선과 상선으 더 이상 수리하지 않았다. 원양선박의 건조를 금지하고, 두 개 이상의 돛을 가진 배는 모두 폐기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다. - 1400년대 중반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무역이 점점 힘들어졌다. 중국의 쇄국정책과 동중국해ㆍ인도양 일대의 무역거점 파괴로 동방에서 오는 물산이 대폭 줄었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중간의 티무르제국과 오스만제국에 의해 차단되고 값이 뛰었다.

- 베네치아와 제노바로부터 동방물산과 무역의 맛을 보았고, 해양항해술을 습득하고 있었던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운명 창조에 앞장을 섰다. 리스본을 중심으로 한 포르투갈의 대외 팽창에서 두뇌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사그레스 성이었다. 이 성을 배경으로 북해 바이킹의 선박과 이슬람의 삼각 돛배를 결합해 탄생한 걸작품이 바로 카라벨라 선박이다. 이것은 대서양세계를 연결시키는 거대한 기술혁명이었다. 그리고 1501년에는 선박의 상부가 아니라 선체에 포문을 내는 방식을 창조함으로써 선박의 무장 능력을 엄청나게 강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머스킷총(화승총)을 개발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손쉽게 무장할 수 있었다. 대항해를 가능케 하는 카라벨라선, 여기에 장착된 대포 그리고 개인이 휴대한 화승총은 대항해시대의 새로운 ‘무력’이 되었다. 사그레스 성이 정복을 뒷받침하는 두뇌로 떠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포르투갈인들이 자국 내에 거주하는 외래인들에게 보여준 관용, 즉 톨레랑스가 큰 몫을 했다. 당시 물산으로는 동방에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인들은 기독교를 세계 확장과 정복의 대의, 곧 ‘문명’으로 내세웠다.

- 스페인의 제국은 바로 그 이전의 세계패권국이었던 몽골제국을 연상시킨다. 몽골이 대륙에서 유라시아에 걸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면, 스페인은 해양에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 몽골제국 전체가 “카라코룸을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수탈기구”였던 것처럼, 스페인도 마드리드를 정점으로 한 거대한 식민약탈기구였다.

❍ 2. 도요토미의 아시아 패권 구상 - 중국과 인도를 지배하라

- 1543년 표류한 포르투갈인이 ‘왜구’와 함께 일본 최남단의 다네가시마에 도착해 일본인에게 화승총 두 자루를 건네주었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가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부대를 이끌고 기마병을 중심으로 한 다케다 신겐의 막강한 군사력을 격파했을 때, 운명은 위기로 다가왔다 - 일본의 서부 규슈지방의 다이묘들은 교역을 통해 화승총과 화약, 그리고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고 앞 다투어 기독교를 믿었으며, 1582년경에는 신도수가 15만 명에 이르렀다. - 일반적으로 히데요시의 아시아정복 구상은 두 개의 국제적 조건에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하나는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16세기 왜구의 활동에 의해 안에서부터 파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포르투갈ㆍ스페인, 즉 이베리아세력의 동아시아 진출이다. - 히데요시의 핵심적 침략 구상을 몇 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① 중국ㆍ조선ㆍ인도ㆍ동남아를 포함한 아시아 전체를 지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히데요시는 대륙국가들이 패권 구상과는 달리 인도를 중시하고, 천하의 중심이었던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 베이징이 아닌 닝보를 세계통치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해양적 세계 인식’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베리아의 국가들을 비롯한 유럽인들의 대항해는 인도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때 닝보는 일본이 명에게 조공무역을 할 때의 기항지였을 뿐 아니라, 중국이 마카오ㆍ천주와 더불어 포르투갈에게 허용한 무역기지였다. 히데요시가 이베리아적인 세계 인식을 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일본 통일전쟁의 주력 군비였던 조총에 쓰이는 탄약의 조달 때문이기도 했다. 이 당시 일본의 무역상들은 주로 동아시아의 조공질서 밖에 있었던 일종의 ‘왜구’였다. 히데요시의 세계 인식은 왜구의 세계 인식과도 연결된다. 결국 히데요시는 ‘이베리아+왜구’의 해양적 세계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대륙 침략에 착수했던 히데요시는 명과 조선,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왜구의 대두목으로 인식되었다.”

② ‘해양적 세계 인식’을 갖고 있었던 히데요시는 해군이 아니라 육군을 아시아 정복을 위한 군사력으로 생각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부대에 의한 교체ㆍ연속사격 전술을 개발해 1575년 다케다의 군대를 대파했다. 그 뒤 히데요시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조총부대와 성을 결합시켰다. 곧 성이 가진 공격적 속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그 방어적 본질을 전술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조총부대에 의한 전쟁 방식을 완성했다. 히데요시는 이베리아의 해양적 세계 인식을 모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베리아의 전쟁 방식은 깨닫지 못했다. 이베리아는 총과 성을 결합해 해양제국을 만든 것이 아니라 총과 함대를 결합해 해양을 지배했다. 섬나라 일본의 통일 과정에서 사용된 전쟁 방식은 해양 지배에도 사용될 수 없었고, 코리아와 중국ㆍ인도라는 대륙에도 사용될 수 없었다.

③ ‘처녀와 같은 대명국’, ‘일본은 활과 화살의 나라’, ‘명은 긴 소매의 나라’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명과 조선 등 정복 대상국의 군사력에 대한 인식이다. 1585년 예수회 일본 부관구장 코엘료는 일본 선교를 위해 스페인함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는 일본 66개국이 기독교로 개종되면 “펠리페 국왕은 호전적이고 예리한 일본군대를 통해 한층 쉽게 중국을 정복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중국을 정복할 수 있다고 본 이유는 “첫째, 국민이 안일해져서 유약한데, 특히 귀족이 그렇다. 둘째, 전 국토에 화승총이 하나도 없다. 셋째, 정부는 국민의 모반을 두려워해 국민이 무기를 휴대하지 못하도록 금지한다. 넷째, 가혹한 정치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가 쉽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스페인 선교사의 군사정세 인식은 히데요시의 군사정세 인식과 거의 일치한다. 히데요시가 아시아 정복전쟁에 투입한 총 16만의 병력은 일본 통일 과정에서 시마즈나 호조를 공격했을 때의 병력보다 적은 것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히데요시가 ‘천하’이고, 일본은 신국으로서 불법과 다례를 갖추고 있는 문명국이라는 논리이다.

- 스페인에게 일본이 신국이라고 주장한 것은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 위한 일종의 방어 논리. 그리고 일본 불교계에서 처음으로 신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도 중국과 인도에 대항해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어적 노력의 산물. 그러나 히데요시 시대에 와서 중국에 대해 일본이 신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팽창 논리가 된다.

- 조선처럼 주자가례가 아닌 무가의례, 유교적 예법이 아닌 다례를 일본문화의 독자성, 우월성의 근거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독특함이 있다. 결국 일본의 아시아패권 구상은 스페인의 해양제국과 기존의 중화사상, 그리고 일본의 자체 논리를 짜깁기 한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세계 인식은 이베리아의 세계 인식에 왜구의 동아시아 인식을 결합한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무력은 조총이라는 이베리아의 무기와 일본 통일의 전쟁 방식이 결합된 것이었다. 그리고 정복의 논리는 일본식의 불교 논리에 기독교의 일부 논리를 결합한 ‘신국’이라는 개념

❍ 3. 임진왜란, 해양과 대륙 세력의 7년 전쟁

- 윤두수와 유성룡은 요동내부를 반대했다. 특히 유성룡은 “임금의 가마가 조선을 일보라도 벗어나면 조선은 우리의 국토가 아니게 된다. 호남의 충의스러운 선비들이 봉기를 일으키려고 하는 상황에서 요동내부를 말하게 되면 인심이 와해된다”라고 주장. 6월 11일 평양을 빠져나온 군통수권자 선조는 “내가 천자의 나라인 중국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조선에서 적의 손에 죽는 것은 안 된다”라고 하면서 다시 요동내부를 주장.

- 중국의 요동지역 책임자가 이를 허락해 요동내부가 준비되는 동안, 유성룡 등은 “전라ㆍ경상ㆍ충청ㆍ강원ㆍ함경의 각도가 아직도 버티고 있는데, 국왕이 요동에 도망가서 조선 신민의 처치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굳이 필부의 일을 하려고 하는가. 명군을 향도할 조선군이 필요하고, 과거를 통해 지휘관을 소집할 필요가 있다”라는 이유를 들어 강력히 반대했다.

- 7년 전쟁 내내 군 최고통수권자인 선조는 군과 민의 사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는 전쟁 초기에는 너무나 쉽게 수도와 평양을 포기하고, 요동 도망과 왕위이양까지 추진할 정도로 극단적인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중국군이 개입하여 의지할 곳이 생기고, 성종과 중종의 묘가 도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번에는 끊임없이 군사적 모험주의를 견지. 일본을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대왜 진공론’이 그 대표적 예.

- 중국군의 참전과 작전지휘권의 문제 : 9월 초 중국의 특명대사 설번이 조선의 형세를 살펴보고 중국군의 대규모 파병을 강력 건의. 2백 년 이래 푸젠ㆍ저장 지방이 항상 왜구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랴오양과 톈진이 안전했던 것은 바로 조선이 울타리가 되어 막아주었기 때문. 또한 빨리 치면 조선의 힘을 빌릴 수 있다. 그러나 늦게 치면 왜적들이 조선사람들을 거느려 우리와 적이 될 것이므로, 군사를 동원해 적을 토벌하는 데 조금도 시간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설번은 조선이 망하면 요동이 위험해지고 중국 전체가 위험해진다는 점, 정벌할 바에는 평양 부근에서 제압해 일본군의 활동반경을 줄여야 한다는 점, 조선이 망하면 일본이 조선의 힘을 흡수해 중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 등 코리아의 전략적 가치와 전쟁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판단과 조공책봉관계라는 군사외교상의 수직적 동맹관계에 따라, 12월 하순 중국의 4만3천여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온다. 조선군의 작전지휘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중국과 일본이 휴전협상을 벌일 때, 중국이 조선군의 전투 행위를 금지시킨 것. 20세기 중반의 ‘한국전쟁’에서도 이와 유사한 패턴이 반복.

- 평화를 위한 회담 과정 : 중국의 경략 송응창은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지키기 위한 요새지라고 주장하며, 완전철병론을 반대했다. 이에 따라 단계적 철병계획이 수립되었다. 선조와 송응창의 대립이 심화되자 송응창은 선조의 무능을 이유로 왕을 교체하려 했고, 조선이 중국에 사절을 보낼 수 없도록 길을 끊었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반대하고 강경하게 대북 진공론을 주장했으며, 미국은 한때 휴전회담에 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계획했다.

- 일본군에 대한 전쟁전략 : 영의정 유성룡은 일찍이 전력상 조선군이 선제공격전을 수행하기는 어렵지만 방어전만은 가능하다고 보고, 조선군의 전력을 보강해 왜란의 장기화에 대비. 그리고 일본군이 재침할 경우, 전쟁 초기 행주산성 등에서의 성공사례와 고구려 안시성의 승리 경험 등을 들어 산성을 거점으로 청야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 이에 대해 좌의정 윤두수를 비롯한 서인은 일본군에 대한 ‘선제공격론’을 주장. 명분과 대의만이 있었을 뿐 전략이 없었다. 윤두수는 일관되게 서조의 요동내부를 반대했고, 중국의 지원조차도 반대한 적이 있다. 이것이 ‘대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선제공격론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것이 ‘명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앞에서는 명분을 주장해 강경파가 된다. 그러나 막상 전선에 직접 나가서 결사항전하라고 하면 구실을 붙여 도망을 친다. 평양성에서 그랬다. 사실 윤두수와 같이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은 평양성에서 장렬히 전사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주장의 진실성이 입증된다.

- 중국과 조선의 전력 구성 : 전쟁의 막바지인 1598년 9월 20일 전후 일본군을 총공격할 때, 중국군은 14만 3천7백 명이었고 조선군은 2만 5천1백 명이었다. 일본이 1597년 3월, 14만 1천5백 명의 병력으로 재침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일본군의 숫자와 중국군의 숫자는 거의 비슷하고, 조선군은 이들의 15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일본군이 압록강ㆍ두만강 유역에 이르렀을 때, 여진의 누르하치가 조선에 원병 파견을 제의했다. 비록 조선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여진도 코리아전쟁에 충분히 개입할 수가 있었다. 결국 전쟁 시의 전선이동 상황, 외국군의 참전과 군사지휘권, 강화ㆍ휴전회담, 전쟁전략, 연합군의 전력 구성 등을 모두 고려할 때, 1592년에 발발한 ‘코리아전쟁’은 360여 년 뒤인 1950년에 발발한 ‘코리아전쟁’과 아주 비슷.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접점이라는 코리아의 지정학적 특수성, 코리아와 패권국 간의 군사외교상의 수직적 동맹관계, 코리아가 스스로를 방어하고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고구려가 세계패권국가였던 수ㆍ당의 침략을 수차례에 걸쳐 격퇴한 무용담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중국인들에게, 임진ㆍ정유 전쟁에서 조선이 보여준 군사적 무기력은 실로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웠다.

- 중국인들은 조선의 쇠약에 대해 크게 세 가지의 원인을 꼽았다.

① 국사태만이다. 경략 송응창은 선조에게 보낸 자문에서 조선 관인들이 시나 읊조리며 기생을 끼고 앉아 국사는 팽개치고 있다고 비난했다. ② 문약이다. 조선이 고구려 이래 강국이었음에도 선비와 백성들이 독서와 농사에만 치주해 변란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③ 오로지 중국 의존이다.

④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 전체를 뒤흔든 ‘옥비의 난(1583년)’, ‘기축옥사(1589년)’ 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옥비의 난’은 조선의 지배세력들이 양인이 된 천인을 다시 천인으로 만드는, 역사에 역행하는 수구정책을 폈기 때문에 일어났다. 기축옥사는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선조의 주도하에 서인이 동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권력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 두 사건과 각종 부정부패로 조선은 전쟁 직전에 이미 국가적 통합력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 ‘7년 전쟁’에서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과 같은 명장, 유성룡과 같은 지도부, 곽재우와 같은 사회세력이 그나마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 동안 거의 전략적 오류를 범하지 않았고 헌신했다.

❍ 4. 광해군의 투항주의, 인조의 모험주의

- 왕위에 오른 광해군의 네 가지의 주요 정책

① 민생안정정책이다. ②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정적을 숙청하고, 대대적으로 궁궐을 중건ㆍ신축했다.

③ 여진족에 대한 대책 ④ ‘북로남왜’의 상황에서 남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쓰고 1609년 기유약조를 맺어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다.

- 고려 인종의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고,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그렇지 않은 이유를 살펴보자.

① 송은 처음부터 고려와 아무런 군사적 관계가 없었고, 고려가 도움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명은 14만의 대군을 파병해 이여송의 말대로 망해가는 조선을 살려주었다. 후금 정벌의 총사령관 요동경략 양호처럼 대일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이 대부분 대 후금 전쟁의 사령관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② 중화사상과 숭명사대주의가 널리 펴져 있었다. 수직적 동맹관계에 있는 혈맹을 배신할 수 없다는 ‘대의와 명분’이다. ③ 고려 예종ㆍ인종 대와 비교해 광해군 대의 여진은 그토록 강력한 군사력이 아니었다.

- 후금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쟁을 중단해 나라를 통합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과도하게 궁궐 공사를 벌이지 말았어야 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조ㆍ명 연합군이 후금군에게 대패한 뒤에도 광해군은 무슨 생각으로 궁궐 건축에 몰두했을까? 위기를 위기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군사력 확충보다 내부의 권력투쟁과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 토목공사에 열중했다.

- 후금 투항노선은 후금을 더욱 강하게 하고, 조선을 더욱 약하게 만들었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말처럼, 몽골의 그 강력한 군대가 수ㆍ당의 1백만 대군과 맞서 싸운 고구려의 명성 때문에 고려 공략에 한계를 느꼈던 역사의 사례를 생각하면, 지더라도 용맹스럽게 져야 역사에 도움이 된다.

- 여진족인 금의 아구다와 후금의 누르하치, 송과 명, 고려 인종과 자신을 동일시한 광해군은 역사의 포로가 되었다. 광해군은 고려사를 잘못 읽은 것이다.

- 서인의 결정적 문제점은 끊임없이 전쟁을 주장하나 전쟁을 준비하지는 않고, 강경한 항전을 주장하나 결사하지 않으며, 결국은 스스로 나가 싸우지 않고 오직 화친하는 것만을 반대하는 점이다. 서인이 옹립한 인조는 코리아의 역사상 최초로 적국의 수장 앞에서 무릎 꿇고 절하며 항복하는 왕이 되었다. 명의 은혜를 갚은 것이 아니라 명의 한쪽 팔이 잘려나간 것이다. 서인은 오히려 광해군보다 더 대의 명분을 잃었다. 인조반정의 대의를 스스로 배신한 것이다. - 명분만을 중시하며 민족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는 서인세력은 이후 노론과 소론, 벽파와 위정척사파 등으로 이어진다.

- 북벌론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입증되자 대청 복수론보다 대명 의리론, 존주론이 국가의 핵심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다. 이 세계에 조선만이 오직 문명국가라는 조선중화주의가 생겨났다. 대청 복수론과 대명 의리론에 갇혀 있었던 사람들이 주로 위정척사파를 형성하고, 박제가의 대청현실론과 국력양성론을 이어받은 세력이 개화파를 형성한다.

❍ 5. 도쿠가와의 쇄국정책 - 일본형 중화체제를 만들다

- 히데요시가 부풀려놓았던 ‘대천하’를 다시 일본을 중심으로하는 ‘천하’로 축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업을 담당한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도쿠가와 막부였다.

-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와 이에 기초한 ‘일본형 화이체제’, 또는 ‘일본중심의 중화체제’의 형성은 크게 다섯 가지의 작업을 통해 달성한다.

① 류큐, 에조지(현재의 훗카이도)를 포함하여 일본 천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② 조선과의 관계에서 조선을 일본 천하에 포함시키는 작업을 진행한다. 반면 조선은 포로의 송환과 재침의 방지를 목적으로 했다. 결국 1627년과 1636년에 청이 조선을 점령하고 1644년 청이 명을 멸하자, 조선의 입장은 일본의 입장에 가깝게 정리된다. 도쿠가와 장군은 대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일본 장군과 조선왕이 대등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에 의해 일본은 조선왕과 장군이 대등하기에 장군 위에 있는 천황과 조선왕은 상하관계라는 주장이 가능하게 된다. ③ 중국을 일본 주심의 세계질서에서 제일 아래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④ 중국이 오랑캐인 청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천황이 ‘천하’의 구심으로서 새롭게 부각된다.

⑤ 일본 중심의 세계질서를 형성하는 마지막 단계는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양세력을 오랑캐인 남만으로 취급해 ‘일본형 화이체제’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결국 “막부와 대등하거나(조선) 또는 일본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류큐) 이들 두 개의 나라를 매개로, 일본은 국제관계에서 자신을 정의하고 또 우주에서 자신을 위치 지우는 데 더 이상 중국과 같은 외적 매개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 6. 서양문명의 도전과 조ㆍ중ㆍ일의 응전

- 1842년 ‘서양 오랑캐’ 영국에게 중화제국이 패배한 이 충격의 진상은 전쟁 직후 위원의 『해국도지』를 통해 즉각 동아시아로 전달. - 중국 조정은 ‘전쟁’의 패배는 단지 넓은 중국 땅 어느 한곳에서 벌어진 ‘전투’의 패배에 불과하다고 생각. 영국과 강화한 이유도 “통상조약을 체결해 오랑캐를 무마하고 목전의 문제인 이적의 베이징 침입을 막는 것”이라고 보았다. - 조선에도 청으로 간 사신을 통해 1845년 위원의 『해국도지』가 전해졌다.

- 중국의 사태는 우리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한 이유는 서양세력이 우리를 침공할 생각이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 따라, 그는 우리 정부가 취해야 할 정책은 ‘민심의 소동’을 막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중국과 조선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비해, 나가사키의 상관을 통해 책과 소문으로 전해진 아편전쟁의 소식은 일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사면이 바다인 일본에게 대륙이 아닌 바다에서 오는 서양세력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적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막부는 1842년,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외국서박을 물리치라’는 전래의 <무이념이국선타불령>을 폐지했다. -쇄국으로 세계정세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당시의 일본인에게 ‘아편전쟁’은 하늘이 내려준 반면교사의 ‘거울’이었고, 『해국도지』는 하늘이 내려준 ‘보배로운 책’이었다.

- 서양세력에 의한 중국의 수도 함락이라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은 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우선 중국은 황제의 어머니인 서태후가 공친왕일파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보수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연호를 동치로 정하고, 군기처에 ‘총리각국사무아문(총리아문)’이라는 기구를 신설했다. 여기서 서양의 조약체결국과 외교통상관계는 물론, 자강을 위한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에 관한 모든 사무를 총괄했다. 중국은 서양문물을 학습하고 군사력을 강화해 ‘동치중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일본은 1854년 일본의 개국 이후 ‘존왕양이론’과 ‘문명개화론’은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이들은 서로 절충하고 결합하기 시작한다. 존왕양이파가 서양의 힘을 인식하면서 맹목적인 양이를 지양했다면, 문명개화파는 메이지유신을 통해 국내의 발전 가능성을 보고 맹목적인 서양식의 문명개화론에서 벗어났다. 보편성의 추구보다는 일본 특수성의 추구로 귀결되어버린다. 즉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혁명에 의한 군대세계의 ‘새로운 질’이 새로운 문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만세에 걸쳐 하나의 계통으로 내려온 ‘천황’이 문명의 근원이 된다.

❍ 7. 대원군, 비전과 전략 부재의 비극

- 서양세력은 중국과 같은 통상적 가치도 없었고, 일본과 같은 기항지로서의 가치도 없었던 조선을 더 이상 침공하지 않았다. 대원군의 대 서양 전쟁정책에 직접적 계기가 된 천주교인들은, 1866년에서 1871년까지 총 8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하느님 맙소사(하느님 마시옵소서)”라는 통곡이 천지를 진동했다.

- 대원군은 미국군의 침공을 격퇴한 다음, “서양인들의 배에서 나는 연기와 먼지가 온 천지를 뒤덮어도 동방국의 찬란한 광채는 영원토록 빛나리라”라는 시를 지었다. 이것은 대원군 개인만의 인식이 아니라, 당시 조선 지배층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그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 8. 개화파, 미숙한 정치력으로 위기를 맞다

- “함부로 예의의 나라라고 하는데, 나는 본래 이 말을 추하게 생각한다. 천하만고에 국가가 되어가지고 어찌 예의가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이 말은 중국인이 이적 중에서도 예의가 있음을 가상히 여겨서 우리를 예의의 나라라고 부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것은 본래 수치스러운 말로서,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호기를 부릴 만한 것은 아니다.”

- 개화파와 박규수는 50년의 긴 세대차가 있었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이 ‘내치와 외치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할 때인 1876년, 당대 최고의 경세가 박규수가 죽었다. 박규수가 기른 신진개화파들은 이 당시 겨우 10대,20대에 불과했다. 코리아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 수 있었던 박규수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 1870년, 일본 외무성은 조선에 대한 기본방침으로 세 가지의 안을 제출했고, 이 중에서 제3안이 채택되었다. 제3안은 “조선이 청국에 복속되어 있기에 우선 중국에 천황의 사절을 파견해 수교를 맺는다. 돌아오는 길에 일본과 중국의 격이 같아진 것을 토대로 조선이 일본보다 한 등급 아래에서 관계를 맺게 한다. 만일 이것을 조선이 수락하지 않으면 화전을 논의한다. 이 안은 임진왜란 때와 같은 중국군의 조선 원조를 쉽게 피하도록 할 것이다. 따라서 중국과의 수교가 조선과의 교섭보다 더 시급하다”라는 것이다.

- 리훙장은 조약에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것을 명시하려 했으나, 미국이 반대했다. 그러나 조약의 조인과 동시에 조선왕은 리훙장의 요구에 따라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며, 조선과 미국 사이에 맺어진 상호평등조약은 중국ㆍ조선 사이의 종속체제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중화체제에서 조공국은 근대적인 의미의 속국이 아니었다. 리훙장도 처음에 인정했던 것처럼 중국적 질서를 벗어나지 않는 한, 내정과 외정 등 모든 것을 자주로 처리하고 그 책임도 스스로 지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조공외교에서 근대외교로 바뀌는 중대한 변혁기에 전통적인 조공국에서 근대적인 속국으로 전락했다. 근대외교에 대한 인식 부족과 중국의 간섭, 그리고 자주독립국가게 대한 의지의 부족 때문이었다.

- 1882년 8월, 중국은 임오군란 진압을 명분으로 리훙장 휘하의 우장칭이 이끄는 2천 명의 군사를 조선으로 진격시켰다. 중국은 1882년 10월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중국은 조선에 영사 재판권을 설정하고, 인천에 중국전관조계를 두었다. 이때 중국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기 때문에 외국에 사용하는 ‘조약’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중국이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장정’이라는 형식을 취했다.

- 북양대신과 함께 조선 문제에 대해 일차적 책임을 진 사람은 일본주재 중국공사 리수창이었다. 리수창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것 처럼, 중국이 조선의 왕을 폐하고 중국의 군현, 곧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조선은 일본, 구미의 견제로 중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지만, 외교ㆍ군사ㆍ내정ㆍ경제 등 전 분야에 걸쳐 중국의 실질적 속국이 되었다.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 1905년보다 20여 년 전에 ‘중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5일 전, 김옥균은 고종과 민비를 독대했다. 이때 고종은 “그대의 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무릇 나라가 위급한 시기에 처하면 국가의 대계를 그대가 생각한 계획에 맡길 터이니, 그대는 이에 대해 다시는 의심치 말라”라고 말했다. 임금이 전폭적인 신뢰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급진개화파들은 ‘위기’와 ‘기회’ 속에서 조급해졌다. - “김옥균은 현대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있는 근대적 국가로 만들려고 절실히 바랐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 일본을 모델로 취하려고 백방으로 분주하였다. 그가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고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 대원군도, 김옥균도 악순환을 끊지 못했다. 그들은 수구와 외세의 사슬 속에서 더욱더 그 사슬을 강화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이 기회를 위기로 만들었다. 영웅적 풍모가 있었던 사람들이 척박한 토양 속에서, 강력한 수구세력과 외세의 힘 앞에서, 위기 속에서 아이처럼 행동했다.

❑ 제4장 영ㆍ일의 공동패권과 코리아의 편입

❍ 1. 대영제국의 세계패권과 중화제국의 해체

- 영국은 1860년경 세계 인구의 2퍼센트에 불과했으나 근대산업의 거의 반을 차지했고, 철과 석탄의 50퍼센트를 생산했으며, 원면의 50퍼센트를 소비했다. -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대영제국의 경제적 패권을 과시하기 위해 런던에서 최초로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 1889년 3월, 솔즈베리는 ‘해양방어법’을 통해 영국이 그 다음으로 강력한 두 나라의 해군력을 합친 것보다 우세한 해군력을 보유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 스페인을 물리친 네덜란드는 자연적 불리함을 기회로 활용해 어업과 조선ㆍ해운ㆍ금융에서 세계 최고가 되었다. 1670년을 기준으로 네덜란드 선박의 총 톤수는 영국의 세 배였다.

- 포르투갈ㆍ스페인ㆍ네덜란드 등 이전의 중상주의단계에서는 유럽의 상업 활동이 동아시아 세계체제 내에 포함되었다. 반면 산업자본주의단계에서는 기존의 동아시아체제를 해체시켜 이것을 유럽의 세계체제 속으로 포함시켰다.

- 해군력에 기초한 영국의 아시아정책에서 주요한 적은 러시아였고, 특히 중시한 지역은 인도와 중국이었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영국의 압도적인 경제ㆍ정치ㆍ군사적 우월성이 보장되는 상태에서 중국의 영토를 보전하고 정치의 독립을 옹호하려고 했다. 그것은 중국에 압력을 가해 중국을 붕괴시키는 것보다는 이러한 정책을 취하는 것이, 중국 전체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낫다고 판단

- 19세기 말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라는 패권 도전세력에 맞서기 위해 하위 파트너로 중국과 일본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러한 틀이 유지되는 한 영국은 중국과 일본이 독자적인 외교 활동과 군사 활동으로 대만ㆍ류큐ㆍ조선 문제 등에 개입하는 것을 허용한다.

- 영국은 1858년의 <톈진조약>에서 공문서에 이자를 쓰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화이사상을 조약으로 금지시켰다. 이것은 중국 황제가 천제로서 세계를 지배한다는 세계관을 파괴시켰다. 중화제국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던 속국들을 하나하나 떼어내 새로운 제국주의체제 속으로 편입시켰다.

A. 예부 관할의 조공국

조선, 류큐, 베트남, 라오스, 시암(타이), 스루, 버마, 서양(네덜란드, 포르투갈, 로마교황청, 영국)

B. 예부관할의 호시국

일본,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기타 동남아 항구도시

C. 이번원 관할의 번부

내몽골 부족, 외몽골 부족, 동투르키스탄의 여러부족ㆍ도시들, 티베트

D. 이번원 관할의 조공국

네팔, 러시아, 카자흐칸국, 코칸트칸국, 기타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 및 도시

※ 청대의 중화제국체제(19세기 초까지)

- 우선 베트남은 프랑스가 선점했다. 영국은 버마가 10년에 한 번씩 청국에 조공사절을 보내는 관례를 인정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 뒤 조공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은 시암(타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시암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다. 시암은 서쪽의 영국과 동쪽의 프랑스 사이에서 세력완충지대로 설정되어 중립국이 된다. 러시아는 중국과 러시아에 2중으로 조공했던 카자흐칸국을 1850년에 완전히 병합했다. 일본은 1875년 류큐에 군대를 투입해 류큐와 중국의 조공책봉관계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1879년에는 류큐 번을 폐하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해 일본영토로 편입시켰다.

-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2천여 년 간 유지되어온 중화제국체제의 국제관계는 모두 해체되었다. 중국의 남ㆍ서부는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북ㆍ서부는 러시아에 의해, 동부는 일본에 의해 해체되고, 새로운 제국체제로 편입되었다. 이제 1년에 네 번 조공하며 중화제국의 하위 파트너 중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 ‘외번필두’ 조선만 남았다. 결국 조선이 중화제국체제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명맥이었다. 중화체제라는 세계체제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중국과 조선이 동시에 망한 것은 역사의 우연이 아니었다.

❍ 2. 『조선책략』, 「영남만인소」의 전략논쟁

- 김홍집이 귀국하면서 일본주재 중국 외교관 황쭌셴이 쓴 『조선책략』을 왕에게 헌상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애정까지 표현한 이 전략문서는 조정 내에서 즉각 회람되었다.

- 급히 일어나 일을 도모하려면 나의 계책, 이른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을 힘써 행하는 것이 상책이다. 주저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며 ‘친중국’하되 옛 제도를 지키는 데 불과하고, ‘결일본’하되 새 조약을 맺는 데 불과하며, ‘연미국’하되 표류한 선박이나 구조해주고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문서나 접수하면서, 격변이 일어나지 않고 혼란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은 하책이다. 내가 속을 것을 근심한 나머지 스스로 도움 줄 세력을 잘라버리고, 적은 병력으로 요새를 지키면서 문호를 굳게 닫아 일체를 거절하고, 남들을 오랑캐라 배척하며 그들과 함께 동렬에 서는 것을 꺼리고 있다가, 변고가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비굴하게 온전하기를 바라고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은 무책이다.

- 1880년 5월 황쭌셴의 상관이었던 주일 공사 허루장이 본국에 제출한 「조서에 대한 세 가지 정책」과는 다른 것이다. 허루장은 여기서 조선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상책, 감국대신을 파견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 중책, 서양 국가들에게 조약체결을 권유하는 것이 하책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막상 이 세 가지 정책 중에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상책이 아니라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이라는 하책이『조선책략』에 나타났다.

- ‘대러 방어론’에 입각한 친중ㆍ결일ㆍ연미 정책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온 것이 이만손을 비롯해 영남 지식인 1만 명이 서명한 「영남만인소」이다. ‘러시아주적론’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친중을 제외한 결일, 연미 모두 강력히 반대한다. 『조선책략』에서 결론으로 언급한 ‘무책’, 즉 쇄국정책이 ‘상책’이라고 주장

- 「영남만인소」에 이어 전국의 수많은 유생들이 상소문을 올려『조선책략』을 비난하고 쇄국정책을 고집

- 『조선책략』과는 정반대로, 조선의 여론은 러시아와 우호ㆍ협력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조성되고 있었다.

① 수구세력인 위정척사파는 이때까지 러시아가 조선에 해를 끼친 적이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② 반 중국 노선을 견지한 급진개화파는 조선을 속국화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하려 했다.

③ 민씨 일파는 러시아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에 굴복해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

④ 일본의 침략 위협에 대처하기에는 중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설령 중국은 힘이 있어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 하기 때문에,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중국’에 의해 임명된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독일의 반 영국 정책 및 중국의 반 일본 노선에 입각해 일관되게 반영ㆍ친러 정책을 폈다.

- 조선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여우를 피하려다 영국이 제일 싫어하는 러시아라는 호랑이의 굴에 들어갔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 특히 세계패권국 영국의 구도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선의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과 외교 역량의 실상이었다.

- 19세기 후반 코리아에 대한 세계패권국 영국의 정책목표와 선택지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은 그 자체의 경제적 이익보다도 러시아에 대항하는 군사적 방파제의 의미를 갖는다.

②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에 있어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은 인정된다. 갑신정변 뒤 제기된 조선에 대한 ‘중ㆍ일 공동보호론’을 영국이 양해할 수 있었다.

③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는 어떤 세력이 조선에 확실히 존재해야 한다.

- 세계패권국 영국의 ‘중국과 일본을 지렛대로 한 대러 봉쇄’라는 동아시아정책에서 중국과 일본의 중요성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1880년대까지는 청국이 중요한 위치를 점했으나, 1890년대 이후 일본의 비중이 높아간다.

-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1894년 ‘청일전쟁’ 전까지는 중국을, 그 뒤에는 일본을 지렛대(하위 파트너)로 하여 전개되었고, 조선은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지레받침’이 되었다.

❍ 3. 일본은 어떻게 중국을 이겼는가

- 기축으로서의 영ㆍ러의 대립과 하위 축으로서의 중ㆍ일의 대립이 한 점에서 교차하는데 그 지점이 바로 조선이었다. 중국은 임오군란의 진압을 계기로 조선을 속국화하고, 갑신정변을 계기로 우민화 정책을 전개했다. 정부 요직에서 개화파를 몰아내고, 외국에 있는 유학생을 소환해 박해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개화지식인 유길준도 조선으로 소환되었으나, 국왕과 한규설의 도움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유폐되었다.

- 일본의 대표적 군사전략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1888년 1월, 「군사의견서」를 제출했다. 영국과 중국이 공수를 함께하기에 중국을 영국에서 분리시켜 조선 문제는 중ㆍ일간의 모순대립으로서 맞붙어야 한다는 것.

- 영국이 일ㆍ중 개전을 묵인 또는 승인하도록 하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ㆍ일 간의 관계강화이고, 다른 하나는 영ㆍ중 간의 관계 악화이다.

- 중국은 조선에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이에 대한 독자 대응력이 약화되자, 일본과의 타협이 아닌 러시아에의 의존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려 했다. 이것은 약소국인 중국의 리훙장이 패권국가가 사용하는 ‘세력균형론’을 자의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 중ㆍ러의 접근에 의해 중ㆍ영의 관계가 멀어지고, 일ㆍ영의 관계가 강화되자 러시아가 발을 빼내 중ㆍ러의 관계가 이완된다.

- 일본 외상 무쓰는 청일전쟁을 서구문명의 대표자 일본과 동양의 구태를 온존시키는 중국(청)과의 전쟁, 서구적 신문명과 동양적 구문명의 충돌로 규정했다. -코리아는 1894년 전쟁까지는 전체가 대륙(X)의 편이었다. 그러나 1904년 전쟁에서는 중립을 선언해 위치(0)를 변경했으며, 그 50년 뒤에는 코리아가 둘로 나뉘었다. 북은 대륙세력(X), 남은 해양세력(Y)과 한편이 되었다.

- 청일전쟁에서 ‘문명’이 전쟁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2천 년 간 중국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수없이 사용한 ‘야만에 대한 문명의 정벌전쟁’과 비교될 수 있다.

❍ 4. 일본의 폭주, 러시아제국을 만나 좌절하다

- 1894년 8월 17일, 일본 정부는 무쓰 외상이 제출한 「조선 정부에 대한 장래의 일본정책」안을 검토했다. 여기서 무쓰는 네 개의 안을 제시한다.

① 일본 정부의 공적 성명대로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해 완전히 그 자주자치에 맡기고, 일본은 간섭하지 않는다. ② 명의상 독립국으로 하고 실질적으로는 보호국으로 한다. ③ 일중 공동보호

④ 구미와 중국을 유도하여 조선을 벨기에, 스위스 같은 중립국으로 한다.

- 조선 점령으로 조선이 일본의 주권선에 편입되자 이익선이 동아시아 전체로 확장되고(동양맹주론), 조선의 점령이 대 중국 전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청의 복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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