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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을 좋아한다고? 그럼 혜초를 아는가? 왕오천축국전을 아는가? 아직까지 물어본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1300년 전 신라인이 쓴 기행문이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서책.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책을 펼치자마자 부끄러운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역주자 정수일 교수는 서문에 불초스럽고 개탄스런 마음을 풀어놓았다. 발견한 사람도 이국인이요, 연구한 사람도 이국인들이요, 현재도 이국의 땅에 있고, 국내에는 제대로 된 역주서도 없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왕오천축국전. 이것은 1908년 중국 둔황석굴에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다. 책명도 저자명도 떨어져 나간 두루마리 잔간(殘簡)이다. 227행, 약 육천 자 정도의 글로 40여개 지역을 개괄하여 쓴 글이지만, 누락자와 오자 등이 많아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전문가로서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고 한다. 역자는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의 부끄러움 을 떨쳐내고자 했다. 그만큼 힘든 작업이었다는 것이 나에게도 그대로 느껴졌다.


 



돈황은 구마라습, 현장과 같은 저명한 승려들뿐 만 아니라 마르코 폴로와 같은 탐험가들이 거쳐간 곳이었다. 신라의 승려 혜초(704~780)도 이곳을 지나갔다. 혜초는 20세부터 24세까지 오천축국(천축은 인도를 의미하며, 인도를 5개 지역으로 나누어 오천축국이라 한 것임)을 다녀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왕오천축국전의 저자가 혜초라는 것을 알아낸 것은 발견자인 펠리오인데, 그의 지식이 없었다면 이것의 존재조차 몰랐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펠리오가 이 잔간을 발견하기 4년 전, 그는 다른 문헌을 통해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과 그 내용이 대략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가 돈황석굴에서 다 헤어진 두루마리를 보는 순간, 이것이 바로 본인이 찾던 그 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알고 있는 자에게만 보물이 보이는 법이다. 혜초의 고국이 신라라는 것은 여행기 발견 7년이 지나 일본학자에 의해 밝혀졌다.



 


신라시대에는 당으로의 유학이 장려되어 많은 승려, 유학자들이 당으로 들어갔다.


‘동쪽나라(신라) 사람들은 승려이건 유자이건 반드시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서 몇 겹의 통역을 거쳐 말을 통하면서 공부하러 간다.’ - 최치원(857~?).


혜초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20세에 신라를 떠나 금강지와 그의 제자 불공을 사사하고, 불공의 2대 제자가 되어 밀교의 전통을 확립한 고승이 되었다(박문호 박사님이 나눠준 불교 계보에서 이를 다시 확인함). 그는 신라도 돌아오지 못하고 76세에 중국 오대산의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한다.



 


이 책이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본문 자체는 혜초의 짧은 글에 붙인 방대한 논문과도 같다. 역자 정수일 교수는 그의 해박한 지식을 통털어 내어 한 글자 한 글자를 해독하는 듯 했다. 중앙아시사의 지리와 역사에 아무 지식 없이 그의 방대하고 치밀한 해석을 눈으로만 훑어가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혜초의 여정은 인도의 북쪽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대식국(아랍)의 파샤(페르시아)까지,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관통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걸어서 4년. 어마어마한 거리다. 그는 여행기에서 ‘다시 총령에서 걸어서 한 달을 가면 소륵에 이른다’ 와 같은 식으로 간단히 말을 끝내버렸지만, 그 한 달이 얼마나 고되었을 지는 그의 시에서 느낄 수 있다. 혜초의 한숨과 눈물이 스며 나오는 듯하다.


 



차디찬 눈이 얼음까지 끌어모으고


찬바람 땅이 갈라져라 매섭게 부는구나


망망대해는 얼어붙어 단을 깔아놓은 듯


강물은 제멋대로 벼랑을 갉아먹는구나


용문엔 폭포수마저 얼어 끊기고


우물 테두리는 도사린 뱀처럼 얼었구나


불을 벗삼아 층층 오르며 노래한다마는


과연 저 파밀(파미르) 고원을 넘을 수 있을런지.



 


이 여행기가 더욱 중요한 것은 한자로 된 글 중에서 최초로 대식(아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자는 혜초가 불교를 배우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견문 차원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불교와 무관한 아랍을 갔을 뿐더러 불교학의 최고 전당인 나란타를 지나면서 아무 글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자의 말이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파고 들었다.


“여행지의 역사와 지리, 사회와 문화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갖추고 있을 때만이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진위를 가려낼 수 있다.”


이 말이 어디 왕오천축국전에만 해당될 뿐이랴. 난 왕오천축국전을 10%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셈이다.


 


혜초의 노정, 그의 기록, 그것을 풀어낸 정수일 교수에 대해 한 눈에 바라보지도, 건너지도 못할 광대하고도 깊은 망망대해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망망대해를 언젠가는 좀 더 멀리 볼 수 있을까...


 


 

  • ?
    박문호 2007.08.06 02:10
    혜초가 사막을 지나면서 신라(계림)을 그리워하며 읊은 시를 가슴에 새기며 우리조상에 대한 자긍심을 느꼈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특히 유식학(현장법사의 번역사업으로 당시 크게 발흥했던 불교분야) 은 신라스님들이 중국불교계를 주도하였습니다. 원측스님과 김화상은 모두 신라사람으로 중국문화사의 주역들이지요. 20년전 불교사를 공부하면서 우리역사에 애정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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