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조회 수 279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웨더포드,정영목/사계절

‘06.4.16.1211시 서울집에서



❍ 머리말 - 사라진 정복자

1. 칭기스 칸의 유산

-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통치자 자리에 앉았던 마지막 인물은 부하라의 아미르인 알림 칸이었다. 1920년 소비에트 혁명의 물결에 밀려 퇴위했다. 2. 몽골 초원에서 사라지다 - 몽골인의 믿음에 따르면 죽은 자의 몸은 평화롭게 놓아두면 그만이었다. 3. 칭기스 칸과 세계사 4. 칭기스 칸을 둘러싼 편견들 - 칭기스 칸의 부족에게는 타르타르, 타타르, 무갈, 무굴, 모알, 몽골 등 여러 가지 이름이 붙었다. - 탈레반은 미국의 침공이 몽골 침략과 똑같다고 생각하여 복수를 한답시고 아프가니스탄에서 800년 동안 살아온 몽골군 후손인 하자라족 수천 명을 학살했다.

5. 『몽골 비사』와 함께 부활하다 - 당 간부들은 투무르 오치르가 “칭기스 칸의 역할을 이상화하는 경향”을 드러내는 반역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를 공직에서 쫓아내고 외딴 곳으로 추방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끝내는 도끼로 찍어 죽였다.

6. 몽골 초원에서 칭기스 칸을 만나다

- 숲이 우거진 오논 강은 늪지대가 많아 대부분의 유목민이 살아가는 넓은 초원지대와 매우 다른 것이 분명했다. 칭기스 칸이 넓은 평원의 투르크 부족들보다 시베리아 문화-『몽골 비사』는 이곳을 몽골인의 기원으로 이야기한다-에더 가가운 곳에서 유년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적국의 민간인은 몰고 다니는 가축 취급을 했지만 병사들은 사냥감 취급을 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1부 초원의 공포정치 1162~1206

1. 핏덩어리 - 역사는 몽골인이 정복한 수천 개의 도시들 가운데 칭기스 칸이 친히 입성한 도시는 하나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하라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인 호라즘 제국에 속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무슬림 세계 전체에서 ‘고귀한 부하라’로 일컬어지며 정서적으로 아주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 사막, 산, 초원을 가로질러 3500킬로미터에 이르렀다. 통치 집단은 투르크 부족민이었다. 호라즘의 술탄은 몽골의 캐러밴을 약탈하고, 평화적인 교역 협상을 하러 온 몽골 사절단의 얼굴을 망가뜨렸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칭기스 칸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 몽골인에게 유일한 신은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사방을 가득채운 ‘영원한 푸른 하늘’뿐이었다. 신은 죄인이나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돌로 지은 집에 가두어놓을 수도 없었으며, 부하라 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신의 말을 붙잡아 책 속에 집어넣을 수도 없었다. 칭기스 칸은 고향 산악지대의 광활한 공간에서 자신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신의 목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었으며, 신의 말을 따름으로써 큰 도시와 거대한 나라들을 정복하게 되었다. - 칭기스 칸이 입성했던 1220년 그날부터 1920년에 소비에트 군대가 진입할 때까지 꼭 700년 동안 칭기스 칸의 후손들은 칸과 아미르로서 부하라를 통치했는데, 이 통치자 가문은 역사상 가장 긴 가족 왕조로 손꼽힌다.

- 핏덩어리는 움켜쥐고 태어나다 - 몽골 초원의 아들, 테무진 : 몽골족과 가장 가까운 친족은 동쪽의 타타르족과 거란족, 그리고 더 동쪽으로 만주족, 서쪽으로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족이었다. 그래서인지 몽골족은 가끔 ‘푸른 투르크족’이나 ‘검은 타타르족’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친족 관계에 바탕을 둔 이 무리는 칸이라고 부르는 우두머리가 이끌었다. 몽골족 자신은 투르크나 타타르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주장한다. 훈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훈은 몽골어로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며, 몽골족은 훈족 조상을 태양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훈누라고 불렀다. 테물이라는 동사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어근은 물불 안 가리고 달려가다. 영감을 받다. 창조적인 생각을 하다. 심지어 분방하게 공상을 하다 등의 뜻을 가진 여러 몽골 단어에 나타난다.

- 초원 : 사냥, 목축, 그리고 전쟁의 무대 - 테무진의 어린 시절 : 제사 음식을 나누어주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고, 나아가서 그녀가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통보였다.테무진은 그의 가족과 함께 비극을 견디어내면서 초원지대의 엄격한 카스트 구조에 도전하고, 자신의 운명을 주도하고, 가족이나 부족보다는 신임하는 동료와 동맹을 맺어 이것을 일차적인 지지기반으로 삼겠다는 강한 결의를 굳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형을 죽이다 - 험난한 길을 선택하다

2. 세 개의 강

- 검은 뼈의 운명 - 새로운 권력 구조의 형성 : 7은 몽골족에게 불운의 숫자였다. 테무진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전투에서는 졌지만 자무카의 잔인함을 두려워하게 된 몽골 대중의 지지와 동정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테무진의 전사들은 참패했지만 다시 그들의 젊은 칸 뒤에 천천히 모여들게 된다.

- 이웃 부족 원정 - 타이치우드와 한판 승부 - 초원의 오랜 관행을 깨다 : 테무진은 타타르 원정에서 오랫동안 초원 생황을 지배해온 규칙을 다시 완전히 바꾸게 된다. 이런 변화로 인해 그의 부하들 가운데 일부는 그에게 적대하고 다수의 충성심은 더욱 강해졌다. 적대한 소수는 귀족 가문이었다. 충성한 다수는 그가 개혁과 물자 분배를 통해 부를 안겨준 하급 가문이었다. 타타르군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둔 다음에 약탈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하면 전보다 조직적인 방식으로 약탈을 할 수 있었고, 모든 물자를 그가 있는 중앙에서 통제하면서 그가 보기에 적당한 방식으로 분배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혁신은 습격 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은 몫을 주기로 한 것이다. 테무진은 이 정책을 통해 부족 내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지원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충성심도 더 끌어냈다. 이제 병사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테무진이 남은 가족을 돌보아준다고 믿었다.

-테무진의 급진적 개혁 때문에 귀족 다수가 분노했으며, 일부는 그를 버리고 자무카에게 합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타타르는 몽골족보다 널리 알려진 부족이었다. 이 싸움 뒤에 몽골족은 타타르족을 아주 많이 받아들였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몽골 제국에서 고위직에 오르고 이름을 떨쳤다. 이런 연유로 타타르라는 이름은 몽골과 동의어가 되었을 분 아니라 몽골보다 더 유명해진 경우도 많아 수백 년 동안 역사적 혼란을 일으켰다. 테무진은 전사들을 아르반이라고 불렀다. 100명이 모여 자군이라는 중대를 이루었고, 1000명이 밍간이라고 부르는 연대를 이루었다. 밍간이 열 모이면 1만 명이 투멘이라고 부르는 사단을 이루었다. 어린 시절 낮은 출신 성분 때문에 여러 차례 벽에 부딪혔던 테무진이 검은 뼈와 흰 뼈 사이의 구별을 폐지해버린 것이다. 이제 그의 무리는 모두 하나의 통일된 민족 구성원이 되었다. 테무진이 클레이스테네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 사람들의 전통적인 경쟁과 분쟁을 차단하기 위해 부족제를 폐지하고 모든 사람을 십진법에 기초한 10개 단위로 재배정했다. 아테네는 지중해 동해안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적, 상업적, 예술적, 지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3. 칸들의 전쟁 - “칭기스 칸이 내 딸을 신부로 삼으려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는 자기가 나의 봉신이자 노예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가서 그에게 내 딸을 그의 아내로 주느니 차라리 불에 던져버리겠다고 전하라.” - 테무진과 자무카의 대결 : 부하들은 흙탕물을 함게 마시며 끝까지 그에게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발주나 맹약’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건은 테무진 칸의 군사적 운의 최저점으로서, 또 몽골 제국의 정체성과 형식이 규정된 사건으로서 신화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테무진 칸과 함께 있던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이었다.

- 몽골을 통일하다 : “그가 나를 불로 보내건 물로 보내건 나는 간다. 그를 위해 간다.” 이것은 새로운 몽골군의 이상을 보여주는 말이 아니라 현실 그대로를 반영하는 말이었으며, 이 힘에 나이만은 곧 무너지고 말았다. 자무카는 살아서 테무진을 실망시켰지만, 죽음으로 더 나은 친구가 되겠다고 말한다. “나를 죽여 그 죽은 뼈를 높은 곳에 놓아라. 그러면 내가 영원히 그대 씨의 씨를 보호할 것이며, 그들에게 복이 되겠다.” 전설에 따르면 테무진은 안다의 맹세를 할 때 자무카에게 주었던 황금 허리띠를 채워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새로운 제국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부족 이름에서 파생된 새로운 공식 명칭을 선택했다. 예케 몽골 울루스, 즉 큰 몽골나라 였다.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몽골어에서 친은 강하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 없다는 의미였으며, 늑대를 가리키는 몽골어 치노와 가까웠다. 실제로 몽골족은 자신들이 늑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 칭기스 칸의 대법령 : 첫 번째 새로운 법은 여자의 납치를 금지하는 내용이었다고 전해진다.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도 금지했다. 부인이 낳았건 첩이 낳았건 모든 아이는 적자라고 선언했다. 여자를 돈으로 사서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다. 간통도 금지했다. 게르의 일은 게르 내에서 결정되어야 하며 초원의 일은 초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칭기스 칸의 언명에 따라, 간통은 서로 분리된 가구의 결혼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만 적용되었다. 잃어버린 물건, 돈, 가축을 발견하고서도 그것을 해당 감독에게 갖다 주지 않는 사람은 도둑으로 간주했으며, 도둑질에 대한 벌은 사형이었다. 칭기스 칸은 모든 사람에게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적 자유를 선언했는데, 이런 종류의 법으로는 세계 최초일 것이다. 칸은 반드시 쿠릴타이에서 선출해야 했다. 자신의 가족에 대한 사형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쿠릴타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정해놓았다. 칭기스 칸은 주권자를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사실은 선포했다. 통치자를 법에 복속시킨 것은 그때까지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 천호와 만호 단위의 모든 지휘관에게 아들과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를 보내게 하여 그 자신의 천호를 별도로 구성했다.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대신 훨씬 더 효과적인 전략을 채택했다. 능력이나 충성심이 떨어지는 관리가 나타날 경우에 그를 대체할 인력 집단으로 활용했다. 이런 식의 대체 가능성이 아마 친척이 죽을 가능성보다 더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 몽골 군대는 부대 전체에 계급이 있었다. 칭기스 칸의 투멘의 가장 낮은 부대원이라도 다른 투멘의 가장 높은 부대원보다 지위가 높았다.

- 제국으로 가는 길목에 서다 : 텝 텡그리는 칭기스 칸이 초원 부족들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만난 마지막 경쟁자였다. 칭기스 칸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파괴했다. 그는 자신의 친척들의 권력을 박탈했으며, 귀족 가문과 모든 경쟁하는 칸을 말살했고, 예전의 부족들을 없앴으며, 사람들을 재배치했고, 마지막으로 초원에서 가장 강력한 샤먼을 죽이는 것을 허락했다. 칭기스 칸의 부하들도 교훈을 얻었다. 그들은 칭기스 칸이 군사적인 힘만이 아니라 영적인 힘에서도 가장 높은 샤먼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족들의 정치적 언어로 볼 때, 이민족 칸에게 친족 관계를 허락한다는 것은 그 민족 전체와 가족적 유대를 맺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친족이라는 용어는 일종의 시민권을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몽골 제국 내의 모든 비몽골 왕국들은 ‘카리’라고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검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를 뜻하는 말이었다. 위구르와 고려 같은 특별한 민족이나 투르크족 가운데 특별한 무리는 몽골족과 인척이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몽골인이 ‘검은 친족’ 이외의 사람들과 혼인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 2부 몽골 세계대전 1211~1261

1. 황금 칸에게 침을 뱉다 - 칭기스 칸이 모든 부족을 이기고 통일을 해내는 전례없는 업적을 이룩해내자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약탈은 끝이 났고 더불어 물자의 흐름도 막히게 되었다. 칭기스 칸은 봉신으로서 물자를 받거나 아니면 그들을 공격하여 물자를 빼앗아야 했다. 부르칸 칼둔 성산에서 ‘영원한 푸른 하늘’에게 되풀이하여 경의를 표할 때 했던 동작이 바로 고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50세에 가까워진 칭기스 칸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도 고두를 할 생각이 없었다.

- 몽골 민족은 모자를 벗고 굶으며 ‘영원한 푸른 하늘’의 결정과 칭기스 칸의 명령을 사흘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들은 밤낮없이 ‘영원한 푸른 하늘’을 향해 고래로부터 전해오는 몽골의 기도 후렴구 “후레,후레,후레”를 중얼거렸다. - 이웃 나라들을 겨냥하다

- 몽골식 전쟁 기술 : 몽골군의 이동과 대형은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첫째, 몽골군은 모두 기병으로만 이루어졌다. 두 번째 독특한 특징은 병사들과 함께 다니는 예비의 많은 말들 외에는 따로 병참부나 거추장스러운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가축의 젖을 짜고, 가축을 도살하여 식량을 만들고, 사냥과 약탈을 통해 배를 채웠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 전사들이 불을 피우거나 음식을 조리하느라 멈추는 일 없이 열흘 동안 여행을 할 수 있으며, 말의 피를 마시고, 각 사람이 5킬로그램의 마른 젖 덩어리를 가지고 다니다가 매일 그 가운데 500그램 정도를 물이 담긴 가죽 용기에 풀어 식사를 해결한다고 전했다. 전사는 가늘게 자른 육포와 마른 응유를 가지고 다니다 말을 탄 채로 먹었다. 몽골군은 진지를 자주 옮겼지만 각 부대의 중앙 야영지는 늘 정확하게 똑같은 패턴으로 배치하여 새로 도착하는 병사들이라도 어디에서 보고를 하고 어디에서 필요한 것을 찾을지 알 수 있었다. 몽골군은 천호마다 자체의 의무대를 거느렸다.

- 초원 전사들의 도시 공성전 : 칭기스 칸은 전쟁을 할 때 무엇보다도 몽골군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을 중요한 전략적 목적으로 삼았다. 몽골 전사는 전장의 안팎에서 죽음, 부상, 패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심지어 죽은 동지나 다른 전사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중대한 금기였다. 몽골군은 전투에서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명예를 찾았다. 교묘한 기만책으로 이기든 잔인한 책략으로 이기든 이긴 것은 이긴 것이었으며, 전사들의 용맹에는 아무런 오점이 남지 않았다. 몽골군은 풀을 먹는 사람들에게 소나 염소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을 사용했다. 농민 무리는 가축 떼일 뿐이었다. 병사들은 밖에 나가 농민을 모으거나 쫓을 때 야크를 몰 때와 똑같은 용어, 정확성, 감정을 보여주었다. 도망치는 농민 때문에 간선도로가 막혀 주르첸 보급물자의 운반이 어려움을 겪었다. 도시로 쏟아져들어가 비축되어 있던 식량을 바닥내고 가는 곳마다 혼란을 일으켰다. 제베는 철수하는 척하면서, 마치 크게 겁을 먹고 서둘러 달아나는 것처럼 장비와 물자를 많이 남겨두고 가라고 명령했다. 이른바 ‘개싸움’ 전술이었다. 공격을 당하던 도시의 관리들은 병사들을 내보내 전리품을 거두어들이게 했다. 그러자 물자를 운송하는 수레와 짐승 때문에 곧 성문이 막혀버렸다. 몽골군은 적군이 성 밖의 들판으로 나오고 도시의 성문도 열려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을 덮치고 이어 열린 문을 통해 도시마저 장악해버렸다. 여름의 무더위는 몽골군과 털이 많은 말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 주르첸을 손에 넣다 - 비단길의 연결고리를 장악하다 - 새로운 적의 출현 : 캐러밴이 호라즘의 북서쪽 오트라르-현재의 카자흐스탄 남부에 있다-에 들어가자 오만하고 욕심 많은 총독이 물자를 몰수하고 상인과 짐승 몰이꾼들을 죽였다. 페르시아의 연대기 기록자 주베이니가 설명하듯이, 총독의 폭력은 캐러밴을 쓸어버렸을 뿐 아니라 결국 “전 세계를 초토화시켰다.” 칭기스 칸은 이 이야기를 듣자 술탄에게 사절을 보내 폭력을 휘두른 지방관리를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술탄은 자신이 아는 가장 극적이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칸을 자극했다.

2. 술탄과 칸의 대결

- 불패의 신화 : 그는 공포가 자신의 전사들의 행동이 아니라 서기나 학자의 펜을 통해 가장 빠르게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몽골군의 선전용 전단이나 다름없는 이 편지들은 늘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를 부풀려, 소식이 닿는 곳마다 공포를 실어 날랐다. 원정 불과 일 년 후인 1221년 8월 몽골 관리들은 고려 신민에게 그곳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종이 10만 장을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무용을 기리는 찬사에도 관심이 없었다. 외려 그는 사람들이 자신과 몽골인에 대해여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악의에 찬 이야기들을 마음대로 유포하도록 허용했다.

- 후계자 선출 회의 - 분열의 징조를 드러내다 : “좋은 옷을 입고, 빠른 말을 타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리면 자신의 전망이나 목표를 잊기 쉽다.” 그런 사람은 “노예나 다름없으며, 반드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 칭기스 칸의 죽음 : 아버지와 아들은 다시 만나지 않았다. 주치는 몽골로 돌아가는 대신 새로 정복한 영토에 그대로 머물럿다. 그는 곧 그곳에서 죽는데, 그의 죽음 역시 출생만큼이나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정치적 평화를 고려하여 주치를 죽였을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 칭기스 칸이 말하는 ‘칭기스 칸’ : 칭기스 칸은 자신의 승리가 ‘영원한 푸른 하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다”고 말한다.

3. 유럽 원정대

- 우구데이가 짧은 치세에 저지른 몇 가시 실수 가운데 첫 번째가 이 정책을 버리고 권력 중심과 제국의 행정부를 고정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 몽골 조정을 지배했던 세력은 기독교도였던 것 같다. 그가 가장 아끼는 손자 시레문(솔로몬의 몽골식 이름)이 기독교인이었다. 예수라는 말은 몽골의 신성한 숫자인 9를 가리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며, 칭기스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의 이름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

- 너무 뚱뚱해서 말을 타지 못하여 쇠로 만든 전차를 타고 다녔다고도 한다. 이런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리한 정신은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수베데이는 여러 번 승리를 거둔 무슬림이나 중국 군대와 다시 싸우기 보다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하여 서쪽으로, 유럽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함으로써 칭기스 칸의 정책과 결별하는 쪽을 택했다. 유럽은 그가 그 무렵 아주 우연하게 발견한 미지의 문명이었다.

- 1000년 만의 침입 - 유럽과 송나라를 동시에 겨누다 : 수베데이의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사람들은 주치 집안이었다. 주치가 죽은 뒤에는 아들 바투가 그의 혈통의 칸 자리를 계승했다. 바투 칸은 주치의 둘째아들로서 칭기스 칸의 손자들 가운데 가장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유럽 원정에서도 성공을 거두면 부와 명예가 크게 늘어 대칸의 제1후보 자리를 확실하게 굳힐 수 있었다. 바투가 유럽 원정에 찬성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구데이 칸은 반대를 했다. 송나라로 가는 길목에는 막내 톨루이의 땅밖에 없었다. 우구데이는 즉시 자신의 아들 구육과 톨루이의 미망인 소르칵타니-케레이트의 오 칸의 조카딸이었다-의 결혼을 추진. 소르칵타니는 어린 네 아들을 고루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로 결혼을 거부했다. 이것은 결국 몽골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된다. 우구데이에게는 송나라 원정이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부를 가져오는 동시에 죽은 동생의 미망인으로부터 땅과 군사를 뺏어낸다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호기였다. 가족의 의견이 갈리자 그들은 전례 없는 주목할 만한 결론에 이르렀다. 송나라와 유럽을 동시에 공격하자는 뜻이었다. 몽골 제국의 역사에서 최악의 결정으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 송나라 원정 실패의 원인은 집중력의 분산과 수베데이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어정쩡한 공격 때문에 송나라는 비틀거리면서도 40년을 더 버티고 나서야 몽골군에게 항복했다. 반면 유럽 원정은 가족의 여러 왕자들 사이의 오랜 다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 유럽 원정의 서막 : 군대를 나누어 둘 이상의 전선에서 동시에 적을 공격하는 전략이었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모든 공후는 자기 도시에 머물며 자신의 영토만 지킬 뿐 다른 공후를 도우러 나서지 않았다.

- 사탄의 종족 - 러시아를 정복하다 : 키예프의 함락으로 몽골의 유럽 동부 정복은 완결되었다.

- 게르만 전사를 격파하다 : 키예프가 무너지면서 갑자기 대규모 난민과 더불어 수많은 이야기가 동유럽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번개의 힘으로 기독교도의 영토에 진입하여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고 학살을 자행하고 모든 사람에게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에 나온 “번개”같다는 묘사는 훗날 독일식으로 블리츠크리크라는 이름이 붙게 된 전투 방식에 대한 최초의 언급일지도 모른다. 기독교 사제들은 성자의 유골과 유물을 진열하여 다가오는 몽골군을 저지하려 했다. 몽골군 가운데 다수가 기독교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몽골인이 유해를 드러내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고 두려워하는지는 몰랐다. 몽골군은 격분했다. 유럽 기사단은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거의 10만 명이 전사한 충격에서 결국 헤어나오지 못했다. 기독교 성직자들은 성경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타타르라는 말은 그들의 귀에 다시스와 비슷하게 들렸는데 성경에서 그 왕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릴”것이라고 나와 있었다. 「시편」에서는 또 이렇게 말한다.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칠 것이다.” 성직자들은 공세를 바친다는 말을 보고 다시스의 왕을 아기 그리스도에게 예물을 가져온 도방의 세 왕들(동방박사)과 연결시켰다.

-몽골군은 헝가리에서 남족으로 방향을 틀어 발칸 제국을 향해 내려갔기 때문에 쾰른과는 멀어졌다. 그것을 본 성직자들은 이제 침략군이 바빌론 유수 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유대인 무리라고 생각했다. 기독교 연대기 기록자들은 1241년이라는 해가 유대교 달력의 5000년과 일치한다고 하면서, 많은 유대인이 이때 메시아가 오거나 다윗 왕이 다시 나타난다는 기대를 품고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극도의 사악함” 때문에 죄 없는 자신들이 몽골인의 진노의 피해를 입고 있다고 비난했다. 국내의 적이라고 상상하는 유대인은 제압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은 몽골인이 원정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방법으로 유대인을 벌주려 했다. 그들은 유대인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 우구데이의 죽음 : 칭기스 칸이 죽고 나서 불과 14년이 지난 시점에 아들 넷이 모두 죽은 것이다. 손자들은 다음 대칸이 되기 위한 경쟁을 계속하기 위해 고향으로 달려갔다. 가문들 간의 투쟁은 이후 10년간 계속된다. 이 10년 동안은 세계가 몽골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몽골 장교들은 유럽 침공의 물질적 성과에 실망하여 원정에 약간이라도 이익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마음에 크림 반도에 자리잡은 이탈리아 상인들과 거래를 했다. 몽골군은 물자를 가져가는 대신 유럽에서 잡은 포로를 다수 넘겨주었다. 이탈리아인은 노예 대부분을 이집트 술탄에게 팔았고, 술탄은 그들을 모아 노예부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몽골군과 싸워본 경험이 풍부했으며, 심지어 노예로 팔려오기 전에 몽골어를 배운 사람도 많았다. 몽골군은 현대 이스라엘의 갈릴리 해 부근에서 이들을 만나 싸우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처음 러시아 평원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와 매우 달랐다.

4. 왕비들의 싸움 - 지금도 남아 있는 1246년 11월의 편지를 보면, 구육이 인노켄티우스 4세를 향해 분명한 질문을 던진 것을 알 수 있다. 신이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에게 자비를 보일지 당신이 어떻게 아는가? 구육은 신이 교황이 아니라 몽골인에게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세계를 다스릴 힘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유럽과 극동 사이의 첫 번째 직접 적인 외교적 접촉은 결국 각자의 신학을 무기로 공방을 주고받다가 종교적 모욕으로 끝나고 말았다.

- 몽골은 기독교 유럽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방법을 한 세대 더 모색해보지만, 결국 그런 희망을 모두 버리게 된다. 그와 더불어 기독교 자체를 완전히 버리고 불교와 이슬람으로 방향을 튼다. - 톨루이 가문, 제국을 손에 넣다 : 칭기스 칸 자신은 비교적 약하고, 술을 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인 아들들만 낳았지만, 소르칵타니가 낳아서 훈련시킨 네 아들은 모두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칸이었다. 또 뭉케에 이어 아릭 부케, 쿠빌라이가 대칸 자리에 오르며, 나머지 아들 훌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이 되어 그곳에서 독자적인 왕조를 창건한다. 그녀의 아들들은 페르시아, 바그다드, 시랑, 터키를 모두 정복하여 제국의 규모를 최대로 키운다. 그들은 남족으로는 송나라를 정복하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까지 밀고 들어간다. 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던 아사신 일파를 없애고 무슬림의 칼리파를 처형한다.

- 소르칵타니의 최후 : 뭉케 칸은 재판을 확대하여 대숙청을 진행했다. 뭉케는 이제 세상에 없는 두 숙부 차가타이와 우구데이의 가족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완전히 뿌리 뽑으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소르칵타니는 죽음과 더불어 1241년에 시작되 s여자들의 통치기 10년도 끝이 났다. 외부의 재능을 통치세력 내부로 끌어들였으며, 수도원과 학교, 책의 인쇄, 사상과 지식의 교류를 지원하여 제국의 새로운 기초를 닦았다. 남자들이 몽공 세계전쟁을 속개한 뒤 몽골 제국 내외의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결국 이 여자들의 손에서 시작된 새로운 제도들이었다.

- 초원 위의 종교 논쟁 : 뭉케는 1252년 아버지 톨루이에게 대칸 칭호를 추서했다. 칭기스 칸의 막내로서 옷치긴, 즉 ‘화로의 왕자’인 톨루이가 아버지의 고향만이 아니라 칭호까지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법적인 주장에 근거하여 벌인 일이었다. 몽골인이 잔치를 마무리짓는 방식으로 끝을 맺었다. 모두 너무 취해 토론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카라코룸에서 여러 성직자들이 토론을 벌이는 동안 그들과 같은 종교를 가진 형제들은 몽골 제국 바깥에서 서로를 베거나 산 채로 불태우고 있었다. “신이 손에 여러 손가락을 주셨듯이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소. 신은 당신들에게 경전을 주셨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그 경전을 따르지 않고 있소.” 이어 신이 몽골인에게는 경전 대신 거룩한 사람, 즉 샤먼을 주셧다고 말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서로 “평화롭게 살고 있소.” 뭉케 칸은 프랑스의 루이 9세에게도 서한을 보냈다. 하늘에는 ‘영생의 신’ 한 분이 계시고, 땅의 주인은 ‘신의 아들’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을 다스리는 그의 후손들뿐이라는 이야기였다.

- 제국의 기틀을 다지다 : 뭉케는 만일 자신이 구육의 경제적 의무를 떠맡지 않으면 상인이나 다른 외국인이 몽골과 사업을 계속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주베이니는 이렇게 썼다. “역사의 어느 책에서든……한 왕이 다른 왕의 빚을 갚았다는 이야기를 읽거나 들어본 적이 있는가?” 상업의 세계에서조차 아직 지폐 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뭉케는 화폐체계의 신뢰성과 무결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1253년에 지폐의 발행을 통제하고, 수케란 500조각으로 나눈 은괴로 여기에 각 지방 화폐들이 연동되어 있었다. 수케를 통해 다양한 화폐를 표준화하자 상인이나 정부 행정관들 모두 회계나 환전이 편리해졌다.

- 아랍 침공을 재개하다 - 천일야화의 도시를 점령하다

- 쿠빌라이의 등극 : 뭉케 칸의 사망 원인은 연대기마다 다르다. 중국인은 콜레라로 죽었다 하고, 페르시아인은 이질로 죽었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죽었다 한다. 어쨌든 뭉케 칸이 죽자 전진은 중단되고 제국은 그 상태에서 응결되었다. 이전의 세 대칸이 죽었을 때에는 몽골 지도자들이 서둘러 고향으로 달려가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각 파벌이 이미 소유한 땅을 보호하러 나섰다.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두 형제는 각각 자신의 영토에서 별도의 쿠릴타이를 열었다. 아릭 부케는 세계주의자인 쿠빌라이와는 달리 초원지대 사람으로 살았다. 자신의 말에서 멀리 떠나가본 적이 없는 골수 몽골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화로의 왕자였다. 나아가서 아릭 부케는 황금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이 각자의 땅을 다스리는 데 큰 위협이 도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뭉케 칸의 미망인과 아들들은 그를 적법한 최선의 상속자로 밀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인 대신들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영토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1260년 대칸에 덧붙여 황제 자리에도 올라, “중앙의 통치”라는 뜻으로 연호를 중통이라고 정했다. 쿠빌라이의 선출이 몽골 기준에서 전통에 어긋났지만, 중국 군대도 휘어잡고 있었다. 식량 공급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추종자들에게 식량을 제공할 수 없었던 아릭 부케는 상도로 갔다가 1264년에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아릭 부케의 답은 그가 패배했을망정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때는 우리가 옳았고, 지금은 형이 옳소.” 쿠빌라이는 몽골 영토에서 다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쿠빌라이는 쿠릴타이를 열 수 있는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자 동생을 용서했다. 아릭 부케에 대한 공적인 처벌은 왕궁 출입을 금하는 것으로 끝냈다. 아릭 부케가 갑자기 병이 들어 죽어버렸다. 독살이 거의 틀림없었다. 몽골의 왕가 일부와 그 추종자들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상징적인 위치 정도만 인정하였다.

-몽골 제국은 이제 별도의 정부를 갖춘 네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를 다스렸지만, 킵착 칸국(황금 오르도에 세운 나라)은 동유럽의 슬라브 국가들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 훌레구와 그의 후손이 다스리는 땅은 ‘봉신의 제국’을 뜻하는 일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가장 전통적인 몽골인은 중앙의 초원지대를 차지했다. 이곳은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은 한동안 우구데이와 투레게네의 손자 카이두 밑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부하라에서 통치하면서 쿠빌라이 칸의 권력과 대등하게 맞섰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 분할되었다.

❍ 3부 세계 인식의 대전환 1262~1962

1. 쿠비라이 칸의 새로운 몽골 제국

- 쿠빌라이는 할아버지가 야만적인 힘으로 이루지 못했던 과업, 즉 지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업을 대중정치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 - 1264년에는 연호를 ‘완전한 시작’을 듯하는 지원으로 바꾸었으며, 1271년에는 ‘위대한 기원’ 또는 ‘위대한 시작’ 정도의 의미를 가진 대원으로 정했다. 쿠빌라이는 강한 군대와 훌륭한 선전이 중요하다고 인정했지만, 그의 전략의 세 번째 요소를 꼽으라면 좋은 행정과 정책이었다.

- 중국인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한 몽골 관습은 뭐니뭐니해도 몽골 여자들이 중요한 행사에서까지 자유롭게 남자들과 섞이며 어울린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 온건한 법으로 민심을 수습하다 : 몽골이 고문의 사용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시기에 유럽의 교회와 국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범죄에 증거를 불문하고 고문을 시행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합의를 전제로 한 회의체와 보수를 지급하는 공무원 제도를 만들려는 노력은 중국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몽골 시대와 함께 막을 내렸다.

- 쿠빌라이의 실용주의 노선 - 새로운 사회제도의 건설 : 공립학교가 2만 166개 세워졌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통교육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때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몽골의 업적은 놀랍기만 하다. 서구에서는 100년이 더 지난 뒤에야 작가들이 구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대중문화의 전성기 : 중국의 연극과 몽골의 음악 후원이 결합되면서 훗날 경극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몽골인은 자신과 서민의 오락을 위해 대중문화를 후원하면서도 유혈을 혐오하는 문화는 고수했다.

2. 팍스 몽골리카

- 랍반 바르 사우마는 종교의 자유가 강조되던 몽골 제국에서 왔기 때문에 유럽에서 단 하나의 종교만 용인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에도 세속적인 권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을 알고 더 놀랐다. - 랍반 바르 사우마의 여행, 특히 잉글랜드 왕에게 영성체를 주고 교황에게서 직접 영성체를 받은 사건은 처음 유럽을 침공한 이후 50년 동안 몽골이 세상을 얼마나 바꾸어놓았는지 잘 보여준다. 이제 통신, 상업, 기술, 정치가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대륙간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

- 14세기를 ‘팍스 몽골리카’ 또는 ‘팍스 타타리카’라고 명명했다.

- 주식회사 몽골의 국제 무역 활동 : 훌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 통치자로서 중국에 비단 노동자 2만 5000가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페르시아와 이라크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정치적 분열 때문에 오히려 과거의 분배 제도를 보존할 필요가 강해졌다. 한 칸이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몫을 공급하지 않으면 상대편에서도 자신의 영토에 있는 그 칸의 몫을 보내지 않았다. 이런 분배 물자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몽골이 전쟁할 때 쓰는 길은 점차 상업적 간선으로 바뀌어갔다.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다. 유교 학자들을 아홉 번째 지위로 낮추었다.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하나 낮은 등급이었다.

- 각자의 관습대로 살아라 : 역사상 대부분의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했다. 로마는 라틴어, 신, 와인, 올리브 기름, 밀농사를 강요했다. 고고학자들은 어떤 장소에 남아 있는 물리적 흔적을 연구하기만 하면 힌두, 아스텍, 말리, 잉카, 아랍 제국의 성장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그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전통적인 제국은 한 도시에 부를 축적했다. 모든 길은 수도로 통했고, 늘 가장 좋은 것은 수도에 이르렀다. 한 도시가 제국 전체를 지배하다 보니 로마나 바빌론 같은 이름은 제국 자체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에서는 주요한 도시 하나가 전체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

- 동서양 지식의 융합 (농업과 과학) - 역법, 수학, 역사, 인쇄술의 발달 : 아랍과 인도의 수학으로부터 유용한 혁신적 방법을 여럿 채택했다. 특히 호라즘 제국의 여러 도시는 수학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연산을 뜻하는 알고리듬이라는 말은 알 호라즘에서 나왔다.

- 몽골 세계체제의 형성과 중세 유럽 :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 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종이와 인쇄술, 화약과 하기, 나침반을 비롯한 해양 장비의 광범한 영향을 받아 유럽인은 르네상스를 경험했고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났다.

- 몽골풍의 그리스도 삽화 - 몽골은 위대하다

3. 환상의 제국

- 중국은 이 병 때문에 인구가 2분의 1 내지 3분의 1로 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13세기 초에 이 나라에는 1억 2300만 명 정도가 살았는데, 14세기 말에는 인구가 650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중국은 몽골 세계체제에서 제조업의 중심역할을 했다. - 페스트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페스트는 아이슬란드 정착민의 60퍼센트를 죽인 것으로 보이며, 그린란드에서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바이킹 거주지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데 겨정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 유럽의 수도원 제도, 나아가서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는 이 비극의 충격으로부터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인구밀도가 높은 마을도 비슷한 위험에 처했다.

- 외교사절단과 편지도 오가지 않았다. 몽골 운송체계의 가동이 중단되자 가톨릭 교회와 중국 선교단의 연락이 끊겼다. 유럽에서 기독교도는 다시 유대인을 공격했다. 유대인은 교역이나 동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348년 11월부터 1349년 9월가지 쾰른에서 오스트리아 사이의 모든 유대인이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 황금 가족의 위기 : 페스트는 유럽을 고립시켰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사는 몽골인을 주국이나 몽골과 차단했다. 각 지파 사이에 연결이 끊어지자 서로 맞물리는 소유제도도 붕괴했다. 몽골인이 외국인 정복자이면서도 때로는 자기들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신민을 큰 탈 없이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약해진 뒤에도 교역 물자가 계속 대규모로 흘러다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군사적 힘과 상업적 이득이라는 두 가지 이점이 사라지자, 러시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의 몽골인은 자신의 신민과 결혼을 하고 의식적으로 그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따름으로써 권력과 정통성의 새로운 양식으로 찾아나갔다. 이곳의 몽골 당국은 자신의 가족들로부터 샤머니즘, 불교, 기독교의 잔재를 몰아내고 이슬람 신앙을 강화했다. 몽골 왕가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자신이 통치하는 주민 내의 특정한 종교분파를 따르게 되자, 왕실 지파들 사이의 불화는 더 심해졌다. 무슬림이 된 중동의 몽골인은 쿠빌라이 칸의 예를 따랐다고 볼 수도 있다. 쿠빌라이도 중국에서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권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 쿠빌라이 칸의 후계자들은 그의 교활한 천재성을 따르기는 커녕 이해하지도 못했다. 몽골 당국은 더 중국화하기는 커녕 탄압을 강화하여 고립을 자초했다. 몽골 당국은 중국인으로부터 모든 무기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철로 된 농기구까지 빼앗고, 칼의 사용도 제한했다. 그들은 중국인이 말을 타는 것을 금했고, 비밀 정보가 전달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중국의 잡극이나 전통적인 만담 공연도 금지했고, 더불어 다른 공적, 사적 집회도 금지했다. 이런 식으로 극단적인 탄압을 하자 중국 신민은 불만이 늘어났다. 몽골인은 가능한 한 중국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한 종교를 공정하게 대접한다는 전통적 정책을 버리고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를 우대하여 특혜를 주었다. 중국의 몽골 칸들은 페스트의 확산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고 신민들로부터도 점차 고립되자 티베트 불교의 영적 세계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몽골 행정부가 약해진다는 조짐만 보여도 지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가치가 폭락하는 대신 구리와 은의 가치는 상승했다.

- 무장해제된 몽골 제국 : 14세기 말에 중앙아시아의 몽골 소유지는 티무르의 손으로 넘어갔다. 티무르가 공개적인 고문을 자행하고 정복한 도시 바깥에 사람 머리로 피라미드를 쌓자, 사람들은 그가 몽골 민족의 전통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해버렸다. 티무르의 만행의 책임을 칭기스 칸에게 묻는 시대착오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티무르의 후손은 역사에서 인도 무굴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519us 무굴 왕조를 창건한 바부르는 칭기스 칸의 둘째아들 차가타이의 13대손이다. 무굴은 인도를 세계 최대의 제조와 교역 국가로 만들었으며, 무슬림과 힌두 전통과는 반대로 여성의 지위를 높였다.

- 제국의 잔상 : 칸이 중국을 통치하고 나서도 100년 이상이 지난 뒤인 1492년 유럽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자신이 바다를 통해 대칸의 몽골 조정과 다시 접촉하여 허물어진 교역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설득했다. - 유럽 ; 악의 화신 칭기스 칸 :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아시아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종종 몽골인이 놓여 있었다. 몽테스키외는 논문 「법의 정신」에서 먼저 입을 열어 오만한 태도로 아시아인을 경멸하면서, 혐오스러운 특질들 가운데 많은 것이 몽골인에게서 유래했다고 비난했다.

- 범몽골주의의 유행 : 네루는 딸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럽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어리석다. 그러나 아시아의 위대함을 잊는 태도 또한 어리석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몽골 전략을 그들 나름으로 해석하여 따라가기 시작했다. 소련은 1223년 수베데이가 칼카 강에서 러시아를 물리칠 때 사용한 전술을 대규모로 적용하여 독일군을 러시아로 깊이 끌어들였다. 결국 독일군은 러시아의 넓은 지역으로 대책 없이 퍼져나가게 되었고, 소련군은 몽골군처럼 반격을 하여 독일군을 각개격파해나갔다.

- 마지막 칸의 최후 : 1944년 부하라의 전 아미르 이자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최후의 통치자였던 사이드 알림 칸이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숨을 거두었다. 주치와 킵착 칸국의 후손을 자처해온 아미르는 가족의 다른 지파의 후손보다는 오래 버텼다. 1857년 영국군은 인도의 마지막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퇴위시키고 이듬해에 미얀마로 보내버렸다. 대신 빅토리아 여왕이 1877년 인도의 여제가 되었다. 망기트 왕조의 알림 칸이 1910년 부하라의 아미르로서 권좌에 올랐다. 쿠릴타이라는 이름으로 열리기는 했지만 사실은 부하라 공산당 대표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그 마지막 후손의 폐위가 결정되었다.

- 사라진 영기 : 영국이 19세기 인도의 마지막 무굴 황제의 아들과 손자들을 처형했듯이, 소련은 20세기 몽골에 남아 있던 칭기스 칸의 후손을 숙청했다. 칭기스 칸이 태어나고 나서 800년이 지난 1960년대 무렵 공산주의자들이 보관하던 술데, 즉 영기가 사라졌다.

❍ 맺음말 : 영원한 푸른 하늘, 칭기스 칸 - 칭기스 칸의 제국은 세계사 최후의 대형 부족 제국이었다. 그는 유목 부족과 문명세계 사이의 만년 전쟁, 즉 사냥꾼 겸 목자와 농부 사이의 오랜 투쟁의 상속자였다. 이 투쟁은 무함마드를 따르는 베두인족이 도시 이교도의 우상숭배를 분쇄하던 이야기, 로마가 훈족 원정에 나선 이야기, 그리스가 방랑하는 스키타이인과 싸운 이야기, 이집트와 페르시아의 도시 거주자들이 헤브루의 목자들로 이루어진 방랑하는 부족들을 약탈하던 이야기, 궁극적으로 밭을 갈던 카인이 가축을 기르던 동생 아벨을 죽인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그 역사가 유구하다. - 칭기스 칸은 세상을 바꾸었지만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게 했다.

❍ 미주 - 몽골어에서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 칸은 투르크어에서 샤먼을 가리키는 말 칸과 거의 같다. 몽골의 여성 샤먼은 Idu-khan이라고 부르며, 남성 샤먼을 가리키는 말은 씨름꾼이나 운동선수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공지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이병록 2006.12.17 2790
1255 공지 집으로 가는 길 - 이스마엘 베아 2 양경화 2007.12.05 3330
1254 공지 짐 콜린스의 경영전략-2008-07 조동환 2008.02.09 2609
1253 공지 진화 임성빈 2005.10.27 1601
1252 공지 진주귀고리소녀 file 정희정 2007.01.23 1859
1251 공지 진주귀고리 소녀 file 이영명 2003.12.19 1759
1250 공지 진시황제 (하) 채종국 2003.06.25 2185
1249 공지 진시황제 (중) 채종국 2003.06.25 2180
1248 공지 진시황제 (상) -조선일보사- 채종국 2003.06.25 2070
1247 공지 직장인 마인드맵 민충근 2007.03.18 2517
1246 공지 지혜를 찾는 명작 김범일 2003.08.15 1946
1245 공지 지와 사랑 을 읽고 2 전하림 2005.03.13 1706
1244 공지 지식점프 신원식 2006.04.18 1634
1243 공지 지식 e –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2 이명의 2008.01.04 2468
1242 공지 지식 e 윤성중 2007.08.16 2558
1241 공지 지선아 사랑해-이지선 정청미 2003.12.28 1920
1240 공지 지선아 사랑해 김미숙 2003.07.31 2105
1239 공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3 리틀 서윤경 2006.10.26 2189
1238 공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 한비야 2 이상희 2006.01.23 3096
1237 공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2 김미순 2007.02.21 242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72 Next
/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