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공지
2006.11.22 09:00

"놀라운 가설"을 읽고

조회 수 2742 추천 수 0 댓글 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놀라운 가설



프란시스 크릭, 1994



나는 이 책을 10년 전에 읽었다. 예전에 나는 보통 책을 사면 언제 어디서 산는지 책 앞 쪽에 표시해 두는 버릇이 있었다. 가지고 있던 “놀라운 가설” 앞 페이지를 보니 1996년 4월 20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 내용에 관해 별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책이 어려웠거나 재미없었나 보다.



10년만에 다시 읽어 본 책이지만 역시 어렵고 재미없었다. 이것에는 서툰 번역도 한 몫한 것 같다. 도대체 다음 문장은 무슨 뜻이란 말인가?

“시각계는 그동안 학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뚜렷한 피질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이 영역들은 준계층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낮은 쪽의 피질영역 중 한 영역에 속하는 뉴런들은 단편들의 시각적 맥락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주로 시각 장면의 작은 단편의 비교적 간단한 측면에 관여한다. ..... p228"

"만약 뉴런들이 시각계를 구성하는 계층구조의 모든 층에서, 자신이 반응을 나타내는 특징이, 시각적 장면의 정확한 위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그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 될 것이다..... p258"

이러한 글들은 결코 역자들이 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번역했다고 믿을 수 없게 한다.

또한 크릭의 글이 코흐에 비해 산만한 것이 사실이다. 좀 더 논점들을 세분화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의식의 탐구”를 읽은 사람에게는 굳이 “놀라운 가설”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릭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즉 놀라운 가설은 명확했고 그것은 정확히 코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했다. 크릭의 글을 인용하자면

“놀라운 가설이란 바로 ‘여러분’, 당신의 즐거움, 슬픔, 소중한 추억, 포부, 자신의 개성에 대한 인식, 자유의지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신경세포의 거대한 집합 또는 그 신경세포들과 연관된 분자들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즉 환원주의적 접근법과 유물론적 관념이 주류인 현대 과학에서 과연 크릭의 이러한 생각이 “놀라운”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한편 현대과학의 성과에 확신에 찬 크릭은 의식의 이해에 있어 심리학자 및 철학자의 연구 및 접근방법을 저서의 곳곳에서 실랄하게 비판한다.

라마찬드란의 말을 인용하여

“지각은 자연선택이 수백만 년 동안의 시행착오 끝에 획득한 주먹구구, 지름길, 그리고 재빠른 손재주라는 규칙을 사용한다. 이것은 생물학에서 친숙한 전략들이다. 그러나 지각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심리학자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심리학자들은 뇌가 생물학적 기관이라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다.... p99”

“... 의식의 문제가 철학자들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철학자들은 지난 2천년 동안 고상한 우월성을 뽐내는 일 이상으로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p283”



나 자신도 자연과학을 전공했고 자연과학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위와 같은 크릭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진리에 이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연과학일 수도 있고 철학, 경제학, 범사에 대한 진지함 등 일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길도 완전하진 않으며, 어느 길이 첩경인지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추측컨대 훗날 의식의 신경생물학적 이해에 큰 진전이 이루어진다면 분명 그 때에는 의식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그간 인류가 쌓아 놓은 철학적, 심리학적 연구 성과들이 꼭 필요하게 될 것이다.



코흐와 크릭의 저서를 읽으면서 생각해 본 다른 한 가지는 이런 것이다. 즉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시각을 통해 인식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뇌가 불완전한 시각 정보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한 허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가장 흥미롭게 영화화한 작품이 바로 “매트릭스”이다. 분명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실재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뇌가 재구성한 상이라는 데 물론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과 관련하여 자칫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과 실재가 전혀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뇌가 설녕 실재에 대한 일부 정보로부터 실세계를 재구성한다고 할지라도 재구성된 세계는 실제 세계와 매우 유사할 것이다. 즉 최상의 해석일 것이다 - 물론 간혹 오류도 있겠지만 -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의식을 진화시킨 동물은 벌써 멸종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놀라운 가설”에서 그나마 흥미로웠던 몇 안되는 부분 중 하나는 후기에 서술한 자유의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크릭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카오스적이기 때문에 즉 초기조건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의지”가 “자유로운” 것처럼 느끼는 것 뿐이라고 적고 있다. 흥미롭다.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경계선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생명체. 그 생명체가 35억년의 진화를 거쳐 그 형질의 일부로서 카오스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면, 그 특성이 과연 생명체의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유도하게 될까?
  • ?
    강신철 2006.11.22 09:00
    문장의 앞뒤도 안 맞는 오역판을 읽을 때면 감정조절 수련을 쌓는 기분이지요. 요즈음은 제대로 된 번역판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특히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는 한편의 시집을 읽는 느낌이었지요. 원작보다 더 잘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 ?
    강신철 2006.11.22 09:00
    인식, 존재, 실재라는 것들 자체도 인간이 생각해 낸 개념들이고 보면 철학은 말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실재가 무엇이든 자연과 신은 우리에게 실재를 본래 모습대로 보여주지는 않을테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실재의 의미는 인간에게 인식되어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가 되었을 때만 가치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실재의 본래의 모습이 어떠하든 여러 인간들이 인식하여 공통된 행동을 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이 실재를 제대로 인식한 것이라고 여기면 될 것입니다.
  • ?
    강신철 2006.11.22 09:00
    "인간은 몸+마음의 결합체이지 의식이 인간은 아니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자기 존재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진 인간은 참으로 위대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우주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라는 생각도 듭니다.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면서 미래를 예측하려 드는 의식세계의 무모함이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가소롭기 짝이 없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우리의 추억, 기억, 의지 등의 의식세계가 그저 신경세포의 거대한 집합에 불과하다는 가설이 섬뜩하기도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존재하는 나무나 돌덩이를 보면, 궁극적으로 그들이 우리 인간과 뭐 다를 게 있는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36 공지 달콤짭자름한 비스킷 2 이영명 2004.04.04 2000
1435 공지 마시멜로 이야기 3 김춘수 2006.08.22 2813
1434 공지 색채 심리 1 이혜영 2003.07.15 2832
1433 공지 전략적 공부기술이란 책을 읽고 30 th 송근호 2005.06.09 1957
1432 공지 한국의 부자들. 송근호 2003.12.28 2069
1431 공지 "The Present" 1 인윤숙 2006.08.23 2386
1430 인문사회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 강연을 듣고 권남용 2015.04.06 1195
1429 공지 "괭이부리말 아이들" 박종두 2004.02.08 2328
1428 공지 "굿바이 마이 프렌드" 박종두 2004.02.08 2153
1427 공지 "나 노 테 크 놀 로 지"[과 학] 박종두 2004.02.08 1972
» 공지 "놀라운 가설"을 읽고 3 엄준호 2006.11.22 2742
1425 공지 "뇌가 나의 마음을 만든다"를 읽고 4 엄준호 2007.01.22 2874
1424 공지 "뇌와 내부세계"를 읽고 1 엄준호 2007.09.27 3878
1423 공지 "다 이 고 로 야 고 마 워" 박종두 2004.02.08 2158
1422 "당신과 지구와 우주"(크리스토퍼 포터;전대호;까치 2010) 1 고원용 2012.10.28 2673
1421 공지 "마 음 을 열 어 주 는 101 가 지" 박종두 2004.02.08 2054
1420 공지 "몽 실 언 니" 박종두 2004.02.08 1939
1419 공지 "법 정 스 님 의 오 두 막" 박종두 2004.02.08 1855
1418 공지 "부의 미래"를 읽고 1 엄준호 2006.11.12 2957
1417 "블랙홀 전쟁"(레너드 서스킨드;이종필 옮김;사이언스북스, 2011) 4 고원용 2012.07.14 252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72 Next
/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