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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누구나 아는 여행기이지만, 학자들에게는 13세기 후반의 세계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이며, 탐험가들에게는 그들을 자극하는 훌륭한 선례가 되는 책이라고 한다. 1900년대의 유명한 탐험가 스벤 헤딘은 그의 책 <티베트 원정기>에서 ‘위대한 마르코 폴로’, ‘불후의 명성을 남긴’ 여행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은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번역한 완벽 결정본이다. 그는 몽골제국사를 연구하면서 이 책이야말로 소중한 사료라는 것을 깨닫고, 학자로서의 소명을 가지고 결정본을 조사하여 번역했다고 말했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것은 같은 아시아 대륙에 대해 8세기 동양인 혜초의 기록과 500년이 지난 후 서양인 마르코 폴로의 기록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다르고, 행로, 시대, 목적, 기간도 다르지만 말이다.


책의 첫 페이지에 실린 지도-광활한 대륙에 찍힌 그들의 구불구불한 발자국은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21세기를 사는 내게도 헤아려지지 않은 원시의 땅을 30cm도 채 되지 않은 발로 “보기 위해” 걸었다는 것은 얼마나 웅대한 꿈인가. 지도 한 장이 그들 여행의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아시아가 전 세계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다른 대륙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은 일본 번역본이 그대로 전해져서 만들어진 것이지, 원작의 제목은 <세계의 서술>이다. 세계의 서술. 이 얼마나 대단한 제목인가!


책의 내용은 이 제목을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모든 세계(!)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지리, 정치, 종교, 역사, 문화, 행정, 동식물, 기후, 사람, 풍속... 한 마디로 이야기가 풍성한 백과사전이다.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평생을 동방견문록 연구에만 바친 학자도 있다고 한다) 동방견문록의 내용에는 다소 과장이 섞여 있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옛 문헌 자료들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한다. 역자가 말했듯이 13세기말 세계사를 연구하는 데 왜 이 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여느 여행자의 기록과 다르다. 마르코 폴로가 25년간 아시아 대륙을 여행했다고는 하지만, 이국인이 쓴 글이라고 보기에는 그 정보량이 아주 깊고 넓다. 게다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기억에 의지하여 구술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는 자신의 오감으로 흘러 들어오는 정보를 그냥 주워 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과 인맥을 동원하여 그 지역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듯 하다. 그의 몸은 2차원의 가느다란 선 위에 머물지만, 호기심이라는 촉수는 시공간을 마음껏 노니는 것이다.


마크로 폴로가 ‘위대’한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행자들의 우상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코 폴로의 생애 자체도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하지만, 그가 말하는 13세기 아시아 역시 그러하다. 그 중 남송의 수도였던 항주에 대한 내용은 이 책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마르코 폴로는 이 도시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도시가 화려하고 현대적이어서 ‘항주’를 ‘서울’로 바꿔 써도 아무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하에는) 1만 2000개의 돌다리가 있고, 이 다리 모두 아니 대부분의 경우 아치 아래로 배들이 쉽게 통과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40보 넓이의 간선도로가 도시의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까지 직선으로 달리고 있고, 그 길에는 쉽게 건널 수 있는 평평한 다리들이 있다... 일주일에 사흘씩 4~5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그들은 온갖 종류의 식량을 갖고 시장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다... 도시에는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12개의 동업조합이 있고 각 조합은 1만 2000개의 점포...를 갖고 있다. 그곳에 상인들이 얼마나 많고 부유하며 얼마나 규모가 큰 교역을 하는지... 경악할 정도이다... 장식품이나 서화나 건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거기에 퍼붓는 돈은 실로 엄청나다... 호수에는 크고 작은 선박과 유람선들이 수없이 떠 있어... 지폐를 사용한다... 병원은 옛날의 왕들에 의해 도시 전역에 수도 없이 많이 지어졌고 많은 보조금을 받는다... 시내의 모든 도로는 돌과 구운 벽돌로 포장되어 있다... 길을 오가는 긴 마차 행렬을 볼 수 있는데... 도시 안에 무려 3000개의 욕탕, 즉 증기탕이 있다’





생각해 보면, 800년 전의 일이다. 800년이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년 전을 까마득한 옛날로 생각하여 ‘당시에는 삶이 얼마나 초라했을까’ 혹은 ‘그 시대에 비하면 우리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한거야’, ‘옛날 사람들이 이런 생각까지 했겠어?’ 라는 식으로 생각했었다. 내 생각의 바탕에는 새로운 세대는 항상 이전 세대의 업적 위에서 시작된다는 전제가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우리는 ‘발전’한다. 과연 그럴까?





13세기 항주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800년은 인류의 역사로 보면 참으로 하잘 것 없는 시간이다. 그동안 인간의 사고가 달라져 보았자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물론 우리는 과학의 힘을 빌려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지만, 우리 자체가 변화된 것은 아니다.


인간 집단이 이루어 낸 문명. 우리가 고대 건축물 같은 유물을 보며 불가사의니 어쩌니 하고 말하는 것은 인간 자체를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가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을 그 당시의 사람들이라고 왜 꿈꾸지 않았겠는가.


항주를 보자. 사람들이 모여 살면 자연스레 집단(도시)이 조직화되고, 제도가 생겨난다. 도로가 정비되고, 건축물이 빼곡히 건설되며, 강에 다리를 건설하고, 교통이 발달한다.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이를 통제하거나 발전시키려는 조직이 생긴다. 빈부 문제 등 복지를 위한 제도가 생겨난다. 여기에 넘쳐나는 부를 소비하기 위한 향락문화가 빠질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의 꿈과 욕망이 뭉쳐져서 만들어지는 것이니, 800년 전이라고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책에서는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관혼상제의 관습들이 마르코 폴로의 입을 통해 하나씩 얘기되었다. 아시아 대륙의 구석구석에서 행해지던 풍속들이 시냇물의 지류처럼 한반도로 흘러들어와 2000년대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옛’이야기는 태고적 죽은 이야기가 아닌 지금 우리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이야기한 이 웅대한 대륙. 그것을 1300년 전 혜초가 되어, 800년 전 마르코 폴로가 되어 직접 보고 싶었다.

 

우리가 하늘 아래 몸을 숨기고 땅 위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변하지 않았다. 내게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히말라야를 맥도날드가 정복하기 전에, 내가 먼저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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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우 2007.08.24 06:38
    제목만 존재하는 책이라는 이상한 착각과 함께한 지난날들이 이 독후감으로 한방에 날아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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