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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어떤 특정한 책 한권을 읽고 쓴 독후감은 아니다. 일정 기간 유사한 주제의 책을 읽고 난 후 갖게 된 나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지난 독서여행이다. 짧은 대화를 통해 이해하고 있다는 것과 남에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남에게 자신의 견해를 설명할 수 없다면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두서없을 수도 있지만 일단 version 1.0을 공개하여 회원님들의 생각도 들어보고 애정어린 비판도 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의 생각이 더욱 정리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도덕의 기원에 관한 생물학적 고찰

- 인간의 윤리 문제가 생물학의 연구 주제가 될 수 있는가?





1. 프롤로그



요즘 나는 예전의 학교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다. 돌이켜보면 학교 공부의 대부분은 타율적이고 의무적인 것이었다. 자발적으로 행하지 않은 모든 것에는 늘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잊고 싶어 한다. 학교 공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심지어 내가 좋아서, 내가 원해서 선택한 대학 공부마저도 일부 그런 측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어쩔 수 없이 한 학교 공부라 하더라도 그것의 필요성과 유용성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류사의 경험을 토대로 나름대로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것이기에 학교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 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미처 이와 같은 타당성을 고민할 겨를이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제 나도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고 살다보니 옛날에 했던 공부 중 어떤 것들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생겨 의무감이 아닌 자연스러운 탐구 의식에 사로잡혀 여러 주제들을 기웃거려 본다. 그런데 이제 의무감은 사라졌지만 시간이라는 또 다른 방해물이 공부를 훼방 놓고 있으니 참 인생이란 짓궂기도 하다. 어쨌든 이제 적어보려고 하는 “도덕”이라는 주제도 나의 뒤늦은 공부의 결과이다. 그러나 아직은 공부가 부족하여 간단한 개념 정리에 그쳤고 나중에 공부를 더 하여 좀 풍성한 내용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첨언할 것은 내가 이야기할 “도덕”이라는 주제는 생물학을 공부한 생물학도의 입장에서 바라본 내용이라는 점이다.





2. 도덕 그리고 도덕적 행위란 무엇인가?



철학자들이야 도덕의 정의에 대하여 할 이야기가 무수히 많겠지만 나 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뭐 별로 오래 고민할 주제도 아닌 듯하다. 우선 도덕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도덕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또는 바람직한 행동기준이다. 이것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인터넷에서 찾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로 충분할 것 같다.



『동양에서 도덕이란 말은 유교적인 어감이 강하고, 실상 유교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여 근대에 이르러서는 흔히 윤리라는 용어로 쓴다. 그리스어의 'ethos', 라틴어의 'mores', 독일어의 'Sitte' 등이 모두 '습속'이라는 뜻인 것처럼, 원래 도덕이란 자연환경의 특성에 순응하고 각기 그 집단과 더불어 생활하여 온 인간이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온 방식과 습속에서 생긴 것이다. 즉 생활양식이나 생활관습의 경험을 정리해서 공존(共存)을 위해 인간집단의 질서나 규범을 정하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켜나간 데서 도덕은 생긴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도덕과 법은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법은 사회적 외적(外的) 규제로, 그리고 도덕은 개인적 내적(內的) 규제로 자연히 분화되었을 뿐이다. 계급사회의 성립과 함께 법과 도덕은 정치 지배의 유력한 수단이 되기도 하였으며 그와 함께 법이 국가권력을 지배하고, 도덕이 보편적 원리를 지배하는 영역이 되었다.』



『‘윤리’의 ‘윤(倫)’자에 대한 사전적인 풀이를 보면 무리[類] ·또래[輩] ·질서 등 여러 가지 뜻이 있으며, ‘이(理)’자에는 이치 ·이법(理法) 또는 도리 등의 뜻이 있다. 물리(物理)가 사물의 이치인 것처럼 윤리는 인간관계의 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에서는 대표적인 인간관계로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라고 표현되는 이른바 오륜(五倫)을 든다. 물리는 자연에 있어 사물이 언제나 그렇게 나타나는 이치이지만 윤리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윤리는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할 이법이다. 그것은 존재(存在)의 이법이라기보다는 당위(當爲)로서의 이법이다. 그러므로 오륜에 대해서는 그것을 위해 실천해야 할 태도, 즉 덕목(德目)으로서 친(親) ·의(義) ·별(別) ·서(序) ·신(信)이라고 하는 이른바 오상(五常)이 강조된다.』



그렇다면 도덕적 행위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도 역시 어려운 정의가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곧 선한 행위이다. 그러면 어떤 행위가 선한 것인가? 최소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타인의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신 또는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을 돕는 것이다. 선한 행위란 최근 생물학에서도 자주 쓰는 용어도 달리 표현하자면 이타적 행위이며 곧 이타성의 발로이다.



3. 왜 우리는 도덕적 삶을 원하는가?



왜 우리는 도덕적 삶, 도덕적 행위, 이타적 행위를 원하는 것일까?

이것과 관련하여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행복에서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찾았다. 즉 우리가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 해야 하는 이유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좀 다르게 표현한다면 선 또는 도덕에 대한 우리의 동경과 의지는 궁극적인 행복을 얻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도덕적 행위는 행복이라는 보상을 얻기 위한 타산적 행위인 것이다.

17세기는 갈릴레이와 뉴턴의 시대로 과학혁명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세계란 모든 부분이 자연법칙에 종속된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연쇄 속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이미 다 결정되어 있는 결정론적 세계관하에서는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왜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고사하고 도덕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도 무의미한 것이었다.

18세기의 철학자 흄은 이전과는 달리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이성능력과 구별하였다. 즉 도덕의 근원을 이성이 아닌 인간의 감정에서 찾았다. 그에게 이성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 뿐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강요할 수 없는 수동적이고 도구적인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우리로 하여금 선함을 인식하고 이를 행하게 하는 것은 감정 즉 도덕감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이기적이 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쾌락과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본성적으로 주어져 있는 근원적 능력인 동정심 때문으로 보았다. 흄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가슴아파하고 이웃의 행복에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하는 동정심이야 말로 도덕의 근원이며 도덕적 행위는 이러한 동정심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한편 오늘날 서양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독교는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신의 의지와 명령에서 찾는다. 오직 신만이 완전한 선이며 따라서 신의 의지에 부합되게 행동하는 것만이 선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다. 그래야만 원죄를 지닌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 현실 속에서 기독교는 이를 좀 더 통속적으로 표현한다. 즉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만이 죽은 뒤에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고 천당에 가 복락을 누린다고 말이다. 평범한 인간에게 도덕성이란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원초적 공포심에 근거한 것이며 절대적이고 무한한 폭력 앞에서의 비굴하고 타율적인 예속일 따름이다. 강요된 도덕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좀 더 본질적인 것을 언급해보자. 우리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 삼을 신의 의지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목사님이나 신부님의 말씀을 통해, 교황님의 말씀을 통해……. 그 분들은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신으로부터 직접 들었을까? 아니면 성서 속에 신의 의지가 다 표현되어 있을까?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를 누군가 적고 첨삭한 그 책속에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에서와 같이 도덕을 종교아래에 예속시킨다면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즉 지구상에는 기독교이외에도 많은 종교가 있으며 그들은 서로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서로 대립하는 종교의 수만큼이나 많은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도덕 체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서양윤리학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칸트는 도덕에 대해 좀 다른 접근을 한 것 같다. 그는 도덕의 본질을 정의하고 도덕의 근거를 인간성 내부에서 찾았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의 본질은 도덕적 법칙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의무감 때문에 생겨나는 선한 의지이며 이와 같은 의무감의 강제와 명령에 따라 행하게 되는 행위만이 도덕적 행위이다. 칸트의 윤리학은 철저히 내향적이다. 도덕 법칙을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이고 이를 행하는 것 또한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이며 도덕 법칙의 궁극적 목적 또한 우리 자신의 도덕성 즉 선한 의지 자체이다. 칸트의 도덕은 자기원인적이고 자기목적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선하게 살아야 할 어떤 당위성이나 필연성은 없다. 더구나 칸트의 도덕은 결과의 유․무용성 그리고 행복과 같은 보상과도 상관이 없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공허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기 쉬우며 인간중심적이다(도덕의 궁극적 목적은 이성적 존재의 도덕성 즉 인격이며 동물을 포함한 인간 이외의 것은 물건이고 수단일 뿐이다). 필연성도 없고 인과관계도 초월한 도덕은 허공에 뜬 누각일 뿐이며 현실에서의 유용성이나 행복 등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어서 예수와 같은 특별한 소수의 사람만이 다가갈 수 있는 완전함의 형이상학이라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칸트가 이상향으로 꿈꾸었던 “목적들의 나라”는 결코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세상이며 허무한 공상일 뿐이다. 칸트의 오류는 당위에서 존재를 찾으려 했던 것이며, 그가 망각했던 것은 우리 인간도 진화의 결과로 탄생한 하나의 동물종에 불과하며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완벽하지도 않으며 그에게 완벽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칸트가 도덕의 행복주의를 비판을 넘어 혐오하는 이유를 보면 그의 과도한 관념주의를 엿볼 수 있다. 그가 도덕의 행복주의를 혐오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도덕의 가치, 도덕의 숭고함을 훼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관적 희망의 강요일 뿐이다. 대체 도덕의 근거가 숭고함을 붙잡고 있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칸트는 인간의 동정심도 진정한 도덕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동정심은 보편타당성이 없고 수동적이고 자동적인 심리 메커니즘에 속하며 무원칙하기(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느끼는 동정심은 그 불행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음, 불행의 크기와 상관없이 나와 가까운 사람의 불행에 대해 더 큰 동정심을 느낌)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동정심에도 한계가 있다. 동정심의 크기가 나와의 친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이 때문에 마땅히 분노해야 할 행위에 대해서도 연민의 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동정심을 우리의 선함과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연민과 동정심 때문에 혈연관계나 친분과 무관하게 타인을 돕는 우리의 평범한 이웃을 비웃고 더욱 왜소하게 만드는 짓일 것이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인간의 도덕 또한 완전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동정심의 불완전함은 이를 도덕에서 분리시킬 것이 아니라 루소가 지적했듯이 동정심을 이성과 정의의 원리 아래에 두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할지라도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생물학적인 관점을 이야기에 하기에 앞서 “왜 우리는 도덕적 삶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왜 우리는 이타적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로 바꾸어 보자. 왜냐하면 이것이 생물학에서 보다 친숙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타적 삶을 산 인물에 경의를 표하고 존경한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우리 자신도 이타적 행위를 하며,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느끼면 자책을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 행위가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자기변명을 만들어내려고 무진 애를 쓴다. 다른 한편으로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이타적이기를 희망한다. 왜 그럴까?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의 이타성은 이기성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가하는 것은 주변을 살펴볼 필요도 없다.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들여 다 보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자기 자신, 혈육, 친한 동료 등의 단기적 또는 장기적 이익을 바라며 이에 적합하게 행동을 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이기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없다. 내가 이기적 사람이라고 떠든다면 누가 나의 손을 잡아 주겠는가? 우리는 이기적이지 않고, 악의가 없으며, 도와주면 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며 이러한 신호 전달은 상당 부분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이타적 신호 형태는 개인, 사회, 문화적 배경 등에 따라 차이가 나고 때로는 감히 그 근원의 이기성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포장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겹겹이 싸여진 포장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다보면 결국 불쑥 고개를 내미는 이기성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과 내 주변의 사람들이 이타적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 또는 (도킨즈가 말했듯이) 나의 유전자를 보존하고픈 욕망의 소산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동물의 독특한 사회에는 놀랍게도 진정한 의미의 이타성도 존재한다. 이기성을 감추는 행위가 변화를 거듭하여 점점 이기성과의 연결끈이 가늘어지다가 마침내 최후의 한 가닥 연결선마저 끊기게 된 것이다. 누가 테레사 수녀의 헌신적 봉사 활동에서 티끌이나마 이기심을 엿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이와 같은 진정한 이타적 행위는 극히 드문 것 또한 사실이다. 미래의 언젠가는 진정한 이타성으로 가득 찬 인간 사회가 도래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은 이기성과 조건부 이타성이 인간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4. 도덕과 관련한 또 하나의 질문

- 동물과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도덕적 행위가 가능할 수 있는가?



철학자들은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도덕이란 무엇이고 왜 우리는 도덕적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고 답하려 한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더 추가한다. 즉 그들은 동물과 인간 사회에서 도대체 어떻게 도덕적 행위가 가능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도 던진다. 생물학자들이 이와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생물 개체들을 이기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고 따라서 이기적 존재가 이타적 행위를 한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간을 포함한 동물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이타적 행위의 진화와 관련하여서는 최근 생물학계의 활발한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하지만 한 단계 한 단계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여기에서는 생물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동물의 이타적 행위에 관한 연구 결과를 중심으로 인간의 이타적 행위의 기원에 대해 추론해 보고자 한다.



1) 이타적인 듯 보이는 행위는 유전자 이기성의 표현형일 뿐이다



꿀벌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일벌의 전 생애는 이타적인 행동의 전형적인 예이다. 일벌 자신은 자식을 갖지 못하면서도 여왕벌이 낳은 알들을 돌보고, 칩입자가 나타나면 죽음을 무릅쓰고 사회와 알들을 지킨다. 일벌의 이와 같은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외형적으로 이타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벌의 행동 이면에는 유전자의 이기성이 숨어있다는 것이 1963년 생물학자인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에 의해 밝혀졌다.

도킨즈가 그의 유명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설명했듯이 모든 생물종의 개체들은 유전자들의 명령에 따라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유전자들을 가능한 한 널리 퍼뜨리려고 한다.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자식을 많이 나아 잘 기르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와 50%의 유전자를 공유한다(근친도 0.5). 따라서 어느 개체든 확률적으로는 두 명 이상의 자식을 낳아 기르면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도 보존하는 셈이 된다. 한편 형제자매간에도 유전자의 50%를 공유하며 삼촌관계에서는 25%, 사촌관계에서는 12.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따라서 자식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나 가까운 친척들을 도와 그들이 자식을 낳게 하는 것도 유전자를 퍼뜨리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이 바로 이타적 행동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이며 이타적 행동을 할 때 내가 치르는 희생이 그 비용이 된다. 여기서 이득이 비용을 초과한다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고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꿀벌사회에서는 독특한 번식과정의 결과, 여왕벌과 집단 형성 초기의 일벌들은 자매간으로 근친도가 0.75 이고 여왕벌과 자식인 일벌들 간에는 근친도 0.5, 자매지간인 일벌들 사이에는 근친도 0.75이다. 집단 형성 초기의 일벌들은 그들이 돌보는 조카벌들과 근친도가 0.5가 된다. 따라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린다는 목표 하에서 보면 일벌들은 스스로 자녀를 갖는 경우와 조카들을 돌보는 것간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 즉 자신을 희생한다고는 하지만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희생이라고 말할 근거가 없어진다.

이와 같이 동물의 이타적 행위를 혈연관계로 설명하는 이론을 “혈연선택 가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나 동물 사회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행하는 헌신적인 행위나 혈육 간의 이타적 행위를 적절히 설명해주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 이론의 한계는 혈연관계의 테두리를 넘어서 존재하는 이타적 행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유전자의 이기성으로 설명하는 데에 대한 감성적인 거부감일 것이다.



2) 추후 상대에게 되돌려 받을 것을 전제로 행하는 이타적 행위는

진정한 이타적 행위가 아니며 이기성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어떤 종류의 흡혈박쥐들은 사냥에 실패해서 굶주리고 있는 이웃 박쥐들에게 피를 게워 나누어준다. 이때 피를 나누어주는 대상에는 친인척관계에 있는 박쥐는 물론 외부에서 유입된 친인척이 아닌 박쥐들도 포함된다. 왜 흡혈박쥐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이웃 박쥐들에게 자신의 먹이를 나누어주는 것일까? 흡혈박쥐의 이타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흡혈박쥐 집단을 면밀히 관찰한 G.S. Wilkinson에 의해 실마리가 풀렸다. Wilkinson의 관찰에 따르면 과거에 A라는 박쥐가 B라는 박쥐에게 피를 나누어준 적이 있다면 이후 A가 굶을 때 다른 박쥐보다 B로부터 도움을 받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박쥐 집단 내에서도 호혜성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며 이와 같은 호혜성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집단내의 모든 개체들에게 이익이 된다. 즉 지금은 내가 먹이를 구했지만 앞으로도 항상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지금 나의 이익을 약간 희생함으로써 미래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보험인 셈이다.

그리고 호혜성에 기초한 이타적 행동은 흡혈박쥐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에서도 흔히 목격된다. 예를 들어 침팬지는 서로 털을 다듬어주며 큰가시고기는 진로 상에 미확인물체가 나타나면 위험을 무릅쓰고 정찰대를 자처한다. 또한 현재 지구상에 남아있는 390여개의 수렵채취부족에는 사냥감을 누가 잡았는가에 상관없이 온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풍습이 남아있다. 그런데 위에서 설명한 호혜성에 입각한 이타적 행위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호의를 주고받는 개체들 간의 관계가 충분히 오랫동안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번 한 번 보고 평생 다시 볼 일이 없다면 호의적 행동을 할 근거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호혜성에 근거하여 이타적 행위를 설명하는 것은 동물 사회나 인간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타적(협조적) 행동을 많은 부분 잘 설명해 주지만 이 설명에도 한계는 있다. 즉 서로 다시 마주칠 가능성이 매우 낮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이타적, 호혜적 행동을 보이며, 보복의 효과가 감소되는 다자간의 거래에서도 흔히 사람들은 이타적, 호혜적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3) 이타적 행위? 사실은 값비싼 대가를 각오한 이기적 행위



나는 어렸을 적에 “동물의 왕국”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정말 좋아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 배경이 어느 아프리카의 초원이었던 것 같다. 다양한 초식동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그 중에는 가젤이라고 하는 영양 무리도 있었다. 그런데 가젤은 포식자인 사자가 접근해 오는 것을 발견하면 대부분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도망치기 시작하지만 이상하게도 일부는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사자 앞에서 껑충껑충 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언뜻 이타적 행동으로 보인다. 즉 껑충껑충 뛰는 가젤은 사자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려 무리의 다른 가젤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려는 이타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우선 엉뚱한 가정을 하나 해보자. 만일 가젤 무리 중에서 누가 잘 달리고 누가 잘 못 달리는지를 점수로 나타낼 수 있고, 각 영양이 그 점수표를 머리에 붙이고 다닌다면, 그리고 사자가 글을 읽을 줄 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자는 가장 낮은 점수를 붙인 놈을 찾아서 그 놈만 쫓아가서 잡으려 할 것이고, 다른 영양들은 처음에 조금 도망치는 척하다가 사자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슬렁거려도 된다. 이렇게만 된다면 사자로서도 가장 쉬운 놈을 골라 쫓으면 되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덜할 것이고, 다른 영양들로서도 사자가 가장 달리기를 못하는 영양을 쫓아갈 것이므로 자기가 가장 늦은 놈이 아니라면 굳이 죽어라고 도망가지 않아도 되어서 좋을 것이다. 가장 늦게 달리는 그래서 사자의 표적이 될 운명에 처한 바로 그 영양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렇게 누가 잘 달리고 못 달리는지를 사자에게 정확하게 알릴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사자에게나 다른 영양에게나 가장 좋은 결과가 될 것이다. 사실 다가오는 사자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껑충껑충 뛰는 가젤은 동료들을 위한 희생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말을 사자에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봐라 나는 이렇게 높이 뛸 수 있으니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는 가젤인지 알겠지! 그러니 감히 나를 잡아먹을 생각은 하지 말고 다른 놈을 알아보라구”

즉 이타적인 것처럼 보여 자칫하면 큰 손해를 볼 수 있는 행위를 통해 사실은 이기적 이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이런 식의 설명이 가능한 행태들이 종종 목격된다. 너무 과하고 티를 내는 선행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미안한 말이지만 불우한 이웃을 진심으로 돕고 싶으면 조용히 도우면 될 것이지 그 오랜 시간을 때론 추위에 떨면서 방송국 앞에서 기다렸다가 마침내 TV 카메라가 얼굴을 비추면 흰 봉투를 모금함에 넣는 사람들을 나는 결코 진정한 이타주의자들로 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어떤 신호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고 싶은 것이다.



4) 집단선택은 이타성을 퍼뜨릴 수 있다



사실 다윈이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동물계에서 관찰되는 이타성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진화론을 뿌리쳐 흔들 수 있는 문제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종의 기원” 출판마저 미루었다고 한다. 아마도 월레스의 편지를 통해 그가 다윈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종의 기원” 출판은 더욱 미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동물의 이타성 문제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붙여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 설명이 바로 “집단선택”을 통한 이타성의 설명이었다. 내용은 매우 단순하여, 이타적 개체들은 보다 협조적이고 타집단과의 분쟁시 보다 희생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결국 이타적 개체들이 많은 집단이 그렇지 못한 집단에 비해 생존 및 번성에 유리할 것이다. 따라서 개체들의 이타적 특성은 집단 내에서 보존되고 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체선택과정은 집단 내에서 이기성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데 집단선택과정은 반대로 집단 내 이타성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해야 하는데 문제가 있다. 일반적으로 집단선택의 속도가 개체선택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집단선택의 기회가 오기 전에 집단 내에서는 이미 이타적 개체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또한 집단선택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집단 간에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처음에 집단선택이 이루어져 이기적 집단이 사라지거나 이타적 집단에 흡수되고 나면 더 이상 집단 간 차이가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집단선택은 무의미해지게 된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집단선택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할 뿐 현실적으로는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나 다른 동물은 몰라도 인간 사회는 집단선택과정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 사회에는 다른 동물 집단에서는 볼 수 없는 제도(법, 규칙, 관습, 규범...)가 있는데 이것들은 개체선택의 속도를 늦추고 집단 간 격차를 크게 함으로써 집단선택의 효과를 증대시키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집단 간에 경쟁이 심하기 때문에 이 또한 집단선택이 작용할 여지를 넓힐 것이다.



5) 유유상종은 우연히 출현한 이타성을 보존하고 전파시키는데 기여한다



게임이론에 따르면 이타적 개체들은 자신들과 같이 이타적 성향의 개체들과 거래를 할 때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이기적 개체들은 반대로 자신과 같은 성향의 개체들과 어울릴 때 가장 적은 이익을 얻는다. 따라서 집단 내에서 환경이나 개체 특성으로 인하여 이타적인 개체들끼리 모일 수만 있다면 이것은 분명 이타적 개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해 집단 내에서 이타적 행위를 진화,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유유상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개체들이 상대방의 성향을 추리해내고 이를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인간은 물론 이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외에도 인간 사회를 관찰해보면 유유상종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점을 살펴보자. 우선 한 사람이 이타적인지 이기적인지의 여부는 신체적 특징이라기보다는 문화적․행위적 특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체적 특징보다는 종교나 정치적 견해가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경향이 있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거래를 할 때 상대방이 믿을 만한지 모든 가능한 통로를 통해 알아보려 하고, 그 사람을 만나서도 표정, 말투,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살피면서 그가 과연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를 알아내려고 한다. 또한 한 사회에서 그리고 같은 문화적 영향 아래에서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람들의 말투와 표정, 그리고 행동거지를 통해 불확실하게나마 상대방의 유형(신뢰성)을 가늠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비교적 규모가 작은 집단에서는 개개인의 과거 행동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더군다나 어떤 집단이든 집단의 유대를 해치는 행위를 징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사회적 규범을 어긴 사람에 대한 징계가 집단으로부터의 퇴출(고립)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우리 자신 및 인간 사회의 여러 특성들은 유유상종을 유도하거나 촉진한다. 따라서 적어도 인간 사회는 이타적 행동이 출현․발전할 수 있는 매우 적합한 환경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6) 상호작용의 국지성도 우연히 출현한 이타성을 보존하고 전파시키는데 기여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이웃과 상호작용을 할 가능성이 사회의 저 먼 곳에 사는 어느 누구와 상호작용할 가능성보다 훨씬 높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에게 행위 전략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모델은 우리 “주위”에서 고를 가능성이 높다. 즉 우리의 상호작용과 지식습득과정은 전역적(global)이라기보다는 국지적(local)일 가능성이 높다. 만일 우리의 상호작용과 지식습득과정이 “국지적”이라면 부분적인 유유상종을 낳게 된다. 우연히 끼리끼리 모여 살게 된 이타적 사람들은 이기적 사람들의 무리에 비해 서로 보다 높은 이익을 얻을 것이고 따라서 주변의 이기적 사람들도 이타적 전략을 따라 배울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타적 전략은 집단 내에서 그 범위를 점차 확장시켜 갈 것이다. 일종의 집단선택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국지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상호작용과 지식습득과정은 인간 사회에서 이타적 행위(전략)가 진화․발전하는데 유리한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7)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인간 사회를 보다 협조적이고 이타적으로 만든다



일부 동물도 의사소통을 한다고는 하지만 언어를 사용한 인간의 의사소통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는 집단속에서 함께 생활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되고 ‘배신’ 혹은 ‘무임승차’전략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죄의식을 배운다. 사실 의사소통은 적발, 징계 및 벌금체계를 도입하는 것과 거의 유사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협조적 행동을 유발시킨다. 다른 한편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는 동안 상대의 표정, 말투, 동작 등을 통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함으로써, 서로간의 신뢰를 증대시킨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뢰의 증대는 배신을 걱정하지 않고 안심하고 상대에게 이타적이고 협조적인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충분한 동인을 유발한다. 의사소통은 인간사회에서 이타적 행위의 촉진제인 것이다.



5. 에필로그



도덕이라고 하는 말은 매우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인 말로 들리며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만의 특징인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도덕은 철학의 주제였지 생물학에서 다루는 주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도 수많은 동물종 중의 하나이며 진화를 통해 오늘에 이른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인간의 다른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동물행동학, 진화심리학, 사회생물학 등과 같은 생물학 분야에서 다루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즉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근원을 동물계에서 찾아보는 것은 무리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이 이 글의 출발점이었다.

나는 인간의 해부학적, 생리학적 그리고 생화학적 특징들의 근원을 동물계에서 뚜렷하게 찾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잊혀진 흔적 또한 동물들이 보이는 행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의 모든 특징들이 진화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유독일부 행위적 특징만이 진화학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따라서 집단유전학자인 도브잔스키의 유명한 선언을 약간 변형하여 나는 “진화의 불빛에 비추어보지 않고서는 인류학의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

유전자는 자기복제성을 가진 물리적 실체이며 생물을 유전자의 자기복제성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본 도킨즈의 생각은 그것을 처음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나를 전율케 한다. 그리고 놀랍고 생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꿀벌 세계의 이타적 행위들을 유전자의 이기성으로 너무도 단순 명쾌하게 설명한 해밀턴의 논문을 보았을 때 나는 또 한 번 전율했다. 대체 자연은 왜 이리도 삭막하며 또 도대체 고상함이란 없단 말인가? 내 팔위에 돋는 소름은 아마도 자연의 원초적 냉혹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리 자연과 우주가 우리가 희망하는 모습으로 존재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인간의 도덕적 즉 이타적 행위의 이해도 생물학적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인간의 이타적 행위의 뿌리는 이기성 즉 유전자의 이기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자기 자신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유전자 자체의 이익을 위해 포장된 이기성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포장이 너무 완벽해 경우에 따라서 그 상호관련성을 유추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여러분은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구경하면서 함께 간 동료가 그 건축물이 우리 자신의 피부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표정을 짓겠는가? 그 엉뚱한 동행의 논리는 이런 것이다. 즉 우리의 피부와 털은 우리 자신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인간의 외부 보호막은 매우 허약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옷을 만들게 되었다. 즉 옷은 피부의 변형 또는 연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보다 완벽한 보호 역할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건축물들을 만들었고 이것 또한 피부가 확장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타지마할, 베르사이유 궁전, 앙코르와트, 피라미드, 석굴암 등을 보면서 이러한 건축물들과 자신의 피부와의 연관성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진화는 이와 유사한 놀라운 변형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도덕성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매트 리들리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견해는 리들리에 의해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느끼는 도덕 감정에 대해 그의 저서 에서 리들리가 언급한 정의는 더 이상의 첨언이 필요없는 너무도 정확한 언명이라고 생각하기에 아래에 적어본다.

“... 도덕 감정이란 고도로 사회적인 생명체들이 유전자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여러 사회적 관계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문제 해결 장치이다. 그것은 단기적 사리 추구와 장기적 타산사이에 갈등이 존재할 때 후자 쪽으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헌신적 봉사 활동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간 사회에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분명 진정한 이타주의자가 존재한다. 리들리는 이러한 행위를 “이기적 목적을 위해 설계된 감성의 노예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단지 진정한 이타주의도 도덕성의 진화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변형으로 이해한다. 도덕성의 진화를 하나의 나무에 비유하자면 진정한 이타주의도 맨 꼭대기의 한 가지를 차지할 것이다.

내가 거창한 제목과 장황한 이 글을 통해 주장하고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본 모습은 이기성이라는 편협한 생물학도의 삭막하고 메마른 단견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누군가 나의 단견에 대해 논리적인 비판과 함께 대체 인간 도덕성의 근원이 이기성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인가? 칸트의 도덕 철학은 다른 동물들은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이상형에 대한 꿈이라도 꾸게 하지만 도대체 도덕성에 관한 생물학적 해석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성이 있단 말인가? 라고 면박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우리가 진정으로 미래에 보다 선하고 도덕적인 사회를 꿈꾼다면, 그런 사회를 원한다면 인간 도덕성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평범한 대답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장황한 글을 통해 내가 진정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토대 위에서 우리의 미래에 도움이 되고 대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최선의 도덕 원칙을 찾아내자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최선의 도덕 원칙이 무엇이라고 말할 능력은 없다 그러나 비록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졌다는 비판을 들을지라도 우리가 그와 같은 원칙을 찾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좀 더 확실하게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 인간은 이 지구의 진정한 주인이다. 어떤 이는 이 말이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이라는 철학적 비판을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는 무슨 말이냐 미생물이 전체적인 생체량이나 다양성 측면에서 보자면 지구상의 진정한 주인이다라는 과학적인 비판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구상에서 전체 생물권의 미래를 의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지구 전체의 미래를 자신의 의지에 의해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나는 지구의 주인은 우리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인간의 이기성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 전 지구적 이기성의 충돌은 게임이론에서 보여주는 단순한 손해와는 차원이 다른 처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테레사 수녀와 같은 이타심을 바랄 수는 없다. 35억년의 역사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우리의 생존 아니 우리의 이기성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이타적 행위와 협조적 행위의 폭을 더욱 혁명적으로 넓히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적극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에 우리가 가까이 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우리의 활동영역이 조만간 가까운 행성으로 넓혀져 인간 사회의 행태에 큰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하루 속히 새로운 인류 도덕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 보다 확실한 생존 보장책이 될 것이다.

최근까지 지구상에서 유일한 자기복제자였던 유전자의 이기성을 극복하고 우리의 미래를 보존하기 위해 새로 등장한 자기복제자인 밈을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6. 참고문헌들



1) 호모 에티쿠스 - 윤리적 인간의 탄생, 김상봉, 1999, 한길사

2) 이타적 인간의 출현, 최정규, 2004, 뿌리와이파리

3) 이타적 유전자(The origin of virtue), 매트 리들리, 1996(2001 역), 사이언스북스

4) 사회생물학 논쟁 - 유전자인가, 문화인가, 프란츠 부케티츠, 1990(1999 역). 사이언스북스



7. 약간 참고한 문헌들



1) 철학의 근본문제에 관한 10가지 성찰, 나이절 워버턴, 1995(1997 역), 자작나무

2) 동물들의 사회생활, 리 듀거틴, 1999(2002 역), 지호

3) 동물사회의 생존전략, 라가벤드라 가닥카, 1997(2001 역), 푸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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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호 2006.12.17 09:00
    "천.지.불.인." -도덕경- 전자공학은 전자의 갯수를 헤아릴 수 있고, 전자가 전하를 갖고 있다는 두 가지 특성으로 많은 것을 설명합니다. 생물은 물질적 관점에서 대부분 우주의 4가지 힘중 "전자기 상호작용'으로 설명됩니다. DNA 든 원형질이든 중요한 것은 이온화된 분자들의 쿨롱작용력이지요. 언어, 사회, 도덕은 시공간에 펼쳐친 유기화합물의 복잡한 춤이라 생각됩니다. 독서사이트에 엄준호 박사님의 이런 생각 깊은 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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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호 2006.12.17 09:00
    "Moral Minds" (Marc Hauser 하버드 대학 진화 생물학교수로 도덕의 기원을 진화생물학으로 접근하는 책)그리고 "마음의 기원" (국내에 소개된 본격적인 진화심리학 책)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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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원용 2006.12.17 09:00
    유전자를 표현형과 직접 관련짓는 것은 근거가 약해졌습니다. 인간 유전자의 개수가 3만개가 안되지만 단백질의 종류는 10만개나 됩니다. 배고픔을 느끼게 하는 단백질 호르몬(ghrelin)과 식욕을 억제하는 단백질 호르몬(obestatin)이 실은 하나의 유전자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2005년에 밝혀졌습니다 (Science, vol 310, p 996). 새로 밝혀진, 밝혀질 사실들에 비추어 유전자에 관한 많은 주장들이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김영사, 2004)(Nature Via Nurture,2003)도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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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원용 2006.12.17 09:00
    "생명의 느낌 - 유전학자 바바라 매클린톡의 전기"도 읽어 보십시오. 연구하는 생명 현상에 몰입하는 과학의 다른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나 자원이 있다면 생명은 그것을 이용해서 더 널리 퍼집니다. 이타성이 나타나야 생명이 우주의 다른 항성계, 다른 은하계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개체의 이타성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대규모 운석 충돌 때 튀어나간 조각에 붙은 가장 간단한 생명에서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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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식 2006.12.17 09:00
    감사합니다...님 덕분에 잘 요약된 도덕과 이타행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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