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조회 수 361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부여족의 기원과 이동 고깔모자를 쓴 단군

정형진/백산자료원.‘06.10.1.1927시 서울 집에서



서론

-고조선:요동 중심설, 평양 중심설, 중심지 이동설 ,최근에는 중심지 이동설이 힘을 얻고,필자는 이 책에서 부여족이 지금까지 전혀 논의되지 않은 먼 곳에서 이주해 온 망명인 집단임을 밝힌다.

터키 중서부 지역에 있던 프리기아에서 집단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원전 15세기 혹은 12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 초까지 소아시아 지역의 주도 세력으로 활동했다. 미다스왕때 혹은 직후에 흑해의 북쪽에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온 킴메르인들Cimmerns의 침입을 받았다. 이때 그들의 일부가 프리기아를 떠나서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들은 천산을 지나서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현재의 난하지역에 흔적을 보인다.

-산해경해외서경:숙신국은 백민국의 북쪽에 있다. 그 나라에는 웅상이라는 신성한 나무가 있다. 그런데 그곳에 먼저 들어온 프리지아의 왕 혹은 프리지아(프리기아)인이 그곳에 있던 웅상 나무를 차지했다(즉 그곳의 지도자가 되었다)-고깔모자의 이동을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이동을 확인,이들이 바로 문헌에 나타나는 변한과 관련

-<한서>지리지에 요동의 번한현, 지금의 개평등지가 변한의 고도이다. <신당서><구당서>신라는 변한의 후예이다.<삼국유사>최치원은 변한이 백제라 했다,신당서 구당서에는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 땅에 있었다고 했다

<삼국지>한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마한 진한 변한이다.ꋼ이는 요동을 포함한 한반도 전 지역에 변한인들이 살았음을 말한다

-2장:발해의 명칭은 바로 프리기아인들이 사는 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장: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가 바로 프리기아의 미다스 왕 이야기....프리기아인들에 관한 서아시아와 유럽의 역사와 신화에 각인된 흔적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앞선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한다. 이는 부여인들이 민족적 자긍심이 강했던 이유와 천손관념을 갖게된 직접적인 근거

-4장:프리기아의 대모신인 키벨레Cybele의 시중을 드는 코리반트 Corybant는 <삼국지>부여전에 실린 <위략>에 나오는 동명이 탄생한 고리국의 명칭과 관련 있으며 이는 고구려<고려>라는 명칭의 기원과도 관련될 가등성이 있음을 설명한다

키벨레 여신의 애인이자 아들인 아티스 Attis신은 프리기아의 오시리스이자 탐무즈인데 이 신의 상징인 소나무는 부여족의 소나무 숭배와 관련이있다. 부여인들의 소나무 숭배는 고구려인들이 무덤가에 소나무를 심게 했고 같은 부여족인 백제의 무령왕의 관이 일본산 금송인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음을 설명한다. 또한 백제금동대향로에 보이는 소나무와 부여 외리 출토 ‘산 경치와 봉황무늬 전돌’에 보이는 소나무도 부여인들의 소나무 숭배와 관련 있다. 우리나라 당산 나무 중에 소나무가 많은 것도 이와 관련 있다.

-6장 언어적 고증::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불례와 구야를 끊어서 해석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부례구야로 붙여서 읽어야 한다. 프리기아를 음사 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후대에 김해 지역에 있던 가야를 본가야라고 . ‘본가야’또한 프리기아를 음차표기한 것이다.“본자는 상고음이 으로서 이는 고대 국어 ‘발,벌,발 부리 블’ 등을 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가야에 대응시키면 본가야는 부리+가야가 된다

-춘천 지방을 가리키는 우수주는 우리말 소머리를 훈차 표기한 것이다. 수차야는 프리지아를 훈. 음차 표기한 것이다. 즉 수차야의 수는 부리를 훈차한것이고 차야는 지아를 음차한 것이다.

-<일본서기>계체천황 23년 3월조에 고령대가야의 왕명인 ‘가라기부리지가’가 보인다. 그리고 <일본서기>중애천황 9년10월조에 보면 신라 왕 ‘파사매금’을 ‘우류조부리지간’이라고 칭하고 있다. 여기서 ‘부리지’는프리기아와 관련된 칭호로 .....

-7장:프리기아인들의 이주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단군과 고조선의 강역에 관한 새로운 견해...프리기아인들 중 일단의 무리가 현재의 요동 지역으로 들어와서 숙신과 결합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바로 후단군이다. 이들은 문헌 기록에 ‘발’ ‘진번’‘벌제’등으로 나타난다. ...숙신과 결합한 프리기아인이 진번을 형성했고 이들 중 북으로 올라간 주민과 고리국에서 남하한 세력이 연합하여 부여.....진번인들 중 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은 삼한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

고구려 국어에서 구토의 회복을 다물이라 한 역사적 배경......프리기아인들이 난하 지역으로 들어온 후 일단의 무리가 현재의 요동으로 들어와 숙신인들과 연합하여 진번국을 형성......주몽이 도읍을 정한 지역의 상루에 있던 비류국은 주몽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조상들의 땅이 된다. 그러므로 비류국은 투항을 받아들인 주몽이 그 곳을 다물도라 부른 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즉 조상들의 고토를 회복한 것이다. 과거에 진번국에 살던 조상들의 땅을 회복한 것이다.



1장 고깔모자를 쓴 사람들

1.동서문화의 교류

-한국의 즐문토기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아 북방 유라시아 신석기시대 토기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시베리아로부터 또는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전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은 유럽의 캄케라믹 사람이 동쪽으로 이동한 시베리아에 기원을 둔 통구스족 혹은 알타이족의 한 갈래인 것으로 흔히 생각하였고 또 기록에 나오는 예인이나 고아시아족으로 보기도 하였다.

-파지리크 유적(알타이산맥 부근):신라왕의 적석목곽묘와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이다. 문신의 물고기도 신라왕들의 허리띠에 달려있는 물고기와 같은 기능이었을 것이 분명하여 신라 문화보다 몇 백년 앞섰던 파지릭 문화와 신라 문화와의 관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초원의 길을 따라 중국의 화북 지역인 오르도스까지 전파된 스키타이 문화는 오르도스식 청동기 문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 오르도스 문화는 다시 요령성을 거쳐 한반도 서부로, 길림을 거쳐 한반도 동해안으로 그 문화가 파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청동기시대에 한반도에 내습한 북방 문화의 영향을 전기 초원 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

-기원전 1000년경 전투적인 기마민족의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스키타이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말 타는 기술을 발달 시켰던 이란계 유목민 중 일부가 키스피 해로부터 흑해의 북안 지대로 이동했다. 이들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 1세기경까지 흑해 북안의 초원 지대에 살면서. 특히 기원전 6~4세기에 이세기에 이 지대를 지배했던 유목민이었다. 이들이 흑해 북안에 나타남으로 해서 카프카스 지역과 소아시아 그리고 오리엔트에는 거센 역사의 폭풍이 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폭풍이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생각...소용돌이의 진원지는 스키타이였고 그 소용돌이에 휘말린 집단은 킴메르족과 프리기아이다....프리기아는 소아시아에서 히타이트가 몰락한 이후 그 공백을 메우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스키타이인들은 이란인 계통

3.고깔모자를 쓴 사람들

-고깔모자는 유라시아 대룩의 범 아리안계 주민이 썼던 모자이다. 아리안계 주민 중에서도 중앙아시아에 기원을 둔 동부 이란계 주민(스키타이.사르마트.사카)과, 같은 이란계 언어를 사용하는 킴메르인들 그리고 프리기아인들.....부여계와 신라. 변한. 일본 사람들이 고깔모자를 쓴 것이 과연 문화의 전파에 의한 것일지. 아니면 주민의 이동에 의한 것인지를 판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치원은 변한이 백제라 했다. <신당서><구당서>에는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 땅에 있었다고 했다. <당서>에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 땅에 있었다 함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으로부터 나온 까닭으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위에 보이는 기록에 보면 요동의 변한 지역이었고, 그 변한인들이 낙랑 땅에 살았을 뿐 아니라 백제나 신라도 변한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지금부터 고깔모자를 쓴 사람들 후에 변한이라고 불리게 된 사람들-이 유라시아 대륙에 남긴 모습을 시대 순으로 정리해 봄으로써 고깔모자의 확산이 단순한 문화의 전파인지 주민의 이동에 의한 것인지 알아보자

-천산 산맥 서쪽의 고깔모자:변한이라고 하는 명칭이 ‘고깔모자를 쓰는 사람들’에서 유래했다.

변진의 弁자는 고깔...관모뿐 아니라 의복과 신발. 대와 장신구에 이르는 대부분의 한국 고대 복식의 원류는 스키타이계에서 찾을 수 있어 한과의 문화 교류 이전의 복식 문화는 북방 기마 민족의 복식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세계문화 상징사전>에서는 프리기아모자...원뿔 모양의 모자로 이 모자는 ‘자유의 모자’라고도 불리며

-천산 산맥 동쪽의 고깔모자:부여계와 뿌리가 같은 돌궐의 조상에 관한 전설

후기 신라의 지배자들의 언어가 터키어와 관련 있다는 강길운의 주장, 즉 “신라 후기 지배층어는 터키 어휘가 절대적인 세력을 가졌다. 적어도 한자를 쓸 수 있었던 후기신라 지배층은 터키어를 쓰는 족속과 관계가 깊다. 라든지 발해의 대조영의 아우대야발이 <단기고사>를 쓰기 위해서 돌궐국에 두 번이나 들어가 고적을 답사하고 책을 저술하였다는 이야기는 부여계인 발해가 돌궐 지역의 역사와 관련 있었음을 암시한다.

-미타국은 최초로 이란어를 사용하는 주민이 세운 나라 였다 어원적으로도 페르시아와 프리지는 일정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들이 과거에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신라 시대의 토우인데 그 모습이 미타기병을 닮았다....알타이 사람들은 나무가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하여 가지의 단이 많을수록 더 높은 절대자와 교감할 수 있는 샤먼이라고 믿는다고 한다.

부여계와 뿌리가 같은 돌궐의 조상에 관한 전설에서 알 수 있다.

-후기 신라의 지배자들의 언어가 터키어와 관련 있다는 강길운의 주장, 즉 “신라 후기 지배층어는 터키 어휘가 절대적인 세력을 가졌다. 적어도 한자를 쓸 수 있었던 후기 신라 지배층은 터키어를 쓰는 족속과 관계가 깉다.” 라든지 발해의 대조영의 아우대야발이 <단기고사>를 쓰기 위해서 돌궐국에 두 번이나 들어가 고적을 답사하고 책을 저술하였다는 이야기는 부여계인 발해가 돌궐 지역의 역사오 관련 있었음을 암시한다.

-삼한의 주도국의 위치에 있던 마한의 수읍이 월지국에 있었다고 했다. 호나 동호가 자신들의 왕을 일월지자

이는 천손의식과 관련된다.마한의 수도가 월지에 있었다는 것은 대월지오 같은 우주관을 지닌 사람들이 마한의 주도권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서북 지역과 동북 지역에 대응하는 집단이 나타나는 것을 필자는 호와 동호의 관계라고 본다. 이 호라는 글자를 파자하면 고+월이 된다. 즉 그들이 옛적부터 달과 관련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로 ‘달의 아들’ 즉 ‘월씨’ 혹은 ‘월지’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새의 깃을 장식으로 모자에 방삽하는 것은 스키타이의 풍습이었다. 흉노도 새 깃을 관모에 장식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도 유행하였는데, 이를 가시라고 하였다. <북사>를 보면 고구려인들은 저마다 고깔 모양의 절풍을 썼는데, 사인들은 새 깃을 두개 꽂았다고 한다. 고깔모자의 전통이 서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민족에게 정착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고깔형모자를 쓰던 사람들이 중국의 서북 지역에도 있었음에도 한민족에게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다는 것은 문화의 전파에 의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여타 민족과 다른 민족 기원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변진이라는 나라이름은 원래 진번과 관련이 있다. 진번의 진은 숙신계 주민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진번에 대해서 안정복은 <동사강목><고이진번고>에서 진번의 진은 숙신의 신에서 나오고 후세의 여진의 진은 진번의 진을 따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진번의 ‘번’은 프리기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조선인이 고깔을 썼다는 문헌도 없고, 고고학적 유물도 없다. 이는 고조선인과 고깔을 쓴 사람들 -필자는 이들이 프리기아인이 중심이 된 사람들로 본다-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한다. 필자는 고조선을 주도한 사람들과 부여인들은 다르다는 관점에서 한국 상고사를 이해한다. ⇒????단골(무당)은 고깔모자를 쓴다



2장 부여족의 등장

1.부여족의 등장

김정학은 빗살무늬토기와 어로경제에 비중을 둔 고아시아족이 시베리아로부터, 한반도 서부로는 Trans-Baikal 지역의 첨저 빗살무늬 토기가 몽골과 만주의 서부를 거쳐 한반도의 서부와 남부지역에 전화된 것으로 동부로는 평저의 빗살무늬토기가 동시베리아로부터 흑룡강 유역을 따라 만주 동부를 거쳐 함경도 지방에 먼저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후 한반도에는 몽골족의 새로운 종족인 새시베리아족의 하나로 높은 청동기 문화를 갖고 있는 알타이족이 몽고, 서부 만주를 경유, 한반도로 내려와 이 지역의 신석기시대 주민인 고아시아족을 정복, 동화시켜 청동기 문화에 들어선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김정배는 신석기시대 주민은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사람들이며, 이들은 고아시아어를 사용했던 주민들이었다고 하였다. 또 그들이 고아시아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이기문이 주장해온 고구려 어휘 속에 남아있는 일부 길략어와의 일치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신석기시대의 고아시아족은 뒤에 들어오는 무문토기인에게 흡수되어 종말을 고하며, 이 무문토기인이 역사상에 보이는 예맥족에 비정된다고 하였다.

-신석기시대의 주민은 시베리아에서 이동해온 사람들....청동기 시대에 새로운 주민은 알타이계 몽골족.예맥족 퉁구스계....필자도 한민족을 구성한 신석기시대 주민은 시베리아에서 남하한 고시베리아족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 후 새로운 유입 세력은 크게 보아 서너 개의 집단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사서에 숙신이라고 기록된 집단이다. 이들은 중국 동북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고조선과 기자조선으로 기록된 사람들이다. 셋째는 맥족이다. 넷째는 예족이다. 이들이 필자가 이 책의 주제로 삼아서 추적하는 부여계의 조상들로 현재 터키의 중서부 지역에서 기원전 15세기 혹은 12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 초까지 거주하다가 동방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예족과 맥족은 다른 집단으로서, 중국 동북 지역에서 만나 하나의 집단으로 동화되었고. 이후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문헌에 보이는 최초의 부여:부여족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관자>이다.발. 조선 중에서 ‘발’이 바로 동북아 역사 기록에 최초로 등장하는 부여족에 대한 명칭....최근에 길림성 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에서 발표한 글에 부여의 조상들은 본래 바닷가에 살았다. 원문에는 발해의 바닷가라고.....필자는 이 발해 연안에 살았던 부여족이 바로 <관자>에 나오는 발족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부여족 최초의 족명과 그것에서 파생한 국명 지명 강명 산명 신명등.예를 들어 발 지리 영지 진번 비리 패수 비류슈 요수 불이상 평양 ...<산해경>해외서경에 나오는 ‘벌제’의 ‘벌’이나 <북사>백제전에 도읍지를 거발성이라 한 ‘거발성’의 ‘발’이나 통일신라시대 나주의 명칭인 ‘발라’의 ‘발’ 그리고 <관자>에 나오는 발조선의 ‘발’등은 모두 프리기아에서 ‘프리’를 음차 표기한 것이다.

<북사>에 나오는 거발성의 ‘거’는 동음동의를 표기하는 접두어로써, 오늘날 대를 의미하는 ‘크.그’의 표기인 것으로 믿어진다. 즉 ‘거발성’은 대발성과 같고, 발은 마한지명에 흔히 쓰이는 ‘비리’와 백제지명 ‘부리’의 단축 형이며, 신라 지명에 흔히 접미..블 불 발 벌 등으로 발음되고 촌 읍 도시 등을 의미한다.‘비이강’이고 ‘요수’였던 명칭은 부여계의 이동과 함께 ‘비이수. 요수 .패수.열수 .비류슈.분려수.포여강.파저’등으로 불리면서 중국 동북 지방과 한반도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관자>에 ‘리지’나 ‘예맥’으로 기록된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현재의 시라무렌 강 지역이나 그 이북 지역까지 이동했을 것이다. 이들은 후에 다시 난하 이동 지역과 대릉하 유역으로 다시 남해해기도 하고 일부는 동명이 남하하기 전에 살았다는 ‘고리국’등과 같은 프리기아인들과 관련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프리기아인들은 전국시대에 동호라고 불린 세력에 포함되었다가 연나라가 강성해졌던 기원전 3세기 초반에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고 북쪽과 동쪽으로 밀려났다. 그들은 다시 남으로 내려오면서 오환. 선비.족으로 나타난다. 오환과 선비족이 동호의 후예라는 것은 <후한서>에 보인다.

-‘비류’가 강이름으로도 사용되고 나라이름으로도 사용...비리가 강이름으로 나라이름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프리기아인이 이주하는 곳마다 강이름. 나라이름,땅이름, 산이름 등으로 프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내린 조서에 고구려를 ‘포예’...프리지아를 2자로 표기한 것이 부여이고 이를 1자로 표기하면 예가 된다. 고구려의 초기 수도인 국내성의 이칭인 ‘불이성’의 불이도 프리의 음차이다. 신라의 ‘서라벌’의 벌도 부리의 축약형이고, 백제의 사비는 ‘소부리’의 축약형이다.

-프리기아란 말은 ‘최초의 생명의 땅’혹은 ‘최초의 생명인 부리가 계시는 곳’즉 천손이 머무는 땅이란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관념을 가졌던 부여인이 천손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우리 민속에 부루단지라고 하여 업신을 모시는데 그 업신이 곡물과 관련된 재물의 신이다. 이는 바로 아리안들의 부리Buri. brh. Phry등과 관련된 곡령신으로서의 부루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3장 부여는 프리기아의 후예이다.

1. 프리기아의 미다스 왕과 신라의 경문왕

-박시인은 <알타이 문화기행>에서 왕의 귀는 당나귀 같다는 전설이 고대 그리스 미다스 왕과 신라 경문왕 이야기에 있는 것도 동서양 전설사화, 또는 신화가 중앙아시아 알타이족의 대이동 결과 갖게 된 많은 공통성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 민족과 알타이 문화와의 관련성을 설명했다. 미다스 왕이 당나귀 귀와 같은 큰 귀를 감추기 위해 썼던 프리기아 모자가 신라인 관모에 그대로 보인다. 이는 미다스 왕의 전설이 단순한 문화 전파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그능성을 시사한다.

2.프리기아인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인 프리기아 사람들...이시스 여신이 프리기아인을 모든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적오도 당시의 이시스 사제들이 프리기아인을 인식하고 있던 것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히타이트는 소아시아와 시리아 북부를 무대로 하여 B.C 2000년기에 활약했던 인도-유럽계 민족이다. B,C3000년기 말엽의 소아시아에는 하티라고 불리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하투실리스 3세 때 신흥 아시리아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집트와 우호조약을 맺고 딸을 람세스 2세에게 출가시키기도 했다. 히타이트는 이 무렵부터 쇠퇴하기 시작..기원전 717년 완전히 멸망....쇠퇴원인은 북방에서 와서 히타이트 왕국의 동남에 미타니 왕국을 세운 프리르 인이나, 남하하여 이집트를 혼란에 빠지게 한 힉소스들의 세력에 밀렸기 때문.

그러한 상황에서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1,250년경 트로이를 침공했다. 그 후 히타이트 왕국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의 압력으로 점점 쇠퇴해 갔다.

-프리기아인이 소아시아로 들어 올 무렵에는 에게 해 와 소아시아 지역은 정치적 격변기,...호메로스의 영웅들이 행동하던 시대인 이 시기는 또한 성서의 <사사기>의 영웅들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 두 영웅시대는 동시적이었다. 양쪽 모두 정주한 농업 민족들과 침략적인 목축 전사들 사이에 상호작용과 적응의 긴 시기가 있었다. 그 다음에는 대단히 급작스럽게 새로운 목축 전사 민족(팔레스타인에서 헤브루인들. 그리스에서는 도리아인들)이 엄청난 학살을 자행하면서 진실한 신들의 황혼과 청동기인들의 세계 시대의 종말이 앞당겨지게 된다. 호메로스가 말하는 ‘영웅들로 이루어진 신성한 종족’의 업적은 기원전 1250-1115년의 시기...격변기에 프리기아도 트라키아 지방에서 소아시아로 들어 온 것

-프리기아와 아시리아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돌발적인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여 프리기아는 멸망하게 된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카프카스 북쪽에서 스키타이인들에게 쫓겨난 킴메르인들의 침입이다. 기원전 690년 경 프리기아의 수도인 고르디온이 파과될 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집단적으로 이주했을 가능성...필자는 이 때 집단으로 이주한 프리기아인들이 춘추시대인 제나라 환공의 재위기간에 중국의 동북지역에 나타났고, 그 흔적이 ‘예. 이지 발’로 <관자>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강력하고 부유했던 그래서 미다스 왕의 황금손 전설이 생겼던 프리기아는 기원전 7세기 초에 스키타이인에게 쫓겨난 킴메르인들에 의해서 수도가 불태워지면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들이 숭배하던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이주했다. (필자의 가설임) 그 후 프리기아는 명맥만 유지하다가 서쪽에서 성장한 리디아에 복속되었고 그 후 페르시아가 소아시아를 장악하자 그 존재가 역사 속으로 완전히 파묻혀 버리게 되었다. 프리기아는 아나톨리아의 여러 지배자들 밑에 놓이게 되었다. 프리기아인들은 이후 그리스인으로부터 노예 취급을 받는다. 프리기아의 몇몇 석소묘와 기념물들은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에야 미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집트 멤피스의 사제들이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게 직접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프리기아인이 이집트 민족보다 더 오래된 민족이고 자신들은 그 다음......프리기아인이 신석기 이후 문명사에서 가장 앞서서 문명을 창조..단서가 된다고 한 것은 그 이야기를 전달한 사제들이 바로 ‘헤파이토스’를 숭배하는 사제들이었다는 데 있다. 자신들이 숭배하는 헤타이토스 신이 프리기아인들의 신앙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헤파이토스 즉 관명신의 역사가 제일 앞선다는 뜻을 담아서 ....미다스 왕의 황금 손 이야기도 이러한 프리기아인의 연금술과 금속 세공술과 관련하여 나온 이야기로 볼 수 있다.최초의 금속 공예인인 카비리가 프리기아의 선조들을 가리킬 가능성은 독일인들의 생각 속에 남아있는 것 같다. 독일에서 유행하는 난쟁이 인형이 쓰고 있는 모자는 소아시아의 프리기아에서 유래

-중국의 북방과 동북 지역에서 춘추 시대 이후, 첫째는 철기 사용의 확산과 관련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철제 무기가 확산되었지만 그러한 요인들 중에 부여계의 등장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

둘째는 중국 북부와 동북 지역에 과거와 같이 옥을 귀하게 여기는 집단. 금을 숭상하는 집단 등장. 부여는 황금 제조기술이 발달. 셋째는 비파형동검문화 지역에 새로운 금속 제조기술을 가진 집단이 유입되어 우수한 동검 제작과 철제 무기를 생산했고. 후에 한국식동검문화인 세형동검문화를 창조한 사람들이 부여계일 것이라는 점이다.

-필자는 이러한 가설에 입각해서 7장 <후단군의 나라 진번>에서 전국시대의 요동 지역은 진번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음을 논증한다. 바로 진번 지역인 요동지역에서 한국식동검이 탄생한다. 물론 이러한 견해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필자의 가설이 타당성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다.



4장 프리기아의 종교와 부여계의 종교

1.여신 키벨레

-키벨레 여신은 원래 산신의 성격을 가지고 잇었다. 그녀를 ‘이다 산의 여주인’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는데

크로노스의 미로의 왕궁 유적에서 나온 크레타 문장은 프리기아가 기원전 1500년경에 소아시아로 들어왔다는 견해를 따르면 프리기아인들이 막 소아시아로 들어왔을 때의 유물이다. 크레타 Creta와 관련된 Ko-re-te-의 kore와 고구려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다룬다. 이는 크레타와 프리기아의 관련성을 시사한다.

-산어머니의 모습이나 키벨레 여신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해인사 승려인 이정의 전기에 기록한 고령가야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가야 산신 정견모주와 연결하여 생각 해 볼 수 있다. 정견모주라는 이름은 불교적으로 윤색된 이름이지만 가야인의 산 어머니 신이라는 모습은 동일하다.

-레아는 크로노스의 누이이자 아내인데 프리기아의 대지의 여신 키벨레와 동일한 여신이기도 하다. 그녀를 숭배하는 신자들의 무아지경의 춤은 쨍그랑거리는 커다란 소음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크레타 섬의 동굴에서 크로노스 몰래 제우스를 키울 때 제우스의 울음소리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분명히 서아시아의 대지의 여신의 시끄러운 제사와 결부되어 있는 제례의식을 설명하기 위한 신화....크리반트들이 병을 치료하는 행위나 비를 오게 하는 행위는 우리 무속의 무당기능과 유사하다. 특히 그들이 광란의 춤을 춘다거나, 광기를 불러내었다가 다시 치유하는 능력은 우리 무속에서 무당들이 하는 행위와 매우 유사하다.

-필자는 코리반트가 <위략>에 나오는 부여의 동명왕이 떠나온 ‘고리’국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신화는 Ko-re-te Kore가 여신의 이름이라는 점을 확실히 전하며 Kore 여신이 그리스시대에 이르러 매우 중요한 존재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신화학자들은 Kore 여신이 아시아에서 크fp타로 왔다고 믿고 있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볼때 Ko-re-te 가 Kore여신과 관련된 장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Kore가 바로 중국의 여러자료에 언급되고 있는 사실.

-하늘의 운행에서 새벽에 시리우스를 뒤따르는 것은 태양이다. 그런데 이시스 여신과 키벨레 여신이 동일한 여신에 대한 다른 이름이라고 했으므로 키벨레 여신과 시리우스 성은 동일자이다. 그러므로 시리우스 성을 뒤따르는 태양에 대응하는 코레는 당연히 태양여신인 것을 알 수 있다.

-코레테와 관련된 코라여신은 프리기아 종족의 키벨레 여신의 딸인 태양여신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프리기아와 관련된 부여와 고구려 백제 등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는 배경이 된다. 으 코레는 바로 일본 창세신화의 천조대신....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문헌학적 자료는 없지만 동쪽으로 이동한 프리기아인들도 키벨레 여신과 코리반트를 동일시 했었다면 고리국을 코리여신의 나라라는 의미로 불렀을 수 있다. 즉 코레의 음사표기로 믿어지는 고리국은 키벨레의 나라로 대모신의 나라라는 의미를 갖는다.

-‘고리국’의 기원에 대해서 언어학자인 강길운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부여는 부리야트의 부리야를 의미하며 몽고족의 한 갈래이다. 그들의 동부 부리야트 방언에 qori방언과 qudara방언 등이 있어 그 말을 사용하는 부족의 대종이 남하한 것으로 고구려 백제 이다.

몽고 과학원 시미야바르트 박사는 <몽고와 한국민족 선조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문제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현재의 바이칼 호 연변에 사는 부리야트인들이 스스로 Kore라고 부르는 것도 한민족사와 관련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부여국은 바이칼 호 남쪽의 부이르 Buir호나 할힌골 지역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필자의생각은 이렇다. 고리국은 프리기아인들이 기원전 7세기 초 중엽에 지금의 난하 지역으로 들어왔다가 제나라 환공의 북벌 때 북쪽으로 밀려갔던 세력들의 후예가 세웠거나. 프리기아인들이 천산 산맥을 넘어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바이칼 호 주변에 정착했던 사람들이 몽골 초원의 동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

-운석으로 상징되는 키벨레 여신, 키벨레 여신의 상징은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운석이었다. ...너희는 나무를 보고 아비라 돌을 보고 어미라 하며(예레미야 2:27)....예레미야의 말로 보아 당시 소아시아와 중동 지역에서 수목 신앙과 검은 돌신앙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트라교의 구세주인 미트라는 성스러운 나무 밑의 성스러운 냇물 옆에서 태어났다. 미술 작품을 보면 그는 ‘탄생’ 의 바위에서 벌거 벗은 아이로 나타난다.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변하여 곰이 되곤 하였다.........우가 마침 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부인이 부끄러워 숭고산에 이르러 돌로 변하여 아들계를 낳았다. 우가 내 아들을 돌려 달라고 하니 돌의 북쪽이 깨지고

돌 어머니에게서 출생한 이야기로 유명한 것으로 동부여 금와 왕의 탄생이야기는 동부여인의 이동과 함께 남쪽으로 전달되어 경남 양산 통도사의 자장암에 금와보살이라는 이름으로 현재에도 살아 있다. 동부여 금와 왕 출생 이야기에 나오는 금개구리가 보인다. 이 유물은 금으로 만든 개구리로 고령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삼한의 변진구야국인 김해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구야국은 <삼국지>위지 한전에 부면, ‘부례구야진지렴’이라는 호칭으로 그 지도자가 불리어 지고 있는데 .....경남 김해시 어방동 분산성 내의해발 330m의 정상에 위치한 해은사 대왕각....대왕각에는 수로왕과 허황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대왕각 연혁에는 “연정 앞에는 허황후가 망산도에 가져왔다는 ‘봉돌’이라고 불리는 영험한 돌....이 돌은 검은 돌인데 바닥에 쌀을 깔고 그 위에 돌을 모셔 놓았다. 이 검은 ‘봉돌’은 프리기아의 후예인 금관가야 사람들의 신앙의 흔적으로 키벨레 여신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다. 김해 지역의 가야인은 기원전 109년 한 무제에 의해 한사군이 설치 될 때 일단의 부여족이 남하하여 정착한 사람들로 보기도 한다.

-키벨레여신과 거울:키벨레 여신이 우리문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는 점이 또 있다. 그것은 “여신에게 바친 공물들에는 거울, 석류, 열쇠가 있다. 엘리아데는 그의 저서인 <샤머니즘>에서 북만주의 서로 다른 여러 퉁구스 민족군의 샤만의 경우, 구리거울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그 기원을 중국-만주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나 그 주술적 의미는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르다. 거울은 샤만으로 하여금 ‘세상을 보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말도 있고 ‘영신들의 거처’노릇을 한다는 말도 있고 인류의 욕구를 투사시키기 위한 것

2. 소나무 신 아티스와 부여계의 소나무 숭배

-아티스의 탄생은 강의 딸과 천신의 결합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스키타이의 조상이 제우스와 보리스테네스강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고구려의 주몽의 탄생 구조와도 같다. 즉 주몽은 하백의 딸인 유화와 천제의 아들 해모수 사이에서 탄생했다.

-이러한 일치는 고구려인들이 소나무를 특히 숭배한 점과 더불어 그들이 부여계인 프리기아인들과 관련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디오니소스는 솔방울을 손에 쥐고 있는데 그 솔방울은 식물적 삶의 영속성을 상징한다. 솔방울을 쥔 디오니소스는 타이탄에게 먹혔다가 다시 소생하는데, 이는 식물의 힘과 생식을 상징한다. 일반적으로 고대 신화나 종교에서 나무의 상징은 원형적 모신에게서 태어난 남성으로 모신의 아들이자 애인으로 신왕 혹은 사제왕인 것이다. 이는 앞에서 인용한 성서의 예레미아가 너희는 나무를 보고 아비라 하고 돌을 보고 어미라 한다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단군 신화에서도 신단수 아래에서 태어난 단군은 신단수의 주인으로서 뭇 생명의 대표자요 리더인 것이다. 그가 바로 신인왕인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무덤 주위에 소나무를 심는 것은 고구려의 지배층인 부여계의 관념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언어학자들은 개성에 있는 송악산의 옛 이름인 ‘부소산’의 어원을 ‘풋소’로 본다. 이 풋소는 소나무의 옛말인데, 이 풋소산의 음차 표기가 부소산이고, 그것의 의역 표기가 송악산이라고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부소는 쉽게 말해서 ‘부여의 나무’라는 의미였다. 우리말에 ‘남새’의 ‘새’나 ‘억새’의 ‘새’ ‘소나무의 ’소‘가 모두 땅에서 자라는 새싹과 같은 생명력을 가진 풀을 가리킨다. 국어사전에 보면 ’새‘는 “띠나억새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또한 부소의 ’소(蘇)‘는 자전에 보면 즉 부활하는 생명력을 가리킨다. 이는 아티스가 함의 하고 있는 부활하는 생명력과 부합한다.부사나 부소의 부여의 소 혹은 부여의 새라는 의미로 고대사회에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경덕왕 때 한자지명으로 고치면서 ‘부여의 소/세’가 바로 ‘소나무’이므로 한자로 ‘송’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비류국에 찾아가서 그곳의 왕인 송양왕을 만나 복속시키는 대목이 나온다. 신채호가 언급했듯이 비류국은 졸본부여이다. 송양은 비류국왕의 실제 이름일 수도 있지만, 그 이름으로 보아 ‘소나무 나라’란 의미가 아니었을까 한다. 졸본부여는 ‘소나무 벌의 부여’로 ‘아티스의 땅’ 이라는 의미였다.

-신채호는 단군조선의 아사달을 설명하면서 아사를 음이 {아홉}과 비슷하다 하여 달은 음이 달과 같다 하여 구월산을 아사달이라 함은 잘못된 것이라 지적하고 아사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사달은 이두문에 ‘아스대’로 독한 바 고어에 ‘송’을 ‘아스’라 하고 산을 ‘데’라 한 것이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아스’는 아티스의 ‘티’가 탈락된 말로서 ‘아티스의 나무’가 소나무였기 때문에 ‘아스’가 소나무를 지칭하게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신채호는 백제의 서울 ‘소부리/사비’를 ‘솝울’로 읽었다. <몽골비사>에 소나무 토템이 태양 숭배와 관련하여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까지 소나무가 아티스의 나무로 기능했을 수 있음을 말한다.

-테무진이 살았던 곳은 몽골부 중 키안이라는 부르는 자들의 소연합인 키야트명사 말미의 트는 복수를 나타내고 그 또한 보르지긴씨라는 가족들이었다. ‘키안’이라는 말은 프리기아인들이라는 말로 보인다. 그들이 모여서 결성한 연합체를 ‘키야트’라고 부른 것이고 그것은 ‘키야’에 복수를 나타내는 말 ‘트’를 붙인 것이다. 즉 ‘키야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는 부리야트에서 ‘트’가 복수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몽골인들 다수가 프리기아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라는 뜻이 아니고 초기에 몽골제국을 세운 사람들인 소수집단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나무를 자신들의 신목으로 여겼기 때문에 <몽골비사>에 소나무가 태양신 숭배와 관련하여 기록되게 된 배경이 아닌가 한다.

-‘발해국’에서 “왕을 가독부, 성왕, 기하라 불렀다” 여기서 기하는 프리기아인들의 나라라는 의미를 가진 발해국의 부여인들이 자신들의 왕을 ‘기아’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흉노를 호라 하고 그 동쪽에 있는 사람들을 동호....<산해경>대황북경에 보면 예족인 부여가 호라는 기록....호불여국이 있는데 성이 열씨이며 기장을 먹고산다.....‘호불여지국’을 정인보. 최남선은 부여국으로 보고 있다. 그럴 경우 <유호, 불여지국>으로 끊어 읽는 것이 타당하다. 즉 ‘호인들의 나라가 있는데 부여국이다’가 된다. 또한 리지린도 부여로 보았다.

-2세기 말의 응소는 고구려를 ‘구려호’라고 칭하고 있다.

-씨름은 그 경기 자체가 중앙아시아가 기원인 것으로 추정되어 양쪽의 교류 상황을 짐작케 한다.씨름이 중앙아시아에서 오르도스를 거쳐 고구려에 전달된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남시베리아의 사야노-알타이에 사는 투르크인들이 결혼식 축제에서 민족적 씨름인 쿠레쉬 놀이를 한다. 여기서 씨름을 ‘쿠레쉬’라고 부른다는 것은 필자가 앞에서 주장한 ‘코레’여신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여신인 ‘코레’앞에서 결혼식을 거행하고, 생명력을 뽐내는 놀이로 씨름을 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무령왕과 왕비의 관은 목관으로 되어 있었다. 세계적으로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으로 만들어졌다. 무령왕 재위 중 양국 간의 친선 교류의 고마움의 표시로 일본에서 보내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부활하는 나무인 아티스의 소나무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백제의 왕은 자신의 관재로 소나무를 선택했다. 금송을 일본인들은 ‘고오야마키’라고 하는데 이는 ‘고야의 나무’라는 뜻이다. 이 금송은 고야산의 특산이다. 고야의 나무라고 부른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조상의 영전에 바치는 풍습이 있다는 것과 ‘무덤의 꽃’으로 불린다는 점이다. 고야산은 가야산의 다른 표기로 프리기아인의 신성한 산이기 때문이다. 금송 가지를 ‘고야의 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가야의 나무이고, 부여의 나무이며, 프리기아의 아티스의 나무’라는 의미를 갖는다. 부활의 나무요 영원히 재생하는 나무로 조상들이 소나무와 하나 되어 부활하고 영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고분시대의 전방후원분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신분이 높았던 사람들에 한해 금송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는 사실에서 보듯이 금송은 부여계 귀족 혹은 그 영향을 받은 귀족들만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신산은 신들의 세계이고 모든 생명의 원향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백제금동대향로의 형태가 솔방울의 모습과 흡사함도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소나무 숭배는 시베리아나 몽골지역의 자작나무 숭배와, 현재에도 우리나라에서 숭배되고 있는 느티나무와는 다른 전통을 가진 것이다. 우리나라 나무 숭배는 크게 두 종류다. 하나는 느티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소나무이다. 전기의 숙신단군의 신목인 웅상이 후기의 벌제단군 시대를 주도한 프리기아인이 들어오면서 소나무로 바뀌면서 양자가 공존하게 되었다. 부여계가 우리 민족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소나무는 신수들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문화상징사전>에 따르면 마을을 수호하는 동신목중에 소나무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산에 있는 산신당의 신목은 거의 소나무라고 한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고구려인은 후장을 하는데 금 은 재물 화폐를 몽땅 죽은 사람의 무덤에 껴묻으며 돌을 무져 봉하고 소나무를 줄지어 심는다. 1428년에 세종이 건원릉에 행차하여 말하기를 ‘능침에는 예로부터 송백을 심어야 하는 법인데 쓸데없는 나무는 뽑아 버리고 송백을 심도록 하라’고 하였다.,<조선민속지>에 솔잎이 금기. 액막이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10월 상순에 행하는 성주맞이로 칭하는 무제에서는, 소나무 가지로 성주신의 신대를 만들어 이것으로 강신을 하는 행사가 있다. 천하대장군의 경우도 소나무를 재목으로 쓰는 것이 보통



5장 예(濊)에 관한 고찰

1.문헌에 나타난 예

-중국의 손진기는 <동북민족원류>에서 예맥족은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 북부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이다.

-<관자>에 나오는 예맥의 ‘예’는 지금의 난하지역에 거주하던 영지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씨춘추>에 나오는 예맥은 숙신 지역으로 들어 온 부여인 -<산해경>해외서경에 나오는 ‘벌제-과 숙신인의 연합 세력인 진번과 그 주변의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리키는 종족은 같을 수 있지만 그들이 살고 있던 시기와 장소는 달랐다. 진번 사람들은 ‘발.조선’의 ‘발인들’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후한서와 위지에서는 맥이 고구려 종족을 가리키게 된다. 예도 또한 특정 종족을 가리키지만, 전.후 양한대에는 동북방의 제종족을 총칭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예맥은 예족과 맥족의 병칭 또는 동북 제족의 총칭이라는 두 용법이 있었다.

2. 예족에 관한 여러 견해

-북한학계에서는 대체로 예족이 고조선을 주도한 것으로 인식은 필자가 6장에서 춘추시대 이후 후단군의 주도 세력으로 지목한 진번의 주도 세력이 예족인 프리기아인이었다는 점과 일면 연결될 수 있다.

-최학근은 이병도의 학설을 받아서 예맥족을 동일 민족으로........예맥족은 원래 진나라 북쪽에 있었었고 이들은 그 당시에 진시황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게 한 원인이 되었던, 어느 대군단족의 일부....최학근이 예맥족이 중국 서북쪽의 먼 곳에서 이주해왔을 것이라고 지적한 대목은 필자의 주장과 조금은 상통한다.

-김정배도 일단 예맥이 <관자>에 나오는 산융.고죽.영지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지적했으나 영지가 예족인 것은 지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대체적으로 예족은 송화강과 눈강 유역과 한반도 일부에 거주하고 맥족은 산동과 요동 및 한반도에 분포한 것으로 보아 양자가 나뉘어 있었던 것처럼 ....이는 중국 동북 지역에 살던 다수의 맥족 주민과 서쪽에서 이동해온 소수의 예족이 융합하여 예맥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독립적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현재의 난하 지역에서부터 북으로 동북으로 동으로 확산된 역사를 관과한 설명이다. 그는 한국의 신석기 문화를 이 땅에 남긴 주민은 오늘날 한민족 형성의 주축이 된 문헌에 나오는 예맥, 즉 알타이어 계통이 아니고 고아시아족으로 보고, 무문토기와 청동기를 사용한 예맥족이 현재의 한민족을 형성한 주체로 보았다.

-김원룡은 청동기. 철기 문화의 담당자는 예 맥인데 이에 예.맥은 피상적으로 잇달아 이동해 온 퉁구스계가 선주민인 고아시아계와 대체적으로 그리고 서서히 융합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이 예맥이 지역화한 것이 한반도 중남부의 ‘한’이다. 고 했다. 필자도 예맥이 지역화한 것이 한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다. 물론 한이라고 불리어진 세력이 구체적으로 어느 집단인가 하는데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대체로 예맥이 남하하면서 한이란 명칭이 사용된 점은 사실이다.

-천관우는 “오늘날 한민족에 직결되는 조상은 고문헌에 자주 보이는 ‘예’‘맥’과 ‘한’이며, 그것은 기층에 있어, 고아시아족 내지 고시베리아조그 통구스 내지 알타이족 이 두계통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데로 의견이 모아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예맥에 더하여 ‘한’을 주목했다. 필자도 이 한으로 불린 집단의 주채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이 한민족의 구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본다.

-백제는 국초부터 부여의 시조인 동명묘를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재는 4세기 중엽의 일로서 요점은 국가의 시조로 부여의 동명왕을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백제 왕실의 시조인 비류와 온조 위에 예맥국가 전체의 시조인 동명왕을 올려 놓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백제가 고구려와 대립하는 가운데 종주권 장악이라는 측면과, 왕실이 교체된 비류계와 온조계의 결속을 위해 초부족적 시조인 동명왕의 존재를 의식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예족 혹은 예맥족으로서의 동류의식은 이미 <관자>에 나오는 ‘발.조선’이나 <산해경>에 ‘벌제가 숙신에 들어갔다’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보아야한다.

-김택규는 예맥계 문화를 아무르계 문화로 파악.....청동기시대의 아무르계 문화는 분명히 농경문화는 아니다. 따라서 위의 암각화들의 문맥에서 아무르계의 어로. 수렵 문화가 남하하여, 이땅의 청동기시대에 그와 동궤의 문화를 울주 반구대 등의 어로. 수렵 문화로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정중환은 <가라서연구>에서 한(汗,韓)족은 가장 일찍 농경을....고조선에서는 맥족에게 농경을 가르쳐 고조선 부족사회를 형성하였고 다시 남하하여 한족(韓族)사회를 형성한 소위 천신 민족. 이것이 집약적ㅇ로 표현된 것이 단군신화에 보이는 호족 웅족 천신족이다. 호족은 예족이고 웅족은 맥족이고 천신족은 한족으로 보는 것이다.....영남지방은 마한지방에 비하여 동해지방가 직결되는 만큼 예족의 바탕이 농후한 지역......가라지방 사람들은 함경도와 강원도를 통해 내려온 예족들이 바탕을 이루고 한반도 서북방면에서 대량으로 내려온 한족汗들이 어로와 수렵단계의 예족들을 동화.....그뒤 한족들에게 농경을 배우고 중국민족과 북방민족들에게 금속기 문명을 받아들인 맥족이 남하하여 토착한 예족을 굴복시켜 부족국가 수립

-손진기는 예는 농업에 종사하였고 지금의 길림성 및 한반도 북부지역 토착민족,..맥은 목축을 위주로 비교적 서쪽에 치우친 지금의 요령성 동부 및 길림성 서부 지역을 무대로 했다가

-삼상차남은 예를 고시베리아계의 어민, 북몽골계 농경민을 맥



6장 프리기아와 관련된 나라 성 이름

1국어의 계통

-우리 국어에는 알타이 계통의 퉁구스제어와 일치하는 것이 제일 많고, 다음이 몽고제어,터키제어는 가장 적은 것으로

-강길운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지명을 연구 : 가야는 드라비다어계를 후기 신라는 터키어계를 고구려는 몽골어계를 각각 썼고, 백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서로 달랐다. 지배층은 몽고계의 고구려어를, 말기의 지배층은 드라비다어와 동계인 가야지배층어를 .....신라의 석탈해계와 김알지계는 터키어를 쓰는 민족이 직접 이주하였을 것이라고 주장......108개의 고구려 지명 중 몽고계가 68개가 대응, 만주어는 31개, 터키 일본어는 30개, 길약어 가야어는 13개...삼국시대에 터키어를 쓰는 주민이 모두 존재

2.삼국지 위서 30 오환선비비열전 한(韓)조의 부례구야는 ‘프리기아’의 음사표기이다.

-유득공의 <발해고>에서 왕을 가독부 성왕 기하라 부른다. 기하는 프리기아의 기하으 음차 표기....가독부는 터키어계와 관련, 터키 몽골계어 kodo(존자,터키)가 가독과 대응...발해에서 가독부는 가독+부로 여기서 부는 부(夫)리(里)의 부로 볼 수 있다. 가독부는 하늘의 아들 중의 부리이며, 존자 중의 앞선사람 즉 왕이라는 의미

-본(本)자는 상공음이 (buan)으로서 고대국어 볼, 벌, 발,부리, 블을 표기....고구려 졸본, 백제와 가야의 답발, 비자발 등...김해일대가 본가야로 지칭된는 것도 북방의 본계통과 무관하지 않다. 본가야는 부리가야 즉 프리기아의 음사표기

3.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은 불이성이었다.

-삼국지에는 불내(不耐)로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에는 불이(不而).....첫째, 고구려에서 땅을 내,노,나,라고 한것과 관련,,,프리기아의 2음절 표기로 불이라고 한 것을 프리기아의 땅이란 뜻으로 불내로 표기 둘째, 실수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포예(도피자)라고 한 것도 프리기아를 2자로 표기한 것

-불이(부리,비리,비례)는 보통명사로 프리기아의 부여인들이 움직이면서 정주한 곳의 중심도시로써 불이 혹은 리지, 불리지, 영지 등으로 불렸다

-나, 노, 내 등의 어휘를 사용한 사람들은 부여계 주민이 아니고 그 이전에 동북지역에 살던 숙신, 조선 혹은 맥족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일 것이다. ....나는 천 양등과 통용되며 땅을 뜻하는 여진어 만주어, 아무르 강 분지의 나나이족......고구려 초기의 나 집단들은 하천이나 강변의 토착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이성은 프리기아의 성, 평양의 평이나 불이의 불은 프리기아의 음차어이다. 즉 평양은 프리기아의 땅이란 뜻으로 불내와 같다. 즉 불내는 불이내의 준말로 프리기아의 땅......불내는 부여의 땅이라는 뜻으로 국내도 나라의 땅(내,양)이라는 뜻이며 평양도 부여의 땅이란 뜻

4.프리기아가 나라이름이나 성이름으로 사용된 예

-신라에서 왕을 마립간, 이는 마립은 두頭를 뜻한는 마리의 표기. 고구려의 막리지의 막리도 머리....프리지아 사람들은 지도자를 불리지 혹은 부리지....신채호는 .......기원전 5~세기경에 블리지라는 사람이 조선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직예,산서,산동 등지를 정복하고 대현부근에 나라를 세워 자기이름으로 나라이름을 삼아 블리지국이라 하니 ...요서의 비여나 산동의 부역이나 산서의 비이가 다 ‘불’의 번역이다. 발해의 발도 음이 불이고 또한 불리지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진번의 번은 프리지아의 프리를 음차한 벌 부리의 다른 표기. 번은 부리로도 표기할 수 있고, 막 혹은 마리로도 표기..이런 사실을 수차야에 대입하면 수는 부리임로 부리+차야 즉 프리지아의 음사표기...우수주는 소머리로 표기되기도 하고 소부리로도 표기할 수 있는데, 소머리의 다른 표기인 수차야는 프리기아인들과 관련...소머리 혹은 소부리....소부리군은 또한 사비라고도 했다....

-수읍(首邑) 서울의 뜻으로 사용된 소부리의 예는 부여계의 이주와 함께 이루어진 일본의 대화조정과 관련해서도 사용....소후, 소에는 신라의 서라벌, 서벌, 백제의 소부리

-거주지역의 중심지를 소부리...소부리는 소+부리지아 ..브리지아는 성의 의미...신라 백제에서 성을 기, 지로 기록..지아를 축약해서 표기한 것

-이벌찬은 관직의 제일 우두머리...이는 위,우를 나타내고 벌은 부리의 축약형, 찬은 한,간 등 지도자를 나타낸다. 이벌찬도 소부리 한 혹은 소머리 한으로 읽을 수 있다. 한문으로 각간(角干) 표기...소부리는 프리기아아계 주민의 언어이고 소머리는 숙신계의 언어이다.

-대로는 막리지의 막리로 표기된 우리말 마리 마루의 마를 대의 훈으로 -루는 로의 음으로 읽도록 표기

7장 후단군의 나라 진번

1.프리기아인들의 이주와 후단군

-프리기아인들 기원전 7세기 초 중국 동부 지역의 중심, 제나라 환공과 대결(환공이 산융을 공격할 때 영지도 공격받음). 제나라와 무역 거래(발,조선), 전국시대에는 연나라와 대결(동호 중에 섞여 있던 영지.진번), 기원전 3세기 초 연의 진개장군의 공격을 받고 한반도와 북만주로 밀려나서 부여로 부상해서 고구려 백제 건국

-숙신으로 들어와 습합된 집단이 진번으로 불린 집단, 진개의 공격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부여에 참가하고 한반도에 들어온 사람들은 삼한의 주도세력

-중국 동북 고대사의 주도적 두 집단은 천손이라고 생각하는 외부이주집단으로 환웅집단과 프리기아 집단

-환웅은 태백산 신단수 밑에서 신시를 열었는데 단군은 단목의 터에 자리를 잡고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았다는 표현은 환웅과 단군의 세력이 다르다는 것

-단군신화가 잊혀진 이유를 노태돈은.....고구려 신라 오아조는 그 기원을 하늘에서 찾아 천손임을 자처하는 독자적인 건국신화를 가졌고 백제 왕실은 부여 고구려에서 기원..삼국은 이미 각기 독자적인 기원신화를 지녔니 때문에 삼국의 지배층에서 자국이 고조선에서 비롯한다는 계승의식은 별달리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단군신화는 발이나 진번과 관련이 있다고...프리기아인들이 난하로 들와 하나는 제 환공의 공격으로 시라므렌 강 유역으로 이동했고, 하나는 숙신으로 단군신화와 관련, 북쪽으로 이주한 프리기아인들은 독자적인 우주 생명관을 유지했고 연의 공격으로 동호가 격퇴될 때 북쪽으로 이동한 진번사람들과 제나라 환공 때 북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이 만나서 부여를 건국...그런데 제 환공 때 북으로 이동했던 프리기아 후예로 추정되는 고리국에서 내려온 동명이 주도권을 행사해서 천손관이 우세. 그리고 한반도의 서북지역으로 이동한 고조선은 실제에 있어서는 환웅이나 단군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단군에 대한 관념은 자연히 약화됨

-단군 신화를 민간신앙차원으로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고조선의 후예가 아니라 진번사람들이 가능성...이세력들은 전국시대에는 고조선이 지역리더가 됨으로 조연으로 기록되고, 진개공격 때 북으로 간 사람은 부여의 주민이 되었고, 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은 황해도 지역과 그 이남 으로 이동하였다. 진개 파동이후 한무제에게 멸망할 때까지 고조선과 위만조선이 역사를 주도했음으로 단군신앙은 약화될 수 밖에 없었고,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진번지역의 민간신앙으로 전해오다가 원과 항쟁시 다시 부상

-황해도 구전 설화에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이 곰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고, 여우와 혼인하여 기자를 낳았다“...난하 하류 지역 고죽국이 여우를 토템......천손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기자족은 여우토템을 가지고 있었고 곰족은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기자족이 활동하고 있는 시기에 천손이 이주해 왔음을...이는 시기적으로 단군이 탄생한 것이 기자가 동쪽으로 이주한 후의 일임을 말한다.

-당시 사람들은 단군을 고조선계 주민과 부여계 주민을 통합할 수 있는 중심적 존재로 보았던 것...대조영은 단군을 통해서 국민통합을 시도....대조영은 단군봉장기년이라는 책을 서술하고 동생인 대야발에게 단기고사를

2.벌제가 후단군이 되었다

-프리를 벌로 지아를 제로 음사 표기....정사가 아닌 산해경에 프리지아의 제가 숙신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벌제로 기록

-산해경 해외서경에 나오는 신목인 웅상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와 같은 나무로 보야야...단군왕검은 처음에 숙신이라 불린 집단의 지도자

-한규철<숙신.읍루연구>:남만주의 민속과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천산. 신산으로 여겨졌던 백산에 대한 토착인들의 경외사상이 한족들에게까지 알려져 있어다는 점인데, 이것은 산해경가 진서에 숙신의 신목이라고 할 수 있는 백산의 웅상, 낙상껍질로 중국의 새 왕들이 옷을 지어 입었다는 기록에서도 잘 입증

3.숙신과 조선

-은주 교체기에 주 무왕이 기자를 실제로 조선에 봉했든지 아니든지를 떠나서 난하 주변과 그 동쪽에 상당한 정치적 파동.....숙신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하였을 가능성....삼국유사에 단군왕검의 장당경 이주설로

-우리 사학계에서는 대체로 숙신과 조선을 같은 집단으로...최남선은 숙신과 조선은 주신의 다른 표현, 정인보는 조선이 한족들에 의해 숙신 식신 직신으로 기록, 신채호도 주신은 숙신 직신 식신이고 조선을 가리킴, 김정학은 숙신이 관자의 발, 조선의 조선과 같은 민족

-중국 동북지역의 대표세력은 숙신 식신 주신으로 불리다가, 윤내현이 요령성 지역의 청동기 문화의 급격한 발전이 기원전 9세기경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점은 숙신과 조선이 교체되는 시기에 해당된다고 지적한 무렵에 어떤 변화의 물결속에서 과거 숙신으로 불리던 지역에 조선이라는 명칭을 가진 사용하는 집단이 새로이 부상, 이 집단이 영향권 밖(요동지역으로 추정)으로 이동한 단군세력들은 계속 숙신으로 불리었다. 그 후 기원전 7세기 초중엽쯤 프리기아인들이 난하지역으로 들어왔을 때 핵심세력이 현재의 요하 동쪽으로 들어 왔는데, 그들이 바로 산해경 해외서경에서 말하고 있는 숙신국에 먼저 들어간 벌제(프리기안인 혹은 프리기아의 왕)라고 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들은 문헌자료에 발,천독 진번이라는 집단으로 나타난다.

4.조선은 요서에 진번은 요동에 있었다.

-포괄적으로 고조선의 강역을 비정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숙신과 조선 그리고 예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이들이 살았던 지역을 모두 고조선의 강역으로 보려는 데 있다. 신석기시대 이래로 중국 동북지역의 주민은 일정한 시차를 두고 계속 동쪽으로 파도처럼 밀리는 역사가 진행

-난하 동쪽의 지역명칭 비교

책 이름

지역명

지역명

책이름

지역명

지역명

1.산해경

조선

천독

6.사기

조선

진번

2.산해경

조선



7.염철론

동호

조선

3.관자



조선

8.위략

조선

만번한

4.전국책

조선

요동

9.산해경



숙신/벌제

5.사기

동호

산용









-고조선이 요서에 있었음을 말하는 7가지 근거

①사기 <흉노열전>진개가 공격한 동호라는 집단에 고조선이 포함되거나 주도세력이 고조선...심양 정가자와 유지의 인골이 동호족의 것②진개기 공격한 동쪽의한계선이 만번한 지역인데 그곳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아니고 진번세력의 중심지. 그러므로 고조선은 최소한 이서 지역에 있었어야 한다③④⑤⑥⑦수문비고에 고죽국은 조선종의 별종

5.만번한은 진번의 고도(古都)이다.

-북부여의 해모수를 단군이라 칭한 것은 연나라 진개가 동호를 공격했을 때 요동에서 북쪽으로 밀려갔던 진번의 후예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비류국왕 송양이 자신을 선인(仙人)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선인은 단군을 가리키는 것. 비류귝이나 졸본부여는 주몽이 남하하기 이전부터 그곳에 살던 부여인(진번)들의 나라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진번의 진은 숙신의 신에서 나오고 후세의 여진의 진은 진번의 진을 따른 것

-손진기<동북민족원류>:숙신이란 명칭은 순.우때에 벌써 보이기 시작하여 상,주를 거치면서 보이다 전국.진.한 때에은 진번이라 칭...위진에는 숙신으로....요가 발해를 멸망하자 사서에는 여진이 등장했는데, 여진은 혹 주려진 주선 등으로도 불려 곧 숙신의 음전임을 알 수 있다.<여진역어>에 의하면 여진어 중에 숙신을 주선으로 읽는다고 했다. 원.명 때에는 여전히 여진으로 불렸으며 청초에는 주신으로 불리었으니 숙신의 원류가 매우 길어 일맥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졸본부여국은 ‘소나무 골 부여국’이고 비류국 송양은 ‘부여국 소나무 땅(골)

-다물은 알타이어와 터키어 tamir와 대응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96 공지 몰입의 즐거움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2 정현경 2007.05.31 3797
1395 자연과학 "아윈슈타인이 직접 쓴 물리이야기"를 읽고 6 표태수 2009.07.01 3792
1394 공지 '스피노자의 뇌'를 읽고 2 엄준호 2007.07.24 3792
1393 공지 제인 구달의 <희망의 밥상>을 읽고 김춘호 2007.02.13 3735
1392 공지 탐독-이정우 2 장현도 2008.05.21 3734
1391 공지 '불편한 진실'을 읽고 2 엄준호 2007.08.05 3731
1390 공지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장현도 2008.05.02 3710
1389 공지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임성빈 2005.10.27 3695
1388 공지 괴짜 경제학 1 김미순 2008.01.11 3687
1387 공지 [59] 자오선 여행 (쳇 레이모) 3 서윤경 2008.12.21 3676
1386 공지 개밥바라기 별 박경희 2008.11.13 3648
» 공지 부여족의 이동과 기원 고깔모자를 쓴 단군 이병록 2007.01.01 3617
1384 공지 호텔왕 힐튼 자서전을 읽고.. (45th) 송근호 2007.06.25 3607
1383 기타 태양과 별자리 이야기 - 시대정신을 읽고 신동찬 2009.09.26 3606
1382 공지 박완서 산문집 [두부] 소개 : 한겨거레신문 전재 현영석 2002.12.15 3580
1381 자연과학 최초의 3분 1 조태윤 2009.02.13 3569
1380 자연과학 뇌 생각의 출현 - 박문호 6 손진경 2009.07.19 3568
1379 문학예술 폼페이 3 조태윤 2009.02.03 3533
1378 공지 1월달의 나의 독서목록 안유선 2003.06.25 3528
1377 인문사회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있다>를 읽어가면서 신영호 2009.11.28 352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72 Next
/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