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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대의 사상가 이지(호. 탁오)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벼락같은 그의 발언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배웠지만, 정작 성인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공자를 존경하지만, 공자의 어디가 존경할 만한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난쟁이가 사람들 틈에서 연극을 구경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잘한다는 소리에 덩달아 따라 하는 장단일 뿐이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서 짖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내가 짖은 까닭을 묻는다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쑥스럽게 웃을 수밖에...”


 



이 말은 단번에 거울처럼 나를 비추었다. 너? 완전한 자유 의지를 바탕으로 너의 생각을 말한 적이 얼마나 있느냐? 다른 사람들이 박수칠 때 너도 박수치지 않았느냐?


이지의 말이 칼처럼 가슴을 후벼 팠다.


 


중학교 시절, 여름방학 때 목포에 있는 도자 박물관(정확한 이름은 잊었지만)에 간 적이 있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등을 보고 그날 저녁 일기에 청자빛의 아름다움에 대해 장황하게 썼던 것 같다. 다음 날, 그 일기를 보셨는지 엄마가 물었다. “넌, 청자 색깔이 진짜 그리 이쁘든? 난 하나도 모르겠던데...”

그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곤, 일기장에 썼던 건 내 느낌이 아니라 교과서의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지금은? 지금의 나는 당당한가? 내 생각에는 표절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참회의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이지(1527~1602). 호는 탁오다. 이 전기는 그가 54세, 4품 관직을 버릴 때부터 시작한다. 진정한 이지의 인생과 사상이 이때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그를 얽매고 있던 관직과 가족을 버리고 완전한 자유를 얻음으로써, 거침없이 생각하고 비판하는 진정한 자유 사상가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는 고인 물과 같았던 당대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76세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사상범으로 죽게 된다(감옥에서 면도칼로 자결했다).

 


중국은 한무제 시대부터 명까지 약 1700년 동안 사실상 공자가 지배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공자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은 패륜이었으며, 공자만이(혹은 주자학만이) 절대 진리로 통하는 고인 물과 같은 시기였다. 주자에 의해 철통처럼 지켜지던 공자 사상에 대해 어떠한 변칙, 변용, 예외도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을 멈추고, 입을 다물고, 노숙한 표정으로 그저 공자 말씀만 외울 뿐이었다.

‘얌전히 노예가 되었던 시대. 노예가 되려고 했지만 되지 못한 시대. 중국인에게는 이제껏 이 두 시대만이 있었을 뿐이다.’-루쉰. ‘유교의 도덕은 모두 노예를 훈련하기 위한 규범’이었다.

 


이지는 ‘공자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공자만 존중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500년 전의 사람이지만, 거짓과 진실을 분간하기 어려운 지금 시대에 그의 말을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인간의 욕구에 대해

그는 금전, 성공, 권력 등과 같은 인간의 욕구를 긍정했다. ‘욕심 없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그는 사심(私心)이 공정을 세우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지 또한 사심이 있었다. 그는 사상으로서 불멸하기를 갈망했다.

그는 가난으로 고생했다. 자식들 몇이 굶어죽을 정도였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54세까지 관직에서 버텼다고 할 수 있다. 이 지경에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억누른다’는 공자의 말은 그에게 통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재물과 권세는 실로 영웅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요, 성인이 반드시 이용해야 할 것이니 어찌 없어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성색(聲色)을 즐기고, 부귀를 사랑하고, 현달하고 싶어 하고, 삶에 연연하며 죽음을 두려워하고, 구속과 속박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모두 사람의 자연지성이요 완전히 정당한 것이어서, 근본적으로 억압하고 숨기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간언하다 죽는 것, 의리를 지키기 위해 굶어 죽는 것은 불필요하며 가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생명 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 학문과 교우에 대해

관직을 떠난 이후, 이지의 인생은 책과 벗(진정으로 말이 통하는)을 추구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독서인이라 자부했다. 그는 ‘나의 시각으로’ 책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세계는 얼마나 좁으며, 네모난 책은 얼마나 넓은가!’

그는 배움이 의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여성 지기였던 매담연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는 이렇게 썼다. ‘배우는 사람이 의문을 품지 않으면 이를 큰 병통이라고 한다. 의문이 있어야 그것을 누차 깨뜨리게 된다. 그러므로 의문을 깨뜨리는 것이 곧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현행의 모든 학설을 대담하게 회의하고 의문을 던졌다.

‘선대 유학자는 억측으로 그 뜻을 말하고, 부모와 스승은 이를 답습하여 암송하고, 어린아이들은 눈이 멀고 귀가 먼 채 그 말을 듣는다. 만 명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한결같이 똑같아서 깨뜨릴 수가 없다. 수천 년을 일률적으로 내려왔는데 자신들은 알지 못한다.’

유학만이 그러한가? 지금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들. 그것은 진정 ‘내가’ 가슴으로 아는 것인가? 타인의 억측이 아무 생각 없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지는 않은가? 무서운 일이다. 진정 ‘내 말’이 아니라면 입을 다물 일이다.


이지의 지기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었다. 마음이 통한다면 어린 소년, 양반집 젊은 여인과도 사상을 논했다. 여성도 재능과 지혜에 따라 얼마든지 도를 공부하고 능력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거침없는 행동 때문에 온갖 추잡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는 소인과 대인도 구별하지 않았다. ‘소인이라고 재능이 없겠는가? 소인이라고 누런 낯으로 늙어 죽는 것을 달갑게 받아들이겠는가?’

중국으로 건너온 박학한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세 차례나 만나면서 서양의 사상과 과학을 배우기도 했다.

한 사대부가 이지를 사모하여 찾아오자 그는 한마디만 툭 던졌다.

“결국 벗어나지 못해.” 이는 사대부에 박힌 ‘속박을 벗어나 자기의 참된 지식과 명철한 견해를 갖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대부들이 저속하게 여기면서도 몰래 읽는 통속문학도 이지는 가리지 않았다. 그는 편향되지도 않고 편애하지도 않았다. 그가 중요시한 것은 진정한 마음에서 나온 글이냐의 여부였다.

그는 배움에 있어 근기(根器)를 중요시했다. 뼈가 있어야 배울 수 있다고 그를 따르는 지기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는 제자를 두거나 학파를 만드는 것도 혐오했다. 오로지 진리를 이야기하며 서로 배울 지기만 필요로 했을 뿐이었다.)

 


* 인생에 대해

앞서 가는 누군가를 따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이지의 가장 중심된 철학이다. 아무리 성인이라도 무작정 따라 한다면 천하고, 하잘 것 없는 쭉정이기 될 뿐이라고 했다.

빈(貧)이라, 식견이 없는 것보다 가난한 것은 없고

천(賤)이라, 기개가 없는 것보다 천박한 것은 없다.

‘선인(善人)은 남의 자취를 밟지 않는다.... 사람이 끝끝내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앞사람의 발자취를 밟으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그가 제자두기를 거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각자 공부하고, 이야기하며 배움을 서로 나누고, 다시 제 길을 추구해간다. 이것이 그가 원했던 관계이다.

이지의 ‘자기 삶을 먼저 위하고 자기 길을 가라는’ 사상은 유교의 틀로 짜여진 당시의 사회 질서를 위태롭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지의 책에 대해 사대부들은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을 취했다. 감동하고 존경하거나, 분노하고 멸시하거나.

이지는 사대부에 의해 죽었지만, 사후 그의 책 <분서>, <장서>, <설서> 등은 은밀하게 유통되어 사대부를 포함한 지식인들의 필수품처럼 여겨졌고, 일본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 글에 대해

‘글이 그때 그때 감흥이 일어나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거나 혹은 자기 나름대로 경험과 연륜을 통해 나와 천고에 바뀌기 어렵다면 모두 무병 신음하는 것이어서 잘될 수가 없다... 자기의 심사를 표현하므로 잘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잘되는 것일 따름이다.’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은 본래 동심(거짓 없고 순수하고 참된 마음)을 지켜서 잃지 않게 하려는 것이지 대의를 절취하고 성현을 사칭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창작이라는 것은 느낌이 있어서 흥이 일어남을 도저히 멈출 수 없거나, 혹은 마음에 격동되어 잠시라도 말하는 것을 늦출 수 없어서 나오는 것이다... 말이 내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말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아무 맛이 없다’.

그는 밖에서 들어온 견문과 도리를 자기 마음으로 삼으면 거짓 사람이 거짓 일을 하고 거짓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표현하기만 한다면 문체의 높고 낮음을 떠나 훌륭한 글이라고 했다. 뭔가를 말하거나 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마음에 되새겨야 할 말이다.

 


이지가 지금까지도 우뚝 서 있는 이유는 그의 독립된 인격 때문일 것이다. 배우되 무작정 따라가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과 삶은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것은 여전히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완벽하지 않다. 그의 사상을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유교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가 다르지 않은가! 모두가 고개 숙여 침묵했던 시기에 자신을 둘러싼 구속의 끈을 모두 끊어버리고 거침없이 공부하고 말하고 썼다는 것은 엄청난 힘을 가진 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진보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어떤 신성한 것에 대한 모독으로 나타나고, 낡고 나날이 쇠망해가면서도 습관적으로 숭배받던 질서에 대한 반역으로 나타난다.“ - 엥겔스


 

이단자 이지. 그를 딛고서야 비로소 모두가 한 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 역시 그를 딛고 한 발 나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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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준호 2007.08.06 00:08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읽어야 할 책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힘들겠다는 생각보다는 왠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더 많은 좋은 책을 소개해 주세요. 더더 많이 읽으렵니다.
  • ?
    송근호 2007.08.06 00:08
    양경화님! 글 잘 봤습니다.

    빈(貧)이라, 식견이 없는 것보다 가난한 것은 없고

    천(賤)이라, 기개가 없는 것보다 천박한 것은 없다.


    라는 두 문장이 자꾸 뇌리에 남는군요 .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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