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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7 10:03

'앎의 나무'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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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나무


- 인간 인지 능력의 생물학적 뿌리





움베르또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 1984(2007역, 최호영)





한번에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었다. 구조접속, 메타세포체, 자연표류 등 생경한 용어들이 많이 사용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식(활동) 또는 인지(행위)을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특정 인식 작용과 관련한 구체적 기작을 논의하고 있지는 않다. 대신 인식(활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려 하고 있다. 즉 말 그대로 인식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칠레라는 낯선 곳에 있는 훌륭한 과학자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순간이었다. 더구나 린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이 두 저자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대학자들간의 사상과 사상의 network 속에 나 자신도 끼어드는 느낌이었다.





1) 인식의 생물학적 뿌리 - 생물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인식 또는 앎이 있나 없나를 평가하는 기준은 우리가 어떤 물음을 가지고 평가에 임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에서 물음은 ‘생물이 특정 환경에서 생존을 지속케 하는데 효과적인가?’ 이다.


따라서 생물의 생존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모든 활동은 인식활동 즉 앎이 있는 활동이다. 예를 들면 어떤 생물이 ‘저기’에 있는 먹이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면 이것은 그 생물이 먹이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며 환경 속의 먹이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포식자를 피해 달아나고 있다면 이것은 생물이 포식자, 포식자의 다가옴, 생명의 위협 등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경구로 표현하고 있다.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p33


“삶이 곧 앎이다.” p197





후자의 경우는 아예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 생물의 존재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식활동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앎을 평가하기 위해 위와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이에 대한 논리적 이유는 없다. 저자들에 따르면 사실 엄밀히 말해 ‘인식’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식 또는 인식활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생물학적 현상을 의미론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저자들은 이와 관련하여 잠수함 안에서 한 번도 밖으로 나온 적이 없이 평생을 살면서 잠수함을 잘 조정하게 된 어떤 사람이 바닷속에서 암초와 같은 장애물과 부딧히지 않고 수면에 떠올라 관찰자인 우리와 조우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깥세계를 모르는 조종사가 탄 잠수함의 역동적 상태변화란 결코 바깥의 관찰자가 보듯이 세계에 대한 표상을 가지고 작업한 결과가 아니다. 이 역동성은 ‘바닷가’, ‘암초’, ‘수면’ 따위를 포함하지 않는다. 오직 계기가 가리키는 것들 사이의 상관관계가 어떤 범위 안에서 존재할 뿐이다. 바닷가, 암초, 수면 등은 오직 관찰자에게 타당한 실체들이다. 잠수함에게 또는 잠수함의 구성요소로 작업하는 조종사에게 이런 것들은 타당하지 않다. 이 비유에서 잠수함에게 타당한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p156-157





그럼 이제 무엇이 남는 것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물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점에서도 저자들의 견해는 독특하다. 생물을 정의함에 있어 그것을 특징지우는 속성들을 나열하는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생물은 자율적 자기생성체계’라고 간명하게 정의한다. 즉 생물은 자발적으로 주위 환경으로부터 에너지와 물질을 끌어들여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체계 또는 조직이라고 정의한다. 생물에게 독특한 점은 조직의 유일한 산물이 자기 자신이라는 점, 즉 생성자와 생성물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자기생성체계의 존재와 행위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자기생성조직의 특성인 것이다.


  생물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환경과 생물이 상호작용을 한 결과 서로의 구조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저자들은 ‘구조접속’이라고 정의한다. 생물은 구조접속 과정에서 자신의 구조를 적절하게 변화시키지 않으면 그것의 정체(identity)를 보존할 수 없다. 시간적으로 보면 환경과 생물은 구조접속을 통해 끊임없이 서로의 구조를 변화시켜 왔다. 여기에는 계획도 목적지도 없다. 그래서 저자들은 이를 표류(drift)라고 표현했다. 관찰자가 보면 환경이 적합한 생물을 ‘선택’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정처없는 표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환경과 생물이 서로의 구조를 해체하지 않고 양립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적응’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저자들은 생물학계를 지배해온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또는 최적화’라는 개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즉 진화상에서 ‘더 잘 적응한 생물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적응한 생물이 살아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적응은 필요조건의 문제이며 그것을 충족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실제로 물 속을 헤엄칠 수 있는 생물의 형태가 얼마나 다양한지만 한 번 생각해보아도 저자들의 생각에 수긍이 갈 것이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으니 원래의 물음을 다시 상기해보자. ‘인식’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현상에 대한 관찰자의 의미론적 기술에 불과하다면 대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자율적 자기생성체계(생물)와 환경사이에 구조접속이 매순간 보존되는 경로(곧 적응)를 끊임없이 밞아가는 구조적 표류가 남을 뿐이다.





2) 생물학적 영역에서 인간적 영역(언어, 정신, 자기의식)까지 





저자들은 생물의 인식활동(인지적 행위, 지각)에 대한 이해를 인간의 영역인 언어, 정신, 자기의식 등의 설명에까지 일관성있게 확대시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생물학적 현상계라는 큰 테두리 속에 묶여 있는 한 이와 같은 일관성의 추구는 당연하고 타당한 것이리라.


이야기를 진전시키기에 앞서 인간의 몇가지 특징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인간은 다세포생물이다. 저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세포들이 2차 등급의 접속을 통해 산출한 메타세포체의 한 부류이다. 또 인간은 발달한 신경계를 지니고 있으며 3차 등급의 접속을 통해 사회라고 하는 무리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신경계의 의의는 그것의 존재가 인간을 포함한 다세포생물이 취할 수 있는 행동(구조 변화)의 폭을 극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도록 한다는데 있다.


  이제 사회적 체계가 생겼다는 것은 구성원들 사이에 지속적인 구조접속 곧 공동개체발생이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각 개체는 다른 개체와 이루는 구조접속의 일부인 한에서만 사회적 개체의 일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찰자로서 구성원들 사이의 행동조정을 기술할 수 있다. 저자들은 사회적 개체의 구성원들이 조정된 행동방식을 서로 유발하는 일을 의사소통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사회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접속을 통해 서로 엮인 채 저마다 자기생성을 실현하고 있는데 바로 이 사회적 접속의 영역에서 생긴 행동방식이 의사소통적 행동인 것이다. 또 의사소통적 행동에는 타고난 것과 배운 것이 있을 수 있는데 후자를 가리켜 ‘언어적 영역’이라고 저자들은 정의한다. 언어적 영역은 언어의 바탕을 이루지만 아직 언어 자체는 아니다. 언어적 영역의 행동 한 가지를 예로 들면...


일본원숭이 무리에서 어떤 원숭이 한 마리가 관리인이 던져 준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으면 모래도 제거할 수 있고 맛도 좋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모방을 통해 무리의 다른 구성원들사이에 급속히 퍼졌다. 바로 이와 같이 무리 속에서 배운 ‘고구마를 씻어 먹는’ 행동과 같은 것이 언어적 영역의 행동인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삶 속에서 언어적 영역을 산출하는 유일한 동물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만이 언어적 행동조정을 통해 새로운 현상계인 언어의 나라를 산출한다. 이것은 행위의 공동개체발생적 조정을 통해 생긴다. 사회적 체계의 구성원들이 함께 살면서 겪는 공동개체발생적인 구조적 표류야말로 언어적 영역의 핵심이다. 


  재귀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언어가 생기려면, 언어적 영역에서 언어적 영역 자체에 속한 행동들의 상호조정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언어가 생기면 언어적 구분의 언어적 구분인 객체(개념)도 생긴다. 객체는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행동조정들을 가리는 작용을 한다. 예컨대 ‘탁자’라는 낱말은 우리가 어떤 탁자를 둘러싸고 하는 행위들과 관련해 우리의 행위를 조정한다. 그러나 ‘탁자’라는 개념은 우리의 구분행위가 ‘탁자’를 산출한다는 사실을 못 보게 가리기도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언어 안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성찰적 과정 속에서 언어적 구분을 언어적으로 구분할 때 우리는 ‘말한다’.


  언어의 세계가 출현하게 되면 인간의 행동영역은 크게 변형된다 그리고 새로운 현상이 창발한다 바로 성찰, 의식같은 현상들이다. 이른바 정신이란 것을 경험하는데 언어는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현상들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여기에는 언어의 근본 특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언어는 언어를 가지고 작업하는 이에게(바로 언어적 구분의 언어적 구분에 힘입어) 주위 상황과 자기 자신을 기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나’와 ‘주위 환경’을 구별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제 언어의 세계에서 ‘나’라는 구분된 응집체는 자율적이고 제귀적인 기술활동을 통해 그 정체성과 적응을 보존해 나간다.





“나는(나를 구분하는) 재귀적인 언어적 구분들이 몸 안에서 작업적으로 교차하여 생긴 사회적 단일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적 상호작용의 그물체 안에서 움직이면서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재귀적 기술활동을 꾸준히 계속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언어적 작업의 응집성을 유지하고 언어의 나라에서 적응을 보존한다.” p260-261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저자들이 말하려는 ‘나’ 즉 자기의식이 출현하는 과정은 저자들이 언급한 생명체의 출현과정과 유사하다.





“유기분자의 영역 안에 다양성과 신축성이 생김에 따라 자신을 이루는 분자들과 같은 부류의 분자들을 다시 생산하고 통합하는 분자반응들의 그물체가 생기게 되었고 이 그물체는 자기를 실현하는 가운데 주위 공간에 대한 경계를 스스로 만든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생산하면서 자신의 경계도 결정하는 분자적 상호작용들의 그물이 바로 생물이다.” p49





유사하게 ‘나’란 언어의 세계가 확장됨에 따라 재귀적이고 순환적인 개념들의 상호작용의 결과 창발적으로 출현한 구분된 응집체이다. 그리고 언어 환경과의 언어적 접속 과정 속에서도 해체되지 않고 그 정체성을 보존하는 그 무엇이다.





끝으로


한 분야에서 일각을 이루고 자신의 전공분야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세계와 윤리(참고로 윤리에 대한 저자들의 견해는 10장 끝부분에 언급되어 있다)에 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지게 된 저자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전에 조나단 싱어(‘자연과학자의 인문학적 이성 죽이기’) 박사에게서 느꼈던 부러움을 다시 느낀다. 나도 이제 단순한 이해를 넘어 세상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솔함이고 시기상조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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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호 2007.06.07 10:03
    바렐라 교수와 달라이 라마의 오랜 친분으로 뇌 과학자와 달라이 라마의 만남이 주선되었습니다. 심리학자 이정모 교수의 홈페이지는 바렐라 교수의 주장으로 시작합니다. 그 사이트에(http://cogpsy.skku.ac.kr/ )에 몇 년전에 바렐라의 행장이 나오는데 병상에서 바렐라를 만나본 동료학자가 발레라의 모습에서 오랜 수행한 선승의 모습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카푸라는 "생명의 그물" 의 후반부를 전적으로 바렐라와 마투라나(바렐라의 스승)의 생명철학을 설명하고 있을정도로 현대 생명 철학에 깊은 영향을 준 학자들이지요. 바렐라의 "the embodied mind"도 국내 번역되었습니다. 엄준호 박사님 좋은 독후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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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준호 2007.06.07 10:03
    바렐라의 'the embodied mind'는 혹시 '인지과학의 철학적 이해'란 제목으로 출간된 책이 아닌지요. 꼭 읽어보겠습니다.
    아울러 항상 좋은 책을 소개해 주시고 독서의 방향을 제시해 주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박박사님의 호의에 보답하는 길은 열심히 책을 읽고 독후감을 올리는 일 밖에 없는 듯하여 죄송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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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경화 2007.06.07 10:03
    너무나 조심스럽게 말씀하시지만, 글에서 엄박사님의 세상을 보는 눈이 느껴집니다. 책을 사놓기만 하고 아직 못 읽었는데 저도 엄박사님처럼 이해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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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호 2007.06.07 10:03
    '인지과학의 철학적 이해'가 맞습니다. 시중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울 겁니다.
    구하시다 힘드시면 알려주십시요. 아침에 서가에서 그 책을 한 참 찾았었는데 아마
    어딘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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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우 2007.06.07 10:03
    '생물학적 현상을 의미론적으로 해석한 것이 인식이다.' 알면 알수록 신비롭고 미스테리한 앎의 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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