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과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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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과학철학 노트]


"유물론과 진화론은 함께 양립할 수 없다!"


아마도 언뜻 생각해볼 경우, 유물론과 진화론은 서로 상통한다고 보는 게
대체적인 일반적 시각이겠지만, 화이트헤드는 그것들이 저마다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기초 가정들(assumptions)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이들 간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고 보았었다. 그의 얘긴 다음과 같다.


“사실상 철저한 진화론 철학은 유물론과 양립할 수 없(다). 유물론 철학의 출발점인 원초적 소재, 즉 물질은 진화할 수 없다. 이 물질은 본질적으로 궁극적인 실체인 것이다. 유물론에 따를 때, 진화란 물질의 각 부분 사이의 외적 관계의 변화를 기술하기 위한 또 하나의 말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외적 관계들의 한 집합은 외적 관계들의 다른 모든 집합들과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진화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목적도 진보도 없는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 진화론의 주안점은 복잡한 유기체가 그에 선행하는 보다 덜 복잡한 유기체의 상태로부터 진화한다는 데에 있다”(SMW 107)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진화>와 <변화>를 분명하게 구분하는데, 진화는 변화에 속하지만 변화가 진화에 꼭 속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봤었다. 즉, 외적 관계들의 변화만으로는 진정한 진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체가 그저 부분의 합이 되는 식의 변화 양상들뿐이라면 사실상 여기서는 그 어떤 새로움도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연의 생명현상들을 관찰해볼 경우, 부분의 합은 이전으로 환원되지 않는 전체 그 이상으로도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사물의 창발(創發, emergence) 현상과도 관련될 것인데, 적어도 유물론적 환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과학 진영에서는 이 문제가 난점으로 남게 될 수밖에 없을 걸로 본다. 창발은 모든 현실적 존재가 과거에 기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에 없었던 <새로움>novelty의 출현이 매순간 모든 사물의 생성 사건들에서 발견되어진다는 점을 함의한다. 화이트헤드에게서 현실 존재란 <사건>이요 <생성>이다.


화이트헤드는 당시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암암리에 전제되고 있던 유물론적 입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자신의 국소적 위치에 자족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물질 입자라는 관념은 추상”(MT 138)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낡은 상식적 견해 자체는 근본적인 진술로서의 그 지위를 박탈당했음에도 그것이 갖고 있던 전제들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것이다”(MT 139).


이에 비해 화이트헤드가 보는 현실 존재는 근원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으로서 실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각각 <유효한 인과>efficient causation와 <목적적 인과>final causation를 함께 지닌다고 보았었다. 이는 각각 철학에서도 말하는 <작용인>과 <목적인>에 해당한다. 중세에는 <목적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있었다면, 근대 과학은 오히려 그 반대로 <작용인>에 대한 과도한 강조로 나타났었다. 특히 과학주의자들 사이에선 근대 과학의 바로 이 점이 부지불식간에 의심되지 않은 전제로서 작동되어 왔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목적인>은 실재라는 존재 형성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그 같은 비판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면서 심지어 냉소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배의 모양이나 장갑, 함포, 엔진, 화약, 적재된 식량 등을 형성하고 있는 원자들, 철, 질소, 그리고 다른 종류의 화학원소들의 집합, 이 집합들이 넘실거리는 대서양의 파도가 아무 목적 없이 메인주의 해변을 때리고 있는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물리적 법칙의 순전한 결과라고 믿도록 강요한다. 저 사건에도 목적이 없는 것처럼 이 사건에도 목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배를 만든 사람들의 활동은 그저 해변가의 반짝이는 모래알의 굴러다님에 비유될 수 있을 뿐이다.

여전히 전통적인 생리학의 이론을 상정하면서 그 유타호의 항해에 관하여 논의를 계속해보자! 미합중국의 대통령당선자는 그 전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남미정책과 관련된 그의 의도, 그리고 세계질서의 안녕과 관련된 그의 의도는 고려의 대상 밖에 있으며, 사회적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하찮은 것이다. 대통령의 신체 움직임, 항해사들의 신체 움직임은 앞서 말한 배를 만든 사람들의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한 돌멩이가 언덕을 굴러 내려가거나 한 컵의 물이 끓는 현상을 지배하는 물리적 법칙과 똑같은 법칙에 의해 순전히 지배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념이야말로 얼마나 웃기는 얘기인가?”(FR 14).
 
 
특히 진화를 거쳐왔고 또한 여전히 진화 과정에 놓여 있는 동물 신체 및 인간사의 행위의 경우에서 볼 때도,
우리의 목적을 결정하는 예견의 승인과 행위로 귀결되는 목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우리의 경험을 잘 설명해주는 지점에 속한다. 그렇기에 과학의 유물론적 측면만 강조할 경우 경험과 실재에 대한 온전한 기술이 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그것 역시 <목적인>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또 다른 관념론적 입장(예컨대 '생기론'vitalism 같은)만큼이나 일종의 잘못된 관념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근대 과학자들이 <목적인>을 거부하는 그 배경에는 아무래도 그것이 기존의 서구 기독교의 과도한 신 관념과 결부된 배경이 있기에 그런 태도가 일견 타당하게 이해되는 맥락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존재와 사물의 구도는 기존의 그 어떤 종교 창조설이나 혹은 지적설계 같은 그런 유치하고 조악한 식의 목적인 요소를 도입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생명의 진화가 단순히 생리학적 사태로서의 인과로만 설명되지 않는 예측적인 목적적 요인들도 함께 포함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그러한 점들까지 고려해 볼 경우,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근원적인 사유의 전환이 있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오늘날 저명한 물리학자로도 알려진 폴 데이비스(Paul Davies) 역시 그의 우주론 강의에서도 그동안 과학에서 금기시되어 왔던 목적론의 가능성까지 조심스럽게 타진한 바 있으며, 이는 휠러가 말한 <목적론 없는 목적론>에도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코스믹 잭팟>Cosmic Jackpot 참조). 따라서 아무래도 기초 존재 혹은 궁극적 사물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결국은 작용인과 목적인에 대한 균형 있는 안배와 고려가 함께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최근 몇몇 철학적 유물론자들 중에는 '물질의 비물질성'을 말하기도 한다. 예컨대, '외부로의 탈주적인 물질'이라는 관념을 설정하는데, 이는 사실상 기존의 유물론적 물질 개념 정의 자체를 완전히 뒤바꾼 것으로 오히려 개념 혼동을 일으키는 언어 사용에 속할 뿐이다. 사전적 정의 자체를 뒤바꿀 경우 그리고 언어의 파생적 효과까지 고려한다면 그 표기 역시 그에 걸맞게 개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애초에 <물질적 원자> 혹은 <정신적 존재>라는 표현 대신에 <유기체>organism라는 표현을 채택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철학적으로 설정한 원자적 존재는 <유기체적 원자>이며, <관계>와 <과정>으로서 매순간 생성 소멸하는 그러한 원자적 존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유기체적 원자는 물질성과 정신성이라는 양극적 성격을 기본적으로 함께 지닌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 표기한 <유기체>라는 용어는 생물학 이전에 이미 철학적으로 설정된 것이며, 이를 통해서 생물학을 포함한 기존의 자연과학적 성과들과 인간의 다양한 경험들까지도 포괄적으로 설명해내고자 한 것이다. 


(*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에 기반한 반론 비평이라면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모두 대환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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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준호 2013.05.28 01:48
    미선님이 생각하는 진화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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