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꿈 (실재는 물질인가? 정신인가? 유기체인가?)

by 미선 posted Jul 1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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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꿈

- 궁극적 실재의 전모는 과연 물질인가? 정신인가? 유기체인가?



[화이트헤드의 과학철학 노트]



“(근대) 물리학에 적용된 데카르트적 주관주의는, 단지 외적 관계만을 갖는 개체적 존재로서의 물체에 관한 뉴턴의 가설이 되었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물체의 원초적 속성으로 기술했던 것이 실제로는 현실적 계기들 간의, 그리고 현실적 계기들 내부의 내적 관계의 형식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와 의견을 달리한다. 이러한 사고의 변화는, 물리학의 기초가 되는 사상에 있어서의, <유물론>으로부터 <유기체론>으로의 전환이다.



물리학의 언어로 말하면, 유물론으로부터 <유기체적 실재론organic realism>―이 새로운 전망을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으로의 변화는, 정태적인 물질static stuff이라는 개념을 유동적인 에너지fluent energy라는 개념으로 바꾸어놓은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에너지는 작용과 유동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구조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이는 또한 <양자(量子)>의 요건들로 조건지어져 있다. 이러한 요건들은 하나하나의 파악들과, 이 파악들이 속해 있는 하나하나의 현실적 존재들이 물리학 속에 반영된 것이다. 수리물리학은 <모든 사물은 흐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을 자기 자신의 언어로 번역한다. 그래서 이 격언은 <모든 사물은 벡터vector이다>가 된다. 수리물리학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도 수용한다. 그것은 그 원자론을 <에너지의 모든 흐름은 ‘양자’ 조건quantum conditions에 따른다>는 말로 번역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과학적 개념의 현장에서 사라진 것은 공허한 물질적 존재vacuous material existence―수동적으로 지속하고, 원초적인 개체적 속성을 가지며, 우유적(偶有的)인 모험을 겪는―라는 개념이다. 물리적 세계의 몇몇 특징은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과학과 우주론의 궁극적 관념으로서는 쓸모가 없다.“ (PR 309/594)





물질은 과연 물질인가?



아마도 이런 문장이 꽤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질이 물질인 것이지 물질이 물질이 아니란 말인가? 철학(형이상학)은 어떤 면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을 그 뿌리에서부터 의심스럽게 사유하려는 학문이기도 하다. 전자에 해당되는 물질은 우리가 정말 존재한다고 여기는 바로 그것이라는 <실재>reality로서의 의미를 함축한다면, 후자에 해당하는 물질 용어는 존재하는 그것에 상응되는 내용물로서의 물질 개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철학에서는 앞의 문장을 “실재(reality)는 과연 물질(matter)인가?”라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근대 과학자들이라면 실재는 당연히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거의 대부분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알게 모르게 이를 의심 없이 당연스럽게 여기는 사람들 또한 꽤 있다고 본다. 물리주의나 유물론적 환원주의를 신념으로 삼는 자들이라면 특히나 그럴 여지가 높다.



하지만 철학(형이상학) 진영에서는 그 <실재>라는 것이 과연
물질인지? 정신인지? 혹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인지? 는 여전히
궁극적으로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알다시피 철학 진영에서도 ‘진실로 존재하는 바로 그것’(res vera)이라는 <실재>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는데, 고대에는 물, 불, 흙 같은 원소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실재로서 여겨졌었다. 더러는 '4원소설' 같은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기원전 5세기 말에서 4세기 초쯤 레우키포스(Leukippos)와 데모크리토스(Democritos)는 더 이상 분할 될 수 없는 <원자(atom)설>을 제창하는데, 이들에 따르면 세상 만물은 바로 이러한 원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원자설>을 통해 이들은 서구사상사에서 일종의 유물론 계보의 아버지격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럴듯한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상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아마도 물질을 연구하는 보통 물리학자들에게는 황당한 질문으로도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실재를 물질로 보지 않는 사람도 있단 얘긴가? 라고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답변은 당연히 “그렇다!” 이다.



예컨대, 고대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말하길,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결구 ‘수’라고 하였고, 플라톤은 더 나아가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은 <이데아>Idea이며, 이 현실세계는 그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봤었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지평 혹은 관념(개념) 세계이며, 물질도 그러한 정신 작용의 파생물로 본 것이다.



혹시 물리과학적 정신이 충만하여 정신이 궁극적으로 실재한다는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려 봐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감각하고 지각하는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들이 결국은 허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만져지는 감각적 물질이란 것도 실은 그 어떤 정신 작용 산물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서구 근대 철학사에서는 특히 버클리(G. Berkeley)나 브래들리의 관념론을 들 수 있겠는데, 예컨대 버클리의 경우 (이미 널리 알려진 언급이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라는 충격적 명제를 남긴 바 있다. 즉, 지각 속에 없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때 그 지각된 사물은 물질이 아닌 사물의 대한 생각으로서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버클리의 관념론은 당시의 유물론 철학이 주장하는 물질 개념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대립각을 이루기도 한다.



어쨌든 정신을 궁극적인 실재로 보는 관념론자들은 현대 과학이 발달했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이 있다. 예컨대, 주로 초월을 강조하는 정신 탐구자들, 혹은 초월 영성 종교 또는 일전에 언급했던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 :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 마음주의자들을 통해서도 여전히 발견되어진다. 이들 사유의 전제에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철학적 뿌리가 맞닿아 있다는 얘기다. 변화하는 이 현실세계는 어차피 지나가는 환상(마야)에 불과하니까 세상에 대해 그리 집착하지 말라는 등등 뭐 이런 얘기들을 한 번 이상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는 정신의 작용이 1차적이며 감각 물질은 그러한 정신의 파생물 혹은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물질을 1차적인 궁극적 실재로서 보는 사조를 <유물론>이라고 한다면, 정신의 선차성을 강조하는 이들의 경우는 정반대로 철학사에서 <관념론> 진영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은 이 같은 관념론 진영의 대표격 철학자로 거론되기도 한다. 화이트헤드는 서구 근대 철학까지 “서구 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PR 39/118)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이 말이 유명하다고 보는 이유는 화이트헤드 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이 말 자체는 곧잘 인용하곤 한다는 점에서다).



데카르트는 물질과 정신을 아예 이원적 실체로서 분리시켰지만, 스피노자는 물질과 정신을 동일한 하나로 봤었다. 그의 도식에서는 신(God)이라는 하나의 실체(substance)에서 출발하여 <신 즉 자연>으로 나아가는데, 이때 하나의 실체에 대한 두 속성이라는 물질과 정신을 주장하기에 이르며, 이때의 물질과 정신 간의 인과 관계는 결여되어 있다. 이른바 스피노자의 철학은 <심신병행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실체>substance라는 단어는 지속되고 존속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한 라틴어 substantia와 관련하는 용어로서 일종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사태를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다. 서구사상사에는 이 실체라는 관념이 뿌리 깊게 녹아 있다. 존재를 실체론적으로 이해한다는 얘기는 궁극적 실재를 항구적인 자기동일성을 갖는 존재로서 파악한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항구성을 갖는 물질 혹은 불변의 입자, 불변의 정신성 등등 이러한 개념들 모두 실체론적인 존재 이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실재란 아예 없다”고 보는 철학 진영도 있었는데, 소위 말하는 현대 포스트구조주의 진영이 그러하다. 물론 계몽주의를 주창했던 서구 근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과 반동으로서의 포스트모던 사조는 일견 타당한 점들도 없잖아 있긴 했지만, 합리성과 실재의 가능성 자체를 아예 부정함으로서 특히 현대에선 자연과학자들과는 상당한 충돌을 겪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은 대부분이 실재론자들일 뿐만 아니라 자연의 합법칙적 질서를 합리적으로 연구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합리성 자체를 부정하는 이러한 철학 사조들과는 근본적으로 피곤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를 예증하는 대표적인 사건을 들라고 한다면 바로 <소칼의 장난질 논문> 사건일 것이다. 물리학자였던 앨런 소칼(A. Sokal)이 20세기 말에 학계를 발칵 뒤집었던 장난질 논문 사건의 의도도 바로 그러한 반실재론적인 철학 진영에 대한 반발로서 나온 것이다(보다 상세한 내용은 http://freeview.org/bbs/tb.php/f003/306 참조).



어쨌든 지금까지 궁극적 실재로서의 존재를 말할 때 대략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물질>정신, 2) 물질<정신, 3) 하나의 실체 안의 물질=정신, 4) 실재는 없다!



이러한 존재론들이 큰 틀에서의 후보였다면, 정작 화이트헤드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에 따르면 물질과 정신을 하나의 과정적 존재가 갖는 양극적(兩極的, dipolar) 특성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것들과 변별된 다른 차이의 존재론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속성이원론> 같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단일한 실체로서의 물질과 정신이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구상한 실재로서의 현실 존재는 실체론적인 구도 자체가 아예 배제되어 있고 역동적인 과정 자체를 현실적 존재로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적 존재는 무수한 관계들로서 구성된 존재다. 그에게서는 오로지 <관계>relation와 <과정>process으로서 형성된 사물을 현실적 실재로서만 볼 뿐이다. 실로 이것은 이전의 서구 철학사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든 <새로운 실재론>a New Realism의 등장이었다. 그의 이 같은 존재론 구상은 당시 뉴턴의 고전물리학이 붕괴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막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양자물리학의 성과들에 따른 새로운 철학적 구상이었던 것이다.



알다시피 오늘날 현대 물리학에서 물질의 개념에 다소 수정이 가해진 것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발견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물질이 이제는 정태적인 것이 아닌 유동하는 에너지로 기술될 뿐만 아니라 절대값을 갖지 않고 확률값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불확정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물질 개념과는 크나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거의 대부분은 무의식적 전제로도 작동되어지는) 개념으로서의 물질 개념은 보통 ‘실체로서의 물질 개념’이지 사실상 물질 그 자체에 대한 전모를 알고서 확정한 물질 개념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 물질이 정말 물질인지는 여전히 탐구 중에 있을 따름이다. 양자물리학자로 널리 알려진 하이젠베르크(W. K. Heisenberg)는 <물리학과 철학>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기본 입자는 정말로 물질의 마지막이며,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기초, 즉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의 ‘원자’인가? 기본 입자는 동일한 물질의 다양한 형태일 뿐인가? 그래서 기본 입자는 서로서로 전이할 수 있거나, 물질의 또 다른 형태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일까?”(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물리학과 철학』(온누리, 2011), p.146.)



보다 극단적으로 나아갈 경우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들먹이는 이들 중에는 의식이 되려 물질을 파생시킨다고 하여 이는 정신의 실재성을 예증하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펴기도 한다. 심지어 포스트모던 진영에서도 실재를 부정하기 위해 그리고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양자역학을 들먹이는 어이없는 경우를 보이기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전통적인 물질 개념이 부정되는 것이지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양자역학을 남용하는 폐해에도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던 전통적인 물질 개념에 대해 수정이 가해져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서 말한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가 말한 원자 개념은 오늘날 양자물리학에서의 원자와는 거의 무관한 것임이 밝혀졌다(<물질이란 무엇인가>(알마), p.26. 이 책은 세 명의 물리학자가 함께 쓴 저작으로 얄지만 추천하고픈 도서에도 속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양자중력 이론을 탐색하는 이론물리학자인 리 스몰린(L. Smolin)은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사이언스북스, 2007)에서 말하길, “우주는 사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있으며, “사건들의 우주는 관계론적인 우주며, 성질은 관계에 의해서 기술된다”고 말한다(pp.103-130. 참조).


이는 화이트헤드가 이미 20세기 초에 <과정과 실재>에서 기술한 것처럼, “존재는 <과정>으로서 이루어져 있고, 관계성이 성질의 범주를 구성한다”고 언급한 것과 거의 흡사한 얘길 해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존재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 물리학의 성과들과 양립 가능한 것인지 혹은 모순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명백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적어도 이전의 고전적인 정태적 물질 개념 안에 더이상 안주할 수 없다는 점과
그런 점에서 실재와 물질에 대한 개념 이해를 다시금 재정립해나가는 가운데
우주와 사물 그리고 세계와 존재에 대한 탐구로 재차 나아갈 필요 또한 있다는 사실이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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