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프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

by 임재서 posted Mar 0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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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뭔가를 써야 한다는 내면의 압력은 팽팽하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진심은 엇나가기 십상이고 말은 오해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포착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사람의 마음일지 모릅니다. 진심 자체가 흐릿하고 몽롱한 데다 설령 진심이 명확하더라도 언어는 늘 우리의 의도를 배반하는 사회적인(그것도 비균질적인) 場이기 때문이지요. 오해를 피하면서 진심을 전한다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뭔가를 전달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달하려는 것이겠지요. 진심은 엇나가고 말은 오해되기 마련이니까요.

<당장만나 프로젝트>

참 코믹한 이름입니다. 유머 코드가 담긴 어느 노래의 가사에서 따온 제목이라서 이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철학, 특히 현대 철학은 대체로 '만남의 영원한 유예(혹은 가정된 기억)'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더욱 더 아이러니한 느낌을 줍니다.

단 한 번의 결정적인 ‘만남’! 대부분의 현대 철학이 단연코 금지하는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금지의 제스처 자체도 불필요합니다만, 철학이란 원래 논리정연한 수다이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금지한다'는 동어반복을 남발하고 있지요.

그런데 '당장' 만나자고 하다니! 이것만큼 기괴한 농담은 없을 것입니다. 현대 철학은 대개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당장'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지금 비유적인 언어를 마음껏 사용하고 있습니다. 철학 전공자들이 읽으면 코웃음 칠 일이겠지요.) 설사 결정적인 만남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진짜 만남인지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것이 만남이라는 것을 의식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둘로 분열되니까요. '만나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남이라는 행위와 만남에 대한 의식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오직 만남이 끝났을 때에만, 혹은 다가올 만남을 기대할 때에만 만남은 우리의 의식에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철학적 사유는 언제나 만남 '이전'과 '이후'에 발생하는 의식(기대 혹은 기억)의 소산입니다. 만남의 '순간'은 영원히 유예되거나 뒤늦게 추인(가정)될 뿐이지요.

이렇기 때문에 철학은 나와 너, 말과 사물, 존재와 사유의 '만남'이라는 텅 빈 사태를 중심으로 떠도는 언어의 부스러기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고 일갈했던 것이겠지요. 저 텅 빈 공간이 무언가(이데아, 신, 역사 등)로 채워져 있다는 모든 담론은 저 허방을, 저 빈 구멍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객쩍은 수다 같은 것일 테니까요.

그러나 저러한 침묵은 얼마나 육중한 것인지요! 저 무게를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보통의 우리에게는 침묵의 명령은 어쩌면 자살의 명령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 될 줄 알면서도 만나고 실패할 줄 알면서도 전달하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는 걸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여기서 멈춘다면, 어떤 냉소가, 어떤 좌절이 우리의 시도에 태생적으로 각인되기 때문입니다.

‘실패’라는 결론이 미리 주어진 상태에서 어떤 시도를 하다 보면 뭔가 비장한 영웅미 같은 것을 풍기기는 하겠지만, 나르시즘적인 자기도취와 자기연민의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앞에서 저는 대부분의 현대 철학이 ‘만남’을 금지한다고 말했지만, 이것을 미리 주어진 결론으로 신념화해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사유가 아니라 주문(呪文)이 됩니다. 주문은 화석화된 사유이자 굳어버린 생각이며 형해화된 결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무언가에 대해서든 결론을 짓는 겁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이겠지요.

보통 우리는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누군가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누군가 책에서 진리를 단순명쾌하게 말해주길 기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공허가 우리의 발 밑을 허무는 듯하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진실로, 책 속에도 길이 없고 아무도 진리를 알고 있지 못하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용기가 생길까요. 저는 이러한 상태를 '부정성의 심연'이라는 말로 부릅니다(물론 제 용어가 아닙니다만, 여기서 복잡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서로 말을 나누지는 않아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심연을 체험하는 시대가 된 것이 아닐까 저는 추측합니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고 한병철 선생이 <피로사회>에서 지적했듯이 말입니다. (제가 알기에 오늘날 이러한 교착 상태를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뚫고 가는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론가는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입니다.)

아무런 결론도 짓지 않는 미정의 상태. 제가 <당장만나 프로젝트>라는 떠들썩한 활기와 따뜻한 온기가 공존하는 특이 공간, 저로서는 우정의 聖所라고 과장해서 이름붙이고 싶은 공간에서, 뭔가 정연한 듯하면서도 혼란스러운 말을 '방언'처럼 내뱉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저 미정의 상태를 그 공간에 도입하고 싶어서였겠지요.

그러므로 당장 만나는 것이 불가능한지 가능한지, 아마도 그것은 여전히 미정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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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참석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 오래도록 제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모두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