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아카데미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원문보기 http://scienceon.hani.co.kr/blog/archives/5536 )

[연재] 마침내 샐러리맨을 위한 ‘수학 아카데미’를 열다
(0)
BY 이종필   l  2010.04.06


 샐러리맨 전 차장이 아인슈타인이 되기까지 (4)

 


 


3nasa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바탕을 두어, 블랙홀 2개의 병합을 3차원 시뮬레이션으로 미국항공우주국(NASA) 수퍼컴퓨터가 계산해 만든 이미지. 출처: NASA


 


 샐러리맨을 위한 ‘수학 아카데미’를 열다


 


 


편도차선만 8개나 되는 세종로는 언제나 부산 출신인 나를 움츠러들게 한다.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잠깐 소개하자면, 세종로는 경복궁의 입구인 광화문에서 시작하여 종로와의 교차점까지 남북으로 나 있는 대로이다. (종로는 여기서 동쪽으로 뻗어 있다.) 이 길은 곧바로 태평로와 이어지는데, 태평로는 서울시청을 지나 남대문까지 남북으로 이어져 있다. 세종로와 태평로의 동쪽으로는 미국대사관, 유력 신문사, 청계천, 프레스센터, 시청 등이 줄지어 있고 서쪽으로는 정부종합청사, 세종문화회관, 또 다른 유력 신문사, 그리고 덕수궁 입구인 대한문이 있다. 얼마 전까지는 삼성의 본관이 그 끄트머리, 남대문 가까이에 있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아이리스>에서는 이 세종로와 태평로 한가운데서 총격장면을 찍기도 했다.


 


세종로는 그 자체가 암울한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광화문을 원래 위치에서 100여 미터 뒤로 물리면서 그 각도를 동쪽으로 살짝 틀었다. 원래 경복궁은 근정전 등 왕궁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주요 건물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곧바로 관악산을 바라보고 있다. 광화문 앞의 해태상이 관악산의 화기를 다스리기 위함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일제가 광화문의 각도를 약간 틀고 그에 맞춰 그 앞으로 큰 길을 냈기 때문에 경복궁을 가로지르는 큰 줄기가 광화문을 기점으로 흉측하게 뒤틀린 모양을 갖게 되었다. 다행히 지금 복원 중인 광화문은 원래의 위치, 원래의 방향을 찾아갈 예정이다. 그러나 한번 그렇게 뒤틀린 세종로와 그에 맞춰 줄지어 늘어선 고층 건물들은 쉽게 바꾸기 힘들 것 같다.


 


street

광화문, 세종로 거리의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대 초반 한참 학생운동 하던 시절에는, 세종로가 말하자면 일종의 ‘넘사벽’이었다. 보통 대학생들이 도심에서 가두시위에 나서면 종로나 을지로를 택했다. 근처 세종로를 따라 국가 주요기관이 줄지어 있는 만큼 정치적인 상징성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경들은 시위대가 종로에서 세종로로 진출하는 것만큼은 기를 쓰고 막았다.


 


내 기억 속에서 1990년대 초반 학생 시위대가 종로를 벗어나 세종로를 밟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세종로로 진출하려는 우리와 그것을 막아서는 전경들의 사투는 처절하기까지 했다.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 나는 한동안 평상시에도 세종로에 나서면 나도 모르게 긴장감에 휩싸이고 마음까지 불안해졌다. 그래서 2002년 붉은 악마가 세종로는 물론 광화문, 종로, 새문안길, 태평로, 시청광장을 붉은 색으로 물들였을 때 사뭇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만큼 세종로 건너편 광화문 뒷골목은 내게 전혀 낯선 세상과도 같았다.


 


 


1 


 


낯선 ‘넘사벽’ 거리에서 이뤄진 큰 틀의 ‘감격적’ 결정


 


그 낯선 세상에서, 처음 만난 낯선 사내의 요청을 나는 승낙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수학부터 아인슈타인 방정식까지 가르쳐 달라는 샐러리맨 전 차장의 요구를 마침내 받아들였을 때, 나는 마치 남의 홈그라운드에 와서 굉장히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서에 사인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잠시 휩싸이기도 했다. 직장이 세종로 근방이었던 전 차장은 이 동네 지리와 음식점 주점 등을 꿰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그를 따라 10여 명의 사람들이 2차를 함께했다. 세종문화회관 바로 앞, 두세 명이 한꺼번에 지나가기도 넉넉하지 않은 광화문의 좁은 뒷골목 안에 있는 감자탕 집에서 우리는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술병이 늘어가고 이야기가 쌓일수록 ‘불리한 계약서’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은 새로운 도전에 대한 희망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수학공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전 차장과 나는 큰 틀에서 의견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것은 첫째, 수학학습이 전 차장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호회 회원 전체를 대상으로 (물론 희망자에 한해) 한다는 것, 둘째 이 프로그램 자체가 동호회 안에서 하나의 자기 완결적인 체계가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2009년)에는 고등학교 수학에서 시작하여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을 한번 풀어보는 것까지 과정을 한 해 12달에 걸쳐 배우기로 했다.


 


전 차장은 진심으로 감격해했다. 내가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인터넷 동호회 학습 독서모임에서 더 전문적인 과학 내용을 독자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중에 한국에서 과학이 크게 대중화되는 날이 온다면, 오늘 우리의 시도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보탰다. 내 생각에도 이런 시도는 하나의 사건이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렇게 9월의 마지막 금요일 밤을 보낸 뒤 전 차장은 그 다음주부터 줄기차게 나를 괴롭혔다. 흔히 술자리에서 오간 얘기는 대부분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실없는 소리라는 게 통설이지만, 전 차장은 그런 통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시로 내게 전화해서 좀 더 구체적인 학습계획을 하루빨리 동호회 게시판에 올리라고 재촉했다.


 


내 입장에서도 술자리에서 이미 호언을 한 상태이지만, 막상 게시판에 학습모임을 제안하는 글을 올리려고 하니, 그렇게 공개적으로 글을 올리고 나면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구나 싶어 잠깐 망설여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남의 홈그라운드에 가서 괜히 사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결국 전 차장을 광화문 뒷골목에서 만난 지 채 일주일이 되기 전인 10월2일, 나는 동호회 게시판에 새로운 학습모임을 제안하는 글을 올렸다.


 



“지난 번 서울모임 뒷풀이 때 전○○ 선생님께서 본격적으로 수학공부를 같이 시작해 보자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동호회의 열기로 본다면 이런 열정을 가지신 분들이 꽤 되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역시 과학은 기본 수학을 좀 알아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스토리 중심의 물리학도 기본적인 수학이 전혀 없이는 좀 어렵습니다.


마침 오늘 전○○ 선생님께서 다시 연락을 주셔서 이렇게 부랴부랴 첫 글을 올립니다. 미리 얘기를 꺼내 놔야 유야무야되는 일도 없을 테고 또 생각이 있으신 분들이 나름대로 준비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구체적인 계획은 추후에 다시 올리더라도 개략적인 생각은 최대한 빨리 공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날 올린 제안서에서 나는 다섯 가지 과목을 학습하자고 제안했다. (1) 고교수학, (2) 대학수학, (3) 고전역학, (4) 양자역학 (5) 상대성이론. (4)번 양자역학은 얼마지 않아 학습계획에서 제외했다. 그 자체가 방대한 양인 데다가 2009년 한 해는 고등학교 수학-일반상대성이론을 중심축으로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았다. 그리고 굳이 고등학교 수학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학습모임에 참가하실 분들이 일반적으로 전 차장님처럼 수학에 대해 전혀 기본 지식이 없는 평범한 직장인들 혹은 가정주부라고 상정했기 때문이다.


 


1screen

2008년 10월 당시의 백북스 게시판.


이 과정들 중에서 평범한 직장인이나 가정주부에게 가장 어려운 대목은 무엇보다 (1)번 고등학교 수학일 것이다. 평소 전혀 해보지 않던 일이니만큼 처음 시작이 가장 어렵다. 그리고 고등학교 수학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미적분을 배우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인수분해나 함수의 극한 등 수학 전반에 걸친 기본 지식을 꼭 배워야만 한다. 현역 고등학생들에게도 쉽지 않은 수학을 샐러리맨이나 주부가 배우는 일이니 쉬울 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전 차장의 열정을 믿었다. 그 믿음은 자연스럽게 동호회 전체에 대한 믿음으로 번졌다. 그래서 이 학습 제안이 쉽지 않은 여정의 출발점이었지만 상당한 호응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나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학습제안 글에 댓글이 14개 달렸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지만 댓글에 묻어 있는 그 열정은 대단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모임이 있기를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동호회 회원들의 뜨거운 반응은 나뿐만 아니라 전 차장도 크게 고무시킨 듯했다. 내가 게시판에 첫 글을 올린 바로 다음날 전 차장은 내게 전화를 걸어 미리 수학공부를 예습하기 위해 어떤 책을 공부하는 게 좋겠냐고 물었다. 하도 간곡히 요청해서 이런저런 참고서를 말해 주었지만, 나는 통화하는 내내 특별히 예습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한 학습모임은 고등학교 수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샐러리맨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푸는 데에 필요한 물리학적 수학적 도구를 그 안에서 모두 익힐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학습모임이 동호회 안에서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시스템이 될 수 있다.


 


 


2


 


수학모임의 목표를 ‘표준우주론의 이해’로 구체화하고


 


일단 게시판에 공식적으로 수학모임을 준비한다는 글이 올라가자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진행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그 다음 주 월요일이었던 10월6일에는 수학 학습모임을 위한 준비모임을 가졌다. 전 차장과 나는 당연히 참석했고, 동호회 서울모임을 주도하시는 분들도 대여섯 분 참석했다.


 


그날의 모임도 세종로 건너편이었다. 이렇게 ‘넘사벽’ 건너편을 몇 번 다니다 보니, 새삼스레 서울 도심 한복판에는 아직도 내가 다녀보지 못한 길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18년을 살다 상경하여 서울에서 19년을 살았건만 그 오랜 세월 내가 뭘 하고 살았나 싶었다.


 


전 차장이 안내한 모임장소는 ‘도마’로 유명한 어느 음식점으로, 이름 있는 한류스타의 친인척이 운영한다고 했다. 월요일 저녁 그리 넓지 않은 식당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용케 구석에 자리 잡고 약간 비좁은 대로 붙어 앉아 바로 뒤 주방에서 금새 넘어오는 맛깔스런 음식들을 즐겼다. 이미 일을 저지르기로 모두 결심한 터라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편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일까? 한동안은 이 아담하고 예쁜 식당과, 눈을 호사시키는 것 이상으로 입맛을 충족시키는 주방장의 솜씨로 환담을 나누었다.


 


2rest

전 차장이 세종로 건너편으로 안내한 모임장소는 '도마'로 이름난, 아늑한 어느 음식점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미향 기자 촬영


 


이날의 모임에서 학습모임의 많은 것들이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무엇보다 학습의 목표가 더 뚜렷해졌다. 막연하게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푼다’는 것이 ‘프리트만(Friedmann) 방정식을 이해한다’로 구체화되었다. 프리트만 방정식은 균질하고 등방적인 우주에 대한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풀이(solution)로서 우주의 탄생과 진화를 바라보는 현대과학의 표준적인 틀, 즉 표준우주론의 핵심이다. 별과 우주에 대한 진리를 쫓아 아인슈타인 방정식에까지 이른 전 차장에게 딱 맞는 목표인 셈이다. 그리고 마침 동호회에서는 뇌과학으로 유명한 박문호 박사 주도로 천문·우주에 대한 학습(수학적인 학습은 아니었다.)을 따로 진행 중이었다. 만약 수학모임이 프리트만 방정식을 수학적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충분히 다룬다면 천문·우주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 확실했다.


 


그 밖에 몇 가지 실무적인 이야기들도 오갔다. 그 내용은 모임 바로 다음날인 10월7일 전 차장이 동호회 게시판에 모임 후기를 올리면서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그 다음날인 10월8일, 그 모든 내용을 다시 정리한 뒤 내 생각을 보태서 글을 올렸다. 마침 전날 일본인 셋이 노벨물리학상을 싹쓸이하는 바람에 그 얘기부터 시작하고 본론을 꺼냈다.


 



“1) 동기


전○○ 선생님께서 교양과학 수준의 내용에 만족하지 않고 좀 더 깊이 과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이 시초였습니다. 2015년이면 일반상대론이 나온 지 꼭 100년이 되는데, 그 때까지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한번 풀어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죠. 그러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미적분부터 다시 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마도 동호회에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꽤 되리라고 봅니다.



 


2) 목표


그래서 저는 이번 수학학습 모임의 목표를 표준 우주론(standard cosmology)의 이해로 잡으면 어떨까 합니다. 표준 우주론의 근간은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프리트만-로버트슨-워커(FRW) 해이니까 전○○ 선생님의 소망도 이루어지리라고 봅니다.


이 과정은 지금 진행 중인 천문우주 모임과도 곧바로 연계가 되기 때문에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이 과정을 마치고 나서 천문우주 내용을 다시 듣게 되면 아마도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또 수학모임이 결성되면 그 때 또 다른 목표가 설정되겠지만 적어도 1기 수학학습모임의 목표는 표준우주론이 딱 맞아 보입니다.”


 


이날 올린 글에서는 이밖에 두 가지 중요한 사항도 포함되었다. 하나는 학습모임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나는 ‘수학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푸는 것이 최종 목표이지만, 이를 위해 고등학교 수학부터 배우는 것이 보다 기초적이고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학습모임 전체를 운영하는 나의 기획안이었다. 기획안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한 건 아니고, 내가 어떤 마인드로 이번 학습모임을 제안하는가를 정리한 내용이었다.


 



“4) 기획


지금 와서 수학공부를 다시 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도 큰 도전이고 저에게도 큰 도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옛날처럼 입시나 성적에 얽매여 있지 않으니 진정한 학습에 매진할 수 있습니다. 이왕 공부하는 거 좀 더 신나고 재미있게, 또 의미 있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전체 프로그램을 잘 기획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 1기 모임의 컨셉을 처음 제안자이신 전○○ 선생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이공계 수학을 전혀 모르는 평범한 직장인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우주론을 알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1기 아카데미의 모습입니다. 이 컨셉으로 공부를 시작하면서 곁다리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척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이 학습의 전 과정을 정리해서 나중에 책으로 낼 수도 있겠죠.


<샐러리맨 전 차장을 아인슈타인으로 만들기까지> 뭐 이런 제목으로 말입니다.”


 


이번 연재물의 제목은 이렇게 태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서 ‘샐러리맨 전 차장을 아인슈타인으로 만들기까지’라는 타이틀을 뽑았는데, 이후에 지금과 같은 제목인 ‘샐러리맨 전 차장이 아인슈타인이 되기까지’로 바뀌었다. 나는 수학 아카데미에서 같이 공부하게 될 분들도 각자 나름대로의 기획을 가지고 학습에 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습에 참가하는 다른 분들도 자기 나름대로 이런 기획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기획을 하고 나면 저나 여러분이나 단지 수학책만 싸고 씨름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훨씬 더 학습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학습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아카데미에 참가하고 나면 그 끝에 뭔가 크게 남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학습을 진행할지도 좀 더 자세하게 제시하였다.


 



- 월1회 토요일 모임, 총 12회


- 2009년 1월 시작 12월 끝


- 오후 3:00~7:00(중간휴식 20분 정도) 집중학습


- 7:00~8:00 저녁식사


- 8:00~9:00 토론 및 보충


- 소정의 수강료


 


월 1회보다 더 자주 학습모임을 갖는다는 건 내게나 수강하시는 분들에게나 너무 부담이 클 것 같았다. 그 대신 한번 모일 때 5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학습하는 방식을 택했다. 고교수학, 대학수학, 고전역학, 일반상대론을 각각 얼마동안 할 것인가를 아직 확정하지는 못했다. 대략 4달-2달-3달-3달 정도로 나뉘어지지 않을까 하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 시각을 오후 3시로 잡은 것은 혹여 대전에서 참석할 분들이 있을까 해서였다. 원래 동호회의 뿌리가 대전이었던 탓에 대전 분들의 학습 열기는 무척 높았다. 이 글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평범한 샐러리맨 혹은 주부가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풀기 위해 수학공부한답시고 매달 한번, 대전에서 서울까지는 고사하고 같은 서울에서라도 과연 몇 명이나 올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런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몇 명이나 올 것인가의 문제는 나와 전 차장이 앞으로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느냐, 얼마나 진심을 담아 사람들을 설득하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동호회 사람들의 열정을 믿었다. 바로 내 눈앞에도 이 믿기지 않는 사내, 전 차장이 떡하니 서 있지 않은가. 그리고 10월말 서울 동호회 모임에서 내게 잠깐 시간을 허락하여 수학 아카데미 출범을 공식적으로 제안하고 수강신청을 받기 시작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그 때를 ‘론칭’하는 날로 삼아 준비를 잘해서 분위기를 띄우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3


 


7차 수학교육과정의 맹점 탓에 태어난 ‘대학수학’ 교재를 손에 쥐다 


 


그러나 그날까지도 수업교재를 정하지는 못했다. (2) 대학수학, (3) 고전역학, (4) 일반상대론 (양자역학은 완전히 제외시켰다.)에 대해서는 대략 생각나는 교재들이 있었지만 (1)고교수학에 대해서는 일감으로 떠오르는 교재가 없었다. 교과서도 괜찮아보였고 이름 있는 참고서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samcheong

삼청동길. 한겨레 자료사진


고등학교 수학과정을 위한 교재를 확정한 것은 10월16일이었다. 이날은 삼청동 근처 이름난 칼국수 집에서 준비모임을 가졌다. 세상에는 정말 내가 모르는 이름난 맛집이 많았다. 나는 처음 가보는 맛집을 찾아 교보문고에서부터 걸었다. 가을의 한가운데로 접어든 서울은 조금씩 갈색과 노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길 건너 경복궁 담벼락 위로, 넘어가는 햇살을 받은 살짝 물든 이파리들이 살랑살랑 춤을 췄다. 간간이 부는 서늘한 바람보다 동십자각 뒤편 삼청동 길을 따라 갖가지 전시회를 알리는 갤러리들의 가을 빛깔 알림막들이 계절의 바뀜을 확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원래 그날 모임의 1차는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에서 갖기로 했다. 그해 가을 간송미술관은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전시로 절정의 인기를 내달리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드라마 <바람의 화원> 덕이 컸다. <바람의 화원>은 신윤복이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드라마적 상상력을 기본 스토리로 하고 있는데, 남장여자로서의 신윤복 역할을 맡은 문근영의 열연이 돋보였다. 그러나 그날 칼국수 집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송미술관에 가지 못했다. 나도 미인도를 보러 간 것은 며칠 뒤였다. 그날 나는 미인도를 보는 대신 대형서점에 가서 고등학교 수학 교재를 골랐다.


 


처음에 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를 생각해 두었다. 그런데 서점에서 교과서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교과과정이 막 개편되기 때문에 이전 책들은 다 들어가고 새 책들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아라고 했다. 새로 개편된 내용이 어떤가 싶어 참고서를 들어 봤더니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얼개로 내용을 뒤섞은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대학교에서 만든 미적분학 교재였다. 대학교에서 만든 교재니까 대학생들이 대학과정 수학을 공부하기 위한 책이라고 나는 처음에 생각했다. 그런데 책장을 넘겨보니 그 내용은 거의 모두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담고 있었다. 즉, 고등학교 수학 과정 중에서 미적분 관련 부분을 중심으로 대학이 다시 집필한 책이었다. 대학에서 왜 이런 책을 만들었을까? 그 이유는 책의 서문에 다 적혀 있었다.


 



“7차 고등학교 수학교육과정에 의하면 많은 학생들이 초월함수의 미분과 적분 등 이공계열의 학문에서 필수적인 개념들을 배우지 않고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학생들이 대학에서 교양 및 전공 교과목을 학습하는 데 애로점을 겪고 있다. 본 교재는 이러한 애로점을 겪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고등학교에서 다루었던 수학적 내용을 위주로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스쳐갔다. 일선 대학에서 학생들의 학력저하, 특히 이공계생의 수학에 대한 부적응 정도가 굉장히 심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오던 터였다. 세간에는 이 모두가 어느 유명 정치인이 예전 교육부 장관일 때 교육개혁을 한답시고 ‘하나만 잘 하면 대학갈 수 있다’는 정책을 편 탓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 자체가 그리 잘못된 방향 같지는 않았다. 가령, 대학에서 경시대회 수준의 문제를 푸는 학생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일선 고등학교에서도 어려운 내용을 가르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교육부에서는 쓸데없이 어려운 내용에 대한 부담을 줄여준답시고 해당 분야를 완전히 제거하는 쪽으로 정책을 잡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적분을 선택 과정으로 돌린 것이다. 미적분에 대한 학습 부담을 덜어주려면 미적분에서 쓸데없이 어려운 내용을 익히지 않아도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런데 교육 관료들은 아예 미적분 전체를 들어내 버린 것이다. 어려운 문제풀이를 시키지 않고 기본내용만 익힐 수 있는 쉬운 문제풀이에 집중하는 것과, 그 단원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천지차이다. 실제 정책은 후자를 따랐고, 그래서 많은 이공계 학생들은 미적분의 기본도 모른 채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학력저하가 심하다는 말은 들었어도 대학에서 따로 교재를 만들만큼 심각한 수준인지는 미처 몰랐다. 서가를 돌아보니 이런 부류의 책들이 상당히 많았다. 한국 교육의 참담한 현실을 생각하면 아찔했지만, 수학 아카데미를 위해 적절한 교재를 찾던 내게는 그 참담한 현실이 축복이었다. 슬픔과 기쁨은 그렇게 연신 쓴웃음을 통해 서로 교차했다.


 


나는 덤불 속에서 보물이라도 찾은 듯 그 교재들을 품에 안고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교재는 두 권을 샀다. 하나는 인문계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이공계 과정이었다. 인문계 과정은 고등학교 수학의 기본을 다룬다. 이공계 학생들은 인문계 과정을 배운 뒤 이공계 과정을 다시 배운다. 이공계 과정에는 삼각함수와 지수/로그함수가 새로 등장한다. 특히 미분과 적분에 관한 현란한 테크닉을 많이 배운다. 이공계 과정을 배우지 않으면 삼각함수나 지수/로그함수를 미분하거나 적분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함수들을 미적분할 수 없으면 대학에서 이공계과정을 단 하루라도 정상적으로 듣기 어렵다.


 


그날 칼국수 집에는 약 10명 정도가 모였다. 수학교재는 단연 거기 모인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이제 수학 아카데미를 위한 모든 게 갖춰진 셈이다. 고등학교 수학과정을 대략 넉 달간 할 예정이었으므로 이후 교재를 확정하는 데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게다가 이후 교재는 거의 마음 속에 정해 두었다.


 


그 집의 칼국수와 만두는 일품이었다. 어려운 여정을 함께 하기로 결심한 사람들과 함께해서인지 무엇을 들어도 맛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품은 일품이었다.


 


시간 남는 대여섯이서 종로까지 나와 2차를 했다. 마침 그 술집에는 전 차장의 직장 동료들이 이미 판을 벌이고 있었다. 몇 달 전 촛불시위 때 직원 중 한 명이 전경 버스를 빼내 몰았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근 15년 전의 광경을 다시 보는 듯했다. 세상은 그렇게 어지럽게 돌아갔지만 우리는 내년의 수학아카데미를 준비하며 행복했다.


 


그러나 순탄하게만 일이 풀리던 수학 아카데미에도 뜻하지 않은 큰 위기가 한번 찾아왔다.


 


  • ?
    서지미 2010.04.06 09:45
    글로 만나는 단백한 수학다큐멘터리.
    장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정겹게 깊이있게 다가오는군요~~
  • ?
    문건민 2010.04.06 09:45
    수학아카데미의 역사가 흥미진진하네요.
    수많은 고민과 열정이 생생하게 느껴져요.
  • ?
    전승철 2010.04.06 09:45
    연재를 읽으면서 2009년을 뜨겁게 살았던 그때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이종필 박사는 매번 강의준비를 완벽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시간과 에너지의 소모가 꽤 컸을 것입니다.

    혼자 잘먹고 잘살기도 바쁜세상에 수학에 문외한인 일반인을 대상으로 고등학교 수학부터 상대성이론까지 강의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무모한 일 이었을 것 입니다.

    수업외에도 수많은 번개모임에 나와주셨기에 수학아카데미는 풍성할 수 있었지만,
    아마 고등과학원 연구 업무에는 큰 지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박사님의 수고로움과 빼앗긴 시간을 바탕으로 우리는 반짝이는 귀중한 시간을 얻을 수 있었지요.

    지나간 일들을 이렇게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도 뭉클한 일입니다.
    이종필 박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 ?
    홍경화 2010.04.06 09:45
    광화문 뒷골목, 태동을 위한 생생했던 순간까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수학아카데미’
    재미있습니다.

    “학습에 참가하는 다른 분들도 자기 나름대로 이런 기획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기획을 하고 나면 저나 여러분이나 단지 수학책만 싸고 씨름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훨씬 더 학습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죠.....”

    작지만 이런 시도가 갖게 될 의미를 묻고, 기꺼이 '불리한(?) 계약'에 도장을 찍은
    이종필 박사님 고맙습니다~~
  • ?
    이기두 2010.04.06 09:45
    제 뇌회로를 약간 변화시킨 수학아카데미 탄생의

    물밑이야기를 소설보다 흥미있게 읽습니다.


    박사님 본인으로서는 많은 손실이 있었을 것임에도

    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34 공지 양자역학 강의계획서 - 이 충기 박사 - file 전승철 2010.08.23 5024
233 공지 수학아카데미 매니저 급구. 5 전승철 2010.08.22 3267
232 이번 회계를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인사를 드립니다 18 서영석 2010.08.20 2553
231 문의드립니다. 3 송숙 2010.08.08 2424
230 양자역학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2 전승철 2010.08.04 3277
229 수학아카데미 MT 공지. 4 전승철 2010.07.24 2871
228 작년 강의 dvd 구할 수 있을까요.. 1 임지순 2010.07.13 2854
227 문의드립니다 1 차민석 2010.07.09 2148
226 수학아카데미 2학기 양자역학 강의계획서 3 file 서영석 2010.07.07 3183
225 공지 내일 (6월 12일) 수학아카데미 네번째(마지막) 수업입니다. 김영철 2010.06.11 3096
224 수학아카데미에서 알려드립니다 4 서영석 2010.06.10 2442
223 손맛 김영철 선생님의 미적분학 강좌 3편 (5월) 5 서영석 2010.05.17 2800
222 공지 수학아카데미 5월 강의 안내. 3 김영철 2010.05.11 3373
221 수학아카데미 4월 회계 내역 1 서영석 2010.04.26 2474
220 수학아카데미 3월 회계 내역 서영석 2010.04.26 2517
219 오늘 저녁 6시 번개합니다. 전승철 2010.04.17 2722
218 안녕하세요~ 2 가론 2010.04.13 2496
217 현장스케치 손맛 김영철 선생님의 미적분학 강좌 2편 (4월) 9 서영석 2010.04.11 3803
216 공지 이번주 토요일은 두번째 수학 공부하는 날입니다^^ 1 김영철 2010.04.09 3323
» [연재 4회] 마침내 샐러리맨을 위한 ‘수학 아카데미’를 열다 5 이종필 2010.04.06 261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21 Nex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