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국부론'

by 김힐 posted Feb 0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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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스미스「국부론」





개인의 이기적 행위가 공공복지에 기여한다.













식당을 포함해 사회 여기저기에서 '원조(元祖)' 자리를 두고 서로가 나입네 하는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경제학만큼은 그러한 쟁탈전과 무관하게 평온하다.

유독 경제학이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 까닭은 경제학의 창시자에 관해서는 도무지 분쟁의 여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 묻는다 하더라도 경제학의 원조는 아담 스미스라는 대답이 곧바로 되돌아온다. 아담 스미스가 10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은 그를 고전경제학의 창시자로 탄탄히 자리매김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은 의문이 하나 생긴다.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원조라고 한다면,아담 스미스의 원래 전공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본인이 경제학을 체계화시킨 원조라는 말인즉슨 본인은 원래 다른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지 않은가.

스코틀랜드 커콜디에서 세관 관리의 유복자로 태어난 아담 스미스는 1737년 글래스고 대학교입학하고 1740년에서 1746년까지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뒤 1751년에 글래스고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이 때 그가 강의를 담당한 과목은 도덕철학이었다. 그의 '국부론'과 함께 유명한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 · 1759년)'은 바로 이러한 연유로 집필이 된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철학 연구를 통해 높은 명성을 얻었고 이후 글래스고 대학의 총장이 되어서까지 평생 도덕철학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다방면에 걸쳐 있었으며,특히 바클루 공작의 프랑스 여행에 동행하여 그곳의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귀국 이후 집필한 '국부론'은 그에게 불세출의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오늘날의 근대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은 한결같이 스미스의 '국부론'으로부터 출발한다. 경제학을 체계적 학문으로 정립한 '국부론'에서 가장 유명한 표현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다.

스미스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이기적 본능이 인간 행동의 원동력으로서 가장 지속적이고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개인의 이기적 행위가 종국적으로는 공공복지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 스미스 경제학의 근간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를 통해 시장의 자율적 기능이 사적 합리성 추구를 공적 합리성의 증대로 이어준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담 스미스는 18세기 당시 영국이 따르던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철저히 비판하면서 자유방임 경제정책을 주장하였다. 중상주의자들은 국가의 부강이 무역차액에 의해서 형성되는 금은의 축적에 따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무역차액 획득을 국가적 과제로 삼고 강력한 정부통제를 시행하였다. 스미스는 국가가 앞장서 이룩한 독점적 통제경제체제를 파기할 것을 주장하였고,그의 주장은 영향을 미쳐 영국을 비롯한 여러 유럽국가들은 자유통상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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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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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년 6월 5일 ~ 1790년 7월 17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애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생애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피페의 커크칼디의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6월 5일 커크칼디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친은 애덤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 경에 일단의 집시들에게 납치되었지만 그의 삼촌에 의해서 구출되어 모친에게로 돌아왔다. 스미스의 전기 작가인 존 레이는 장난스럽게 애덤 스미스는 별로 쓸만한 집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첨부한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란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하였다. 1740년 옥스포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포드대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1746년에 자퇴하였다. 1748년에 케임즈경의 후원하에 에딘버그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계기가 되어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1750년경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59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하였다. 1764년부터 귀족인 타운젠트의 아들을 데리고 가정교사를 하며 1년의 유럽여행을 시작한다. 2년에 걸쳐 프랑스등지를 여행하며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하였다. 귀국후 저술활동에 전념하여 1776년 《국부론》을 발표하였다. 그 뒤 글래스고 대학 총장등을 역임한 뒤 1790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