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맥주

by 이홍윤 posted May 07, 201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네팔의 맥주
    
                                                                          요시다 나오야
                                           
   
    4년이나 전의 일이니 정확히 말하자면 '최근'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어제 일어난 일보다 훨씬 생생한 이야기다.
    
    1985년 여름, 난 촬영차 히말라야 산기슭,  네팔의 돌라카라는 마을    
    에 십여 일 머물러 있었다.  해발 1500미터의 경사면에 집들이 여기    
    저기 붙은 듯이 널려 있는 마을로, 전기, 수도, 가스라는 이른바 라
        이프 라인은 전혀 들어와 있지 않았다.
   
    4500의 인구가 있지만 자동차는 물론,  바퀴가 있는 장치로 다른 부    
    락과 왕래할 수 있는 도로가 없다.  게다가 두 다리로 걸을 수 밖에    
    없는 울퉁불퉁한 산길을, 가는 곳마다 계류처럼 급류가 잘게 끊어져
    흐르고 있다.  그곳을 지날 때면 바위에서 바위로 목숨을 걸고 건너     
    뛰어야 하는 것이다.
   
    손수레도 이용하지 못하니 마을 사람들은 체력의 한계까지  짐을 짊    
    어지고 하나 뿐인 그 길을 걷는다.  때문에 수풀이 움직이는가 싶어     
    놀라서 자세히 보면 아래에서 작은 발이  움직이거나 한다.  연료로    
    쓰는 옥수수잎 더미를 어린 아이가 나르는 것이다.
   
    옛날 일본에서도 마을 공유지인 공동 채벌산에서  섶나무를 벨 때는    
    마차에 싣고 돌아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자기 몸에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벤다면 해님이 허용해 준다는 사상이 있었던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차를 굴릴 길이 없는 탓에  돌리카 마을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환경 보호에도 적합하고,  해님도 허용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옛날을 모르고,  지금의 마을 사람들은 자동차    
    가 지나다닐 수 있는 도로를 포함한  일체의 라이프 라인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생활이 세계 수준보다 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여행자의 눈에는 도원경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속    
    에서 꽤 괴로운 심정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 아이들에게는 마을을 떠나 전기와 자동차가 있는 도    
    시로 가고 싶어하는 염원이 강하다. 그런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 우   
    리에게도 차를 이용하지 못하는 이곳에서의 촬영은 매순간이 중장비    
    를 짊어진 등산인 것이다. 차로 올 수 있는 최종 지점에서부터 마을    
    까지는 짐꾼을 열다섯 명이나 고용해서 기재와 음식을 날랐는데, 남     
    는 것은 모두 두고 갈 수 밖에 없었다.
   
    맨 먼저 포기한 것이 맥주다. 무엇보다 무겁다. 알콜로 따지자면 위    
    스키 쪽이 효율적이다. 그것을 여섯 병. 한 사람이 한 병 반씩 맡는    
    다면 네 명이서 열흘간 어떻게든 되리라는 계산에서 포기했다.    
    하지만 위스키와 맥주는 그 역할이 다르다.
   
    땀을 많이 흘리고 하루 촬영이 끝났을 때,  눈 앞에 맑고 차가운 시    
    내가 흐르고 있어 무심결에 말했다.  "아, 여기다 맥주를 차갑게 해    
    서 마시면 맛있을 텐데." 라고.
   
    스태프 전원이 협의한 끝에 포기한 맥주를  이제 와서 입에 담는 것    
    은 규칙 위반이다.  하지만 내가 꺼낸 그 금지된 말을  놓치지 않고     
    짚어낸 사람든 내 동료가 아니라 마을 소년 체토리 군이었다.
   
    "이 사람 방금 뭐라고 한거죠?"    
    라고 통역에게 묻고는 의미를 알자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맥주를 원한다면 내가 사다 줄게요."    
    "... 어디 가서?"    
    "찰리코트."
   
   
    찰리코트는 우리가 차를 남겨두고 짐꾼을 고용한 산마루의 거점이다.    
    트럭이 오는 최종 지점이기에 물론 맥주는 있다.  산마루의 찻집 선    
    반에 병 몇 개가 진열되어 있는 것을 올 때에 얼핏 봤다.    
    하지만 찰리코트까지는 어른의 걸음으로도 한 시간 반은 걸린다.
   
    "멀잖아."    
    "괜찮아요. 완전히 깜깜해지기 전에 돌아와요."
   
    엄청난 기세로 자청하기에 보조 배낭과 돈을 건네며 부탁했다. 그럼    
    힘들겠지만 가능하면 네 병 사다 줄래? 하며.    
    기운차게 뛰어나간 체토리 군은 여덟 시 쯤 맥주 다섯 병을 지고 돌   
    아왔다. 우리의 박수를 받으며.
   
   
    이튿날 한낮이 지나  촬영장을 구경왔던 체토리 군이  "오늘은 맥주  
    필요 없어요?" 라고 묻는다.  전날 밤의 그 시원한 맥주 맛이  다시 
        떠오른다.
   
    "필요 없지는 않지만, 힘들지 않니?"    
    "괜찮아요. 오늘은 토요일이라 이제 학교 수업은 없고,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이스타르를 많이 사다 줄게요."
   
    스타라는 상표의 네팔 맥주를 현지 사람들은 '이스타르'라고 발음한    
    다.  기쁜 마음에 어제보다 큰 배낭과 열두 병이 넘는 맥주를 살 수     
    있는 돈을 건넸다. 체토리 군은 어제보다 더 기운차게 뛰어나갔다.    
    그런데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한밤중 가까이 되어도 소식이     
    없다.
   
    사고가 난 게 아닐까 해서 마을 사람에게 의논했더니 "그런 큰 돈을    
    맡겼다면 도망친거다." 하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다. 그만한 돈이     
    있으면 부모님이 계신 곳에 갔다가 수도인 카트만두까지도 갈 수 있
        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라고. 
   
    열다섯 살이 되는 체토리 군은 산 하나 너머에 있는 더 작은 마을에    
    서 이 마을로 와 하숙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다. 땅바닥 위에 거적을    
    깐 침대만을 둔 그의 하숙집을 촬영하고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사    
    정은 잘 알고 있다.
   
    그 땅바닥에서 체토리는 아침 저녁으로 다미아와 지라라는 향신료를    
    고추와 섞어 돌 사이와 끼워 빻아 채소와 함께 삶아서  일종의 카레    
    처럼 만든 것을 밥에 얹어 먹으며 잘 공부하고 있다. 어두운 땅바닥    
    이라  낮에도 작은 석유 램프를 켜고 침대 위에 엎드려 공부하고 있    
    다.
   
    그런 체토리가 돌아오지 않는다. 이튿날에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 이  
    튿날인 월요일에도 돌아오지 않는다.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하고, 대책을 의논해 보니, 선생님까지도  "걱정할 거    
    없어요. 사고 난 게 아니예요.  그만한 돈을 가졌으니까 도망갔을 거    
    예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갈 정도로 후회했다. 그만 깜빡 일본의 감각으로 네팔 아이에게    
    는 믿기지 않을 큰 돈을 건네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착한 아이의 일    
    생을 틀어놓고 말았다.    
    그래도 역시 사고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최악이다.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으로 보낸  사흘째 늦은 밤,  누군가 숙소 문을     
    마구 두드렸다. 저런! 최악의 흉보인가? 하며 문을 열자 거기에 체토    
    리가 서 있었던 것이다.
   
    진흙투성이에 너덜너덜한 옷차림이었다.  찰리코트에 맥주가 세 병밖    
    에 없어서 산을 네 개나 넘어 다른 고개까지 갔다고 한다.     
    도합 열 병을 샀는데,  넘어져서 세 병이 깨졌다고 울상을 지으며 그     
    파편을 전부 꺼내 보여주고 거스름돈을 꺼냈다.
   
    난 그의 어깨를 감싸며 울었다. 최근 들어 그렇게 운 적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깊이 여러모로 반성한 적도 없다.


 


 


(주) 대한산악연맹회장, 한국등산학교장을 지낸 김영도선생의 책 "산과 사상"의   배낭 속의 단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85년 당시 요시다 나오야씨는 NHK소속 연출가로 취재 차 네팔을 방문하였으며, 이 에세이는 "문예춘추('91년.1월 특집"내가 제일 많이 울었던 이야기)에 게재 하였다. 일본어 원문이 있습니다. 필요하신 분 말씀하시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