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백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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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에서 무의식을 비의식'non-consciousness'이라고 명명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어쨌든 핵심 의미는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을 일컫는다. 여기서는 그냥 일반적으로 부르는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쓸 것이다. 참고로 티모시 윌슨(Timothy D. Wilson)이라는 미국의 심리학자는 무의식을 <적응 무의식>adaptive-unconsciousness이라고도 부르는데, 본인은 그와 같은 견해에 많이 동의하는 편인데, 그럴 경우에도 <1차 적응무의식>과 <2차 적응무의식>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이 글은 인천 백북스 모임에서 한 인문학 전공자로서 프리스의 책과 가자니가의 책을 읽고 무의식과 의식의 상관 관계에 대해 써 본 낙서글에 속한다. 다소 긴 글인 점은 양해바람..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


개인적으로는 무의식에도 크게 두 가지 상태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바로 <1차 무의식 상태>와 의식의 과정을 거쳐서 나온 <2차 무의식 상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1차 무의식> 상태란 그냥 계속적으로 의식이 없는 무의식 상태이거나 또는 의식이 조금 있다고 해도 적어도 거대한 무의식에 의해 지배당하거나 조종되는 경험 상태를 의미한다. 단적으로 의식이 아예 없는 경우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좀비 상태>라고도 표현하잖은가. 좀비 작동체는 자각 느낌 없이 오직 경험만을 수행할 뿐이다. 또한 의식적 경험이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여전히 무의식의 통제에 놓여 있는 경우 역시 결국은 1차 무의식 상태에 해당한다고 보여진다.


현대의 뇌과학에서도 말하길 인간 행동의 95%는 자동항상성시스템에 의한 것이라고 하며, 단지 5%정도만 그렇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흔히 프로이드 심리학이 강조하는 무의식도 1차 무의식이 갖는 위력을 강조한 것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의식적 존재가 아니며 거대한 무의식의 통제와 지배하에 놓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드 진영이 <정신적 결정론>을 주장하는 이유도 짐작할만하다.


그런데 앞서 말한 1차 무의식과 달리 의식을 거쳐서 나온 2차 무의식 상태가 있는데 이는 1차 무의식과 같은 무의식 상태라는 점에서 비슷하며 구분이 안되는 혼동의 오류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2차 무의식은 적어도 의식이라는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앞의 1차 무의식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자동차 운전 경험을 통해서 이해하는 무의식과 의식의 상관 관계





나의 경우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동차 운전을 곧잘 예로 많이 드는 편이다. 물론 우리는 운전이라는 경험을 경험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전의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운전과 관련해 1차 무의식 상태에 속한다. 즉, 운전과 관련된 자각 자체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살다보면 사회적 관계에서 운전을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순간 역시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이 차 운전을 요구하는 경우나 주변에 생필품 가게나 약국 혹은 병원이 없거나 너무 멀리 있는 경우 등등 여러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의식은 운전을 익혀야겠다는 매우 뚜렷한 목적적 지향을 지니게 되며, 그리고서 운전을 배우고 그것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고도의 집중 상태를 형성한다. 즉, 의식적 노력이 정말 많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의식적 노력에 있는 운전 경험은 운전 외의 다른 경험들에 열려 있지 않고, 오로지 운전에만 고도로 주의 집중되어 있는 상태다. 그때의 의식은 차창 밖의 풍경을 즐길 여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운전이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운전과 관련된 <2차 무의식 상태>가 형성되게 된다. 이젠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운전 경험이 능수능란하게 가능하다. 운전이라는 경험이 이제 <몸의 자동항상성시스템> 안으로 포섭되는 것이다. 운전 경험이 <2차 무의식 상태>가 되면, 이제 그동안 운전 익히기에 바빴던 의식을 다른 경험에 사용해도 좋은 여유가 생기게 된다. 운전 경험은 2차 무의식 상태로 보내면서 동시에 자동차 밖의 풍경도 감상할 줄 알게 되고, 또는 전화 통화도 할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기게 된다.


따라서 <1차 무의식 상태>와 <2차 무의식 상태>는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둘 다 의식 상태가 아니라고 해서 이를 혼동할 경우 이는 <전후 혼동의 오류>에 해당할 수 있다(이 개념은 켄 윌버Ken Wilber가 말한 ‘전초 오류’pre-trans fallacy 개념에서 따온 것인데, 이를 조금 쉽게 풀어서 표현한 것임).


의식의 두 국면, <무의식에 통제받는 의식>과 <무의식을 조정하려는 의식>


이쯤 되면 <1차 무의식 상태>와 <2차 무의식 상태>가 똑같이 <의식>에 대해서도 성립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눈치 채셨을 걸로 본다. 즉, 의식 또한 <무의식에 포섭당한 1차 의식>과 오히려 <무의식에 간섭하려는 2차 의식>로 나누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역시 의식의 두 국면인데, <1차 무의식>의 통제에 놓여 있는 명멸하는 의식 상태가 있는가 하면 <2차 무의식>을 산출시키는 의식의 국면 또한 있는 것이다. 이때 후자의 의식 상태란 매우 강력한 목적지향성의 <의지>will로도 나타난다(나는 의지라는 용어를 적어도 의식 상태에서의 목적지향성을 뜻하는 것으로 쓴다. 즉, 단순지향성이 아닌 고도의 복합적 지향성인 것이다)..


결국 <낡은 습관>에서 <새로운 습관>으로 전환에는 반드시 의식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의식이 없다면 우리의 습관은 계속 고정되면서 자동반복화될 것이기에, 새롭고 창조적인 경험을 명징하게 향유하기가 매우 힘들 수 있다. 의식은 의도하려는 특정한 경험에 대한 향유를 매우 명징하게 인지하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의식이라는 경험에는 자각 느낌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자각 느낌이 없는 무의식적 경험에서는 명석 판명한 느낌이 부재하다.


앞서 말한 운전 경험이 없는 자에게 운전 경험은 그야말로 새로운 경험을 하나 더 증대시킨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운전 경험이란 게 뭔지를 생생하게 확보하도록 해주며, 이를 기억의 저장고에 고이 간직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의 운전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경험에까지 나아가도록 이끈다.


인간의 경험에는 결국 무의식적 경험과 의식적 경험이 있다지만, 그러한 무의식적 경험과 의식적 경험에도 그 역시 함께 상응하는 경험의 두 가지 국면이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프로이드 진영을 비롯한 주류 심리학 진영이 흔히 <무의식에 통제받는 의식>의 국면들을 보다 강조한다면, 요컨대 마음수련 혹은 종교에서 말하는 명상 훈련을 주장하는 진영은 <무의식에 개입하려는 의식>의 국면들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전자는 인간에 대한 통제 혹은 세뇌의 측면 역시 함께 포함되기도 하며, 후자의 경우는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에서 말하는 <초-의식>의 경험으로 넘어가기도 한다(물론 그것이 진짜 <초의식>인지 아닌지는 실현된 맥락에서조차도 더 살펴봐야 할 문제이지만).





흔히 고등 종교에서 말하는 영성 훈련 또는 몸수행 프로그램들을 보면, 주로 후자의 국면을 강조한 것들이다. 그 안에는 마음을 잘 닦아서 우리의 몸에 새롭고 유익한 습관을 길들이려는 방향이 있다. 만일 그 누군가가 <2차 무의식 상태>를 자유롭게 형성할 정도로 매우 강화된 수준의 의식 경험들을 보인다면, 그(녀)는 붓다 못지 않은 상당한 수행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진화 과정에서 의식이 갖는 의미와 지위

- 향유하려는 <경험의 다양성 증대>와 <경험의 강도 심화>를 위해


앞서 운전 경험 사례를 굳이 글로 풀어 본 이유는, 내가 볼 때 진화 과정에서 의식이라는 사건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세포, 동물, 인간으로의 진화 과정은 한편으로 그 경험의 다양성을 증대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단순히 생존의 목적만 지향하는 경험은 크게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왜냐하면 향유하는 경험이 너무나 단조롭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생존을 원하되 보다 만족스러운 생존 방식을 원하며, 그리고선 그 만족의 증대를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지향한다.





아마도 최종적 만족의 종착역은 나와 타자의 목적들의 실현이 최적화된 균형을 이루는, 바로 그러한 만족 상태이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이미 서로가 존재론적으로도 얽혀 있는 관계적 사태에서 서로 합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지점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이르는 과정만큼은 상당한 시행착오와 숱한 비극들의 연속일 수 있기에 결코 낙관적으로 보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 "항상 희망하되 끊임없이 회의할 것!"


처음에 우리 몸의 자동항상성시스템은 거의 생존 지향성으로만 반응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먹고 사는 생존 경험만으로도 충족되지 않는 상태, 곧 자신의 생존 시스템을 보다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 만들려는 목적 지향이 생기게 되고, 이것을 또한 보다 만족스러운 방향으로 향유하려는 방향으로도 나아가게 되었을 걸로 본다. 인간의 문화생활이란 것도 단순한 생존지향의 목적적 삶을 넘어서 있다. 그럴 경우 생존 방법을 터득하는 것 외에도 인간은 지식과 교양을 쌓으려는 삶으로도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보통 무의식적 상태는 자동 반복적인 경험으로 나타나는데 이 지루하고 반복된 경험은 단조로움이라는 퇴행으로 떨어지기 십상일 수 있다. 개미의 경험이 아무리 정교한 사회 시스템을 추구한다고 해도 인간의 사회만큼 복잡 다양한 경험을 갖진 않는다. 심지어 인간의 경우는 단 한 사람의 경험조차도 온갖 양상의 드라마가 나올 수 있을 만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단기적으로 볼 경우 진화라는 과정을 꼭 발달로만 볼 순 없지만, 적어도 장대한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발달은 분명 발달이다. 왜냐하면 의식을 지닌 인간이 개미의 단조로운 경험 상태로 퇴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평생을 구석기 시대의 배고프고 굶주린 돌도끼 사냥 경험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없다. 단지 오늘날에는 그러한 경험들이 마음만 먹으면 향유할 수 있는 경험의 목록 안으로 들어와 있을 뿐이다. 마치 TV정글의 법칙에 나온 병만족의 경험처럼 말이다. 생존으로서의 경험과 같은 경험이라도 문화로서 향유된 경험은 분명한 다른 질적 차이를 갖는다.




의식은 무의식상에서 수행된 단조로운 경험의 목록들을 더욱 넓혀주도록 이끈다. 적어도 의식 수준에서의 목적지향성은 다양한 경험의 목록들을 의도적인 목적에 맞도록 배치시키는, 매우 강화된 목적지향성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일종의 자각 느낌이 있고, 매우 강화된 목적에 따라 배치된 경험들을 수행하기 때문에 <통일적 느낌의 체험> 역시 함께 가진다. 이른바 <자아감>이 등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을 통해 다양한 경험의 목록들을 의도적인 목적에 맞도록 배치시킬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매우 명석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통일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 과정에서 의식이 갖는 지위는 우선 경험(움직임)의 다양성을 향유하기 위해서 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언어라는 상징의 출현도 크게는 이러한 맥락 안에 놓여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경험들을 저장하고 활용하는가.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경험(움직임)을 향유하고 있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때의 다양한 경험들이란 양적인 다양성만을 이야기 한 것인가?




여러 경험들 중에서도 특정 경험을 향유하려는 목적과 중요성으로서의 의식


물론 경험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도 특징적일 수 있지만, 그 다양한 경험들조차도 관계적 맥락에서 볼 때 질적인 차이 역시 드러날 수 있다. 의식은 많은 다양한 경험들 중에 그 어떤 특정한 경험을 선택하는 경험이다. 따라서 의식에는 향유된 경험이 갖는 특별한 <중요성>importance이 함축되어 있다.




의식 순간에 체험하는 경험은 각별한 중요성을 함축하고 있는 경험이다. 우리가 주변의 다른 것들을 의식하지 못할 경우 그것들은 사소한 배경 속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 중요성에 대한 경험은 일종의 주의집중화 경험이기도 할 것이다.




중요성을 갖는 이 주의집중화 경험은 아무래도 진화생물학에서 보듯이 시각 눈의 진화와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는데, 예를 들면, 후각만 발달된 상태나 맹시에서 단색의 흐릿한 평면 잔상의 시각으로 그리고는 다시 보다 각별한 체험을 가능케 하는 <입체시>의 획득과 시세포visual cell가 중앙에 밀집되어 나타난 <중심와>(中心窩)의 형성 여기에다 이후에 나타난 <3색형 색각>의 출현은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다양한 경험들 중에서도 그 어떤 특정 경험을 점점 더 각별하게 환기시키거나 강화했을 걸로 여겨진다. 



이것은 또한 특정 열매에 대한 분간과 함께 그것을 따러가거나 쥐거나 하는 손과 발의 다양한 경험들 역시 함께 수반하면서 보다 세분화된 정교한 경험들에 대한 각별한 느낌 역시 가능하도록 해준다. 그래서 의식 작용에는 특정 경험을 선별해내는 구분 기능 역시 지니고도 있다.




호모사피엔스라는 인간에 이르면, 중요성을 갖는 각별한 경험들은 이제 <언어>로서 저장되고 교환되며 계승되어진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경험의 목록들을 저장하거나 혹은 새롭게 꺼내기도 할 뿐더러 심지어 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경험을 창출시키기도 한다. 이 모든 역량에는 의식에 대한 진화적 발달 작용이 함께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의식은 분명 경험의 다양성 증대에도 기여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경험의 다양성만 증가한 것을 두고 일컫는 얘기가 아니다. 앞서 말한 운전 경험의 사례에서 볼 때도, 운전 경험이 하나 새로 추가됨으로서 그로 인해 훨씬 더 폭넓은 다른 경험들의 세계를 안내되거나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운전 경험 하나로 인해 이제 마음만 먹는다면 먼 곳까지 여행할 수 있는 경험이 생기게 되고, 그 여행에서 또 다른 낯선 경험까지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훨씬 더 커지게 된 것이다. 이 가능성은 집 안에만 있는 경험과 비교해볼 때 어떠한가? 즉, 새로운 가능성들을 담을 수 있는 여지에서 질적인 차이 역시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동일한 경험조차도 그것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임의의 순간에 박쥐 고기를 먹는 경험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생존 방법이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던 부족들에겐 박쥐를 먹는 것은 생존 지향의 맥락에 놓인 경험이다. 하지만 정글을 탐험한 병만족이 박쥐 고기를 먹는 경험은 결국 색다른 문화 체험의 목록들 중 하나로 포섭되어질 뿐이다.


따라서 의식은 경험의 다양성을 증대해주는 것과 함께 경험의 강도(intensity)를 깊게 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즉,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하려는 그 경험은 여러 다양한 경험들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경험이다. 물론 의식을 하는 그 순간에는 주의집중화 되어 있어 폐쇄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경험이 다른 데 주의를 돌리지 못하는 폐쇄적 경험이되 그 자신에게는 매우 뜻 깊고 고양된 차원의 경험을 선사해준다.


앞서 말했듯이 운전 경험은 그 자신에게 많은 것을 선사해주는, 매우 특별한 가치를 제공해주는 경험이다. 의식적 노력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주의 집중된 그 경험이 힘들 수 있으나, 그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향유되었을 때는 그 댓가로 훨씬 더 많고 다양한 경험 가능성들이 내가 향유할 수 있는 경험의 목록들 안으로 들어오는 즐거운 보상이 내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인간이 의식의 경험 상태에 있을 때만이 책임성을 지닐 수 있고, 물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 책임성이란 앞서 말한 향유하는 경험에 대한 보상과 함께 받는 댓가이기도 하다. <자유의지>란 관계에서 얻어지는 가상적 실재인 것이다. 환상이라고 부르긴 하나 그것은 한편으로 엄연한 효과를 갖는 환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장래 희망이 주는 환상이 작금의 현실을 추동하는 실체로도 작동된다는 사실은 가상성(virtuality)이 현실에 갖는 효과성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이 같은 가상성에 대한 조작과 발달을 꾀하면서 거대한 문명을 건설해온 것이다.


이제는 의식 수준의 깊고 풍요로운 발달로, 자아실현에서 <자타실현>으로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인간은 아직 거대한 무의식에 지배당하거나 의식을 쓰더라도 여전히 아주 단순하게만 쓸 줄 아는 현실에 놓여 있다. 의식은 자각하는 범주가 넓어지는 만큼 발달의 가능성도 훨씬 높아질 수 있다. 의식은 결코 정태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으며, 그것 또한 여전히 새로운 진화적 발달로도 열려 있는 과정적 사건에 해당한다.


소위 말하는 자아(Self, 또는 ‘자기’로도 번역됨)란 앞서 말한 다양하게 향유되는 경험들을 의식상에서 통일적으로 느낄 때 형성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의식이 고양되어진다는 것은 향유하는 경험의 목록들이 다양하다는 것과 강도가 깊은 질적인 경험을 갖는 것에 비례한다. 따라서 의식이 고양되어진다는 것은 자아가 발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와 타자 간의 관계를 새로운 설정으로 이끌게 한다.


즉, 타자의 경험이 나의 경험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인간과 나의 경험 양태만 의식하는 인간의 수준은 분명 다른 것이다. 예컨대, 히틀러의 의식 수준과 간디, 붓다 같은 성인들의 의식 수준을 비교해보면 금방 가늠되어질 것이다. 의식이 고양된 인간일수록 타자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과 가상적으로 견주어 볼 줄 안다. 나는 이를 <자타실현>(自他實現, Self-Others realization)이라고 부른다. 즉, 진정한 <자아실현>이란 결국은 <자타실현>이라는 얘기다. 그것이 우리 <경험의 다양성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경험의 강도를 매우 깊게> 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냥 요약적으로 얘기한다면 결국은 우리의 무의식 상태를 의식적으로 길들여서 다양한 타자의 경험들을 흡수하여 그 경험의 목록들을 내 안에 증대함과 동시에 보다 고양된 질적 경험들을 몸에 익혀서 자신의 자아를 더욱 풍요롭게 하기로 요약될 수 있겠다. 궁극적으로는 나와 타자 간의 소통적 일체감으로..



끝으로 통합사상가인 켄 윌버(Ken Wilber)의 유명한 언급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자기가 에고중심적인 파동에서 사회 중심, 세계 중심, 신 중심 파동으로 항해함에 따라 그 정체성은 확장되고 심화되는데, 이는 물질에서 원본능, 자기, 신에 이르는 정체성이다. …… 세계 중심적 수준에 있는 사람은 매우 성숙한 자기를 지니고 있다. 



이는 한 개인이 단순히 자신만의 자기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다각적인 조망을 취할 수 있어 인종, 피부 색, 성, 신념에 관계없이 공정성, 정의, 배려를 고려하면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요할 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만 그가 고려하는 범위는 상당히 넓고, 타인들은 그의 확장된 정체성 범위에 속하기 때문에 타인들의 이익이 더 많이 그 자신의 이익에 포함된다.” Integral Psychology (Boston & London : Shambhala, 2000), p.36.


"자신의 에고로부터 가족으로, 또한 지역 사회로
관심과 공감을 확장시킨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무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과 공감을
부족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인류로,
그리고 인류에서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로 확장하는 것은
더 폭넓은 포옹 속에서 더 깊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 켄 윌버


* 개인적으로 켄 윌버에 대해선 매우 유용하다고 보는 관점과 다소 부족하다고 느끼는 비판적인 견해가 함께 있지만, 여기선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그의 언급만을 살짝 빌려온 것임을 말씀드린다. 또한 이번 인천 모임에서 켄 윌버를 나눈다고 하셔서 그냥 이래저래...^^;;











* 본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의식 발달 훈련을 위한 경구


“<오류>는 고등한 유기체의 징표이며, 오류는 상승적 진화를 촉진하는 교사다” - A. N. 화이트헤드


“논리에는 <자기제외 논리>와 <자기포함 논리>가 있다. 전자의 논리는 타자에 대해 폭력적일 수 있지만, 후자의 논리는 타자와의 대화를 기본적으로 가능케 해준다.”

- 이는 김상일 교수의 ‘A형 논리’와 ‘E형 논리’ 분류를 본인 표현으로 해석한 언급임


“Thinking Glocally, Act Glocally 지구적ㆍ지역적으로 사고하고, 지구적ㆍ지역적으로 행동하라”

- 작자미상 (Glocally란 용어의 원출처 불분명), * 여기서 Glocally란 Globally(지구적으로)와 Locally(지역적으로)를 합쳐서 줄인말로 본인은 ‘Glocalization’를 <지구역화>(=지구화+지역화)로 번역하기도 한다(혹자는 '세방화'로). 어쨌든 이 개념은 사건적 존재의 홀아키적 특성을 인간 문명사에서도 그대로 잘 반영해주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비슷하게 지구화되는 보편성..
각각 특별하게 지역화되는 특수성,,
즉, 전체와 부분이 함께 어우러지며 맞물려 가는..
전체적 개별성들 간의 유기적 시스템이 다시 또 개체 사건을 형성해나간다고 볼 수 있다.







P.S - 물론 윗글에 대해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만 있다면야 반론 역시 언제든지 환영함!












  • profile
    김형태 2013.03.04 15:50
    의식 뿐만 아니라 무(비)의식 개념도 (상호보완적인) 기층구조를 가진다는 점이 의미심장 합니다.
    문득, 우리는 어떤 개념을 사고하면서 왜 level 모형을 떠올리는가?가 궁금해 졌습니다. 아마도 시간 개념(역사 의식) 등과 같이, 이미 우리 안에 내재(탑재)된 default '자체'는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동차 운전 경험 사례의 명쾌한 설명, Ken Wilber 읽기에서 곱씹을 부분들을 짚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론은 없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언어' 그리고 '상전이와 임계현상'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싶습니다.

    미선님의 우정과 나눔, 고맙습니다.
  • ?
    장철순 2013.03.04 15:50
    미선님 글 잘 보았습니다.
    반론은 아니고 이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의식, 무의식 그리고 인식 이는 대체로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뇌의 작용은 신경작용에 따른 정보처리를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정보란 무엇을 의미를 할 까요?
    (정보란 물리적 신호패턴으로 전해지는 의미라고 하는데, 이때 의미란? )

    그리고 뇌에서 이루어지는 정보는 어떠한 상태일까요?
    (신경전류의 상태?, 생화학물질의 상태? 아니면 이들이 가진(내포된)또 다른 의미상태? )

    그리고 의식에 따른 정보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보처리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정보취합에 따른 생화학적 반응으로? 또는 생리적 반응으로? 아니면 또 다른 정보에 따른 반응으로? )

    그리고 정보처리의 지향성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작위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보의 농도로? 또는 선택된 정보에 따른 우선순위로? 이것도 아니면 이미 정해진 정보에 의하여?)

    저는 우리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적인 것에 대한 것은 다양한 학문의 관점으로 대부분 밝혀지고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에 대하여는 아직도 오리무중인 것이 많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이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위와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뇌 과학적인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 ?
    주영준 2013.03.04 15:50
    좋은글 감사히 보았습니다!!
  • ?
    이기두 2013.03.04 15:50
    생물학 모임에서 미세소관에 대해 얘기 했었는데.
    펜노즈와 하머노프 등이 제기한 미세소관의 기능과 구조를 막바로 뇌안에서 일어나는 의식과 연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것은 양자역학에서 막바로 의식에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미세소관도 마찮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양자역학에서 미세소관과 같은 작고 단순한 구조로, 미세소관에서 DNA로, DNA 안에서 단백질의 복제기능에서 이보디보의 진화로 이어지면서 의식의 출연과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만.

    즉 단순한 하위구조에서 복잡한 상위구조로 진화하면서 적용되는 규칙이 단순한 규칙에서 복잡한 규칙으로 진보하고, 거기서 나오는 산출물이 단순한 반응에서 복잡한 의식으로 발전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철학과 다른 점은 내 머리속에서 이루어지는 수리적 논리적 연산으로 자연의 법칙을 해석하는가 자연에 내재된 규칙을 관찰하고 판단하여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는가에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전자기작용과 화학작용, 물리법칙등이 적용되고, 신경과학, 뇌과학 등의 성과가 적용되고, 생물학의 많은 성과가 적용된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객관적인 세계와 우리의 의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하위시스템에서 복잡한 상위시스템을 하나의 연결관계로 조망함이 없이 양자역학의 법칙을 막바로 의식에 연결한다든지, 뇌과학의 성과만을 가지고 의식을 다알게 되었다고 한다든지,

    상위레벨의 표면의식을 관찰하는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인 방법만으로 의식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든지 하는 것은 옳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철학이 화이트헤드, 러셀을 거쳐 비트겐쉬타인에 이르러 동어반복의 논리로 막다른 끝에 몰리는 것을 보았던 같습니다만.
  • ?
    이기두 2013.03.04 15:50
    한마디로, 시스템적인 방법이 필요하하다는 생각입니다.


    http://www.nature.com/news/big-neuroscience-billions-and-billions-maybe-to-unravel-mysteries-of-the-brain-1.12519

    이런 방대한 뇌과학 프로세스도 결국 예쁜 꼬마선충의 시스템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걸 알기 위해서는 그 아래 단계를 알아야 한다는.

    결국 양자역학에서 미세소관으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미세소관부터 알아야 한다는 데 이를 것입니다.


    신경세포 연결망을 연구하다 보면, 그안에서 꼼지락거리는 미세소관과 세포골격이 이해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데 이를 것이 뻔합니다.

    또한 단백질을 연구하다보면, 그것을 만드는 RNA, DNA 이전에 미세소관이 있다는 것에 부딪칠 것입니다. ^ ^
  • profile
    김형태 2013.03.04 15:50
    백두 선생이 어느 분인가?! 순간 당황 했습니다. ^^;
    박해를 받지 않는 위대함이 없고, 오해를 받지 않는 진리가 없다고 합니다.
    인천백북스에서 제가 만난 두 분의 미선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 ?
    장철순 2013.03.04 15:50
    이기두님의 글에 동의 합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이고,
    생명체는 물리적 시스템적으로 존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리적인 근원적 작용기전은 양자역학적으로 풀이가 되어지므로
    모든 생명현상도 양자역학적으로 풀이가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인식, 의식, 무의식, 마음이나 정신, 감정 등도 우리의 신체적인(물리적인) 것 내에서 생명 현상적 시스템의 작용현상의 일부로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자역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또 의문이 드는 군요
    생명체의 물리적 시스템과 양자역학적 관계?
    정보와 양자역학적 관계?
  • profile
    김형태 2013.03.04 15:50
    장철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물리적인 것' 즉 '물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해답을 얻은 철학자나 과학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
    이기두 2013.03.04 15:50
    물리학의 석학들도 양자역학을 정확히 이해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양자역학을 함부로 얘기하는 것이 마땅치는 않지만, 양자역학에서 생물학으로 연결되는 가장작은 접점에서 미세소관을 만난다는 생각을 얘기했습니다.

    장철순 선생님이 의문으로 표시히신 물리시스템과 양자역학과 정보의 문제까지 모두 관련된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단순한 구조의 미세소관이 왜 중요하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보았는데, 단순하기 때문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랍보다는 쥐, 쥐보다는 초파리, 초파리보다 선충으로 덜 복잡한 것으로 시선을 옴겨서 연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정란이 분할 되는 과정을 진행하는 것이 미세소관인데, 미세소관에 어떤 정보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진화에서 처음 나타나는 물리적 시스템이고, 정보이라고 본다면 문외한인 저도 중요한 실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명백한 실체를 놓아두고 형이상학적인 사변으로 가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출발하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진화론이든,
    게놈이든,
    복잡계과학이든,
    신경과학, 뇌과학이든, 여타 등등.


    물리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이나 로저 펜로즈나 스튜어트 하메로프, 마이클 콘래드 등의 생각을 동의하지 않는 듯한 말들을 하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물리학자라면 상위레벨에서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즐기느니, 이들의 방법에 대해 검토하는데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
    이기두 2013.03.04 15:50
    로저 펜로즈도 현재 안 계시고, 물어볼 분도 없으니 ^ ^

    맥스 테그마크(Max Tegmark)라는 분이 양자작용이 일어나는 온도를 계산했는데, 절대영도에서나 그런 작용이 일어난다는데, 뇌안의 온도는 너무 높다는 얘기였습니다.
    양쪽에 의견이 분분해서 알 수는 없으나,
    단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미세소관이 생명현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자발적으로 어떤 작용을 하는 물리적 실체라는 점입니다.
    나노크기에서 어떤 외부의 정보가 없이 수정란을 조작해서 생명현상을 이끌어 내는 현상은 어떤 과학자의 계산보다 명백한 증거일 것입니다.


    제가보는 이들의 논란의 문제점은 우물에서 숭늉 달라는 식이라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적 결과가 중간과정없이 매우 신비하게 정신작용으로 떠오르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거의 연금술이 가능하냐 마느냐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처럼 황당한 논의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생명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도 절대영도에서는 진짜로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 ^

    다만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환원주의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오류나 잘못된 예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고,
    미세소관에서 부터 쌓아올린 시스템으로 옳바른 판단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미세소관 안에서 일어나는 양자역학적인 작용이 막바로 의식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의 규칙이 다수(매우많은--집적회로 형성과 같이)가 모여서 네트웍크적인 통합되어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의 매우 많이 모여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상위 규칙으로 통합되는 과정이 여러차례 이어지며, 복잡계를 형성하여 신경과학과 뇌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의식형성의 과정을 만든다고 보는 것입니다.

    개별컴퓨터의 연산작용의 규칙은 매우 단순한 규칙으로 이루어지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네트워크의 통합인 슈퍼컴퓨터는 n개의 프로서서의 합이 아니라 새로운 규칙에 의해서 작동하지요.
    그리고 그위에 규칙인 인트라넷은 또한 다른 규칙이고, 그위에 WWW는 또한 다른 규칙입니다.
    이런 규칙이 복잡계를 이루어 이루어지는 환경은 생명의 작용처럼 연상되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 빅브라더라고 부릅니다.
    이미 어느 누구에 의해서 통제되는 수준을 넘어서 엄연한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입니다.
    여기에 다수의 무선 프로토콜들을 통합한 새로운 시스템이 사물인터넷 등과 얽힌다면, 그 시스템을 누가 통제하겠습니까.

    미세소관에서 생명체까지 이런 방식이 이루어 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실리콘기반이 아니라, 인산염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훨씬더 파워플하고, 규칙의 상승과정이 단숨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보여줌니다.
    생명 40억년 중에 39억년은 거의 수평으로 진화하다가 일억년동안에 너무나 급격한 변화가 있었고, 인류역사도 구석기가 대부분의 차지하다가 신석기로 넘어 서자 마자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것은 규칙의 통합에 의한 개별컴대 슈퍼컴, 슈퍼컴대 인터넷, 같은 변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니까,

    제가 제기한 내용이 그냥 나만의 상상이 아니라, 데이터의 뒷바침이 있다고 보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로저 펜로즈나 뇌과학과는 다른 입장의 가설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시스템생물학을 창시한 데니스 노블의 생각이나 프랜시스 크릭의 방법에 더 가까운 생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
    이기두 2013.03.04 15:50
    시간적 갭이라기 보다는 규칙상승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하나의 규칙상승단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도약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복잡계과학이 옳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크릭은 기억시스템 연구를 통해서 세포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시스템적으로 밝히는 연구를 했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 ?
    이기두 2013.03.04 15:50
    크릭의 그런 견해는 환원론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의식이 떠오르는 과정이라든지, 정체성을 느끼는 과정은 분자나 신경세포 수준보다는 상위에서 일어 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에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작용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난 생물학 모임에서 본 것은 의식이 홀로그램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간과 데이터, 정보가 별도로 루프를 그리고 뇌의 중심부로 들어와서 홀로그램영상을 만들 듯이 얽혀져서 심상을 만드는 것으로 보았습니다만.
  • ?
    이기두 2013.03.04 15:50
    전체적으로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 공감이 된다는 점에서 대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선님 글도 장문이고, 토론도 길었는데, 미선님께서 보람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되셨으며 다행이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장철순 2013.03.04 15:50
    물리적인 것에 대한 저의 정의 입니다.

    물리적 정의
    1)존재의 본질로 “물질(物質)”과 이에 따른 모든 작용현상을 통 털어 물리적인 것이라고 한다.

    2)물질(物質): 구체적인 공간적 형태를 가지고 있는 실체(實體)로 소립자의 상태로 원자적 구성으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질량(質量)으로 정의되어지는 것, 모든 사물이 이에 해당되어진다.
    속성: 시공적 변수가 적은 상태로 지속성을 가지며, 모든 “물리적 현상”의 근원이 되는 실체이다.

    3)물질에 따른 작용현상 : 물질의 변수에 의하여 나타나는 시공간변수의 상태로, 이를 “물리적 현상” 이라고 한다.
    속성: 시공간적으로 변하는 값으로 나타나며, 이를 “작용에너지”의 상태라고 한다. 이에 따른 것을 에너지량으로 표현이 된다. (에너지 : 시공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양(量))
    작용에너지는 모두 물질의 질량에 의하여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중력, 전자기력, 운동에너지, 열에너지, 화학에너지, 복사에너지(빛) 등이다.
    따라서 에너지량은 모두 시공간변수의 양으로 나타낸다. 이때 기준이 되는 량이 “보편상수”로 표현되는 것으로 현재는 빛의 속도에 따른 공간변수에 따른 시간과 공간크기(거리)인 “광속 c” 값이다.
    (과거에는 “거리”는 지구 표면의 일정부분을 기준으로 하고 “시간”은 태양을 도는 지구의 공간변수에 따른 것으로 나타내었지만, 현재는 물리적으로 절대값을 가지는 광속c값으로 통합적으로 다루어진다. 거리 1m 는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를 기준으로 다루며, 시간에서 1초는 “세슘원자가 2개의 초미세구조 사이에서 전이(轉移)할 때의 나오는 복사 또는 흡수하는 전자기에너지(빛)의 진동 주기의 91억 9263만 1770번 진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으로 규정을 하고 다루고 있다)
    시간과 공간크기의 함수는 물리학에서 가장 기본적 기준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4) 현재 물리학계에서는 세상은 이러한 물리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거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거의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이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적인 것에 대하여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탐구를 하고 있는 학문이 “우주물리학”과 “소립자물리학”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이러한 물리적인 것을 기본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관측과 관찰이 되어지므로 세상의 본질은 물리적인 것이라고 보며, 물리적인 것의 근원적 속성은 물리적 에너지라고 보고 있다. 이는 물질을 이루는 질량도 작용에너지로 변환이 되는 것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실험으로 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물리적 에너지가 질량의 상태로 물질을 이루면서 물리적 작용으로 세상을 구성을 하고 유지가 되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최근의 이론이 “끈이론(string theory )”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물리학에서는 세상의 본질적 존재는 물리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인문학적인 물질과 물리적 현상의 오해 (존재론에 대한 오해)

    우리 인간도 세상에 존재를 하므로 기본적으로 물질로 이루어진 신체와 생명체의 특성인 생화학적 시스템에 의하여 세상의 물질들을 이용을 하면서 살아간다. 이는 누구도 부정을 할 수가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은(아는 것은) 주로 인식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식작용은 물리적 신호패턴으로 전해지는 정보와 신체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정보처리를 하는 것으로 대상을 인식을 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대상은 정보의 상태로 가지고 있으며, 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한 대상은 그 대상자체가 아니고 정보의 상태이다 이를 “지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대부분 기억이라는 저장된 정보의 상태이다. 이는 시간적으로 보면 실재의 정보의 상태는 아니다. 즉 과거(경험)의 정보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지향성(의지)에 따라서 실시간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인식적 정보와 살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서 존재를 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보면 우리는 과거의 정보와 의지로 실시간적으로 세상의 실존적 존재들과 교류를 하면서 살아간다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대한 인문학적인 것에서는 우리의 의식과 의지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게 되는데, 일부 인문학자(철학자)들은 인식에 따른 지식과 의지의 관점에서 실체적 존재들에 대하여 부정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실체적 대상이란 없고, 모두 우리의 의식적인 지식으로만 존재로 만 존재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명제는 잘못된 것이다. 지식이란 실체적 대상자체가 아니라 이에 따른 정보의 상태이므로 지식은 실체적인 상태가 아니다. 실체성은 인식적 정보의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적 존재에 대하여 부정을 하는 것으로 옳지 않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말을 한 학자도 이러한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즉 물질보다 우리의 사회적 삶에서 조화롭고 합리적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의미에서 한 말이라고 생각이 되어진다. 하지만 이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오해를 할 수가 있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이 실체성이란 없다. 라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들이 “모든 것은 공(空)하다.” “모든 것은 생각일 뿐이다” 등과 같은 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한 “실체”와 “현상”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즉 우리는 실체적인 것도 인식적으로 정보의 상태로 현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이 인식적 정보에 대하여 실체성을 요구하는 것과 같이 다루게 되므로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제 생각으로는 현상(現象)은 작용에너지에 따른 시공간적으로 변하는 상태로 정의가 되어진다. 예를 들면 “보인다”. 라고 하는 현상은 빛에 의한 정보로 대상을 인식을 하는 것이고, “움직인다”라는 것은 시공간적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고, 내가 슬픈 감정을 느끼는 현상은 나의 인식적 정보와 의지에 따른 판단의 과정 따라서 나타나는 신경학적 작용상태의 일부로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앞서서 설명한 물질의 정의와 같이 공간적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며, 시공간적으로 변수가 적은 상태라고 할 수가 있으며 현상은 시공간적으로 변하는 작용의 상태가 인식적 정보의 상태로 인식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즉 이러한 물리적인 것은 우리의 인식작용(신경학적 작용)의 현상으로 인식이 되어진다고 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살고자 하는 지향성(의지)도 우리 인간의 생명체적 신체에 현상에 따른 현상의 일부로 볼 수가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물질이 무엇이며, 물리적인 것이 무엇이며, 실체적인 것이 무엇이며 현상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저는 이와 같이 보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김형태 총무님 저의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 ^
    글 솜씨가 없어서 생각을 글로 설명을 하려니 무척 어렵네요,
  • profile
    김형태 2013.03.04 15:50
    장철순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람이 책이다'를 보여 주신, 미선님과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마음에 남아 있는 '책읽기'에 관한 글을 소개합니다.

    http://blog.daum.net/irepublic/7888481

    - 독서를 하는 이유 한가지, 강국진
  • ?
    이기두 2013.03.04 15:50
    위에 제 댓글에서 아래 글은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적 갭이라기 보다는 규칙상승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하나의 규칙상승단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도약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복잡계과학이 옳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크릭은 기억시스템 연구를 통해서 세포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시스템적으로 밝히는 연구를 했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시간적 갭이라기 보다는 규칙상승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하나의 규칙상승단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도약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복잡계과학이 옳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크릭은 기억시스템 연구를 통해서 세포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시스템적으로 밝히는 연구를 했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


    위글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간적 갭인가" 라고 물으신 것에 대해서는 규칙의 상승이 이루어 지는 것은 시간의 경과라기 보다 규칙상승을 이루기 위해 네트워크가 이루어 지기에 충분한 숫자와 농도, 그리고 네트워크를 통해 규칙상승이 필요할 정도의 상황, 예를 들면 생존의 위협, 또는 다른 선택이 더 유익하다는 합의가능한 시스템의 발견같은 것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억 시스템을 연구한 분은 크릭이 아니고 '에릭 켄달' 이었습니다.
    에릭 켄달의 '기억'이라는 책은 백북스 회원들은 많이 아시는 책.
  • ?
    이기두 2013.03.04 15:50
    물론 변화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변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비율(변수)로 나타나는가, 아니면 시간의 흐름에 무관하게 랜덤하게 나타나는가하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후자쪽으로 본 것입니다.

    미선님이 에릭 켄달을 환원주의자라고 본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그냥 과학자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랫단계에서 발견한 사실을 가지고 위 단계를 설명하는 것을 모두 환원론이라고 하면 과학은 불가능합니다.
    아랫 단계에서 발견한 사실의 총합이 위 단계를 만족한다고 하면 환원론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랫단계에서 발견된 사실이 위단계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이거나, 위단계를 구성하는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 만으로는 환원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래 단계에서 발견된 사실이 시스템적으로 위 단계를 형성하는 일부-요소일 것이라고 하는 것 만으로는 환원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환원론은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 ?
    이기두 2013.03.04 15:50
    시간에 관해서는 위글에 수정으로 한줄 추가 했습니다.

    의식의 창발과 기억은 분리해서 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억은 창발이 일어나기 이전의 단계이고, 세포와 신경을 연구하는 뇌과학 영역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환원론, 비환원론의 대상이 아닌 분야인 것으로 이해 했습니다.

    위에서 두분을 예로 든 것은 전체를 시스템으로 이해는 태도와 부분인 요소를 정밀하게 이해하는 것이 같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함께 예로 든 것입니다.
  • ?
    이기두 2013.03.04 15:50
    너무 길어진 듯 합니다.
    생물학 소모임에서 토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니면 글을 바꿔서 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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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후기 인천백북스 안희찬 회장님 만남 ( 2013년 4월 5일 ) 3 김형태 2013.04.06 1958
12 후기 형이상학이 우리 삶의 일상과 뇌에 큰 영향을 끼칠 때.. 5 미선 2013.03.11 1935
11 후기 [인미모] 묵자 읽기 1 (계속 작성중) 김형태 2014.05.17 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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