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상향적인 의식 발달 (인천모임 나눔)

by 미선 posted Mar 0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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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에서 무의식을 비의식'non-consciousness'이라고 명명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어쨌든 핵심 의미는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을 일컫는다. 여기서는 그냥 일반적으로 부르는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쓸 것이다. 참고로 티모시 윌슨(Timothy D. Wilson)이라는 미국의 심리학자는 무의식을 <적응 무의식>adaptive-unconsciousness이라고도 부르는데, 본인은 그와 같은 견해에 많이 동의하는 편인데, 그럴 경우에도 <1차 적응무의식>과 <2차 적응무의식>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이 글은 인천 백북스 모임에서 한 인문학 전공자로서 프리스의 책과 가자니가의 책을 읽고 무의식과 의식의 상관 관계에 대해 써 본 낙서글에 속한다. 다소 긴 글인 점은 양해바람..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


개인적으로는 무의식에도 크게 두 가지 상태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바로 <1차 무의식 상태>와 의식의 과정을 거쳐서 나온 <2차 무의식 상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1차 무의식> 상태란 그냥 계속적으로 의식이 없는 무의식 상태이거나 또는 의식이 조금 있다고 해도 적어도 거대한 무의식에 의해 지배당하거나 조종되는 경험 상태를 의미한다. 단적으로 의식이 아예 없는 경우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좀비 상태>라고도 표현하잖은가. 좀비 작동체는 자각 느낌 없이 오직 경험만을 수행할 뿐이다. 또한 의식적 경험이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여전히 무의식의 통제에 놓여 있는 경우 역시 결국은 1차 무의식 상태에 해당한다고 보여진다.


현대의 뇌과학에서도 말하길 인간 행동의 95%는 자동항상성시스템에 의한 것이라고 하며, 단지 5%정도만 그렇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흔히 프로이드 심리학이 강조하는 무의식도 1차 무의식이 갖는 위력을 강조한 것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의식적 존재가 아니며 거대한 무의식의 통제와 지배하에 놓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드 진영이 <정신적 결정론>을 주장하는 이유도 짐작할만하다.


그런데 앞서 말한 1차 무의식과 달리 의식을 거쳐서 나온 2차 무의식 상태가 있는데 이는 1차 무의식과 같은 무의식 상태라는 점에서 비슷하며 구분이 안되는 혼동의 오류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2차 무의식은 적어도 의식이라는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앞의 1차 무의식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자동차 운전 경험을 통해서 이해하는 무의식과 의식의 상관 관계





나의 경우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동차 운전을 곧잘 예로 많이 드는 편이다. 물론 우리는 운전이라는 경험을 경험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전의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운전과 관련해 1차 무의식 상태에 속한다. 즉, 운전과 관련된 자각 자체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살다보면 사회적 관계에서 운전을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순간 역시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이 차 운전을 요구하는 경우나 주변에 생필품 가게나 약국 혹은 병원이 없거나 너무 멀리 있는 경우 등등 여러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의식은 운전을 익혀야겠다는 매우 뚜렷한 목적적 지향을 지니게 되며, 그리고서 운전을 배우고 그것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고도의 집중 상태를 형성한다. 즉, 의식적 노력이 정말 많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의식적 노력에 있는 운전 경험은 운전 외의 다른 경험들에 열려 있지 않고, 오로지 운전에만 고도로 주의 집중되어 있는 상태다. 그때의 의식은 차창 밖의 풍경을 즐길 여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운전이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운전과 관련된 <2차 무의식 상태>가 형성되게 된다. 이젠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운전 경험이 능수능란하게 가능하다. 운전이라는 경험이 이제 <몸의 자동항상성시스템> 안으로 포섭되는 것이다. 운전 경험이 <2차 무의식 상태>가 되면, 이제 그동안 운전 익히기에 바빴던 의식을 다른 경험에 사용해도 좋은 여유가 생기게 된다. 운전 경험은 2차 무의식 상태로 보내면서 동시에 자동차 밖의 풍경도 감상할 줄 알게 되고, 또는 전화 통화도 할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기게 된다.


따라서 <1차 무의식 상태>와 <2차 무의식 상태>는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둘 다 의식 상태가 아니라고 해서 이를 혼동할 경우 이는 <전후 혼동의 오류>에 해당할 수 있다(이 개념은 켄 윌버Ken Wilber가 말한 ‘전초 오류’pre-trans fallacy 개념에서 따온 것인데, 이를 조금 쉽게 풀어서 표현한 것임).


의식의 두 국면, <무의식에 통제받는 의식>과 <무의식을 조정하려는 의식>


이쯤 되면 <1차 무의식 상태>와 <2차 무의식 상태>가 똑같이 <의식>에 대해서도 성립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눈치 채셨을 걸로 본다. 즉, 의식 또한 <무의식에 포섭당한 1차 의식>과 오히려 <무의식에 간섭하려는 2차 의식>로 나누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역시 의식의 두 국면인데, <1차 무의식>의 통제에 놓여 있는 명멸하는 의식 상태가 있는가 하면 <2차 무의식>을 산출시키는 의식의 국면 또한 있는 것이다. 이때 후자의 의식 상태란 매우 강력한 목적지향성의 <의지>will로도 나타난다(나는 의지라는 용어를 적어도 의식 상태에서의 목적지향성을 뜻하는 것으로 쓴다. 즉, 단순지향성이 아닌 고도의 복합적 지향성인 것이다)..


결국 <낡은 습관>에서 <새로운 습관>으로 전환에는 반드시 의식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의식이 없다면 우리의 습관은 계속 고정되면서 자동반복화될 것이기에, 새롭고 창조적인 경험을 명징하게 향유하기가 매우 힘들 수 있다. 의식은 의도하려는 특정한 경험에 대한 향유를 매우 명징하게 인지하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의식이라는 경험에는 자각 느낌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자각 느낌이 없는 무의식적 경험에서는 명석 판명한 느낌이 부재하다.


앞서 말한 운전 경험이 없는 자에게 운전 경험은 그야말로 새로운 경험을 하나 더 증대시킨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운전 경험이란 게 뭔지를 생생하게 확보하도록 해주며, 이를 기억의 저장고에 고이 간직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의 운전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경험에까지 나아가도록 이끈다.


인간의 경험에는 결국 무의식적 경험과 의식적 경험이 있다지만, 그러한 무의식적 경험과 의식적 경험에도 그 역시 함께 상응하는 경험의 두 가지 국면이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프로이드 진영을 비롯한 주류 심리학 진영이 흔히 <무의식에 통제받는 의식>의 국면들을 보다 강조한다면, 요컨대 마음수련 혹은 종교에서 말하는 명상 훈련을 주장하는 진영은 <무의식에 개입하려는 의식>의 국면들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전자는 인간에 대한 통제 혹은 세뇌의 측면 역시 함께 포함되기도 하며, 후자의 경우는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에서 말하는 <초-의식>의 경험으로 넘어가기도 한다(물론 그것이 진짜 <초의식>인지 아닌지는 실현된 맥락에서조차도 더 살펴봐야 할 문제이지만).





흔히 고등 종교에서 말하는 영성 훈련 또는 몸수행 프로그램들을 보면, 주로 후자의 국면을 강조한 것들이다. 그 안에는 마음을 잘 닦아서 우리의 몸에 새롭고 유익한 습관을 길들이려는 방향이 있다. 만일 그 누군가가 <2차 무의식 상태>를 자유롭게 형성할 정도로 매우 강화된 수준의 의식 경험들을 보인다면, 그(녀)는 붓다 못지 않은 상당한 수행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진화 과정에서 의식이 갖는 의미와 지위

- 향유하려는 <경험의 다양성 증대>와 <경험의 강도 심화>를 위해


앞서 운전 경험 사례를 굳이 글로 풀어 본 이유는, 내가 볼 때 진화 과정에서 의식이라는 사건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세포, 동물, 인간으로의 진화 과정은 한편으로 그 경험의 다양성을 증대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단순히 생존의 목적만 지향하는 경험은 크게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왜냐하면 향유하는 경험이 너무나 단조롭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생존을 원하되 보다 만족스러운 생존 방식을 원하며, 그리고선 그 만족의 증대를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지향한다.





아마도 최종적 만족의 종착역은 나와 타자의 목적들의 실현이 최적화된 균형을 이루는, 바로 그러한 만족 상태이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이미 서로가 존재론적으로도 얽혀 있는 관계적 사태에서 서로 합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지점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이르는 과정만큼은 상당한 시행착오와 숱한 비극들의 연속일 수 있기에 결코 낙관적으로 보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 "항상 희망하되 끊임없이 회의할 것!"


처음에 우리 몸의 자동항상성시스템은 거의 생존 지향성으로만 반응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먹고 사는 생존 경험만으로도 충족되지 않는 상태, 곧 자신의 생존 시스템을 보다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 만들려는 목적 지향이 생기게 되고, 이것을 또한 보다 만족스러운 방향으로 향유하려는 방향으로도 나아가게 되었을 걸로 본다. 인간의 문화생활이란 것도 단순한 생존지향의 목적적 삶을 넘어서 있다. 그럴 경우 생존 방법을 터득하는 것 외에도 인간은 지식과 교양을 쌓으려는 삶으로도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보통 무의식적 상태는 자동 반복적인 경험으로 나타나는데 이 지루하고 반복된 경험은 단조로움이라는 퇴행으로 떨어지기 십상일 수 있다. 개미의 경험이 아무리 정교한 사회 시스템을 추구한다고 해도 인간의 사회만큼 복잡 다양한 경험을 갖진 않는다. 심지어 인간의 경우는 단 한 사람의 경험조차도 온갖 양상의 드라마가 나올 수 있을 만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단기적으로 볼 경우 진화라는 과정을 꼭 발달로만 볼 순 없지만, 적어도 장대한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발달은 분명 발달이다. 왜냐하면 의식을 지닌 인간이 개미의 단조로운 경험 상태로 퇴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평생을 구석기 시대의 배고프고 굶주린 돌도끼 사냥 경험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없다. 단지 오늘날에는 그러한 경험들이 마음만 먹으면 향유할 수 있는 경험의 목록 안으로 들어와 있을 뿐이다. 마치 TV정글의 법칙에 나온 병만족의 경험처럼 말이다. 생존으로서의 경험과 같은 경험이라도 문화로서 향유된 경험은 분명한 다른 질적 차이를 갖는다.




의식은 무의식상에서 수행된 단조로운 경험의 목록들을 더욱 넓혀주도록 이끈다. 적어도 의식 수준에서의 목적지향성은 다양한 경험의 목록들을 의도적인 목적에 맞도록 배치시키는, 매우 강화된 목적지향성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일종의 자각 느낌이 있고, 매우 강화된 목적에 따라 배치된 경험들을 수행하기 때문에 <통일적 느낌의 체험> 역시 함께 가진다. 이른바 <자아감>이 등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을 통해 다양한 경험의 목록들을 의도적인 목적에 맞도록 배치시킬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매우 명석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통일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 과정에서 의식이 갖는 지위는 우선 경험(움직임)의 다양성을 향유하기 위해서 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언어라는 상징의 출현도 크게는 이러한 맥락 안에 놓여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경험들을 저장하고 활용하는가.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경험(움직임)을 향유하고 있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때의 다양한 경험들이란 양적인 다양성만을 이야기 한 것인가?




여러 경험들 중에서도 특정 경험을 향유하려는 목적과 중요성으로서의 의식


물론 경험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도 특징적일 수 있지만, 그 다양한 경험들조차도 관계적 맥락에서 볼 때 질적인 차이 역시 드러날 수 있다. 의식은 많은 다양한 경험들 중에 그 어떤 특정한 경험을 선택하는 경험이다. 따라서 의식에는 향유된 경험이 갖는 특별한 <중요성>importance이 함축되어 있다.




의식 순간에 체험하는 경험은 각별한 중요성을 함축하고 있는 경험이다. 우리가 주변의 다른 것들을 의식하지 못할 경우 그것들은 사소한 배경 속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 중요성에 대한 경험은 일종의 주의집중화 경험이기도 할 것이다.




중요성을 갖는 이 주의집중화 경험은 아무래도 진화생물학에서 보듯이 시각 눈의 진화와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는데, 예를 들면, 후각만 발달된 상태나 맹시에서 단색의 흐릿한 평면 잔상의 시각으로 그리고는 다시 보다 각별한 체험을 가능케 하는 <입체시>의 획득과 시세포visual cell가 중앙에 밀집되어 나타난 <중심와>(中心窩)의 형성 여기에다 이후에 나타난 <3색형 색각>의 출현은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다양한 경험들 중에서도 그 어떤 특정 경험을 점점 더 각별하게 환기시키거나 강화했을 걸로 여겨진다. 



이것은 또한 특정 열매에 대한 분간과 함께 그것을 따러가거나 쥐거나 하는 손과 발의 다양한 경험들 역시 함께 수반하면서 보다 세분화된 정교한 경험들에 대한 각별한 느낌 역시 가능하도록 해준다. 그래서 의식 작용에는 특정 경험을 선별해내는 구분 기능 역시 지니고도 있다.




호모사피엔스라는 인간에 이르면, 중요성을 갖는 각별한 경험들은 이제 <언어>로서 저장되고 교환되며 계승되어진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경험의 목록들을 저장하거나 혹은 새롭게 꺼내기도 할 뿐더러 심지어 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경험을 창출시키기도 한다. 이 모든 역량에는 의식에 대한 진화적 발달 작용이 함께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의식은 분명 경험의 다양성 증대에도 기여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경험의 다양성만 증가한 것을 두고 일컫는 얘기가 아니다. 앞서 말한 운전 경험의 사례에서 볼 때도, 운전 경험이 하나 새로 추가됨으로서 그로 인해 훨씬 더 폭넓은 다른 경험들의 세계를 안내되거나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운전 경험 하나로 인해 이제 마음만 먹는다면 먼 곳까지 여행할 수 있는 경험이 생기게 되고, 그 여행에서 또 다른 낯선 경험까지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훨씬 더 커지게 된 것이다. 이 가능성은 집 안에만 있는 경험과 비교해볼 때 어떠한가? 즉, 새로운 가능성들을 담을 수 있는 여지에서 질적인 차이 역시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동일한 경험조차도 그것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임의의 순간에 박쥐 고기를 먹는 경험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생존 방법이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던 부족들에겐 박쥐를 먹는 것은 생존 지향의 맥락에 놓인 경험이다. 하지만 정글을 탐험한 병만족이 박쥐 고기를 먹는 경험은 결국 색다른 문화 체험의 목록들 중 하나로 포섭되어질 뿐이다.


따라서 의식은 경험의 다양성을 증대해주는 것과 함께 경험의 강도(intensity)를 깊게 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즉,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하려는 그 경험은 여러 다양한 경험들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경험이다. 물론 의식을 하는 그 순간에는 주의집중화 되어 있어 폐쇄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경험이 다른 데 주의를 돌리지 못하는 폐쇄적 경험이되 그 자신에게는 매우 뜻 깊고 고양된 차원의 경험을 선사해준다.


앞서 말했듯이 운전 경험은 그 자신에게 많은 것을 선사해주는, 매우 특별한 가치를 제공해주는 경험이다. 의식적 노력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주의 집중된 그 경험이 힘들 수 있으나, 그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향유되었을 때는 그 댓가로 훨씬 더 많고 다양한 경험 가능성들이 내가 향유할 수 있는 경험의 목록들 안으로 들어오는 즐거운 보상이 내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인간이 의식의 경험 상태에 있을 때만이 책임성을 지닐 수 있고, 물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 책임성이란 앞서 말한 향유하는 경험에 대한 보상과 함께 받는 댓가이기도 하다. <자유의지>란 관계에서 얻어지는 가상적 실재인 것이다. 환상이라고 부르긴 하나 그것은 한편으로 엄연한 효과를 갖는 환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장래 희망이 주는 환상이 작금의 현실을 추동하는 실체로도 작동된다는 사실은 가상성(virtuality)이 현실에 갖는 효과성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이 같은 가상성에 대한 조작과 발달을 꾀하면서 거대한 문명을 건설해온 것이다.


이제는 의식 수준의 깊고 풍요로운 발달로, 자아실현에서 <자타실현>으로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인간은 아직 거대한 무의식에 지배당하거나 의식을 쓰더라도 여전히 아주 단순하게만 쓸 줄 아는 현실에 놓여 있다. 의식은 자각하는 범주가 넓어지는 만큼 발달의 가능성도 훨씬 높아질 수 있다. 의식은 결코 정태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으며, 그것 또한 여전히 새로운 진화적 발달로도 열려 있는 과정적 사건에 해당한다.


소위 말하는 자아(Self, 또는 ‘자기’로도 번역됨)란 앞서 말한 다양하게 향유되는 경험들을 의식상에서 통일적으로 느낄 때 형성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의식이 고양되어진다는 것은 향유하는 경험의 목록들이 다양하다는 것과 강도가 깊은 질적인 경험을 갖는 것에 비례한다. 따라서 의식이 고양되어진다는 것은 자아가 발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와 타자 간의 관계를 새로운 설정으로 이끌게 한다.


즉, 타자의 경험이 나의 경험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인간과 나의 경험 양태만 의식하는 인간의 수준은 분명 다른 것이다. 예컨대, 히틀러의 의식 수준과 간디, 붓다 같은 성인들의 의식 수준을 비교해보면 금방 가늠되어질 것이다. 의식이 고양된 인간일수록 타자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과 가상적으로 견주어 볼 줄 안다. 나는 이를 <자타실현>(自他實現, Self-Others realization)이라고 부른다. 즉, 진정한 <자아실현>이란 결국은 <자타실현>이라는 얘기다. 그것이 우리 <경험의 다양성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경험의 강도를 매우 깊게> 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냥 요약적으로 얘기한다면 결국은 우리의 무의식 상태를 의식적으로 길들여서 다양한 타자의 경험들을 흡수하여 그 경험의 목록들을 내 안에 증대함과 동시에 보다 고양된 질적 경험들을 몸에 익혀서 자신의 자아를 더욱 풍요롭게 하기로 요약될 수 있겠다. 궁극적으로는 나와 타자 간의 소통적 일체감으로..



끝으로 통합사상가인 켄 윌버(Ken Wilber)의 유명한 언급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자기가 에고중심적인 파동에서 사회 중심, 세계 중심, 신 중심 파동으로 항해함에 따라 그 정체성은 확장되고 심화되는데, 이는 물질에서 원본능, 자기, 신에 이르는 정체성이다. …… 세계 중심적 수준에 있는 사람은 매우 성숙한 자기를 지니고 있다. 



이는 한 개인이 단순히 자신만의 자기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다각적인 조망을 취할 수 있어 인종, 피부 색, 성, 신념에 관계없이 공정성, 정의, 배려를 고려하면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요할 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만 그가 고려하는 범위는 상당히 넓고, 타인들은 그의 확장된 정체성 범위에 속하기 때문에 타인들의 이익이 더 많이 그 자신의 이익에 포함된다.” Integral Psychology (Boston & London : Shambhala, 2000), p.36.


"자신의 에고로부터 가족으로, 또한 지역 사회로
관심과 공감을 확장시킨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무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과 공감을
부족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인류로,
그리고 인류에서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로 확장하는 것은
더 폭넓은 포옹 속에서 더 깊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 켄 윌버


* 개인적으로 켄 윌버에 대해선 매우 유용하다고 보는 관점과 다소 부족하다고 느끼는 비판적인 견해가 함께 있지만, 여기선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그의 언급만을 살짝 빌려온 것임을 말씀드린다. 또한 이번 인천 모임에서 켄 윌버를 나눈다고 하셔서 그냥 이래저래...^^;;











* 본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의식 발달 훈련을 위한 경구


“<오류>는 고등한 유기체의 징표이며, 오류는 상승적 진화를 촉진하는 교사다” - A. N. 화이트헤드


“논리에는 <자기제외 논리>와 <자기포함 논리>가 있다. 전자의 논리는 타자에 대해 폭력적일 수 있지만, 후자의 논리는 타자와의 대화를 기본적으로 가능케 해준다.”

- 이는 김상일 교수의 ‘A형 논리’와 ‘E형 논리’ 분류를 본인 표현으로 해석한 언급임


“Thinking Glocally, Act Glocally 지구적ㆍ지역적으로 사고하고, 지구적ㆍ지역적으로 행동하라”

- 작자미상 (Glocally란 용어의 원출처 불분명), * 여기서 Glocally란 Globally(지구적으로)와 Locally(지역적으로)를 합쳐서 줄인말로 본인은 ‘Glocalization’를 <지구역화>(=지구화+지역화)로 번역하기도 한다(혹자는 '세방화'로). 어쨌든 이 개념은 사건적 존재의 홀아키적 특성을 인간 문명사에서도 그대로 잘 반영해주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비슷하게 지구화되는 보편성..
각각 특별하게 지역화되는 특수성,,
즉, 전체와 부분이 함께 어우러지며 맞물려 가는..
전체적 개별성들 간의 유기적 시스템이 다시 또 개체 사건을 형성해나간다고 볼 수 있다.







P.S - 물론 윗글에 대해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만 있다면야 반론 역시 언제든지 환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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