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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을에 눈이 오다

by 옥순원 posted Jan 3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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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중에 펄펄, 흰 눈을 만났다. 남녘 매화가지 꽃눈을 다독이는 1월의 눈이다.


거대한 특고압 송전탑들이 <접근금지>라는 붉은 팻말을 걸고 선 청주 서쪽의 부모산.


휘날리는 눈발 속에서 한 달의 휴가를 정리하는 고요함 - 찻길 너머 교회의 첨탑이 환영처럼 신비하다.


산의 관자놀이를 안타깝게도 관통한 송전선 아래를 걸어 내려오면서


1월 5일에 처음 찾았던 독서클럽의 신년 산행을 떠올린다.


 

새 인연에 섞여 함께 올랐던 계룡산. 독서클럽의 길잡이 되신 선생님들과 친절하고 풋풋한 회원들을 처음 만났던 곳. 마침 방학 중이라 이후로 몇번을 더 대전을 드나들며 클럽이 베푸는 토론과 강의에 참가했다. 항공우주공학을 공부 중인 아들과, 낡아가는 교사인 나에게 무척 신선한 방식의 모임이었다. 앞서 많은 시간을 공유해온 회원들의 순수한 열정이 주는 탄력감 때문일 것이다.

 

생명의 유한성을 인정하면서도 초조함 없이 대우주,소우주의 비밀과 감동 찾기에 몰입하는 사람들. 고압 송전탑 아래에도 십자가를 세우고 절을 짓는 사람의 마을처럼 이 독서모임은 따뜻하다.

시공간에 떠도는 온갖 학설들의 귀와, 눈과 입들을 불러 모아

그 진위와 혼란을 수습하고 온당한 정신의 집을 짓기 위해

방위를 보고 터를 닦아 길을 트는 선생님과 서까래를 다듬는 학우들 .

이들의 본 보이기는 성결한 종교적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소중한 것들을 (청춘을 지난 자에게 시간은 분명 돈 이상으로 귀한 사유재산이므로 더욱 그렇다)  공동의 것으로 돌리는 생각과 말과 실천이야말로 제대로 학문하는 자의 진면목이 아닐까.

 

오십 중반에 서도록 이렇다 할 이타적 삶을 실천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부러움이 앞선다. 당연히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겠다.

내일이면 겨울방학 끝. 나는 다시 아이들의 마을이 있는 괴산으로 돌아간다.

이미 발원이 있었으니 접근금지, 고압송전탑이 가로막더라도 언제든 우린 다시 만나리라.

책과 사람들이 어우러져 은하수처럼 환한 이 마을에서...

 

-청주를 떠나면서, 옥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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