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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책 아이들 이야기도 듣는다면 - 독후감

by 김용전 posted Apr 1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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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위험한 마음  




(1)
호우원용 저/한정은 역 | 바우하우스 | 2008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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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열반 편성 논쟁을 지켜보며


-교육정책, 학생들에게도 물어라-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 드리겠다’고 외치면서 출범한 새 정부가 연일 새로운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균형발전을 내세우며 추진하던 혁신도시가 오히려 경제적 효과가 없다고 재검토를 한다고 하자 해당지역 주민들이 ‘이럴 수가 있느냐’라며 반발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위협한다고 해서 도와주지 않는다’라며 강경한 자세로 ‘퍼주기 식 대북정책’을 선회시키자 진작 그랬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반도 대운하’는 반대 여론이 높아간다는 보도가 나오는 가운데, 정부와 여당은 ‘국민의 뜻을 폭 넓게 물어서 추진하겠다’고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말장난 같다는 생각도 든다. ‘폭 넓게 물어서 추진 여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폭 넓게 물어서 추진하는 거’라면 어차피 추진은 하겠다는 건지 - 하긴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도 진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윗 전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거나 아니면 백성들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 없거나 그도 아니면 둘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이렇게 연일 쏟아지는 보도 가운데 필자의 가슴을 때리고 지나가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학교에서의 ‘우열반 편성’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정부에서 우열반 편성을 허락하되 실시는 학교장 재량에 맡긴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왜 우열반 편성 이야기가 지금 시점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것이다. 우열반을 편성하지 않아서 우리나라 교육에,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무슨 문제가, 어떤 피해가 있었다는 것인가?





 우리 사회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 그것이 1인당 국민소득 2만불이라는 물질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까지 포함해서 -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대전제를 계속해서 구현해나가고 있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전제 아래 여성도 자신의 성(姓)을 자녀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시대까지 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추세와 이런 노력들은 아직도 사회 전반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박학비재라 잘 모르긴 해도 - 엄청난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숭례문 방화범이나 연쇄살인범, 유괴 살해범 등을 보도진 앞에 세우면서도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주는 것은 그런 ‘극악무도, 후안무치’한 인간들에게도 ‘기본적 인권’이 있다는 취지가 아닌가?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런 우리나라가 왜 유독 교육문제 만큼은 이렇게 ‘정처 없는 발길’인가? ‘우열반’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우등생반’과 ‘열등생반’으로 나누어서 공부를 시키겠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두 반 중에서 학교가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쪽은 어느 쪽인가? 우등생반인가 열등생반인가? 이렇게 물어보는 필자가 한심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우등생반이다. 가능성 있는 아이들을 확실하게 더 가르치겠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능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음악가가 될 가능성인가, 과학자가 될 가능성인가, 우주인이 될 가능성인가, 도대체 어떤 가능성인가? 이 또한 어리석은 질문이다. 대학에 갈 가능성, 더 정확히는 명문 대학에 합격할 가능성임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문대학, 아니 대학에 갈 가능성이 없는 아이는 바로 열등생이라는 이야기인가? 시대를 역행해도 유분수라야 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지금은 결코 학과목 성적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학과목 공부를 못하더라도 어느 분야에 남다른 소질이 있다면 저마다의 그것을 찾아서 이를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되는 그런 세상이다. 남다른 소질이 없는 평범한 아이라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소양을 길러 주어야 된다. 그것이 교육이 할 일이다. 학과목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가 곧 열등생은 결코 아니다. 학과목 공부를 잘해서 명문 대학 가고, 일류 회사 들어가서 안정적으로 한 평생 사는 것도 좋지만 그렇지 않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발휘하며 또는 평범한 백성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필자가 살아온 인생의 경험으로는 ‘특출 나게 사는 것’보다 오히려 ‘평범하게 사는 것’이 더 어렵다. 평범하게 사는 이들을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서민을 위한 백성의 종(從)’이 되겠다고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는가? 과연 서민이 누구인지 알기는 하는 건가? 학교에서 서민은 과연 누구인가? 우등생인가 열등생인가? 아니 열등생이라는 말 자체를 써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그 학생을 ‘열등생’이라고 낙인찍을 권한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없다.  모든 아이들은 가능성의 존재일 뿐이다. 어른들의 임무는 그 가능성을 키워주는 일이지 ‘너는 될 놈’, ‘너는 안 될 놈’이라고 낙인찍는 일이 아니다. 필자가 단언하건대,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이를 추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자신이 결코 ‘열등생’이라는 낙인의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는 ‘우등생’들이었거나, 또는 그 자녀들이 ‘열등생’의 고통을 모르는 ‘우등생’들이기 때문에 이런 시대 역행적인 불평등 개악이 거론되고 있다고 본다.





 혹자는 ‘수준별 학습’을 내세울 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르는 내용을 뒤섞어서 가르치지 말고 잘하는 아이는 잘하는 쪽으로 빨리 나가고, 못하는 아이는 자기 수준에 맞는 낮은 곳을 가르쳐 줌으로써 교육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주장 말이다. 만일에 그렇다면 논의의 출발점을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 거기에는 ‘우열반’ 편성이 아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교육’을 논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아이들을 평등하게 대하자, 아니 ‘모자라는 아이에게는 더욱 더 관심을 쏟자’라는 그런 관점에서 밤을 세워가며 교육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은 너무 ‘이상적인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인가? ‘우열반’이라는 발상 자체가 ‘내 아이를 다른 아이보다 더 특출 나게 가르쳐서 명문대학에 보내고 싶은 학부모의 욕망’을 사교육이 아닌 공교육에서 수렴하겠다는 데에서 나왔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진보 성향의 정부가 너무 ‘이상(理想)’에 치우쳐서 10년을 잃어버렸다면 새 정부는 너무 ‘현실(現實)’에 치우쳐서 고통 받는 계층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어차피 정치는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니까 그렇다 치자. 일반 학부모들은 어떤가? 내 아이가 자칫 ‘열등반’에 들어가서 일찌감치 ‘열등생’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지도 모르는데 그런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왜 높지 않은가? ‘전교조’나 ‘참교육 연대’ 같은, 역시 진보 성향의 단체만이 목소리를 높일 일인가? 우열반이 거론은 되어도 실제로 실행될 확률은 적어서 그런가? 그렇다면 정말 현명한 일이다. 침묵 속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격언을 되새길 일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거대한 공범 구조 속에 갇힌 사람들’이라서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된다. ‘거대한 공범 구조’라는 말은 대만(臺灣)의 전문의이자 작가인 호우원용의 소설 '위험한 마음‘에 나오는 말이다. 소설 내용은, 수업시간에 만화를 보았다는 이유로 복도에서 강의를 듣도록 내쳐진 중 3 학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교실로 들어 갈 수 없는 주인공은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먹게 되고 이를 안 엄마가 언론사에 제보를 한다. 급기야 담임이 아이를 때리고, 아이 앞에서 엄마에게 심한 말을 하는 교사를 아이가 넘어트리면서 일은 겉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져 나간다. 학교와 교사들은 주인공을 ’나쁜 학생‘으로 몰아가면서 학부모들을 위협하고, 주인공 편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교육의 근본적 문제를 거론하면서 교육당국과 맞서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필자의 가슴을 울린 내용들을 몇 가지만 적어 보면





‘동일한 일을 놓고 하는 말이라도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실이 어땠느냐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누가 이 사실들을 설명할 권리를 지녔느냐가 중요하다.’





‘교육이든 사회든 어떻게 돌아가든 알게 뭐야. 내 아이는 학교에 공부를 하러 가는 거지, 혁명을 하러 가는 게 아니야. 자유니 민주니 박애니 하려거든 손중산 선생을 찾아가. 우리 애를 갖고 그러지 말구. 애가 무슨 구국열사야?’





‘그렇다면 왜 선생님은 뚱보 자오를 내버려 두고 하필이면 나를 향해 칼을 뽑아든 것일까? 나는 알 것도 같았다. 나와 뚱보 자오의 차이점은 ’수업에 전념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선생님에게 복종하는 정도‘가 달랐던 것이다.’





‘이제 동요를 부르는 아이는 사라진 것 같았다. 어른들의 유행가를 목청껏 부르는 아이, 유명 가수의 흉내를 내는 아이들뿐이다.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아이다운 상상력과 활기는 죄악이기 때문에 그래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이들이 앞을 다투어 어른을 모방한다. 미성숙이라는 원죄를 짊어진 아이들에게 유일한 길은 어른인 척 하는 것 밖에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아이가 없는 나라에 살고 있고 결국 우리의 세계는 어른들만 있거나 아니면 나쁜 아이만 있다.’





‘어쩌면 네가 한 일이 옳은 일이었기 때문에 일이 갈수록 커진 거겠지. 하지만 3학년 8반 애들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야. 입시가 다가오는데 무엇보다 안정이 필요해.’(주인공이 옮겨간 반에서 학부모들이 주인공을 거부하며 한 이야기)





‘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낭비해가며 누가 좋은 선생님이고 누가 나쁜 학생인가를 다투어 온 걸까? 학생이 좋은 선생님을 진심으로 느끼는 데는 5분도 필요치 않다. 학교에 좋은 선생님이 있는 한,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아무리 목소리가 작아도 많고 많은 멍청한 아이들은 보고 듣는다. 격려 받고 감동받으며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을 키워 간다.’





‘어렸을 때는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싶어 했어요. 저는 학교에 가면 사고, 이해, 존중, 나눔 이런 것들을 배울 수 있을 줄 알았고, 삶이 내게 준 모든 것들을 더 잘 이해하고 세상을 더 많이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줄 줄 알았어요. 학교에 들어가서 저는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어요. 학교는 경기장이고, 공부는 안간힘을 쓰고, 노력해야 할 싸움이라고 말했어요. 선두가 되기 위해서 저는 이해, 나눔, 존중을 모두 내 던지고 냉혹, 위선, 욕심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왜 무엇 때문에 그 애가 눈을 뜨게 만든 거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감당하게 만들었냐고? 그냥 그냥 지내던 애를 네가 죽인 거야.’(주인공의 항거에 동조해서 투신자살한 아이의 부모가 주인공에게)





‘정치는 그렇게 굴러가는 거야. 손에 쇠망치가 쥐어져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튀어나온 못을 힘껏 내리쳐서 평평해지도록 만드는 거야.’





 소설은, 교육당국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경찰에 강제 해산당하고, 교육부 장관이 사퇴하고, 담임이 교직을 떠나고, 주인공은 다른 학교로 전학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한다. 위에 인용한 내용들 외에 하나 더 특이한 것이 있었는데 주인공이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한 말이다.





‘지금의 학교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학교가 아니에요.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학교가 어땠으면 좋겠느냐고 물어 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우리도 주요한 교육 정책, 특히 입시제도 같은 것에 대해서는 학생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당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한두 해만에 다시 뒤엎는 시행착오를 언제까지나 계속해야 하는가? 침묵은 금이 아니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정말 위험한 마음들을 지니고 있다. 우열반 편성이라는 매우 위험한 이야기가 떠돌아다님에도 대다수 학부모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아이는 우등생반으로 가서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라는 이기심, 곧 거대한 공범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옳은 것’이 아니라 우선 ‘이익 되는 것’을 추구하는 심리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보면 정말 소중한 것은 성적이 아니다. 돈과 권력도 좋지만 사랑, 나눔, 이해 등이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이런 말은 구호에 불과하고 ‘현실은 무슨 수를 쓰든지 역시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가고 돈 많이 벌어서 사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소설의 제목이 말하는 ‘위험한 마음’인데, 우리나라는 어떨까? 대만에서는 이 소설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자녀교육에 관한한 대부분 ‘정말 위험한 마음’을 지닌 한국의 학부모들에게도 마음에 울림이 있을까? 있다면 현재는 힘들어도 우리 교육의 앞날은 밝은 것이요, ‘이상은 이상일 뿐’이라고 이런 책이 읽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육에 관한한 더욱 반성해야 할 것이다.





 다만 작가의 입장에서 일말의 아쉬움이 있다면, 소설 속 주인공을 우리나라 강남의 명문 고등학교나 요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J고 같은 곳의 고 3쯤으로 그렸으면 더욱 우리들 마음에 와 닿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중3이 사람들을 이끌고 개혁을 논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이야기인지는 좀 미심쩍다. 그러나 역시 교육에서는 진실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런 면에서 정직하게 이 책을 원본대로 완역 출간한 출판사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많은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끝으로 노파심에서, 이 책에 대한 권면은 전적으로 개인적 믿음에서라는 사실을 밝혀 둔다. 필자는 고 3 때 글을 쓴다고 무단결석 20일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그 때 담임이 학교로 찾아온 세 살 위인 형을 옆에 세워 놓고 하루에 한 대씩 스무 대의 매를 때렸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고통에 겨워하는 나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던 형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때 책가방을 들고 집으로 와 버림으로써 퇴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왜 퇴학당했는가?’는 묻지 않고 ‘정말 퇴학당했는가?’라는 사실만 확인하던 기억이 난다. 즉 소설에서처럼 학교와 선생은 법이요, 학생은  그에 따라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 후 검정고시를 거쳐서 사범대학을 가고 선생이 되었다. 교편생활도 사람들이 문제시 하는 2부 고등학교에서 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나도 교직을 그만 두고 직장인을 거쳐 작가가 되었지만, 세상에 나온 그 제자들이 누구보다도 열심히 잘 살고 훌륭히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절감하고 있다.



 글을 마치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요즘 전국 석차를 알려주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모의고사 전국 1위인 학생이 나서서 ‘저는 우열반이 싫어요. 그냥 친구와 함께 공부 할래요.’라고 하면 그 학부모가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라고 하는 꿈을.  
 




*김용전 - 1953년 제주 중문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동 대학원 교육학 석사.고대 경영대 최고 경영자 과정. 보성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한 교육기업의 창업 멤버로 참여, 매출 3000억이 될 때까지 20여년 근무 삼십대에 이사 승진. 나이 50에, 젊음을 바쳐 성장시킨 회사로부터 비정하게 퇴출당한 뒤 느낀 바 있어 귀농의 길을 선택.

 강원도 화천읍 동촌리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농사지으며, 평소에 뜻하던 저술과 강연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1992년 詩 <남한강>을 '月刊文學'에 발표하면서 등단.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새미래뉴스(semirenews.com) 편집위원.

저서로는 시집 <법원리 가는 길>, <내 눈물의 강을 건너 사라져 가는 당신>이 있고 자기계발서로 <토사구팽 당하라>, <회사에서 당신의 진짜 실력을 보여주는 법>이 있다. 홈피 주소는 birdsingvalley.com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