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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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를 위하여의 저작권


 얼마 전에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이사 첫날부터 나는 반복되는 멜로디를 밤낮으로 들어야 했으니 그 유명한 베토벤의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다. 고교시절에 처음 기타를 배운답시고 설치던 시절, 아직 CD는커녕 오디오도 없어서 음악 하나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시절에 어쩌다 라디오 같은데서 흘러나오면,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맘 설레며 들었던 [엘리제를 위하여]다. 그런데 그 음악이 어느 날 부터 자동판매기를 필두로 하여 여기저기 자동화기기의 음악으로 지겹도록 쓰이고 있다. 처음 하루 이틀은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드디어 그 소리의 출처를 알고 말았다. 지하주차장에서 차가 올라오거나 내려갈 때마다 울리는 경보신호음이었던 것이다.


 지하에서 자동차 한 대를 끌어올리거나 내릴 때마다 울리는 음악. 저작권료도 받지 못한 베토벤 할아버지는 아마 천상에서나마 그 공로를 인정받고 있을지도 모른지만 출차로 입구에 가까이 사는 우리는 아무리 좋은 음악도 한 두 번이지 차라리 멜로디 없는 소음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출차로 근처에 살게 된 후에, 나는 어떤 사람들은 왜 뽕짝음악 같은 천편일률적인 스타일이 반복되는 것에 그토록 오만상을 찌푸리는 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체험한 셈이다. 또한 왜 어떤 사람들은 밥도 나오지 않은 일에 순수예술이란 타이틀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지에 대해서도 그 이유를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너무 지겹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에 내가 부전공으로 했던 영문학시간에 어느 교수님께서 우리에게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기준이 뭔지를 물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교수님께서 한마디로 시원스레 정의해주신 것이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대중예술이란 기존의 가치체계를 답습하는 것이고 순수예술이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순수예술이란 뭔가 새로운 것이 포함되어야 함을 일컫는다.


 생각해 보면 이 우주에서 멈추어 있는 것이란 없다. 태양조차도 초당 10 km가 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어디론가 달리고 있으며, 원자속의 전자나 다른 입자들도 쉼 없이 춤을 춘다. 또한 세상에 변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간파한 주역의 역은 만물은 변한다는 원리에서 나왔다. 변화는 우주의 본질이며 끝없이 변하는 물질로 구성된 우리 몸의 본질이기도 하다. 예술은 우리의 본성을 따라 목적지 없는 여행을 떠난다.


 마차 시절에는 안락한 포장도로를 갈망했다. 그 시절에는 사진처럼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사람이 최고의 화가대접을 받았다. 솔거가 그린 소나무에 새가 않으려 했다는 일화는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음악은 최대한 듣기 좋은 화음을 찾아 고전음악이 태동하였다. 드디어 포장도로가 완성되고 고속도로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비포장도로나, 심지어는 거친 산악 길로 찾아가 오프로드를 즐기고자 한다. 그림에서는 사실이 비틀리거나 흐릿해지더니 이미지만 남다가 이제는 비전문가는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는 추상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음악도 더 이상 듣기 좋은 오선지 속의 화음의 세계에 안주하지는 않는다. 관객의 오감에 낯설음이나 불편함을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달콤한 음식을 자꾸 들이대서는 안 되듯이, 당신의 친구들에게 유익한 충고를 자주 함부로 해서는 안 되듯이, 어떤 촌스런 정권처럼 사회 정의라는 명목으로 젊은 에너지를 통제해서는 안 되듯이, 저작권료도 지불하지 않은 [엘리제를 위하여]를 날마다 듣지 않을 권리를 나에게 달라.


  출처: 한국화학연구원 정밀화학정책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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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철 2009.10.27 22:16
    공감 100%.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자유와 통하고, 그게 모든 생물들의 신성한 권리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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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진 2009.10.27 22:16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변화를 즐기지만 변화를 따라가야하는 사람은 변화가 스트레스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남이 변하는가? 나가 변하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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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은 2009.10.27 22:16
    지적인 충만함과 함께 속이 시원해집니다.
    철학은 싫증에서 파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한 임어당의 말이 생각납니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이렇듯 좋은 글을 만들었다는 것에 위안 삼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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