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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by 김동성 posted Feb 2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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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도시는 나의 굴욕과 실패의 地圖같은 것


그 門에서 나는 석양을 보아왔고, 그 대리석 앞에서 나는 부질없는 기다림을 배웠다.


여기 어제는 불확실하고 오늘은 다른 나날이


내게 모든 인간이 겪는 평범한 日常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 발자국을 측량할 수 없는 미궁을 그린다


여기 잿빛오후가 약속한 내일의 열매를 기다린다


여기 나의 그림자도 또 하나의 부질없는 마지막 어둠속에 가볍게 사라져 가리라


이 도시와 나를 잇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차라리 경악이다


아마 그래서 나는 이 도시를 그토록 사랑하는 걸까***


아르헨티나의 詩人 보르헤스의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詩의 일부분입니다.


보르헤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느낀 절망과 고뇌를,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느낍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그런 고비의 순간과 맞닥뜨릴 겁니다.


삶이라는 것이 어차피 희망과 절망의 외줄타기라고 할진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또 오르막이 있겠지요.


보르헤스의 표현대로 도시의 삶이란 '측량할 수 없는 미궁'을 헤매는 건 아닐까요?


굴욕과 실패, 부질없는 기다림, 마지막 어둠---. 보르헤스는 이 도시에서 절망을 읽어냅니다.


사실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녹녹한 건가요?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 안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로 걱정하며 살아가는 게 도시인의 삶이겠지요?





보르헤스의 표현대로, 이 도시와 나를 잇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차라리 ‘경악'이 아닐까요?


이 도시는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었으면서도, 참으로 많은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사실은 빼앗아간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분실했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내 삶의 주체는 나 자신이니까요.


인생은 농사 같아서 뿌린 대로 거두는 법. 노력한 만큼 거기에 합당한 결실을 주는 것이겠지요?


 어느 순간, 삶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했을 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겠지만,


이 도시에 과연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이 도시엔 정말 너무 많은 아웃사이더들이 넘쳐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지 않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보르헤스의 '굴욕과 실패'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보르헤스가 말했던 '잿빛오후가 약속한 내일의 열매'가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닐까요?


누군가 얘기했지요? 희망은 가난한 인간의 빵이라고. 이 도시도 따지고 보면 많은 희망의 씨앗을


곳곳에 숨겨놓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걸 찾아내서 싹 틔우고 가꾸어서 열매 맺게 한다면,

그게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거겠지요.

도시가 삭막하고 어둠이 깊을수록, 그 속엔 은밀한 희망과  건강한 빛이 숨어있는 거 아닐까요?

그 희망과 건강은,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주인일 테지요.

詩의 끝 구절---"아마 그래서 나는 이 도시를 그토록 사랑하는 걸까---처럼 우리는 이 도시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 도시란 결국 우리네 삶의 터전이며, 삶 그 자체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네 삶을 정말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중요한건 인생이란 누구한테나


공평하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땀 흘리는 만큼 결실을 주는 거니까요.


우리는 '잿빛오후가 약속한 내일의 열매'를 쟁취해야하겠지요.


보르헤스의 <불면>이란 詩에 이런 구절이 나오지요?

***포도주 빛 성긴 구름이 하늘을 모독할 때, 내 무거운 눈꺼풀 너머로 먼동이 터 오리라***


밑줄을 그을 만한 구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