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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왔다

by 김민경 posted Jan 1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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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니, 생각지도 않은 엄청난 양의 가루눈이 퍼붓고 있었다.

 

어린 시절, 눈이 오면 참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눈사람도 만들어야 하고, 새하얀 눈밭에 누워 보기도 해야 하고,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을 골라서 처음으로 발자국도 남겨야 하고. 가끔은 눈싸움도 했던가?  눈사람 두 개를 붙인 크기의 커다란 진돗개 눈사람을 마당 한가운데에 만들어서 그것을 타고 찍은 사진도 있었다. 지금 하라고 해도 참 귀찮을 것 같은(?) 작업인데, 초등학생 혼자서 무슨 지치지 않는 힘으로 그런 걸 다 만들 생각을 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신기하기도 하고 슬쩍 웃음이 난다.

 

이런저런 놀이에 열중하다 보면, 맨손으로 눈을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빨갛게 곱은 손을 보며 엄마가 "그러다 동상 걸린다!"고 겁을 주셨지만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 크리스마스에는 꼭 눈이 오게 해 달라고 매해 12월마다 빌었고, 나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거의 실현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한두 번? 그나마도 전날이나 다음날 쯤, 정확히 24일이나 25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가 아니더라도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인 겨울 풍경은 아련한 낭만을 가져다 준다. 어린 시절 친구네 집에서 빌려 읽었던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큰숲 작은집' '초원의 집' 에는 긴긴 겨울, 눈에 갇힌 숲속 오막살이에서의 놀이와 삶이 무척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먹는 것에 무서운 집착을 보이는 나답게, 지금도 생각나는 장면들은 단연코 먹을 것과 관련된 것들이다. 커다란 호박들을 테이블과 의자삼아 앉아서 놀았다느니, 우유를 엄청나게 열심히 휘저어 버터를 만들어 먹었다느니, 단풍나무 수액(메이플 시럽?)을 열심히 졸여서 그릇에 꾹꾹 눌러 채운 눈에다가 떨어뜨리면 그것이 굳어서 그대로 사탕이 된다느니.. 아무리 먹을 게 좋아도 그렇지, 달랑 그런 장면들만 골라 기억이 난다고 하면 어쩌란 말이냐!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눈'이라고 하면 상당히 낭만적인 이미지를 꽤나 어른이 된 후까지도 오래오래 끌어안고 있었던 나였다.

 

하얀 떡가루같은 눈이 바람 따라 사선으로 퍼붓는다.

아, 오늘은 절대 밖에 나가지 말아야지. 넘어지기라도 하면 고생해.

내일 서울 가야 하는데, 길이 얼어 있으면 위험한데 어쩌지?

이상하다, 이 정도 많은 눈이면 예전 같으면 예쁘다고 한참 감동했을 텐데, 아무 감흥이 없네.

 

덕분에 집 안에서 종일 이것저것 맛있는 것들은 많이 해 먹었다만 ^^

내 안의 낭만이, 이젠 거의 사라지다 못해 거의 종적을 감추어 가나 보다.

작년만 해도 이렇진 않았는데.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08-01-18 16:40:03 회원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