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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무슨 이야기를 했냐 하면......

by 김원기 posted Mar 0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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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면서 문헌학이라는 말을 들어보는 사람의 수는 적을 것이고, 문헌학의 성과를 직접 볼 수 있는 사람도 적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전에 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문헌학의 산물입니다. 우리가 흔히 문명의 원형과 뿌리를 언급할 때 그 대상이 되는 그리스-로마(그리스어, 라틴어), 인도(산스크리트어), 중국(한문)의 고전들은 모두 사용자가 사라지거나 혹은 언어의 형태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오래된 언어로 쓰여졌습니다. 그러한 과거의 문헌들을 대상으로, 텍스트의 출처와 진위 여부로부터 시작해서 언어의 연구를 통해 그 문헌에 나타난 그 시대 사람들의 사상을 규명해나가는 작업, 그것이 문헌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이죠.

 

2.

인문학을 '텍스트를 통해, 텍스트에 표현된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문헌학이 인문학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브루노 스넬의 책을 통해서 우리 회원님들이 일생에 한 번쯤은, 언어를 통해 표현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어렵고 힘든 작업인지, 고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어떻게 형성되어 온 것인지 느껴 보시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누구나 해 보아야 하는 공부는 절대로 아니지만, 한 번 접해 본다고 크게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3.

보통 원전을 접할 때 느끼는 가장 큰 생소함은,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원전이 번역되거나 요약되고, 그것이 재진술되면서 원전은 해석되고 압축된 형태로 전해집니다. 그렇게 우리가 얻은 상식적인 견해는, 원전을 직접 마주할 경우 그 앙상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브루노 스넬은 자신의 책 전체를 통해서 서구적 정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어떻게 그리스 시대에 그 단초를 드러냈는가, 그 합리적 정신의 원형은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던 스넬도 호메로스의 원 저작을 읽을 때 우리가 고대 그리스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으로부터 호메로스의 세계가 얼마나 먼 것인가 지적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호메로스의 세계는, 세련된 그리스 고전기에 나타난 논증의 세계(소크라테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비극의 세계(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는 달리, 꽤 투박한 세계니까요.

 

4.

호메로스의 언어에서 우선 지적되는 것은, 추상적인 일반적인 개념이 덜 발달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개념들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본다'는 뜻의 단어만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시각적 이미지가 눈을 통해 들어와 인지된다'는 뜻을 가진 일반적인 단어는 오히려 뒤늦게 나오고, '뱀의 눈처럼 노려본다'든가 '그리워하면서 하염없이 바라본다'는 식으로, 그 양태나 정서 등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단어들이 먼저 사용되었다는 거죠.

 

이것은 사물의 본질이라든가 원형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형이상학의 실마리를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것"(ousia, 본체)에서 찾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로부터 거리가 먼 세계죠. 그렇다면 이런 개념틀을 갖고 있는 두뇌는 세계를 어떻게 지각할까요?

 

5.

이런 질문들의 즐거움을 더 심화시켜주는 것은 몸과 마음에 대한 호메로스의 개념들입니다. 가장 뜻이 넓은, 추상적인 일반 명사로서의 '몸'이나 '마음'에 해당하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죠. 칼이 몸을 찔렀다고 할 때의 '몸'은 피부와 관련되는 단어입니다. 몸을 움직인다고 할 때는 '사지, 팔다리'를 의미하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구요.

 

여기서 우리는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이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서의 자아 관념, 즉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의 통일체로 여기는 관념을 갖지 않았던 것인지 궁금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언어/단어가 없다면, 그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맞닥뜨리면서 '언어-관념-세계'라는 철학적인 문제를 만나게 되기도 하구요.

 

답은 읽어 보시는 분들이 찾으셔야겠지만, 호메로스 원전 꼼꼼하게 읽기, 가 없다면 이런 식의 질문은 던질 수도 없다는 겁니다. 문헌학이 갖는 힘이 이런 곳에 있는 것이죠. 우리는 번역된 해석본을 통해 많은 걸 놓치기 때문입니다.

 

6.

모두들 낯설고 어려운 텍스트를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때문에 기존의 회원분들의 참여가 저조하셨는지도 모르겠어요.

 

다음 텍스트는, 훨씬 재밌고 쉬울 겁니다. <파우스트>를 통해 '모더니티' 읽기거든요. 이번 1기 인문 고전 읽기 모임의 모토가 "읽는 힘을 기르자"(라고 저혼자 정한 것이지만)라고 한다면, 그 힘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텍스트가 될 것입니다.

 

중간에 빠지셨던 분들, 꼭 오세요. 이 책, 쉽습니다. 재밌기도 하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