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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18:56

<중세의 가을> 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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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이 가득한 중세의 삶


교회의 종소리는 개인적 결투에서부터 교황의 선출 소식이나 평화조약을 알리기 위해서 쉴 새 없이 덩그렁 덩그렁 울려 퍼졌다.  분쟁이 있는 날마다 성체거동이 집전되어 맨발에 성유골을 매고, 촛불이나 횃불을 들고 퍼붓는 비 사이를 걸어가는 기나긴 행렬이 수주일간 계속되었다. 가능한 모든 사치와 예술이 총동원된 즐거운 입성식이 있었고 그런가 하면 잔인한 흥분과 거친 연민이 난무하는 교수형이 끊임없이 집행되었다. 순회 전도사들의 설교가 유행하여 이름을 날리는 설교가 들이 등장하고 이러한 설교는 한번에 며칠씩이나 이어졌다. 청중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밤을 새우기도 하고 뜨거운 눈물로 죄를 고백하였으며 설교 도중에 모든 사치품을 불사르기 일쑤였다.


이들의 격렬한 취향은 절망과 희열, 잔혹함과 애정 그 극단을 오고 간다. 정신적 기복이 크고 눈물을 잘 쏟는 민감한 성향으로 인하여 애도의 표현은 거의 참극에 가까웠다.


왕위를 찬탈당한 수많은 왕들이 궁정을 배회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제후들과 그 지역 주민들의 행동 및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모티프는 피의 복수였다. 복수는 신성한 의무이다. 격렬한 지역감정, 충동적인 영주에의 충성심, 맹목적인 정열과 확고한 정의감으로 인해 형 집행은 더없이 가혹해진다. 민중들은 형집행에서 짐승같은 쾌락을 느꼈으며 비싼 값으로 강도를 사서 축제처럼 고문광경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범행과는 별도로 돌연 그들을 용서하기도 하는데, 완전 징벌 아니면 완전 은총의 양극단을 오간다. 이러한 잔혹함과 동정심의 대조는 중세관습 어디에서나 지배적이다. 가난한자, 병자, 광인, 난장이 들은 가장 깊은 연민의 대상이기도 했다가 또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잔인한 학대와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백성들의 삶은 학정과 착취, 전쟁과 약탈, 기근과 페스트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귀족과 관리들의 삶 역시 위험과 격변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료들에서 우연히 포착되는 그들의 삶은 그야말로 일생동안 소송, 범죄, 싸움, 박해의 연속일 뿐이다.


이렇게 쓰라린 삶에 대하여 고뇌와 절망만을 이야기하도록 되어 있었다. 삶을 우울하고 어둡게 보려는 갈망이 깊어 삶에 대한 두려움은 팽배하였고 이러한 두려움은 그들을 꿈과 환상의 길로 이끌게 된다. 환상속에서 현실을 잊자. 꿈같은 과거의 행복, 과거의 영웅주의, 자연 속에 묻혀 사는 기쁨으로 시선을 돌린다. 옛시대의 완벽함에 대한 꿈은 삶을 예술품으로 만들고 삶은 하나의 유희처럼 조절된다.


모든 행동과 사건들은 언제나 일정한 형식이 갖춰지고 그 형식은 거의 의식의 높이까지 올려졌다. 결혼, 탄생, 죽음 등은 아름답고 장엄한 형식에 둘러싸이며, 오락이나 놀이까지도 엄숙한 형식이, 식사시의 자리배치나 사소한 예의범절조차 거의 제식에 가까운 위엄으로 실시되었다. 때론 형식이 지나쳐서 내용은 망각되기조차 한다


이러한 형식주의에서 예절은 윤리적 가치보다는 미학적 가치를 갖게 된다. 겸양지심으로 사양 할수록 높이 평가 되므로 입에 발린 인사치레와 예절에 대한 경쟁이 치열했으며, 교회에서조차 한사코 겸양을 떨다가 예배가 중단되곤 했다. 형식의 침해는 치명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여졌고 결단코 용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엄숙해야할 경우조차 예절은 땅에 떨어지곤 했다. 왕의 의전행사며, 장례식, 미사중에도 사소한 소유권을 놓고 주먹다짐과 난투극이 벌어지는 등 형식을 침해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절차처럼 되어 버렸다.


열렬하고 격하며, 냉혹하면서도 동정적이며, 세계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이 시대의 정신은 엄격한 형식주의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삶의 사건들, 그리고 고통과 기쁨의 감정들은 자연스럽게 표현되지 못하고 비장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단장되었다. 감정은 단지 그 미적 표현에 의해서만 그 시대가 열망하던 그 높은 단계의 표현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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