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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한국에서 태어나 초.중.고등
교육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정신병원에 가거나 아파트 13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을 것"이라고 황지우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시인)은 말한다.

하나의 정답만을 골라내는 '수렴적(Convergence) 사고'만 강제하고, 오직 이 하나의 잣대 만으로 수십만 명의 아이들을 한줄로 세우는 한국의 학교 교육에서 모차르트는 나올 수 없다. 모두들 '천재'로 알고 있지만 모차르트의 지능지수는 120 정도로 지극히 평균적인 수준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당시
작곡의 기본틀이었던 '캐논'을 따르지 않고 여기에 기반해 새로운 변주를 만들어내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타고난 경박함과 산만함에 내재해 있었다.

정답으로 수렴하는 게 아니라 많은 변주를 만들어내는 분산적(Divergence) 사고가 바로 예술의 기본인 창의력을 이끌어내는 힘이다. 예술 뿐 아니라 과학적 사고도 마찬가지다. 과학의 영역도 기존의 이론을 의심하고 가설을 만들고 이를 검증해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은 '과감한 상상력'이다.

일제하, 해방 이후 한번도 '패러다임 시프트'를 경험하지 않고 있는 우리 교육은 어떤까? '경쟁력'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 교육은 앞으로 경쟁력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데 적합한가?

정권이 교체되면서 정치의 잣대로 교육과 예술과 문화를 재단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아픔을 겪고 있는 데가 한국예술종합학교다. 황 전 총장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퇴해야만 했다. 강의마저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참여사회포럼 세번째 강의로 그의 예술, 문화, 교육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그는 '소통'을 강조하는 정권에 의해 '불통'을 강요받고 있다. 다음은 지난 2일 있었던 황 전 총장 강연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벌써 총장 쫓겨난 지 6개월 됐다.
한예종에서 10여 년간 주로 예술하겠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오늘 주제가 창의성이다. 이 화두를 들고 여기 온 까닭은 초등교육, 중등, 대학교육까지 제도화된 교육이 우리 아이들의 창의성을 얼마나 멸균시켜버리고 있는가, 우리 아이들 안에서 자라나는 창의적인 싹을 학교교육이 얼마나 무자비하가 전지가위로 잘라버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고민을 나눠봤으면 한다.









▲ 황지우 시인. ⓒ참여사회연구소


제 아이들이 초등학교 2,4학년 무렵 어느 겨울날 목포여행을 떠났다. 마침 비가 좀 가랑가랑 내렸다. 오랜만에 본 유달산 바위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 아이들에게 일기를 쓰게 했는데 큰아이가 이런 글귀를 남겼다. 흐린 날 유달산 바위들이 마치 숨 쉬는 것 같았다고 했다. 딸아이는 목포 앞의 기다란 섬이 물을 뿜는 고래 같다는 구절을 남겼다. 우리 아이들은 문재가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애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바위를 보고 숨을 느꼈던, 섬에서 고래를 떠올렸던 애들의 창의적인 상상력이 전부 증발돼 버렸다. 결국 우리 제도교육의 교수법에서부터 커리큘럼까지 근본적으로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오직 정답 하나만을 찾는 기술, 정답을 찍어내는 능력 하나 만으로 한 해 수십만 명의 고교 졸업생들이 서열이 매겨져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들도 서울과 교통거리에 반비례해서 계서화되고 서열화돼 있다. 지금 우리 제도교육의 시스템이 전적으로 창의성을 말살하고 있다는 심각함을 우리가 다 느끼고 있지만 어찌 해보지도 못하고 끌려가고 있다. 여러 대안들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힘을 못 받고 있다. 정말 우리 아이들이 영혼이 숨쉬는, 살아 생동하는, 스스로 자기 인생에서 보람창조해 내는 삶을 설계하도록 교육시스템이 전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 대안을 창의성 교육에서 찾아야 한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영화 아마데우스를 봤나. 그 영화는 피터 쉐이퍼라는 영국
현대 극작가의 픽션이다. 에쿠스라는 연극도 그의 작품이었다. 저는 아마데우스를 희곡으로 먼저 읽었고, 그 다음에 영화를 봤다. 이 영화를 보실 때, 두 인물을 축으로 해서 스토리라인이 전개된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모차르트 같다고 느낀 사람 있나? 모차르트에 자기동일시를 하는 관객이 있다면 그 관객은 좀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일지 모르겠다. 작가 자신이 시점인물로 전체 스토리를 끌고 가도록 한 인물은 살리에리다. 많은 이들이 나는 살리에리 같다고 느낄 것이고, 그렇게 느낀 사람이 작품을 제대로 본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자기가 모차르트 같다고 느꼈다고 했다. 속된 말로 돌아이는 돌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살리에리는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요셉 군주는 스스로 계몽된 군주로 음악.발레.예술을 사랑한 이였다. 비엔나가 그때 서양 음악의 중심 도시였다. 살리에리는 음악에 지원을 많이 하는 비엔나에 와서 궁정음악가가 된다. 요즘으로 치면 국민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최고의 작곡가였다. 그리고 그 위치에 오른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즐겼다. 영화에서도 'I like myself, until he came'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모차르트를 회한의 젖은 모습으로 들으며 회상을 한다.

이 작품에서 모차르트는 18세기 낭만주의가 한껏 부풀려 놓은 이른바 천재의
신화적인 모델이다. 살리에리가 결정적으로 절망을 느꼈던 것은 자신은 결혼도 않고, 정말 기독교가 깔아놓은 모든 신조를 지키고, 무엇보다 음악으로 신에게 전부 봉사했는데, 저 풋내기 같은 싸가지 없는 젊은 녀석, 불경스럽고 경망스러운 꼬마아이에게 신이 음악을 바로, 말하자면 모바일로 내려주는 것이었다. 살리에리는 신과 계약을 했다. 내게 음악을 주면 최대의 영광을 주기로. 신에게 음악으로 장엄화 시켜주겠다는 신앙을 통한 계약을 했는데, 신에 대해 불경하고, 현실 생활에서도 경거망동한 저 보잘것없는 꼬마에게 음악을 통째로 내려주고, 나에게는 더 비참하게 그것을 알아보는 재능만 줬다. 차라리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저 녀석이 내는 멜로디가 천상의 멜로디임을 알 수 있었다.

일자리가 없어 허겁지겁 하던 모차르트의 부인이 어느 날 모차르트가 작곡한 악보를 들고 살리에리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엉성하게 두 개의 오보에로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 가면서 천상의 희열이 담긴 음악으로 변했다. 악보를 보니까 정정한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음악을 모차르트에게 신이 넣어 준 것이다. 천상의 멜로디를 그냥 받아썼다. 그 곡을 보고 살리에리는 절망해 악보를 떨어뜨린다.

이 영화에서 보면 모차르트는 만년에 망상에 시달렸다. 모차르트 연구가에 의하면 독살은 아니고 가벼운 병이 발전한 것으로 돼 있다. 어쨌든 피터 쉐이퍼의 작품에서는 살리에리가 레퀴엠을 의뢰하는 사람으로 변장해 모차르트를 죽인 것으로 돼 있다. 이건 픽션이다. 모차르트를 죽여 놓고 살리에리는 정신병원으로 돌아간다. 30년이 지났는데 살리에리는 음악은 커녕
이름조차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사후 모든 음악가들이 경원하는 신의 음악을 받아 쓴 자, 즉 천재(genious)의 전형으로 숭상되고 찬양됐다. 30년 뒤의 살리에리의 모습이 영화 마지막이다. 살리에리는 신부에게 회고를 마치고 나오면서 '아임 더 챔피온 오브 미디아커'라고 말했다. 미디아커는 이류, 아류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모차르트를 지나치게 신화화했다. 그런데 창의성과 관련해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세 개의 장면이 있다. 7살에 작곡을 시작해 11살에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 14살에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신동이 비엔나에 요셉황제 궁정에 온다고 하니까 전날 살리에리가 서재에서 모차르트를 환영하는 곡을 작곡한다. 그는 콩나물 대가리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점찍듯 화음에 맞춰서 찍어 나간다. 그리고 스스로 너무 흐뭇해 벽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그걸 갖고 가서 요셉 황제에게 보여준다. 아마추어인 황제가 더듬더듬 악보를 재현한다. 그동안 모차르트는 궁정 문 밖에서 여기저기 특유의 경거망동한 제스처로 기웃거린다. 황제가 다 마치고 나니까 모차르트가 들어갔다. 황제가 모차르트에게 살리에리가 너를 위해 만든 것이라며 전달한다. 모차르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도 보지 않는다. 필요 없다고 한다. 이미 문 밖에서 기웃거릴 때 머리에 음이 메모리가 됐다. 모차르트가 가볍게 친다. 살리에리 곡은 18세기 궁정양식이 요구하는 전범, 어떤 예술작품이 창작되기 위해 마땅히 따라야 할 그것(캐논)에 입각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이미 주어진 캐논에 실증이 나 있었다. 그는 이 캐논을 내려다보고 넘어서 있었다.

음악사에서 모차르트 음악이 낭만주의를 여는 실마리를 갖고 있는데, 그의 통제가 안 되는 가벼움으로 상쾌하고 가벼운 음악을 만들었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살리에리 곡을 가볍게 치고, 살리에리의 캐논으로부터 다른 멜로디를 끌어낸다. 그리고는 또 그걸 바꾸고 혼자 좋아한다. '너무 심심하지 않아요' 라고 말할 때 살리에리의 그 표정, 금이 싹 가 있다. 완전히 살리에리
가슴을 찢어버린 게 모차르트 특유의 싸가지 없는 웃음이었다. 악의가 있는 게 아니었지만 상처 주는 줄 모르는 웃음, 그 상처 때문에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여 가는 게 영화의 내용이다


창조란 유에서 무를 만들어 내는 것

이 작품에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두 유형의
예술가를 볼 수가 있다. 이미 있는 규칙에 잘 맞춰서 만들어가는 작가, 예술가. 살리에리가 그런 예술가라면 모차르트는 주어진 것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을 끌어내는 예술가다. 이게 창조다. 창조에 대한 일반의 가장 큰 오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하는데, 인간이 하는 것이라면 무에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유에서 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주어진 것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창조한 것을 보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그 이전에 다른 작가들, 작품에 대한 종이 한장 만한 차이를 쌓아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가장 창의적.근대적 인간, 천재의 전형으로 얘기하지만 다빈치 작품을 보면 절대로 무에서 나온 게 없다. 그 이전에 있던 것에서 아주 작은 차이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다만 그 차이가 결정적인 차이가 되게 했을 뿐이다.

미술사의 긴 흐름에서 다빈치가 진짜 뭘 창조했느냐 보면 그 이전에 르네상스의 여러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과 비교하면 사실 아주 작은 차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밸 플린 같은 예술사학자는 오히려 한 예술가의 개성, 개인성, 또는 한 개인의 천재적인 능력보다 한 시대의 어떤 예술의 관습 내지는 전통을 더 중시한다. 아예 예술의 역사를 인명을 배제해버리고 순전히 양식의 자기발전, 양식 스스로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 내적 논리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중심으로 예술의 역사를 씀으로써 예술사를 예술가의 전기적 열전이 아니라 하나의 과학적 시스템으로 기술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 개인의 천재성보다 창의성은 한 시대 예술가에게 공통으로 작용하는 지각패턴, 형식이 오히려 새로운 작품이 나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다.

베르지노의 '천국의
열쇠'라는 작품이 있다. 15세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대상을 그릴 때 이른바 중앙투시선 원근법(central linear perspective)으로 표현했다. 당시 관습은 인물은 전경의 수평으로, 배경은(건축 외부, 내부) 선 원근법으로 표현했다. 건축가가 설계하듯이 표시를 해 놓는다. 그래서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시선이 모아져 사라진다. 소실점이 이 작품의 중심이다. 그래서 르네상스 작품은 전부 중앙이 있다. 여기서 벗어나는 작가는 단 한 명도 없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중앙투시선 원근법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다빈치는 단지 이를 실내로 바꿨을 뿐이다. 르네상스 작품들은 원근법 때문에 중심으로 쑥 빨려드는 듯 한 깊이의 착각을 일으킨다. 이것을 보면 평면이 아니라 3차원의 깊이라는 게 정교하게 계산된 중앙투시법 때문에 흡입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르네상스 양식에는 강력하게 중심이 존재한다. 그 중심이 소실점이다. 그 소실점은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대응하는 것이다. 이렇게 외부세계를 바라봤다는 것은 바라보는 나(ego), 내가 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이념이던 휴머니즘, 중세와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상을 시지각 패턴으로 표현한 것이다. 르네상스는 인간중심주의, 휴머니즘에 정확히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 시대에 요구되고 통용되는 지각패턴 속에서 각 개개의 예술가는 자기 개인의 천재적인 창의성보다는 한 시대의 패러다임에 충실했다.

1425~1510년까지 약 1세기 정도 기간 동안 이런 르네상스의 시지각 패러다임의 제일 끝에 있는 마지막 작품이 라파엘로의 '
아테네학당'이다. 그리고 급격하게 쇠퇴기가 온다. 1510년대 이후부터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한다. 예술사에서는 매너리즘의 시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 오게 되면 르네상스 양식이 가진 도저한 고전주의(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지 않고 이상화시킨다)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다빈치의 기법 중에 스푸마토가 있다. 붓을 여러 번 칠해 붓 자국이 하나도 없도록 돼 빛과 어둠이 자연스럽게 하는 기법이다. 이렇게 다듬어 놓으니까 고전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권태를 느끼기 시작한다. 100여 년 동안 르네상스 양식이 하나의 시지각의 패러다임으로 통용되고 나자 여기에 노이즈가 자꾸 나타났다. 매너리즘이 오게 되면 인체도 캐논에 입각해 비례에 맞추는 게 아니라 인물을 쭉쭉 길게 늘어뜨린다. 엘 그레코는 인물을 병적으로 새장형으로 그린다. 붓질한 것도 그대로 남겨 거칠하다. 르네상스에 익숙했던 사람이 보면 엘 그레코 작품은 형편없는 졸작이다. 매너리즘은 고전주의에 대한 미학적인 노이즈다.









▲ ⓒ참여사회연구소

그러다가 확 변한 게 바로크 스타일이다. 르네상스를 매너리즘을 과도기로 불연속적인 비약을 한 게 바로크 양식이다. 바로크의 대가가 루벤스, 벨라스케스, 램브란트인데 루벤스의 작품을 보면 인물들이 대각선으로 쓰러져 있다. 안정되게 도열한 르네상스 작품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인물들도 움직인다. 르네상스는 구도가 상당히 안정돼 있는데 바로크로 오면 불안정하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움직임이 많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배경을 보면 원근법을 보면 소실점이 옆으로 빠져 있다. 중심이 이동해 있다. 어떤 미학자는 이것을 중심의 상실로 보기도 한다. 왜 이렇게 됐느냐는 예술 내부의 요인도 있고, 그 예술작품을 낳은 사회.역사적 요인들도 있다.

정확하게 바로크 양식이 통용된 시기가 서구에서는 상업자본이 나타났던 시기다. 바로크 양식은
원시자본에서 상업자본으로 이행하면서 신대륙으로 향하고, 화폐가 부의 축적기준이 돼서 상거래가 많아지고 이동이 많아지고 정신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시기였다. 반동이 일어나고 종교적으로 종말론이 퍼져 있고 곧 망한다는 강박관명이 있던 시대였다. 그래서 바로크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화면의 느낌이 현저하게 어둡다. 특히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배경은 아예 시커멓게 칠한다. 이른바 렘브란트 라이트라고 해서 빰, 여자 젖가슴에 명함을 줘서 흑백 대조가 아주 심하다. 르네상스와 꽤 다른 시지각 패턴이 나타났다. 이게 한 100여 년 동안 지속된 예술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패러다임 안에서 한 개인의 능력, 또는 창의성이라는 것은 작은 차이, 그러나 작은 차이들이 축적돼 어느 순간 결정적인 차이가 돼 불연속적인 비약이 일어난다. 예술의 역사 안에 기라성 같은 천재적인 작가들의 창의성의 업적들이 있는데 사실 보면 개인의 창의성 못지않게 그것을 둘러싼 패러다임, 한 시대의 독특한 양식, 관습, 전통이 어떤 의미에서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학과 예술

이런 예술사 안에서 창의성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상하리만치 과학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이론, 지식, 세계관의 변화와 거의 정확하게 일정한 대응(correspondence)이 있다. 과학의 역사에서 지동설, 조수이론, 중력이론,
전자기장 이론, 상대성 이론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예술의 르네상스-바로크-신고전주의-낭만주의-리얼리즘의 진화와 상관성이 있다. 과학에서 왜 이렇게 이론이 변화하느냐는 매커니즘, 기제가 예술에 있어 양식, 개념이 변화하는 것과 알고리즘이 상당히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 시프트(paradime shift)라는 용어를 제안했는데 과학적 지식도 시간을 초월해서 절대 불변의 진리가 있는 게 아니다. 근대 과학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한 시기의 과학자들 사이에 통용되는 패러다임이 있는데 그 패러다임 안에서 어떤 의미가 소통되다가 일정시기가 지나면 안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 이 새로운 퍼즐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가설을 내고 증명을 하면서 앞의 이론이 깨지고 새 이론이 과학커뮤니티 안에서 진실로 인정되다가 또 퍼즐이 나오고 새 이론으로 대체된다는 게 쿤의 생각이다.

이런 쿤의 생각이나 제가
대학원 때 빠졌던 포퍼의 프라블름 시프트(problem shift)와 비슷하다. 과학 지식의 체계도 바뀔 수 있고 새로운 이론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진리에 조금 더 가까이 가는 진화론적인 생각을 포퍼는 갖고 있다. 과학에서 창의적인 이론이 나오는 내적 기제는 예술 안에서 어떤 양식이나 개념이 시프트 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특히 포퍼가 얘기한 것 중에 눈여겨 볼 것은 가설을 제시할 때 과감한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14~15세기에 눈 뜨면 해가 동에서 떠서 서에서 지니까 천동설이 맞다는 생각에 대해 지구가 돈다는, 화형에 처해지거나 감옥에 가야 할 정도로 과감할수록 창의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과학은 광기로 하면 안 되겠지만 예술은 광기로 해도 좀 된다. 학교에서 턱없이 엉뚱한 생각을 하라고 한다. 이 사회에서 매장될 정도로 과감한 생각을 하라, 정신병원에 넣을 정도로 과격한 생각을 하라, 실현여부를 떠나서 그 정도라도 해야 조금 변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제도교육은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더라도 조금만 이상하게 생각하고 배제, 제거, 격리시킨다. 그게 문제다

예술은 감정의 산물, 과학은 이성의 산물로 남극과 북극의 차이처럼 위치시키는데 실제로 과학에서의 새로운 이론, 기술의 발명이 그 내부에서 진행되는 매커니즘을 보면 예술에서 벌어지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 오히려 위대한 과학자일수록 발견의 과정이나, 발견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스러움, 암중모색의 과정이 예술가의 그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여러분께 '생각의 탄생'이라는 대중적인 책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인터뷰, 심리학자들의 스터디를 보면 새로운 과학이론을 세울 때, 뜨거운 느낌이 먼저 왔다. 이거 될 것 같다는 필이 오고 이를 정식화(formulation)하는 것은 한참 뒤였다.

맥스웰이 이제까지 전기장과 자장이 따로 연구되다가 전자기장이라는 현상을 이론화하는데 새로운 이론체계를 만들기 전에 비주얼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고 한다. 어떤 이미지가 먼저 왔다는 것이다. 전자기장은 바퀴도르래의 집합체처럼 움직인다고 했다. 원자는 작은 태양계 같다고 했다. 그러니까 새로운 과학지식의 단초가 은유(metaphor)였다. 과학에 있어 창조는 메타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아인슈타인도 특수상대성이론을 끝내고 일반상대성이론을 정식화하는 데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어마어마한 주사위가 나타났다. 비주얼 이미지를 보고 일반상대성이론의 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파인만은 천재적인 과학자는 예술가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과학과 예술이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라 창의성의 관점에서 보면 같은 알고리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에 길포드(Guilford)가 '인간 지능의 본성'이라는 책을 냈다. 인간이 두 개의 모델로 작동하는데 컨버전과 디버전 사고다. 컨버전은 단 하나의 답을 찾는 데 작동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이다. 디버전 사고는 일련의 문제에 대해 여러 개의 답을 뱉어내는 사고방식이다. 두 개가 변증법적으로 피드백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일제하, 해방 이후
학교 교육은 컨버전 사고만 강제하고 있다. 단 하나의 정답, 밑줄 하나 긋고 여기에 가장 가까운 것을 1~4번 중에 찍는 것이다. 비슷해도 틀렸다고 한다. 생각의 매커니즘을 수렴적(컨버전) 사고에다가 찍어 내고 있다. 예술가의 창조는 대부분 디버전 사고에서 나온다. 어떤 한 문제에 골몰하다가 전혀 엉뚱한 데서 답을 찾게 된다.

모차르트의 지각구조에서 굉장히 특이한 게 있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 누구도 없는 이상한 능력이 있었다. 음악은 시간의 시퀀스 안에서만 지각된다. 4소절까지 들어야 음악의
언어를 알아듣는다. 몇 소절 지나면 앞에 소절을 잊는다. 그래서 반복시켜서 음악 전체가 흐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재 들려지는 음악만 지각할 수 있다. 앞은 망각되고 뒤의 것은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차르트는 첫음과 끝음을 동시에 듣는다. 이게 가능한가. 구라 아닌가. 인간이 지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건 아마 구라일 것이다. 단 모차르트는 음악을 비주얼 이미지로 지각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음악을 건축으로 환치해서 지각했는지도 모른다. 음악과 제일 가까운 게 건축이다. 두개 다 일정한 단위를 쌓아 올린 것이다. 부분들이 서로 연결돼 하나가 빠지면 전체가 무너지는 하나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런 점에서 음악과 건축은 같다. 문학은 언어로 현실을 재현하고, 건축, 미술도 바깥에 오브제가 있지만 음악은 그게 없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건축적이다. 그게 특이체질이 아니었나 싶다.

모차르트의 편지를 보면 아버지, 사촌에게 보낸 게 천양지차다. 아버지에게 보낸 것은 항상
감시하고 있는 초자아(super ego)다.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 그런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상당히 조리가 있다. 때문에, 때문에로 이어지는 논리적 기술을 하고 있다. 반면 사촌누이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제일 많이 나온 단어가 방귀, 똥, 엉덩이, 쓰레기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한다면 모차르트에게는 항문기 도착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데우스 영화에서 콜로레도 주교에게 퇴짜 맞고 나올 때 대주교를 향해 엉덩이를 보이고 나온다.

창의성과 몰입

모차르트가 우리 초등.중등학교에 왔으면 아마 자살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줬던 모차르트
신화의 껍데기를 벗기고 나면 심리학자들이 추정하는 그의 아이큐는 120정도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신이 점지한, 인간세계에 속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다. 창의적인 사람, 아이큐가 높을 것 같지만, 여러 조사에 따르면 창의성과 아이큐는 거의 무관하다고 한다. 아이큐가 100이하인 사람에게는 창의적인 업적이 안 나왔다고 한다. 100이하면 침팬지 정도인데 그것이 아닌 보통 120정도면 창의적인 업적을 낸다는 것이다. 아이큐는 성격, 환경에 비해 영향을 덜 미친다.

2차 세계대전 끝나고 스탠포드 심리학자 루이스 터먼은 20년 장기관찰
프로젝트를 실시해 1470명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결론은 실제 천재는 천재로 남아 있지 않았다. 1400명 중에 대부분이 공무원이 됐다고 한다. 대법관 2명, 지방판사 2명이 나왔고 오히려 여기서 떨어진 사람 중에 노벨상이 나왔다. 인지심리학자의 얘기는 140이냐 150이냐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리암 허드슨의 DT(divergent thinking) 테스트에 따르면 아이큐 높은 군과 낮은 군을 보면 낮은 군이 더 많은 아이디어를 낸다.

우리 사회에서 모차르트는 병원에 가거나
아파트 13층에서 떨어져야 한다. 다행히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홈스쿨링을 받았다. 이게 문제다. 우리 대학생들을 만나면 솔직히 서울대, 연고대 까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대학 다니는 애들은 컨버전 사고로 나온 것으로 모든 자기의 능력을 재단하고 콤플렉스가 있다. 인생 전체가 그것으로 멍든다. 수능시험 5지선다 찍기로 20~30년까지 결정된 순위가 그 사람을 지배한다. 이것을 디버전 사고로 해 보면 다르다. 인류에게 정말 창의적인 일을 할 기회가 우리 교육풍토에서 원천봉쇄 되거나 멸균이 되고 있다. 그러면 산만하기만 하면 창의적인가? 산만하기만 한 아이들도 많다. 저희 학교 영상원은 좀 산만한 아이들을 뽑는다. 그런데 계속 산만한 애들도 있다.

창의성과 관련해서는 산만해 보이는 디버전 사고와 또 하나가 필요하다. 몰입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퐁당 빠지는 것이다. 제가 총장 하면서 예술과 과학이 만나야 한다고 하니까
포항공대와 친해졌다. 포스텍 총장이 '아웃라이어'라는 책을 추천했다. 그것을 보니까 '1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있었다. 여러 심리학자들의 조사를 종합해 놨는데 세계수준의 전문가, 마에스트로가 되는 자들을 보니까 1만 시간, 에누리 없이 1만 시간을 몰입을 했더라는 것이다. 하루 8시간 몰입을 하면 10년 걸린다. 몰입이란 그냥 그 시간 자체가 망각돼 버린다. 밥도 잊고 잠도 잊고, 내가 뭐하고 있는지 시간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태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소설가, 체스 챔피언, 심지어는 완전범죄에 가까운 숙달된 범죄자들을 보니까 1만 시간을 그 분야에 몰입을 했다. 베를린음대의 학생을 세 부류로 나눠지더라. 1만 시간 몰입한 이들은 솔로로 나가고 8000시간은 오케스트라단원, 4000시간 몰입한 이들이 음악교사를 하더라. 빌 조이, 빌 게이츠, 심지어 비틀즈도 1만 시간이 넘었다. 그 시기가 한 14살~16살, 중학교 2,3학년이나 고1,2에서 대학교 3학년까지가 제일 집중이 돼 있는 것 같다. 우리 자녀들을 봐야 한다. 10대에서 20대 초반에 1만 시간 몰입했느냐가 한 분야에서 창의적 업적을 이룰 수 있는 큰 조건인 것 같다.

제 경우 시에 처음 눈뜬 게 중3때였다. 형님의 일기장 앞에 나오는 릴케의 시 '고독'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버렸다. 그러면서 시에 전염돼버렸는데 대학교 1학년 때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 머리 위로는 시였다. 시를 이고 다녔다. 꿈에서도 썼고, 한참 고은 선생의 시가 나왔을 때 거기 빠졌다. 어떤 시는 내가 쓴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풍덩 빠졌다. 그 나이, 그것만 하면 밥도 안 먹어도 되는 것, 예술이 됐든 과학이 됐든, 체스가 됐든. 우리 아이들이 가진 능력을 심해에 집어넣어서 몰입시키면 폐활량이 커져 어느 분야에서든 창의적 일을 할 수 있다. 컨버전 사고로 재단돼 있는 수능, 아이큐에서 빨리 해방시켜 좋아하는 분야에 풍덩 빠지게 해야 한다.

제도교육의 커리큘럼 구성도 다시 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게 교육 방법이다. 수렴적 사고로 단련이 돼
양산하고 있는데 디버전 사고를 할 수 있는 교과내용, 교재개발, 교육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EBS 방송을 보면 범죄다. 3번이죠, 찍어요다. 죽여 버리고 싶다. 큰일이다. 정 안되면 대안학교를 만들던가. 지금 우리 교육으로부터 상처받은 아이들, 속에 잠재력이 있는데 이게 사장되지 않게 시민단체들이 각별히 연구도 하고 시민운동, 국민운동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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