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2009.12.16 03:32

일상속의 들뢰즈

조회 수 249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들뢰즈를 알 리 없었던 큰어머니의 시뮬라크르






한겨레




















학문이란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내는 작업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반대로 극히 쉬운 것을 굳이 어렵게 구성하는 면도 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쯤의 일로 기억한다. 당시 뭣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연로한 큰어머니가 가족들 앞에서 그 자리에 없는 작은아버지를 성토하고 있었다.

큰아버지가 듣기 민망했던지 넌지시 만류하자 큰어머니가 대뜸 “왜 하지 말아요?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인데.”라고 말을 받았다.

갈등의 내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나였지만 이 말에는 귀가 퍼뜩 띄었다. 그렇다, 고기가 아무리 맛있어도 씹지 않고 넘긴다면 먹으나 마나다. 그리고 말을 하면 실제로 뭘 먹는 것도 아닌데 맛 같은 게 느껴진다.

그 후로 나는 말을 할 때 느끼는 쾌감이 도대체 어디서 오나 하는 막연한 호기심이 지금껏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언어를 연구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던 중 우연히 들뢰즈를 읽다가 스토아학파의 사건/시뮬라크르의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즉 맛이란 비물체적인 것인데 이는 물체적인 것들이 부딪칠 때 물체들의 표면에서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표면효과이자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기의 맛은 이가 고기를 파괴하는 표면들 사이에서, 다시 혀가 그 표면을 훑는 사이에서 발생하는 효과이고, 말의 맛은 언어의 음운법칙에 따라 구강내 발음기관들이 서로 부딪는 표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맛의 효과인 셈이 된다. 그러니까 말도 음식처럼 씹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옛날 우리 큰어머니는 그냥 감각으로 터득한 사실을 철학자들은 정말 힘들게 설명했구나!

그러므로 물체적인 것은 비물체적인 것을 생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 비물체적인 것이 우리의 존재를 알게 해주는 존재자(시뮬라크르)가 되므로, 우리가 물질을 욕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존재를 느끼기 위해서이다. 오늘날의 물신주의는 물질 자체에 집착하게 만드는데 이는 도착증이다. 말은 해야 맛이듯이, 물질은 제대로 쓸 때 맛이 난다.

김근 서강대 교수·중국문화전공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04 [네이버기사]인공위성..세게 던진 뉴턴의 사과 1 서지미 2009.08.08 1956
1003 [네이버기사]우울증의 정체 2 서지미 2009.07.20 2062
1002 [네이버기사]양자역학이란? 서지미 2009.08.21 1971
1001 [네이버기사]색의 근원은? 서지미 2009.08.21 10004
1000 [네이버기사]사랑의 화학 3 서지미 2009.07.09 1808
999 [네이버기사]단백질의 빌딩 블록, 아미노산 2 서지미 2009.07.20 31407
998 [네이버기사]관성의 법칙..수학아카데미 리더 이종필박사님 글 1 서지미 2009.08.21 1919
997 [네이버 과학] 만델브로 집합 : 복소수와 프랙탈 1 김양겸 2010.11.02 3031
996 [내일 낮2시 개강!] 스피노자와 그의 비판자 다지원 2012.03.31 1292
995 공지 [나의 학생들에게] 퍼옴 2 임석희 2008.03.19 1831
994 공지 [긴급공지] 대전 백북스 8/14 모임 취소 관리자 2018.08.03 290
993 공지 [긴급공지] 1월 28일 16차 모임 연기합니다. 송윤호 2003.01.26 2455
992 [긴급] 6/24 출범식 & 출판기념식 행사장소 - 네비게이션 검색관련 정남수 2012.06.24 1462
991 [기획강좌] 조금 깊게 읽는 「논어」(2019.11.1(금)~22(금), 매주 금요일, 총 4강) 인권연대! 2019.08.29 158
990 공지 [기사]힉스입자...이종필박사 서지미 2009.03.06 1607
989 공지 [기사]태양..지구생명의 어머니 서지미 2009.02.17 1906
988 공지 [기사]초신성 폭발...천문학관련 1 서지미 2009.03.06 1975
987 공지 [기사]철학자 온버림 정종박사와 함께 10 박혜영 2007.10.10 2950
986 [기사]인공의 블랙홀?...이종필박사 서지미 2009.05.06 1927
985 공지 [기사]이종필 박사님 글 잘 읽고 갑니다. 3 임재용 2009.01.17 159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61 162 163 164 165 166 167 168 169 170 ... 216 Next
/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