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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형을 그려서 마음을 담으면 통섭을 이룰수 있을까

by 전재영 posted Mar 2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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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무소유]란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속에는 ‘우리는 각각의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전체의 한 부분’ 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바로 3월22일 온지당에서 몸소 깨우친 내용이다. 최재천 교수님이 말한 화엄의 궁극적 경지와도 그 맥이 닿아있다. 통섭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정의 하기보다 그 말이 주는 느낌, 즉 박문호 박사님의 말을 빌리자면 높은 차원의 복합계를 통한 생각의 출현으로 표현 되어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통섭이라는 단어를 한 문장으로 정의 하기에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되므로 그 말이 주는 느낌을 갖고 그 느낌을 언어가 아닌 다양한 창조적 형태로 표출해야한다는 것이다. 너무 문자적 해석에 매달리게 되면 근대 불교학이 겪은 그리고 다산이 겪었던 더 나아가 현재 모든 학문에서 겪고 있는 매널리즘에 빠지게 된다. 


이 문제는 고미숙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다산과 연암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잘 설명되어진다.


 


고마숙 박사님이 말하는 연암은 삶과 지식의 경계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왕의 눈을 벗어나 자유롭게 세상과 소통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반면에 다산은 자유를 구속당하고 생각도 구속당해서 결국은 독창성을 갖지 못했다. 요즈음 같이 통합적 인재를 요구하는 사회는 어떠한 경계가 없이 어느 곳에서든 조화로울 수 있는 연암과 같은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통합적 사고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이 한계는 고봉준 박사님과 이종상화백님의 강연을 통해서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문학은 사회의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하는 분야이자 삶의 애통을 사람들간에 대화하고 소통하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IMF이후의 문학은 주로 백수의 이야기, 이력서200장, 88만원세대 등 청년실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모든 일이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인데 통섭이라는 말이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청년실업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굼벵이는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당신도 굼벵이랑 다를 것이 없군요. 백날 이력서만 쓰면 뭐합니까? 인간이라면 조금 더 창조적인 일을 해야죠. 지금부터 늦지 않았으니 생각을 키우세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서점가서 책 좀 들여다보세요. 그러면 뭔가 느끼는 것이 있을 겁니다."

 

과연 당사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100명중 50명은 ‘미친놈’이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고 나머지 50명중 49명은 “책 볼 테니까 대신 돈 벌어달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1명은 어떤 것을 느꼈을까? 이종상화백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자.

 

이종상화백님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화가들이 액자의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옛날의 화가는 건축가이자 철학자이자 화학자이자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등등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한 스페셜리스트라고 한다. 오늘날의 화가의 부족한 자질은 바로 근본의 이해이다. 근본은 어느 학문이든 닿아 있으며 경계가 없다. 학문분야가 다르더라도 다름을 인정하고 근본이 닿아있음을 안다면 어떤 학문과도 소통하고 대화할 수가 있다. 그럴 때야 비로소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수 있다는 것이다.. 즉, 통섭을 통하면 블루오션을 찾을수 있고 창조적인 사고를 갖게 되어 전례가 없는 작품을 만들수 있다는 말이다. 청년실업의 현실을 벗어나 성공으로 가는 가장 바른길을 미술가에 빗대어 말씀해주신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1명이 느낀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은 통섭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성장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고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해야 한다. 박성일원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식성장은 공동체와 함께 해야만 하며 그 공동체는 양자역학적 사고를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양자역학적 사고란 불확실성을 최대한 정확히 예측하려는 사고이며 과거의 규격화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 아주 섬세한 부분까지 들여다 볼수 있는 사고를 말한다. 현영석 교수님께서 경영에 생명시스템을 접목 시킨 것도 이러한 사고의 일환이다. 경영이라는 것도 불확실한 요소가 무수히 많기 때문에 그 요소를 가장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경영기법이 필요했으며 생명시스템에서 그 해법을 찾은 것이다. 즉 양자역학에서 제공하는 확률과 통계가 통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관성이다. 우리시대에 통섭을 통하여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되어도 끊임없이 관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통섭은 또다시 깨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명심할 것이 있다. 분리된 각각은 원래는 하나였다는 것이다. 분리가 되어진 각각을  하나로 통섭하는 것은 자연상태에서 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확률은 0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리가 되는 것은 자연상태에서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며 시간의 방향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를 되짚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에 전례가 없다는 말은 시간에 대하여 비대칭적인 구조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대칭이 붕괴되는 시점이 통섭의 최종 목적지 일 것이다. 그 시점을 정확히 예측하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양자역학적 사고를 끊임없이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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