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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4 22:27

퀴즈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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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방송 퀴즈 프로그램은 1950년대 케이비에스 라디오의 <스무고개>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방송사마다 몇몇 중요 퀴즈 프로를 운용하고 있으며, 방송기술과 진행 방식도 다양해졌다. 필자가 초등학생이던 1960년대에 라디오 퀴즈 프로에서는 방송 출연자가 답을 알았다 싶으면 직접 “스톱!”이라고 소리 지르고 발언권을 얻은 다음에 답을 말하곤 했는데, 금석지감을 느낀다. 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방송기술의 발전과 진행 방식의 다양화에도 불구하고 퀴즈 프로의 본질적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그것은 퀴즈 프로가 참가자의 ‘기억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학자들이 정의하는 기억이란 “정보를 저장하고 인출하는 능력”을 말한다. 곧 시간이 지났어도 정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그것이 필요할 때 다시 기억 저장고에서 끌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생각을 하기 위해서도 기억은 필수적이다. 언어의 기억이 있어야 사고하기 때문이다. 고대 신화에서 기억의 여신은 신들의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므네모시네 여신이 태초에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결합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신의 계보에서 기억의 여신이 지닌 위상을 잘 보여준다. 후에 제우스가 신들의 제왕이 되고 나서 므네모시네와 결합하여 아홉 명의 무사(뮤즈)를 낳았다는 이야기도 기억의 여신이 학예(學藝)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철학사적으로는 기억의 여신과 피타고라스 학파 사이의 관계가 밀접함을 관찰할 수 있다. 기억의 여신이 ‘지성적 활동의 지속성’을 관장하기 때문에 그 학파에게는 중요했던 것 같다. 또한 피타고라스 학파는 윤회설을 발전시킨 까닭으로 생활 방식과 규범에서 기억력 훈련을 중요시했다. 영혼은 과거, 곧 역사를 지닌다. 윤회설에서 영혼이란 여러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 학파 사람들은 매일 저녁 하루 일과를 조목조목 기억하면서 반성했는데, 이런 기억력 훈련을 하는 사람은 이어서 더 깊고 중요한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영혼이 걸어온 길과 그 과정을 상기하는 일이다.

?이는 삶의 저 깊은 심연을 찾아가는 여정과 다르지 않다. 곧 그들에게 기억은 단순히 삶에서 배운 것들을 외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진다. 그들은, 이런 의미의 기억력 덕택으로 지혜로울 수 있다는 인식을 품고, 기억의 행위를 므네모시네와 무사 여신들을 위한 의례에 반영했다. 이러한 전통은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며 도서관을 짓는 일에 영향을 끼쳤는데, 이들은 모두 ‘기억의 행위를 조직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방송 퀴즈로 돌아와 보자. <도전 골든벨> 프로에 출연해서 골든벨까지 울렸던 한 출연자는 “방송 퀴즈라는 게 문제를 처음 들었을 때 바로 생각나지 않으면 절대 맞힐 수가 없거든요. 여유 시간을 5초 더 준다고 해서 생각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라고 말한다. 방송 퀴즈에서는 순간적으로 기억의 창고에서 답을 끄집어내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뜻이다. 곧 ‘추론적 사고’나 ‘성찰적 사고’와는 연관이 없다는 말이다.

고대에도 기억의 기술적인 면을 강조한 사상가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하던 소피스트인 히피아스다. 그는 ‘기억술’을 이용해서 ‘박학다식’할 것을 가르쳤다. ‘많은 것들을 안다’는 것을 그리스어로 ‘폴리마테이아’라고 했는데, 영어의 폴리머시(polymathy)에 그 단어의 모양새가 그대로 전해져 있다. 요즘 말로 하면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 되는 것을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히피아스가 추구한 지식은 주로 수학과 자연 법칙에 관한 것이었지만)그러나 폴리마테이아는 또한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의 비판 대상이었다. 로고스 개념의 창시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폴리마테이아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했고,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는 “많은 것들을 알려 하지 말라.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라고 가르쳤다.

이상의 고찰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오늘날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은 별 의미가 없다. 디지털 인터넷 시대에는 도처에 백과사전이 떠다니기 때문이다. 또한 퀴즈 프로그램에서도 단답형보다는 ‘추론적 퀴즈’ 개발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다. “퀴즈라는 게 중독 같아요”라고 하는 출연자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앎’은 중독성이 있다. 뇌를 자극해서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의 자극적 쾌락에 끝나는 단답형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추론이 더 큰 즐거움을 준다. 이는 오늘날 퀴즈 프로가 ‘기억의 여신을 오해한 엔터테인먼트’에 머물지 않고, ‘기억의 여신을 기리는 놀이’로 발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가치 있는 지식이란, 모두 기억한 결과가 아니라, 죄다 잊어버린 후에도 기억에 남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김용석 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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