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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20여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오고 체전부는 이따금 하드롱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이 생겼나봅니다. 나도 도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까지 내려와서 가재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사로잡아다가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 놓아준 것만 같은 감각을 자꾸만 느낍니다. 밤이 되면 달도 없는 그믐 칠야에 팔봉산도 사람이 침소로 들어가듯이 어둠 속으로 아주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빛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 「누가복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의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객주집 방에는 석유등잔을 켜 놓습니다. 그 도회지의 석간과 같은 그윽한 내음새가 소년 시대의 꿈을 부릅니다. 정형! 그런 석유등잔 밑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호까'-연초갑지(煙草匣紙)붙이던 생각이 납니다. 배짱이가 한 마리 등잔에 올라 앉아서 그 연두빛 색채로 혼곤한 내 꿈에 마치 영어 'T'자를 쓰고 건너 긋듯이 유다른 기억에다는 군데군데 '언더라인'을 하여 놓습니다. 슬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도회의 여차장이 차표 찍는 소리 같은 그 성악을 가만히 듣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또 이발소 가위 소리와도 같아집니다. 나는 눈까지 감고 가만히 또 자세히 들어봅니다.


  그리고 비망록을 꺼내어 머루빛 잉크로 산촌의 시정을 기초합니다.

 



  그저께신문을찢어버린
  때묻은흰나비
  봉선화는아름다운애인의귀처럼생기고
  귀에보이는지난날의기사


  얼마 있으면 목이 마릅니다. 자리물-심해처럼 가라앉은 냉수를 마십니다. 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면서 폐부에 한난계 같은 길을 느낍니다. 나는 백지 위에 그 싸늘한 곡선을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청석(靑石) 얹은 지붕에 별빛이 나려쪼이면 한겨울에 장독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벌레 소리가 요란합니다.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 장에 적을 만큼씩 오는 까닭입니다. 이런 때 참 무슨 재조로 광음을 헤아리겠읍니까? 맥박소리가 이 방안을 방채 시계로 만들어 버리고 장침과 단침의 나사못이 돌아가느라고 양짝 눈이 번갈아 간질간질합니다. 코로 기계 기름 내음새가 드나듭니다. 석유 등잔 밑에서 졸음이 오는 기분입니다.


  '파라마운트'회사 상표처럼 생긴 도회 소녀가 나오는 꿈을 조곰 꿉니다. 그러다가 어느 도회에 남겨 두고 온 가난한 식구들을 꿈에 봅니다. 그들은 포로들의 사진처럼 나란히 늘어섭니다. 그리고 내게 걱정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만 잠이 깨어 버립니다. 죽어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벽 못에 걸린 다 해어진 내 저고리를 쳐다봅니다. 서도천리(潟千里)를 나를 따라 여기 와 있습니다그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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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 모든 사물들이 권태로워 보이는 날이면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는 좁은 방 안을 곧잘 뒤집어 엎곤 합니다.
청소하기를 썩 좋아하진 않지만 산만한 것은 저 하나로 족해 정리정돈도 열심히 하는 편이구요.

 

그런데 유독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는 일에 있어서의 귀찮음과 반항심은
지하철 2호선 잠실역에서 삼성역에 가려다가 깜빡 졸아 시청역에서 깰 때까지, 지나친 정류장의 수 이상으로
늘- 지나치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생면부지의 이삿짐센터 분들께 지극히 사적인 모습들을 드러내기도 싫고
가치를 잃고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들까지 꾸역꾸역 챙겨갈 수도 없어

하릴없이 구석구석 숨겨진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위 수필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발견했더랬죠!

 

대학교 1학년 때 아르바이트로 과외수업을 했었는데
ebs 문제집 지문으로 나온 이 수필을 처음 접한 그 순간 저는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렸어요.
MJB, 하도롱빛, 파라마운트 등 외래어에서 드러나듯 도시적 감수성으로 그려낸 산촌생활의 정서도 아닌,
편지와 일기와 시의 형식을 모두 취하면서 뛰어난 구성력을 드러내는 글의 구조도 아닌,
마치 지금의 이 느낌이 꼭 그대로 수능문제로 나올것 마냥
똑같은 설레임을 강요하고 강조했던, 그날의 수업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 저를 별다른 감흥없이 구경하던 터프했던 여학생은
'그렇게 좋으면 가지세요-' 하고는 부욱- 지문이 있던 페이지를 찢어주었답니다.
그래도 명색이 과외'선생님'인데 그걸 그냥 기쁘게 홀랑 받아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 __)a

 

운영하던 까페는 계속 망하고 사랑하는 금홍과도 헤어지고 고질적인 폐결핵에 시달리며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을 가난에도 휘청이고 1930년대가 주는 시대고로 또한 아팠을 그 힘든 상황에서
어찌 이렇게나 특별하고 아름다운 글을 낳을 수 있었을까...
십수번을 다시 읽은 지금에도 그저 놀랍고 또 설레입니다.

 

그 수업이 있은 다음날 바로 책으로 구입함으로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종이 한 장이
퍽퍽한 건빵더미 속에서 별사탕마냥 짠 하고 나타난 덕분에
그날 전 이삿짐 정리를 마지막까지 기분 좋게 마칠 수 있었답니다.

 

아, 쓰다보니 제 소개를 빠뜨렸네요.

저는 4월 천문모임에 처음으로 백북스를 방문했던 서울아가씨 문혜인 입니다. ^^a

그리고 5월 모임에서 세포막 구조를 발표하려고 신청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사와 날짜가 겹쳐 본의아니게 첫 발표부터 펑크를 내고 말았네요. (이크)

늦었지만 멋진 수필 한 조각 앞세워 슬그머니 용서를 구해봅니다.

 

어머니께서 입원해 계신 사이 급작스레 이사를 하게되는 바람에 여러가지가 정리되는데 시간이 오래걸려
이제사 인사드리게 된 점 또한 사과드립니다. (꾸우벅)
그럼 6월 온지당에서 뵙겠습니다.

 

저는 일교차가 너무 심해서인지 감기에 걸리고 말았는데
모쪼록 모두 아프지 마세요!

  • ?
    임유정 2008.05.15 11:46
    [나는 백지 위에 그 싸늘한 곡선을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이 참 와닿습니다. 이상 좋아하는데 저 글은 처음입니다. 잘읽었습니다.^^
  • ?
    이정원 2008.05.15 11:46
    반갑습니다. 천문우주모임 때 뵈었는데 잘 기억 안 나시겠지요? ^^
    제가 지난 주말에 '세포막수송' 발표 준비를 하면서,
    세포막수송 바로 앞 챕터인 '세포막구조'를 공부했었는데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더라구요.
    펑크내 주시는 바람에 세포막을 제대로 공부하게 되어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
    다음 모임 때 봅시다~~ ^^
  • ?
    이상수 2008.05.15 11:46
    글이 아름답습니다.
    문혜인님의 마음도 아름답네요.
  • ?
    정영옥 2008.05.15 11:46
    님의 감성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 ?
    김세영 2008.05.15 11:46
    묻혀있던 글을 오늘 문득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갔던 5월천문우주모임 발표펑크자가 님이셨군요. *^^* 제가 읽어보지 못했던 이상의 글을 아주 재미있게 소개해 주셨네요. 잘 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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