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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9 18:39

[나의 학생들에게]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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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못차리고 현실이라는 무게에 헬렐레 하고 있던 내가 마치 무거운 망치를 맞은듯

키치를 너머 삶의 본질로 꿰뚫고 들어갈 수 있게 된 인연이 있습니다.

작년 1월 심산스쿨에서 있었던 조중걸 예술사 수업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1년 예정이었던 수업은 한달만에 중단되었고, 아래 글은 수업이 중단되면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남긴 삶에 대한 마지막 메세지입니다.

저는 현실과 타협하고 싶을때마다 꺼내서 읽습니다. 그리고, 이제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어, 한 자 한 자 옮겨 적습니다. 긴 글입니다만, 찬찬히 음미하시면, 좋은 영감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1. 심산스쿨은 수유너머처럼 제도권 밖에서 글쓰기 운동을 하는 아카데미입니다.(작가 전문 양성소)

2. 조중걸 선생님은 지금 투병중이시며, 예전에 양경화님이 올린 글의 "공부에 미친사람"이라는 사연의 주인공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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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생들에게.

 

우리 삶의 어떤 순가들이 드무레 그렇듯이 우리가 서로 만나게 된 것은 하나의 놀라움이었고 기적이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첫 수업이 시작되던 날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기억됩니다. 눈 오는 침침한 토요일 오후에 저는  강의실에 들어섰고 어떤 포근하고 따스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에 쌓인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위기는 아름답고 아득하여 제가 꿈을 꾸고 있는 듯했고 어떤 몽환적인 빛이 우리 모두에게 비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정말이지 여러분을 가르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강의 하는 것을 싫어했고 또한 대학이 지닌 특유의 도제적인 분위기도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학생은 학점과 졸업장과 학위를 요구하는 것이고 교수들의 일반적인 권위는 열의와 실력보다는 학점 수여에 기초해 있는 것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학문이 존재하는 것은 여러분의 가슴속이지 아카데미의 담 안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학문과 아름다움에 대한 강렬한 요구를 지닌 여러분을 만난 것은 저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예술의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은 감상 능력과 지적 역량과 역사적 통찰입니다.

 

예술의 우리의 감성에 기초한 미적현상입니다. 예술에 대한 접근에 있어 그 미적구조물에 대한 감상과 감동은 그러므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입니다. 예술 이론에 대하여 아무리 많은 것들을 알고 있고 예술작품에 대한 정보에 있어 아무리 능란하다 해도 만약 그것들을 진정한 감동과 기쁨으로 감상할 수 없다면 사실상 예술에 대하여는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마음으로는 예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의미와 아름다움에의 열렬한 요구와 분투가 여러분을 예술로 인도할 것이고 여러분 삶의 진정한 기쁨은 이제 거기에서 얻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의미한 아카데미시즘과 화석화된 지식이 여러분을 차갑고 건조한 세계 속에 가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돌아서서 여러분이 애초에 지녔던 열렬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어둠 속에서 외롭게 깜박이고 있는 삶의 의미-여러분이 살아오는 어떤 과정 속에서 그만 잃어버린-를 여러분에게 회복시켜 줄 것입니다.

 

예술의 이해에 있어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지적 역량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지성과 심미적 역량을 대조적인 두가지의 인간활동으로 믿고 있지만, 사실은 이 둘은 상호의존하고 있고 서로 보완적인 것입니다. 지성이 없다면 진정한 예술은 있을 수 없고 또한 예술이 없다면 과학적 통찰과 직관도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가들은 한결같이 명석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고 진정으로 위대한 과학자는 직관과 인간미에 있어 매우 탁월한 사람들이 었습니다. 인식적 태도가 결여된 심미적 활동은 결국 자기만족과 센티멘탈리즘과 맹목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기 위하여 그리고 예술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통찰력과 날카로움이 함께하는 지적 조력이 동시에 수반되어야 합니다. 철학과 과학의 양상과 의의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와 노력은 여러분을 진정한 예술 감상자로 인도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예술의 이념사로 인도하려 애썼던 것은 바로 그러한 소이였습니다.

 

예술의 이해와 관련하여 세번째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역사와 또한 그 역사에 속해있는 예술에 대한 사적 고찰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축적에 의해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고 또한 과거는 우리의 현존에 의하여 그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과거의 예술과 이념과 과학이 어떻게 하여 현재를 만들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도 그리고 우리가 속해있는 현재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역사는 단지 사료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대한 정보만으로 역사적 이해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과수원을 경영하면 만유인력의 법칙은 저절로 귀납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입니다.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평생을 천문 관찰에 보냈고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축적해 놓았지만 어떠한 의미있는 과학적 가설도 도출해내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상상력입니다. 과거의 어떤 시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만이 여러분이 과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과거에 속한 사람들의 삶과 영혼에 스스로를 일치시킬 수 있도록 마음을 집중하려 애써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정도의 지식과 열렬성이 있다면 어떤 순간 역사적 과거는 여러분의 가슴을 섬광같이 때리며 여러분 마음속에 살아 숨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와의 대조 혹은 유비에 의하여 우리 자신을 훨씬 잘 이해하게 되고 우리 자신의 삶은 순식간에 이해의 단서위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더하여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것은 철학에 대한 소양입니다. 철학은 먼저 우리가 우리 삶과 우주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가를 말해주는 학문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적 견지하에서 예술사를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그 근본에 있어 이해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철학자의 이론 이상으로 그 이론의 의미와 위치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철학이 단지 학위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철학을 하는 양식이 이와다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철학 체계가 전체적인 철학 세계 속에서 어디에 속해있고 어떤 요구와 희망과 의지 위에 기초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즉 전체의 빛 가운데서 부분을 보아야 하고 우리 삶의 해명자로서 철학을 보아야 합니다. 그 철학이 우리 삶 위에 어떻게 착륙할 수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삶과 관련하여 그 무엇이 아닌 한 그것은 더이상 철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삶과 철학은 서로 얽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이해와 동시에 예술을 탐구해 나갈때 여러분은 예술에 대한 커다란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제가 감히 말하는바 예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의 삶의 의미와 이유를 알고자 하는 마음속의 요구를 굳건히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 강렬하고 타협없는 마음으로 노력하고 분투하는 것입니다. 정열과 열렬성은 지식과 학위보다 훨씬 더 의미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젊음의 정열이 학식보다 훨씬 큰 파괴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불꽃을 꺼뜨리지 말고 분투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여러분을 가치있는 삶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허영, 허위의식, 피상성, 자기만족 등을 지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위의 악덕들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소크라테스도 경멸적으로 말한바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무어나 된 듯이 생각하는" 인품은 삶을 참을 수 없이 무겁게 만들고 스스로를 오만 속에서 몰락해가게 만듭니다. 누구라도 죽을 때까지 배워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인가가 옳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올바른 요소를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름을 향해 분투하고 있는 그 순간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내가 있을 뿐"이듯이 노력하고 있는 내 자신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박하고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삶과 운명에 대한 이해를 하겠다는 견지에서 예술사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지성과 아름다움의 세계는 여러분에게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모름지기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커다란 정신적 열렬성 속에서 끝없이 분투해 나가는 와중에 순간순간 빛이 나의 눈에 스며서 무엇인가를 이해했다고 믿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 모두는 삶이 요구하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측면 때문에 고통받고 시시각각 힘든 노역을 치루고 살아나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는 것은 학문과 예술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의미이고 즐거움입니다. 그러므로 잠시라도 경제적 노역의 순간을 벗어나는 계기가 있다면 학문과 예술에 몸을 담그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갑자기 살아나갈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젊은 시절에 매우 행복했습니다. 하루의 식량이 단지 감자 몇개와 우유 1리터였던 가난한 시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공부할 수 있고 바하의 악보를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저를 기쁘게 했습니다. 제게 어떤 역량인가가 있어서 무엇인가를 이해했고 어떤 역량인가가 부족해서 무엇인가의 포착에 있어 실패했다 해도 단지 분투 가운데 저는 행복했습니다.

 

나의 학생들 중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분들은 어리고 미성숙한 우리의 미래의 희망들이 여러분의 가르침과 인도를 기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마음에 새기고 더욱 노력하여 우리의 어린 영혼들을 지성과 아름다운 세계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보다 젊은 분들 그리고 아직 어리다고 할만한 분들, 여러분은 훗날 우리 삶의 증거이고 우리의 미래이고 우리의 희망이고 꿈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삶이 요구하는 생존 경쟁의 진흙탕으로 끌려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여러분이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고 회피해서도 안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더욱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지금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하게 앎과 아름다움을 요구하고 있었던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몸이 생존을 위해 애쓸 때 동시에 여러분의 영혼은 의미를 위해 애쓰기를 저는 신심으로 촉구합니다. 그것만이 궁극적으로 삶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우리는 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심산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선생님에게서 타고난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든 모든 것들이 잘 진행되어 선생님과의 친교가 계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심산스쿨에 감사합니다. 저는 꿈같은 한 달을 보냈습니다. 삶의 길에는 뜻하지 않게 아름다운 곳도 있군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바, 선생님으 지도와 조정하에 나의 학생들이 철학과 과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학생들이 어느 정도의 철학적 소양을 갖춘다면 이제 우리는 선생과 학생이며 동시에 친구들로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능성과 희망만으로도 저의 가슴은 두근 거립니다.

 

2007년 2월 6일 조중걸
  • ?
    전재영 2008.03.19 18:39
    한구절 한구절 가슴에 팍팍 와닿는게..조중걸님께서 지으신 열정적 고전읽기 라는 책을 다시 한번 책장 속에서 꺼내봅니다..지금 투병중이시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좋은글 고맙습니다. 담아가야겠네요
  • ?
    임석희 2008.03.19 18:39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조중걸 지음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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