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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속에서 자랐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서울로 대학진학을 하고서야 알았다.




내가 나고 자란 집은 건물은 허름했지만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그 부근이 개발제한구역이었기에 조금만 걸어나가면


물가에 사는 개구리와 올챙이떼들이 보였고


가끔은 배가 빨간 무당개구리도 만났다.


요즘은 흔히 볼 수 없는 맹꽁이도


큰 비 올 때마다 우리 집 마당에 찾아와서 맹꽁맹꽁 울었다.




아버지는 어린 내가 꽃이나 나무 이름을 물어볼 때마다


“이건 황매.” “이건 측백나무.” 하고 잘 가르쳐주셨다.




봄에는 유채밭에서 숨바꼭질했고


늦여름에는 꽃씨를 따모으며 놀았고


나무토막을 가지고 친구랑 자치기 할 때면


해가 지고 깜깜해져서 안 보일 때까지 놀았다.


겨울엔 오빠들이 꿩잡으러 간다고 해서 따라다니고.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초반에는


이 큰 도시 전체가 얇은 먼지막에 덮여있는 것 같았고


멀리 볼 수록 뿌연 하늘만 보여 우울하고 답답했다.


한라산을 배경으로 돌담과 키 작은 소나무들이 늘어선 그 풍경이 그리웠다.




서울생활에 적응하고 부터는  자연을 가까이 하고 싶다는 소망은 
반쯤 포기하고 반쯤 잊고 살았다.




든든하고 은근한 생명력을 지닌 나무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은 고시공부 시절이었다.


2차시험에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 다음해 1차시험까지 떨어진 후에


긴 방황이 시작된 봄이었다.




같이 스터디하던 후배가 ‘누나가 좋아할 것 같아서’라며


<궁궐의 우리 나무>라는 책을 선물해 주었다.


그 때부터 가방에 책 한 권 넣고 서울시내 궁궐을 찾아다니며


나무보러 다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박상진 교수의 맛깔스러운 글을 더 접하고 싶어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도 다 사서보았고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숲이나 박물관이나 식물원을 주로 찾아다녔지만


그냥 걷다가 길에서 만나는 풀과 꽃들도 한없이 좋았다.




나무를 통해서 보는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자연이 주는 치유...  말없는 위로. 


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추스르고


조금씩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서울에 돌아오면 물집이 다 낫지도 않은 발로 또 떠날 궁리를 하곤 했다.


같은 과 선배였던 작은 오빠는 전공공부보다 나무에 더 빠져 지내는 나를 보고


“법과대학 식물학과 문건민!” 이라며 놀리곤 했다.




다시 본격적으로 공부에 몰입하면서부터 법학과 관련이 없는 책들은


싹 정리해서 모두 집으로 보냈다.




작년 여름,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그 때까지도 친정에 둔 내 책들을 정리하지 못한게 미안해서


( 나만이 아니라 5남매가 이런 식으로 짐을 방치하면 양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내가 읽고서 친정에 두었던 책들을 박스에 담아서 중고서점에 팔거나 기증해버렸다. 




그런데 이젠 그 책들을 치워버린게 정말 후회된다.


책장에 꽂아놓고 보기만 해도 그게 다 지금의 나를 이루는 ‘기억’이 되는 것인데.



<궁궐의 우리나무> 이 한 권이 없었다면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텼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다시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절판이었다. 아차 싶어서 인터넷 서점을 모조리 뒤지고


중고검색도 해보았는데 재고가 없었다. 


으으...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하고 다음 날 친정에 전화해 보았으나 역시나.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책은 없다고 한다.




마지막이다. 출판사에 전화나 해 보자.


한 권이라도 남아 있으면 팔아달라고 졸라보자.


상냥한 여자 직원의 목소리, “출판사에도 남아있는 게 없거든요.”


그래서 정말 깨끗이 단념하려는 순간,


“지금 그 책 개정작업 중이거든요. 3월 20일쯤 되면 다시 나올 거에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힘든 시절을 지켜준 속 깊은 옛날 애인을 다시 만나는 느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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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설 2010.03.18 12:36
    시골에서 자란것이 그때는 부끄러움이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그것은 소중함을 알게 되더군요. 그래도 문건민님은 일찍 그런 자연에 눈을 뜨셨네요. 저는 전공이 전기,전자이다보니 자연에 대한 관심이 없다가 마흔을 넘기고서야 요즘은 자연사연구회에 가입하여 겨울은 철새탐조 봄은 초본 목본 탐사, 여름은 어류탐사, 가을은 동굴이나 화석탐사에 재미를 붙이고 있답니다. 식물들의 생태를 알아 갈수록 재미는 더해져 갑니다. 찾아 갈수잇는 자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좋은 벗을 얻었다는 생각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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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영석 2010.03.18 12:36
    저도 무주 시골출신이라 나무을 너무 좋아합니다 '궁궐의 나무'를 사서 읽었어요. 가끔 나무 나무 사진들을 보면 너무 좋습니다. 궁궐만 있으면 좋은 나무를 다 심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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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원 2010.03.18 12:36
    뒤늦게 찾아온 책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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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종연 2010.03.18 12:36
    자연속에서 자랄 수 있는 환경은, 그 자체가 축복인 것 같아요.
    도시의 한복판에서 태어나, 40년이 넘는 시간을 그 공간을 떠나본적이 없던 제가
    근교의 조그만 시골에 '텃밭'을 만들면서, 야채를 가꾸면서, 나무에 관심을 두면서
    언제나 통탄했던 한가지. 책만으로 익힌 지식은 한계가 있다는 것.
    작은 풀포기 하나의 차이조차 꿰뚫고 있는 지인을 보면서 느꼈던 선망과 질투.

    옛애인을 기다리는 설레이는 심정을 잠시 공감해보며,
    책이 나오면, 저도 한번 읽어볼게요^^
  • ?
    연탄이정원 2010.03.18 12:36
    봄에는 유채밭에서 숨바꼭질했고

    늦여름에는 꽃씨를 따모으며 놀았고

    나무토막을 가지고 친구랑 자치기 할 때면

    해가 지고 깜깜해져서 안 보일 때까지 놀았다.

    겨울엔 오빠들이 꿩잡으러 간다고 해서 따라다니고.


    문건민님 외관상 모습이 저와 비슷한 또래라 생각되었는데,
    자연환경적 요소도 있겠지만, 오빠들 틈에서 자라서인가요? 씩씩하게 자라신듯^^
    저의 유년 시절과 사뭇다른 모습이라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글귀입니다.^^
    글 읽는 동안 한참을 웃었습니다.ㅋㅋ
    한라산과 돌담, 유채...
    문건민님 고향이 제주로군요^^
    제주, 갈때마다 제주에서 한 1년만 이라도 살아봤으면 종종 환상을 갖곤 했었는데~

    책을 기다리는 문건민님, 지금 얼마나 설레일까요...
    제 가슴까지 꽁닥꽁닥거립니다.^^
    책 나오면 읽고 꼭 독후감으로 전해주세요.
    기다릴께요^^ 문건민님~ 문건민님~^^

    참~! 처분해버렸다는 책이 넘 아깝네요.
  • ?
    홍경화 2010.03.18 12:36
    '물집이 다 낫지도 않은 발로 또 떠날 궁리를 하곤 하던' 건민씨!
    동무되어 선연한 어린시절로,
    한동안 방황하던 그대를 뒤쫓다
    어느새 기억속의 내가 됩니다.
    자꾸만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 ?
    문영미 2010.03.18 12:36
    어릴적 시골 들판에서 노을과 마주쳤어요.
    평생의 기억으로 각인될 저만의 노을이었지요.
    시골아이라서 가능한 시공간이었답니다.

    건민씨 얘기에 가슴이 열리는 기분!
    시골의 자잘한 장난과 즐거움을 함께 체험하였구나 하는 공감대가
    일어나네요.

    요즘 아이들도 시골의 자연에 텀벙거리게 해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향수에 잠기게 하는 좋은 글 잘봤어요.
  • ?
    황문성 2010.03.18 12:36
    좋은책 인것 같아요.책소개도 너무 정겹구요.좋은책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
  • ?
    문건민 2010.03.18 12:36
    뇌과학 공부 아니고 이런 '딴소리'해도 되나 하면서 올린 글인데
    이렇게 따뜻한 댓글들을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영석 님은 어느 중고서점에서 책 구할수 있는지 문자까지 주셨어요^^.

    그 시절에 같이 자치기 하던 저의 단짝 친구는 우리 작은오빠와 결혼하여
    이제 저의 새언니가 되었답니다.
    그 친구와 제가 항상 안타까워 하는 것이
    아이들을 자연속에서 뒹굴며 자라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랍니다.
  • ?
    김향수 2010.03.18 12:36
    ㅎㅎㅎ, 정겨운 글, 어린시절이 오롯이 기억되네요, 나무의 매력들이 가득한 건민샘의 생각들이 숲을 이뤄가고있네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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