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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9 09:18

책: 기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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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비평(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  이영준 저



1. ‘기계비평’ 하나: 기계도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뭐, 기계를 비평한다고?”
“기계를 어떻게 비평해? 기계가 비평이 돼?”

여태껏 기계를 비평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기계비평’이라는 말도 없었다. ‘기계비평’은 지금까지는 없었던 매우 낯선 담론이다.

사실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었을 뿐, 기계는 인간 만큼이나 아름답고 감각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이를테면 기계는 여러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피스톤의 폭발음, 기어의 마찰음, 액슬의 회전음, 압축공기가 새는 소리 등등. “좋은 기계는 좋은 소리를 낸다.” 이는 악기에서 경주용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되는 말이다. 기계는 예술작품 못지않게 풍부한 감각적 층위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주체적 조건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따라서 기계의 목소리는 인간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 그 목소리는 인간과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비평, 미술비평, 영화비평, 시사비평처럼 ‘기계비평’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계에는 역사가 있다. 하나의 톱니바퀴를 만들기까지는 오랜 역사가 걸린다. 그럼에도 톱니바퀴는 역사에 저항한다. 톱니바퀴를 낳은 패러다임의 낡음이 가해 오는 저항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처럼 기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기계는 다층적 함의를 가지고 발전해 왔으며, 인간에게 많은 의미로 다가옴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기계는 우리의 사회, 경제, 문화, 일상 등 모든 영역에서 깊게 뿌리를 박고 있다. 아니 기계가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계비평은 현재 우리 주위에서 작동하고는 있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계의 지층을 드러내는 일, 알게 혹은 모르게, 은밀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밑에, 옆에, 틈새에 끼어 있는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기계의 지층을 캐내는 ‘지식의 고고학’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유령처럼 끈질기게 횡행하는 요즘, ‘기계비평’은 바로 인간과, 특정한 문화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문명, 그리고 인간과 기계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을 요구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2. ‘기계비평’ 둘: 기계는 인간이 자신을 해석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기계비평: 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은 인간이 해석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대상인 기계에 미학적·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책에는 KTX·선박·항공기 등 저자가 직접 체험한 이동성기계·속도기계에 대한, 너무나 빠른 우리 시대의 속도에 대한, 인간을 교묘하게 속이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담론들로 가득하다. 책에는 또한 저자가 직접 들여다본 놀라운 기계의 세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다양한 컬러 이미지들과 친절한 설명들이 곳곳에 실려 있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특히 저자는 경춘선 디젤기관차, 자동차 운반선 등을 승객이 아닌 ‘기관사’, ‘선원’의 신분이 되어 타고 가면서 체험한 기계와 속도에 대해 비평가의 시선을 던지고 있다. 일상에서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기계와 속도의 세계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우리들의 감수성은 텔레비전이나 카메라, 자동차 같은 기계의 감각에 깊숙이 삼투되어 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은 이미 이런 기계들에 의해 착색되어 있는 지 이미 오래다. 미술인간, 철학인간, 도박인간, 살인인간 등등 인간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타자의 존재에 감염되어 특수한 형태를 띠게 된다. ‘기계인간’은 그런 인간들 중 하나의 특수한 존재형태다.

이제 인간의 개념은 기계의 개념과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었다. ‘기계적인 것’을 뺀 순수한 인간적 본질이란 이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계비평의 근거는 기계인간의 출현과 관계있을 것이다. 기계가 한낱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뗄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인간들 말이다. 물론 근대/탈근대의 인간은 ‘정글의 왕자’ 타잔 빼고는 대부분이 기계인간이다. 신체의 말단에서부터 내장 깊숙이, 표현의 감정에서부터 무의식에까지 기계의 영혼이 바이러스처럼 깊숙이 침투해 있는 인간 말이다.


3. ‘기계비평’ 셋: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작동하는 하나의 커다란 기계다.
기계는 인간의 세계 속에서 가치를 지녀야 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고, 유통되어야 한다. 기계는 가치로, 말로, 이미지로, 역사로, 철학으로 작동한다. 기계를 비평한다는 것은 기계를 만들어내고 기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기계를 평가하고 기계에 의해 평가받는 문명을 이해하는 일, 근대 인간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던 기계를 이해하는 일이다. 《기계비평: 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은 결국 우리의 기계문명, 근대문명에 대한 내면의 성찰에 다름없다.

이 책에서는 철도, 항공, 선박 등 세 가지 거대기계를 다루고 있다. 저자가 이런 기계들을 다루는 데는 이러한 이동성기계·속도기계가 근대 이후 우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속도에 대한 감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저자의 기계비평은, 더 작고 더 낙후한 상황에서 전수되고 개발되는 기계기술의 계보학을 따지는 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새우잡이 배나 낡은 선풍기 같은, 아무도 눈길 안 주는 기계 말이다.

저자를 놀라게 한 것은 기계의 규모, 무게, 복잡성, 정밀함 등 기계가 이 세계와 벌이는 메커니즘이었다. 저자는 그 체험을 ‘감동’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비평가의 임무는 자신이 체험한 놀라움과 감동을 설명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관찰자이면서 분석가의 눈을 통해 기계가 내는 상징성의 목소리를, 엔지니어의 언어를 인문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기계의 목소리를 인간의 소리로 번역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작동하는 하나의 커다란 기계라 할 수 있다. 그 세계 속에서 ‘기계’ 또한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말하지 않는 듯 보이는, 기계의 다층적인 목소리를 듣는 일, 그 목소리의 근원까지 파내려 가는 모험을 하는 일은 기계를 만든 인간의 운명을, 그러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계의 운명을 들여다보는 길이기도 하다.


4. ‘속도비평’: 퀵서비스의 출현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소리를 보내세요? 선물을 보내신다구요? 당신을 보내세요!
그분께 가는 일,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그분께 당신을 보내세요.”

“그리운 마음이 시속 300km로 달려갑니다.”


‘시속 300km’에 도드라지게 색이 입혀 있고, 마지막에는 “대한민국의 내일로 가는 길”이라는 자막이 뜬다. 바로 요즈음 TV에 나오고 있는, ‘속도의 화신’인 KTX의 광고다.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길은 끝없이 열려 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정말 빠르게만 가면 대한민국의 희망찬 내일이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내일”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오늘도 KTX는 “시속 300km”로 열심히 앞으로만 달린다. 그 길은 충동(drive)의 길이다. 길은 어차피 달리라고(drive) 있는 것이니까. 대한민국의 내일로 가는 길은, 무엇을 향해 또 무엇을 위해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가도록 몰아 부치는(drive) 길이다. 그 길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엄청난 움직임을 촉발하고 담아내는, 속도의 담지자 모습을 하고 있다.

KTX의 광고에서는 “그리운 마음이 시속 300km로 달려”간다고 사뭇 자랑스러운 어투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인간의 감정은 ‘단위’로 나타낼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수치 단위가 아닌, 대단히 불확정적이고 주관적인 어휘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감정 중 숭고미를 인간의 스케일을 초월하는 사물에 대해서 지니는 경외의 감정이라고 했을 때, 높이가 몇 미터 이상 또는 무게가 몇 톤 이상이면 숭고미를 느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속도는 ‘몇 미터’의 아찔한 높이와 ‘몇 톤’의 둔중한 무게로 우리의 삶 속에 침입해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속도는 서구의 희망이다”, “정지는 죽음이다”라며 속도가 전쟁과 권력, 정치와 문화 등에 미친 영향을 추적해 냈던 비릴리오는, 근대사회의 동인이 -자본의 축적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과 달리- ‘속도에 대한 추구와 통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근본적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은 움직이므로, 속도는 존재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존재를 있게 해주는 근본적 차원이다. 가만히 있는 듯이 보이는 물건도 초미시적 차원으로 들어가보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듯, 모든 것에는 속도가 삼투해 있다. 속도가 존재의 외부에서 부과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속도를 나타내는 어휘와 개념들이 우리가 존재를 말할 때 쓰는 것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속도와 정치》를 쓴 비릴리오나 《천 개의 고원》을 쓴 들뢰즈와 가타리는 속도를 인간존재가 세계와 삶 속에서 전개해 나가는 본질로 보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발휘하는 속도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논지를 더욱 밀고 나가서 인간의 감각, 사고, 행동, 체계 등 모든 국면에 걸쳐 있는 속도를 분석해 보면 그 인간 문명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떤 사람의 관상을 보면 그의 경력이나 성격을 읽어낼 수 있듯이, 어떤 사회와 문화의 속도를 읽어내면 그 사회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생활을 대기처럼 가득 메우고 있는 ‘속도’라는 차원에 대해 생각해 볼 때다.
[YES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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