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우리 나무>를 기다리며.

by 문건민 posted Mar 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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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속에서 자랐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서울로 대학진학을 하고서야 알았다.




내가 나고 자란 집은 건물은 허름했지만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그 부근이 개발제한구역이었기에 조금만 걸어나가면


물가에 사는 개구리와 올챙이떼들이 보였고


가끔은 배가 빨간 무당개구리도 만났다.


요즘은 흔히 볼 수 없는 맹꽁이도


큰 비 올 때마다 우리 집 마당에 찾아와서 맹꽁맹꽁 울었다.




아버지는 어린 내가 꽃이나 나무 이름을 물어볼 때마다


“이건 황매.” “이건 측백나무.” 하고 잘 가르쳐주셨다.




봄에는 유채밭에서 숨바꼭질했고


늦여름에는 꽃씨를 따모으며 놀았고


나무토막을 가지고 친구랑 자치기 할 때면


해가 지고 깜깜해져서 안 보일 때까지 놀았다.


겨울엔 오빠들이 꿩잡으러 간다고 해서 따라다니고.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초반에는


이 큰 도시 전체가 얇은 먼지막에 덮여있는 것 같았고


멀리 볼 수록 뿌연 하늘만 보여 우울하고 답답했다.


한라산을 배경으로 돌담과 키 작은 소나무들이 늘어선 그 풍경이 그리웠다.




서울생활에 적응하고 부터는  자연을 가까이 하고 싶다는 소망은 
반쯤 포기하고 반쯤 잊고 살았다.




든든하고 은근한 생명력을 지닌 나무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은 고시공부 시절이었다.


2차시험에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 다음해 1차시험까지 떨어진 후에


긴 방황이 시작된 봄이었다.




같이 스터디하던 후배가 ‘누나가 좋아할 것 같아서’라며


<궁궐의 우리 나무>라는 책을 선물해 주었다.


그 때부터 가방에 책 한 권 넣고 서울시내 궁궐을 찾아다니며


나무보러 다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박상진 교수의 맛깔스러운 글을 더 접하고 싶어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도 다 사서보았고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숲이나 박물관이나 식물원을 주로 찾아다녔지만


그냥 걷다가 길에서 만나는 풀과 꽃들도 한없이 좋았다.




나무를 통해서 보는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자연이 주는 치유...  말없는 위로. 


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추스르고


조금씩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서울에 돌아오면 물집이 다 낫지도 않은 발로 또 떠날 궁리를 하곤 했다.


같은 과 선배였던 작은 오빠는 전공공부보다 나무에 더 빠져 지내는 나를 보고


“법과대학 식물학과 문건민!” 이라며 놀리곤 했다.




다시 본격적으로 공부에 몰입하면서부터 법학과 관련이 없는 책들은


싹 정리해서 모두 집으로 보냈다.




작년 여름,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그 때까지도 친정에 둔 내 책들을 정리하지 못한게 미안해서


( 나만이 아니라 5남매가 이런 식으로 짐을 방치하면 양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내가 읽고서 친정에 두었던 책들을 박스에 담아서 중고서점에 팔거나 기증해버렸다. 




그런데 이젠 그 책들을 치워버린게 정말 후회된다.


책장에 꽂아놓고 보기만 해도 그게 다 지금의 나를 이루는 ‘기억’이 되는 것인데.



<궁궐의 우리나무> 이 한 권이 없었다면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텼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다시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절판이었다. 아차 싶어서 인터넷 서점을 모조리 뒤지고


중고검색도 해보았는데 재고가 없었다. 


으으...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하고 다음 날 친정에 전화해 보았으나 역시나.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책은 없다고 한다.




마지막이다. 출판사에 전화나 해 보자.


한 권이라도 남아 있으면 팔아달라고 졸라보자.


상냥한 여자 직원의 목소리, “출판사에도 남아있는 게 없거든요.”


그래서 정말 깨끗이 단념하려는 순간,


“지금 그 책 개정작업 중이거든요. 3월 20일쯤 되면 다시 나올 거에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힘든 시절을 지켜준 속 깊은 옛날 애인을 다시 만나는 느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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