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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지역도서관에 요청했던  "신의 방정식"을 받아 볼 수 있었고,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은 나중에 올릴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만, 읽으면서 에딩턴과 다이슨의 일식관측에 대해서 의문이 있었습니다. 과연 어떤 관측적 방법으로 일반상대성이론을 검증했는가, 특히 당시 사진기술과 측정으로 충분한 정밀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하고, 측정오차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Physics Today 3월달에 이것과 관련된 기사가 실렸더군요. 궁금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고, 좋은 책을 소개 받았으니 그 보답도 할겸. 부족한 실력이지만 번역을 해서 올려 놓습니다. 

 

영어 원본도 다음 URL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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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일식관측의 상대성이론 검증 - 편향성에 대한 의문.

(Testing relativity from the 1919 eclipse - a question of b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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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케네픽 (Daniel Kennefick), Physics Today, 2009 3월 3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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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결과를 해석할때는 배경(정황)이 모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식데이타를 얻고 분석했던 연구자들에게는 그 실험이 알버트 아윈스타인의 승리라고 판단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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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천문학의 역사속에서 가장 유명한 측정중의 하나가 1919년의 몇 개월의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영국 그리니치와 캠브리지 천문대의 관측팀들은 1919년 5월29일에 일어난 개기일식을 관측하기위해서 브라질과 서부 아프리카로 여행했다. 그들의 목적은 태양의 강한 중력장을 통과하는 빛의 경로가 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관측은 그후 일반상대성이론의 공고함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발표되었다. 즉. 그 관측은 전통적인 뉴톤의 이론에 의한 예측치보다 알버트 아윈쉬타인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중력이론의 예측치와 더 부합하는 것이었다. 



최근 수 십년간 많은 물리학자들과 과학사가들은 이 유명한 실험의 확실성에 대하여 의심을 던져왔다. 그들은 1919년의 측정이 아윈쉬타인과 뉴톤의 중력이론 중 어느 한쪽을 결정하기에 충분한 정밀도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몇몇 과학철학자들은 더 나아가 단정하기를, 아윈쉬타인에 더 호의적인 결론은 원정대원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아서 스탠리 에딩턴의 편향성(bias)에 의해서 유발되었다고 주장한다. 에딩턴은 일반상대론의 열렬한 제안자였으며,  자신과 같은 평화주의자이자이자 독일의 과학을 주도하던 한 사람(아윈쉬타인)이 만든, 이 이론을 검증함으로서,  영국과 독일사이의 화해를 향한 몸짓을 만들기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와같이 1919년의 일식관측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때때로 실험자들이 기대되는 결과에 그들의 데이타를 끼워 맞추는, 소위 "예언가효과"(predictor effect)의 중요한 예로서 주어지곤 한다. 



1919년의 일식관측이 결정적인 실험이 아니라고 헐뜯는 이야기에는 두개의 버전이 있다. 첫째는 정밀도에 관한 것으로 1970년 이래로 물리학자들 사이에 통용된 것이다. 그 실험자들(관측자들)은 단지 운이 좋아서 두 예측치중의 하나에 상당히 가까운 것을 얻었을 뿐이고, 그 실험은 그 이론들을 검증할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과학철학자들과 과학사가들 사이에 통용되고, 대중적인 추종자들을 얻기 시작한 이야기로,  1980년의 한 논문에서 철학자인 존 얼만(John Earman)과 클락 길모어(Clark Glymour)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특정적으로 에딩턴과 그의 동료들이 아윈쉬타인보다 아이작 뉴톤을 지지하는 데이타들을 버려버렸다고 비난한다. 몇몇 현대의 비평가들은 그러한 행위는 과학의 영역에서 정당하지 못하며, 이것은 에딩턴의 이론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의 편향성에 의해 유발된 것이라고 비난해 왔다.

            
물론 거의 한 세기전이나 오래된 실험의 결정들에 대해서 확실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19년 탐험의 선도자인 프랭크 왓슨 다이슨 과 에딩턴이 그들의 관측결과가 뉴톤의 이론에 의한 예측치와 잘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만한 충분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지지하는 많은 증거들이 있었다. 실제로 그들의 데이타 취급에 대한 타당성은, 그들의 사진건판에 대한 1979년의 현대적인 위치천문학적 자료처리방법을 통한 재분석을 통해서 획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연구자는 당시 아직도 그들이 마지막 결론을 주었다고 생각지 않았었다. 실제, 다이슨과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1922년의 개기일식 때 1919년의 그 실험을 반복하기위해서  기나긴 여정을 떠났었다.


원정



1911년의 한 논문에서, 아윈쉬타인은 처음으로 주장하기를, 빛은 중력마당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태양의 가장자리를 가깝게 지나가는 별빛은 경로로부터 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태양 가까이를 지나는 별의 위치는 0.87초 변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의 분석은 중력을 포함하는 상대성이론의 기본요점, 특히 등가원리, 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등가원리는 모든 질량들이 중력마당속에서 동일한 비율로 떨어질 것을 요구한다.



에딩턴과 다이슨은 아위쉬타인이 1911년에 계산한 이 변동치(0.87")를 "뉴톤적인 값"이라 명명했다. 이 명명은, 나중에 발견된 1804년판 논문에서 독일의 천문학자인 조안 기오르그 폰 솔드너(Johann Georg von Soldner)가 오직 뉴톤의 물리학에만 기반해서 비슷한 변동치를 산출했다는 것이 알려짐으로서 정당화 되었다. 1916년, 일반상대성이론의 최종판을 개발한 이후, 아윈쉬타인은 태양의 질량에 의한 시공간의 휘어짐에 의해서 빛의 휘어짐 효과에는 추가적인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편평한 공간을 통과하는 경로에 비해, 태양 가까이에서는 직선경로 혹은 측지선(geodesic)이 휘어야 한다. 공간의 곡률에의해 야기된 부가적인 휘어짐은 중력에 의한 낙하(falling)에 의한 휘어짐의 양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한 예측은 뉴톤물리에 의한 별위치의 변동치의 두 배의 값 - 태양의 가장자리에서 약 1.75" - 를 요구하게 된다. 



1913년경, 아윈쉬타인은 그가 예측한 이 빛의 휘어짐현상에 대해 관심을 유도하고 관측하도록 주요 천문학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태양에 가까운 별들은 일반적으로는 볼 수 없지만, 개기일식중에 태양 주위의 별들을 찍을 수 있다. 이것은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지역까지 힘들게 여행을 해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1919년 이전, 이 현상을 관측하려는 몇몇 시도가 있었지만 나쁜 날씨와 제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아윈쉬타인이 1916년에 그의 예측치를 변경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그 이전의 원정관측이 실패한 것은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19년 일식은 특별히 아주 좋은 기회였다 왜냐하면 개기일식중에 상당히 밝은 많은 별들이 속한 하이야데스성단이 태양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아윈쉬타인의 이론은 태양에 의한 시공의 구부러짐이 일으킨 궤도상의 섭동으로서 수성근지점이동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각광 받고 있었다. 



1919년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사람은 영국그리니치천문대의 대장이었던 다이슨이었다. 아윈쉬타인의 새로운 이론의 중요성을 다이슨에게 지적해준 사람은 캠부리지대학천문대의 대장이었던 에딩턴이었다. 다이슨은 영국 왕립학회와 왕립천문학회의 공동상설일식위원회(The Joint Permanent Eclipse Committee)의 의장으로서 에딩턴을 1919년의 관측원정을 준비하기위한 분과위원회에 임명하였다. 비록 전쟁이 그들의 노력을 좌절시킬 것처럼 보였지만, 1918년 11월의 갑작스런 종전으로 제 시간에 관측원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에딩턴은 노샘프턴셔의 시계공인 에드윈 터너 코팅햄(Edwin Turner Cottingham)과 동행하여 적도부근의 서부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프린시페(Principe)섬의 관측지점으로 여행했다. 다이슨은 찰스 데이비슨 (Charles Davidson)과 앤드류 크롬멜린 (Andrew Crommelin) 이라는 그리니치의 두 보조원을 브라질 북쪽의 소브랄(Sobral) 관측지점으로 파견했다. 



에딩턴의 아윈쉬타인 이론에 대한 단정적인 편향성을 나타내는 가장 유명한 일화는 나중에 에딩턴 자신이 반복해서 이야기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다이슨은 원정출발전에 시계공인 코팅햄에게 실험(관측)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세 가지 결과가 있다고 말했다: (1) 휘어짐이 없는 경우(no deflection), (2) 반만 휘어진 경우 (half deflection) - 이것은 빛이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뉴톤의 이론을 지지한다, (3) 완전히 휘어지는 경우 (full deflection) - 아윈쉬타인의 이론을 지지한다. 더 큰 휘어짐이 이론적으로 더 흥분되고 신기한 결과라는 것에 대해, 코팅햄은 그럼 만약에 아윈쉬타인의 휘어짐의 두 배나 되는 결과를 얻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고 물었다. 다이슨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되면... 에딩턴은 미칠 것이고, 너는 혼자서 집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이 두 원정대는 삼월에 영국을 떠나서, 일식관측준비에 맞추어서 그들의 관측지점에 도착했다. 5월29일 일식이 있던 날, 에딩턴은 많은 구름들때문에 실망했지만, 구름들이 충분히 얇아서 일식이 진행되는 동안의 노출 중 마지막 몇 개의 노출 속에서 가장 밝은 별들의 이미지를 찍을 수 있었다. 한편, 그리니치팀은 일식중에 아주 좋은 날씨를 누리고 있었지만 천문사진용렌즈(astrographic lens)를 가진 주요기기의 고장으로 난처해 했다. 사진을 이용한 전하늘탐색(photographic all-sky surveys)에 쓰기위해 고안된 천문사진용렌즈(astrographic lens)들은  아주 넓은 광시야를 가지도록 설계된 것들이다. 그 대체기기(backup instrument)인 4인치렌즈는 잘 작동했다. 그러나 이 렌즈의 좁은 시야때문에 적은 수의 별들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데이타분석



상대적으로 밝은 별들이 있는 영역속에 태양이 지나간다는 행운의 상황은, 태양에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별에 대하여,  천문학자들이 양질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어두운 별빛은 태양의 코로나의 빛에 잠겨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별위치의 겉보기이동(변이)에 대한 예측치는, 그들이 믿기로,  당시의 위치천문학의 기술(astrometric technique)로 달성가능한 정밀도의 레벨에 있었다. 비록 섬세한 장치를 먼 거리에 떨어진 곳으로 운송하는 것에 의해서 발생하는 기술적인 어려움들을 허용한다고 할 지라도.



파섹은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서, 지구의 공전에 의해서 발생하는 시차(parallax)에 의해, 별의 위치가 일년동안에 걸쳐 1초(각도)크기의 겉보기운동을 보이게 될때를 1 파섹이라고 정의한다. (먼 별일수록 겉보기 운동 크기는 더 작게 된다./옮긴이). 우리 태양계에서 1파섹이내에 존재하는 별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별들의 시차는 1초보다 작은 값을 보인다. 다이슨은 별의 시차에 대한 연구에 상당한 경험이 있었다. 사실 다이슨과 에딩턴은 위치천문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연구 - 시차, 별과 다른 천체들의 고유운동 - 를 시작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겉보기변이(apparent shift)를 결정하기위한 방법은, 일식중에 태양주위의 별밭(star field)의 사진을 찍은 후, 다시 태양이 없는 밤에 비교건판(comparison plate)으로서 동일한 별밭을 찍어 비교하는 것이었다. 명백하게, 비교건판은 그 해의 다른 시간과 날짜에 찍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태양이 하이야데스성단 밖에 위치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바람직하게는 비교건판은 그 별밭이 하늘상에서 동일한 위치(동일한 고도와 방위각)에 올 때 찍는 것이 좋다. 이것은 일출전에 하늘의 동일한 고도에 별밭이 떠올라 있어야 함을 의미하고, 그러기위해서는 태양이 황도를 따라 충분히 멀리 움직여야 한다. 



소브랄팀은 일식을 아침에 맞았기때문에 단지 2개월정도만 기다리면 되었고, 그렇게 했다 (태양이 천구면에서 하루에 1도씩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생각하면, 아침에 태양주위에 있던 별들은 몇개월후에는 태양보다 서쪽에 있기 때문에 일출전에 볼 수 있다./옮긴이). 그러나 프린시페팀은 개기일식을 한 낮에 맞았기 때문에 비교건판을 찍기위해서는 거의 반년을 기다려야 했고, 에딩턴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에 비교건판을 출발전 영국에서 찍어 놓았다. 



동일한 기기를 다르게 설치하고 비교노출을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척도의 변화나 다른 복잡한 문제들 때문에, 캠브리지팀은 또 다른 하나의 별영역에 대해서 영국과 프린시페 양쪽에서 확인건판(check plate)들을 찍었다. 이러한 건판들은 일식때 찍은 건판과 비교건판사이에 뜻밖의 커다란 척도(scale)의 변화가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태양은 확인건판들의 어느 쪽에도 결코 찍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들은 에딩턴의 실험에 어떤 통제를 주게 되었다. 실제로 이런 소극적인 역할은 에딩턴의 원래계획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동일한 별밭에 대해 다른 때에 관측해 얻은 두 이미지들을 비교하고자 할 때는 예측 가능한 천문효과와 기상효과에 의한 별위치의 변위에 대해 확실히 설명해야 한다. 동일한 관측기기를 사용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할 지라도, 두 이미지는 서로 약간 회전되어 있을 수 있고, 최악의 경우는 배율이 서로 틀릴 수 있다. 다른 배율은 결국 두 이미지사이의 척도(scale)을 다르게 한다.  척도의 변화는 빛의 휘어짐을 측정하려는 사람의 관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효과이다. 왜냐하면 이 효과는 빛의 휘어짐효과와 흡사하게 굴기 때문이다. 빛의 휘어짐은 사진 속에서 별들을 태양으로 부터 방사상으로 멀리 떨어져 보이게 한다, 그러므로 태양은 태양에 가까운 별들의 대칭을 얻기위한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한다. 



운이 좋게도 두 효과(척도의 변화와 빛의 휘어짐)에는 한 가지 다른 특성이 있다. 빛의 휘어짐은 태양의 가장자리에 가장 가까운 별에 대해서 가장 크고, 태양으로부터 멀수록 그 효과는 작아진다. 척도의 변화는 이것과 반대의 효과를 가진다: 건판의 중심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별(즉, 건판 가장자리의 별)에서 가장 큰 변위(shift)가 일어나는 반면에 건판의 중심에 위치한 별에 대해서는 그 효과가 최소한이 된다. 이와같이 원리적으로 두 건판에 있는 많은 수의 별들의 위치를 직접적으로 비교해보면 이 두 효과를 구별해낼 수 있다. 



에딩턴이 프린시페에서 얻은 건판을 다루는 데 있은 어려움은, 개기일식의 끝부분에야 엷은 구름을 뚫고 찍은 몇 개의 건판들에 가장 밝은 별들 몇 개만이 관측되었다는 것이다. 단지 몇 개의 별들만을 가지고 일을 하게 되면,  위의 두 효과를 구별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유효하게 그의 귀중한 보고의 절반은 본질적인 흥미요소가 아닌 이 "척도변화"를 측정하는 데 바쳐졌다.



그 결과 에딩턴은 대안적인 자료처리방식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옥스포드와 프린시페에서 관측한 확인건판(check plate)들 사이의 척도변화를 측정했다. 그는 이 척도의 변화가 옥스포드에서 찍은 비교건판(comparison plate)과 프린시페에서 찍은 일식건판사이의 척도변화와 동일하다고 가정했다. 그런 후 그는 이들 건판들에 대한 그의 방정식속에 이 숫자(척도의 변화)를 집어 넣었다. 이와같이 그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측정된 정보들은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 숫자 - 각 별에 대한 빛의 휘어진량 - 을 확립하는 쪽으로 쓰여졌다. 



에딩턴 그 자신이 알고 있던 것처럼, 이 방식은 그의 원래계획에는 없던 것이었다. 양팀은 그들의 데이타처리방식- 일식건판과 비교건판사이의 척도변화를 직접적으로 측정하는 것- 에 반대하는 어떤 주장도 미리 제압할 작정이었다. 결국, 프린시페에서 에딩턴의 확인건판은 저녁에 관측되었고, 일식건판은 낮에, 하늘상의 다른 위치에서 관측되었다. 이 두 세트의 건판이 온도나 다른 환경조건의 변화로 척도가 변화되었을 지는 정말로 알 수가 없다. 



이런 오차(불확실함)에 대한 반응으로, 에딩턴은 두 관측지점 모두에서 습한열대성기단의 온도가 안정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잘 알려진 일식의 특징중 하나는, 달그림자의 밑으로 들어온 지상 수 백마일의 넓이에서 개기일식중 갑자기 온도가 몇 도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프린시페에선,  에딩턴에 의하면, 습한 열대성이라는 것과 흐린날씨라는 조건속에서 온도가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 확인건판을 찍은 밤시간의 온도와 일식때의 온도사이에는 1도보다 적은 온도변화를 보였다. 따라서 에딩턴은 그 확인건판들로 부터 측정된 척도변화는 아무 문제없이 일식건판과 비교건판에 적용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에딩턴이 캠브리지에 앉아서 그의 개정된 데이타처리안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을 때, 소브랄의 크롬메린과 데이비슨은 그들의 비교건판을 찍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8월25일에 도착했다. 9월 그리니치에선 데이비슨과 보조원인 헐버트 헨리 퍼넬 (Herbert Henry Furner)이 다이슨의 지휘하에 건판들위의 별의 위치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캠브리지의 데이타중 살아남은 것이 거의 없는 것에 반해, 그리니치의 보관문서에는 거의 모든 건판들과 수십장의 데이타처리 서류가 존재한다. 이러한 자료들은 거기서 무엇이 발생했는 지에 대한 충분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에딩턴이 소브랄팀의 데이타분석에 참여하거나 참석한 적이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다이슨의 글씨는 소브랄테이타처리 기록에서 많은 중요한 곳에 존재하는 반면에 에딩턴의 글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두 사람이 교환했던 편지 중 에딩턴의 것이 문서보관되어 있다. 다이슨의 손실된 편지에 대한 1919년 10월 3일의 답신을 보자:



친애하는 다이슨,



당신의 편지와 측정치를 보고 기뻤습니다. 그 콜티에건판들이 완전휘어짐(full deflection)을 보여주어 기쁩니다. 이론때문만이 아니라 프리시페건판들에 대해 걱정하며, 그 건판들이 절반휘어짐(half deflection)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이 아마도 아주 적은 수의 측정치로부터 얻은 척도를 성급하게 적용하려 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A셋트의 명확한 측정을 마쳤고(A셋트: 5장의 프린시페건판 v. 5장의 옥스포드건판), 빛의 휘어짐값이 약간 적어지긴 했지만, 이전의 임시적인 값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에딩턴이 다이슨에게, 1919년 10월 3일, MS.RGO.8/150,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위 인용문은 데이타처리에 대한 에딩턴의 이론중심적인 접근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편지는, 그가 그때 처음으로 4인치건판(위에서는 콜티에건판(Cortie plate)으로 언급되었다. 이것은 가톨릭예수회의 사제인 알료시우스 콜티에(Aloysius Cortie)가 원정대에게 4인치렌즈를 대여해 주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의 데이타처리결과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해준다. 겉으로 봐서 에딩턴은 소브랄팀의 천문사진건판(astrographic plates)에 대한 자료처리의 결과를 보고받아왔다, 하지만 그의 반응이 그리니치건판들에 대한 분석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절반휘어짐을 보이는 뉴톤적인 결과에 가까운 소브랄팀의 이전 결과보고 (천체사진건판에 대한/옮긴이)를 기준으로, 그는 자신의 건판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소브랄팀의 결과와 모순되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노력했다.



따라서, 천체사진건판의 결과를 무시하기로 결정하고 대신에 4인치렌즈의 데이타에 의존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다이슨이었다. 그러므로 에딩턴이 아니라 다이슨의 편향성을 묻는 것이 더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그 당시의 천문학자들의 거대한 주류처럼, 다이슨은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1920년 3월 19일에 예일천문대 대장인 프랭크 슐레진저(Frank Schlesinger)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결과는 내 기대하고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그 결과를 얻은 이후부터 나는 그 상대성 사업 (the Relativity business)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그것은 확실하게 상당이 포괄적이다. 비록 이해하기 어렵지만.

(MS.RGO.8/123, 캠브리지대학도서관)



에딩턴은 1920년 8월 18일에 수학자인 헤르만 웨일(Hermann Weyl)에게 비슷한 내용을 썼다.



상당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일식원정 준비를 시작하게 만든 것은 다이슨의 열정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그것(일반상대성이론)에 깊은 흥미를 느끼면서도 매우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아주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Hermann Weyl Nachlass, Hs 91:523, ETH-Bibliothek Zurich)

 

종종 아윈쉬타인의 이론을 향한 에딩턴의 편향성에대한 또하나의 동기로서 인용되곤하는 독일과의 화해중재에 관한 의문에 관해 고찰하면, 이 경우에 대해서도 역시 십중팔구 똑같이, 다이슨이 더욱 더 주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이슨의 사망기록(1939년에 출판된)에는 그가 전쟁후의 화해중재를 더욱 더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이슨은 제1차세계대전후 국제천문연합(IAU: International Astronomical Union)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국제천문연합의 초기 몇 년간은 독일 혹은 그 동맹국들에게는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일반상대성이론과 독일과학에 대한 전형적인 영국천문학자의 관점의 좋은 예로서, 일식자료와 함께 왕립그리니치천문대에 보관된, 다음의 두 천문학자들간의 편지를 들 수 있다:

 

아윈쉬타인의 두번째 이론 (일반상대성이론)은... 더욱 더 이론적(사변적)이라서 관측과 부합할 때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 분석은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고약스럽습니다. 류벤을 불태우고, 루시타니아를 가라앉힌 리만과 크리스토펠의 같은 나라 동포들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돌프 모리츠가 필립 코웰에게, 1918년 3월 1일, MS.RGO.8/123, 캠브리지대학도서관)

 

다이슨이 처음에는 상대성이론에 편향되어있지 않았다하더라도, 더 젊고 이론적으로 더 최신인 동료 에딩턴의 관념적인 확신에 흔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는 거의 없다. 다이슨은 영국천문학의 원로였고, 오늘날에는 에딩턴의 명성이 더 크다 할 지라도, 그 일식의 시기에 이 두 사람은 사회적인 명성과 과학적인 평판에 있어 거의 동등했다. 더 나아가 다이슨이 천문사진건판의 데이타를 무시한 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결정이었다고 믿게하는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   


 

1979년의 재분석

 

그리니치팀은 처음부터 천문사진용렌즈를 주요관측기기로서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렌즈들은 어떤 일식관측에도 사용된 적이 없었고, 거울과 그 작동메카니즘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브랄팀은 콜티에 4인치렌즈에 기반한 대체관측기기를 가지고 가게 되었다. 일식 바로 직후, 몇몇 건판들을 관측지에서 바로 현상했을 때 크롬메린과 데이비슨은 일식중에 천문사진건판이 촛점을 벗어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별들은 눈에 띄게 얼룩져(흐려져) 있었고, 6월13일경 왕립천문학회에서 이 문제점이 다이슨에 의해 보고 되었다. 혼란스럽게도 2개월 후에 비교건판을 찍었을 때 이기기는 다시 촛점이 맞아 있었다. 이 건판의 질에 대한 걱정들에도 불구하고, 다이슨과 그의 팀은 계속 일을 진행시켜 천체사진건판 데이타를 처음으로 처리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건판을 측정하는 데 있어 심각한 어려움들에 직면해야 했다. 얼룩의 불명료함과 촛점이 안 맞은 이미지들 때문에, 그들은 천체사진건판의 일식사진에서 별들의 위치를 단지 일차원좌표로서 측정했다. 그 결과, 처음에 절반정도의 데이타를 버려버린 후, 그들은 밀어붙혔고 0.93"라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결과를 재발견했다.

 

이 결과치는 에딩턴에게 10월 3일 이전 어느 지점에서 보고되었다. 선명한 촛점을 가진 4인치렌즈의 일식건판을 데이타처리하자마자, 그들은 두 기기(천문사진용렌즈기기와 4인치렌즈기기)의 건판들의 측정치가 심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에 맞닥트리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그리니치팀은 그 천문사진거판데이타를 다른 대안의 방법으로 분석을 시도했다. 공동보고서의 다이슨이 쓴 부분에서, 그는 이 대안적인 분석에 의해 소브랄 천문사진데이타로부터 1.52"라는 결과를 다시 얻게 되었다고 기술했다. 나중의 1921년 논문에서 이 진술은 다시 반복되어지고 있다(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조금 다른 그림들이 인용되고 있음.).

 

만약 스케일이 변화되었다고 가정하면, 이 건판들로부터 얻어진 아윈쉬타인의 휘어짐은 0.9"이다; 만약 촛점에 의한  실제 변화가 없고, 단지 이미지가 흐려진것 뿐이라면, 그 결과는 1.56"가 된다; 그러나 이 시리즈의 사진들에는 중요성이 거의 없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다이슨과 그의 동료들이 에딩턴의 분석방법에 가까운 어떤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에딩턴이 가졌던 확인건판(check plate)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식건판을 관측했던 같은 기기로 같은 장소에서 찍은 비교건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에딩턴이 프린시페에서 낮시간에 얻은 일식건판과 밤시간에 얻은 확인건판들 사이에 어떤 척도의 변화가 없다고 가정할 수 있었다면, 같은 열대 조건속에서 기온차가 역시 거의 없는 소브랄에서도 같은 방식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알려진 천문학적효과에의한 척도변화를 계산하고, 이 변화를 일식건판과 비교건판들사이의 별위치의 차에 적용시켰다. 그 결과는 빛의 휘어짐이 1.5"보다 더 큰 값으로 에딩턴이 얻은 프린시페의 결과치와 그렇게 차이나지 않았다. 이것에 함축된 의미는,  천문사진렌즈의 건판들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기기의 어떤 결함으로 인한 예기치 않은 커다란 척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다이슨과 그의 동료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주장했을 것이다. 만약 천문사진건판들 속에 있는 커다란 척도의 변화에 대한 그들의 계산이 맞다면, 그 기기는 일식 중의 온도의 변화에 의하여 배율에 심각한 변화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측정된 휘어짐 값이 뉴톤의 이론과 잘 일치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만약 기기가 단순히 촛점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문제를 일으킬 만큼의 척도의 변화는 없었고, 그렇다면 그 결과는 아윈쉬타인의 이론과 잘 부합되며, 소브랄 4인치와 프린시페 천문사진렌즈 건판들에 의해 얻어진 결과들과도 잘 들어 맞는다. 이와같이 뉴톤의 이론에 대한 지지는, 어떤 점에서는, 의도된 방식으로 움직이는 기기와 논리적으로 잘 부합되지 않는다. 논쟁의 흐름은 그리니치팀들이 최종보고서에 천문사진렌즈의 데이타를 배제하는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왕립그리니치천문대가 수행한 1979년의 재분석은 이러한 관점을 지지한다. 대장인 프란시스 그라함 스미스(Francis Graham Smith)와 앤드류 무라이(Andrew Murray)의 간청에 의해, 천문대의 위치천문학의 전문가였던 제프리 하베이(Geoffrey Harvey)와 클레멘츠(E. D. Clements)는 그 두 소브랄 기기들(천문사진렌즈기기와 4인치렌즈기기)로 취득한 1919년의 데이타를 끄집어내어 현대적인 건판측정기계를 이용하여 별들의 위치를 측정하였다. 데이타는 그 후 무라이가 만든 위치천문학용 데이타처리 소프트웨어에 의하여 분석되었다. 여기서 보여주는 밑의 표는 하베이의 결과와 1919년팀의 원래결과를 비교해 놓은 것이다. (모든 양은 "(arcsecond)단위이다.) 

 

















데이타의 비교
기기 1919 결과 1979 결과
4인치렌즈 1.98” ± 0.18” 1.90” ± 0.11”
천문사진용렌즈 0.93” 1.55” ± 0.34”
                     

다이슨의 천문사진용렌즈데이타에 대한 다른 대체결과치가 1.52"(주어진 오차범위없이)였던 것을 상기하자.

 

4인치렌즈기기의 결과는 원래 측정치와 훨씬 잘 맞아 떨어진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천문사진렌즈의 1979년 결과와 1919년의 다이슨과 크롬메린의 대체결과치가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이다. 비록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재분석은 소브랄의 천문사진렌즈의 데이타가 가진 실제 문제점이 빛의 휘어짐에 대한 척도의 변화와는 동떨어진 1919년 당시의 미비한 측정수단 이었다는 관점을 사후 정당화 시켜주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979년의 논문은 1919년의 실험이 의심스럽다는 새롭게 부상하는 이야기에는 어떤 충격도 주지 못했다. 실상, 내가 말할 수 있는 한에서, 그 논문은 어느 누구로부터도 인용되지 못했고, 다만 예외적으로, 간단히 어렴풋한 참고문헌으로서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에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호킹은 재분석이, 1919년의 원래측정치가 그자체로서 주장했던 정밀도를 얻지 못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상기시켰다. 이것은 1979년팀의 한 멤버가 해명편지(clarification letter)를 발행하도록 재촉했다. 

 

획득한 관점

 

실험결과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정황이 모든 것이다. 빛의 휘어짐을 측정하기위한 프로페셔날 일식원정은 1973년이 마지막 이었다. 이 원정은 텍사스대학이 주도한 것으로, 아윈쉬타인의 이론을 요르단-피에르츠-브란스-딕케 스칼라-텐서이론과 비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이론들에 의한 예측치를 구별하기위해서는 1919년에 얻은 것보다 훨씬 높은 정밀도가 요구되고 있었고, 이전의 실험들에 대한 더욱 더 비판적인 평가가 조장될 것이다. 1973년 이후로, 전파천문학자들은 태양에 엄폐되는 퀘이사들에 대한 관측을 통해서 더욱 더 정밀한 측정을 수행하고 있다. 

 

비슷하게 철학자인 얼만과 길모어는 이론들이 각각의 실험들에 의해 정말로 폐지될 수 있는지 하는 인식론적인 이슈를 잡고 있다. 1919년의 측정은 홀로는 뉴톤을 뒤집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불행하게도, 에딩턴과 다이슨이 요구되는 정밀도를 측정할 능력이 단순히 없었다는 식의 편견에 의한 반복된 공격으로 인해, 더욱 더 미묘한 점들에 대한 논의가 천박해져 갔다. 그들의 결과가 뉴톤의 이론들에 부합되지 않고 아윈쉬타인의 이론에 넓게 부합된다는 그들의 주요주장은 타당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뉴톤적인 중력이론을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대체하고자하는 그들의 노력은 어떤 하나의 실험이 할 수 있는 것 만큼 중요했다. 다이슨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의 측정을 반복하려고 노심초사했고, 1922년 일식때는 척도변화에 대한 독립적인 측정치를 주기위해, 확인건판의 사용에 기반한 방법을 적용했다. 비록 릭천문대팀이 1919년의 결과에 부합하는 새로운 측정치를 제공했지만, 그들은 나쁜 날씨탓에 실패했다. 비록 그들이 빛의 휘어짐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결정짓는 말(the last word)를 주진 못했지만, 행운으로 축복받아 그 데이타들을 얻을 수 있었다. 1919년의 그 사람들에겐 엄청나게 어려운 환경밑에서 노련함과 통찰력과 정직함으로 그 어려운 실험을 수행한 것에 대한 찬사를 주어야 마땅하다. 그들의 연구는 현대물리학을 이크는 주요이론들 중의 하나로서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등장하도록하는 데 중요한 공헌이었다.

 

(다니엘 케네픽(Daniel Kennefick)은 페이이트빌에 있는 알칸사스대학의 물리학 조교수이다.)

 



    

       

       

                   




    


  • ?
    현영석 2009.04.03 05:53
    인연, 링크/연결, 하나가 됩니다, 우주안에서. 좋은 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 ?
    김영이 2009.04.03 05:53
    표태수 박사님~~~~ 하와이 가고 싶네요~ 우와~ 우리 표박사님~~ 반갑습니다~~!!
    글은 너무 머리가 아파서 못읽었고~ 그냥 표태수란 이름만 봐도 이리 반가운지요!
    하와이 소식좀 들려주세요~근데 수바루 천문대라고 하나요? 아니면 수바루 관측소라고 하나요? 아니면 수바루망원경이라고 하나요?
  • ?
    이철국 2009.04.03 05:53
    표박사님 유익한 좋은 글, 정보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 ?
    서지미 2009.04.03 05:53
    요즈음 "137억년 우주의 진화"특강을 서울에서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강의 내용중 핵심이
    아인슈타인의 등속도 기준으로 한 특수상대성이론 (1905년 )과
    가속도 기준으로 한 일반상대성이론 (1916년)이었습니다.

    위에 올린 자료에서
    두 과학자가 관측실험했던 시기가 1919년이었네요.
    상대성이론이 발표된 후 3년.
    상대성 이론이 나오고
    그것을 관측하고 검증하는 과정들이
    아주 섬세하게 나와 있네요.

    표태수박사님
    감사합니다.
    하시는 일에 건승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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