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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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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끝 - 류시화



 
여행의 끝

  
달팽이에게 길을 물어

  
다시금 나는 하루의 밤 깊은 시간으로 돌아온다.
마치 먼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나그네처럼.
또는 저녁의 강가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가
자기 움막으로 돌아온 은자처럼.
그래서 다시 내 방의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날벌레들의 소리를 듣는다.
시계바늘은 자정 너머를 가리키고
바람이 나무들을 쓸고 내려간다.
별빛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간은 덧없다.
고대 힌두의 속담에 의할 것 같으면
시간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괴물이다.
덧없는 시간 속에 내 삶은 흘러간가.
짧은 생의 많은 부분을 일상적인 일들이 차지해 버리고,
뚜렷이 비극적인 사건이 있거나 크게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때로 걷잡을 수 없는 삶의 허무함이 나를 엄습한다.
저 바람처럼. 짐승들은 밖의 것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과연 삶의 무엇이 우리를 지치게 하는가?
그것은 삶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고(苦),
저 고타마 싯달타가 알아차렸던 '두카'인가?
허무함 또는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사람됨의 부조리?
시간의 되돌릴 수 없음?
아니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더러운 요소들,
이를테면 잘난 체하는 정치인들 내지는 우리들 머리 속의
정치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함정은 도처에 있다.
우리를 지쳐 쓰러지게 하는 것들.
그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삶의 길을 떠났던 한 여행자들을 나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내면의 길'이라고 불렀다.
지도조차 없는 여행.
니르바나로의 여행.
나는 강과 산을 건너 그를 따랐다.
한동안 내 삶이 그렇게 흘러갔다.
강을 만나면 강가를 걸었고, 숲을 만나면
그 나무 아래서 잠들었다.
병들면 아파했고,
기차가 쉬는 낯선 곳에 무작정 내려서
먼 들판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그 여행자가 곧 나 자신임을 알았다.
내 안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뉴욕에서 만났던 흑인 거지가 있었다.
봄비가 내리던 사월의 어느날
나는 비를 피하기 위해 건물 밑에 서 있다가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뉴욕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여행자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그 흑인 거지가 어개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세상 사람 모구다 여행자 아닌가?
너는 너만이 여행자라고 생각하나?"
"You are right!"
그렇다 흑인 거지여,
너의 말이 옳다.
세상에 여행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뉴욕 할렘가 근처 공터에
버려진 부서진 차를 집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집'에 초대받아 간
나는 영국제 골동품 커피 믹서기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그것이 그의 것이냐 물었다.
그는 다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겠는가?"
"You are right!"
그렇다. 흑인 현자여,
아무것도 소유한 적이 없는 너의 말이 옳다.
세상에 나의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모두가 여행자인 것을.
뉴욕에 있다가 나는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며칠 동안 로스엔젤레스에 머물렀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갑자기 막막해졌다.
차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다.
돌아오기 전에 나는 할리우드 근처의
'보리수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네델란드에서 온 히피 여행자를 만났다.
대화를 나누다가 마음이 통한 우리는
함께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운좋게도 그는 렌터카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두 달 동안 아리조나에서
멀리 캐나다 국경에 이르는 해변을
여행하면서 온갖 명상센터들을 여행했다.
도중에 우리는 <성자가 된 청소부>의 저자인
침묵의 성자 바바 하리 다스를 만나기도 했다.
그의 눈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인도에서는 갑자기 막막해져서 쓰러졌었다.
먹지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
정거장에서 만난 한 인도인이
나를 뉴델리의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으며,
호텔에서는 침대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티벳에 대한 어떤 것'이 내 머리를 영감처럼 스쳤다.
그래서 나는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이 호텔에 티벳 사람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티벳 소년이 한 명 보이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티벳 소년이 나흘 동안 나를 보살펴 주었다.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 티벳사람 소년만큼
순수하고 순진무구한 영혼을 알지 못한다.
그는 영어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티벳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티벳어로,
나는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었다.
아아,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
서로 그렇게 얘기를 나누었던가.
우리는 언어를 초월해서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서로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그것이 나에게는
최초의 내 영혼을 '느낀'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회복하여 그 호텔을 떠날 때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두세마디 작별의 말을 나누는 것말고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세발택시를 타고 멀어져가는 내 등 뒤에서
그는 오랫동안 서 있었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적어도 이 생에서는.
그 다음 생에 대해서야 우리가 무엇을 알겠는가마는...
나는 아직도 그의 눈을 잊지 못한다.
아무런 욕망에도 때묻지 않은 그 눈,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눈을 통해 신이 나를
들여다보는 듯하던 그 눈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 티벳 소년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뉴델리 호텔에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꿈이 아니라면 죽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꿈이라면 죽음은 곧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리라.
그렇게 내 삶이 흘러갔다. 정처없이.
다시 말하건대 이곳 저곳 정처없이
떠돌아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삶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길을 잃을 때면
달팽이의 뿔이 길을 가르쳐 주었네
때로는 빗방울이
때로는 나무 위의 낯선 새가
모두가 스승이었다.
달팽이의 뿔이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나는 먼 나라 인도에도 다녀오고
그곳에서 거지와 도둑과 수도승들이
또 내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병들어 갠지스 강가에 쓰러졌을 때
뱀 부리는 마술사가
내게 독을 먹여
삶이 한 폭의 환상임을 보여 주었다
그 이후 나는 영원히 입맛을 잃었다
...........<달팽이에게 길을 물어>
  
그렇다. 길을 잃을 때면
달팽이의 뿔이 길을 가르쳐 주었다.
때로는 낯선 새가 나무 위에서 방향을 일러 주었다.
그것은 목적없는 여행, 무목(無目)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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