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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십만원이라는 돈보다 열흘이라는 시간이 더 비싼거야. 내 생애에 최고로 비싼 선물이네?



글, 사진 : [razemind]님(양해를 구하고 퍼왔습니다.)

출처 : Raysoda





자신의 생애 첫 취업면접시험을 하루 앞둔 두근두근한 저녁.
제 여자친구였던 누나가 제게 한 말입니다.


"누나. 빨리 졸업하고 취업해서 나 먹여살려라. 난 학교나 할랑할랑 다니고. 멋지지 않아?"
퍽. - 또 맞았습니다. 말이 필요없습니다.

제가 입학하기 전에 일년간 휴학을 했었다던 누나는.
아직 삼학년입니다. 누나 친구들은 다 사학년이었죠.
누나 친구들은 취업이다 뭐다 정신없지만.
누나는 한가했습니다. 아직 일년 남았었으니까요. (사실은 성격이 한가한거였는지도 모르겠어요.하하.)

어느날 뜬금없이. 교수님이 누나에게 좋은 취업자리를 소개해주셨습니다.
뭐 누나가 공부를 잘한것도 아니었고. 학교에 버스를 사준 적도 없는데. 그렇다고 사학년 졸업반도 아니고.
어쨌든 미스테리였습니다.

소개받은 취업자리는 전공도 살리고 학교도 다니면서도 일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좋은 자리였죠.
차라리 누나를 밀어내고 제가 가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면접시험을 보아야 한답니다.
기간은 보름정도 남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다이어트 좀 할 시간은 있을테니까요. 훗훗.

평소 깔끔한(?) 성격답게 정장한벌 없던 누나는 급해졌습니다.
집에다 SOS를 치더군요. 정장한벌 사게 돈좀주세요. 하고.
누나를 만나면서 그렇게 비굴하게 전화하는건 처음 봤습니다. 재밌었어요.

오십만원이라는 큰 돈이 누나에게 보내졌습니다. 첫 정장. 첫 면접. 신경 좀 써야죠.

"정장 쫙 입어주고 면접봐주면 한방에 합격일꺼야. 내가 옷걸이가 되잖니."
"누나는 옷걸이가 아니라 행거겠지. 누나 몸매가 평범한건 아니잖우."
"얼굴에 대패질 좀 해줄까. 달걀귀신 되볼래."
누나는 기분이 두근두근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덜렁쟁이 누나는 끝내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룰루랄라 정장사러 백화점가다가 지갑을 잃어버렸거든요.

자취하는 사람에게 오십만원이면 두세달치 생활비입니다. 정말 큰 돈.
정장은 친구에게 어찌저찌 빌리기로 했지만.
한껏 우울해진 누나의 마음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어요.


마음이 급했습니다. 열흘 좀 넘게 남았었어요.
아르바이트를 찾아나섰습니다.
어찌어찌 새벽수산시장에서 일할수 있게 됐어요.
아는 분 가게였는데. 떼쓰다시피 해서 억지로 일하게 된거였습니다. 그래서 시급은 얼마 안됐지만요.
시급 이천백원. 하루에 열두시간씩. 밤열시부터 아침열시까지.열흘간 하기로 했어요.

누나에겐 거짓말을 했습니다.
"누나. 나 시골에 일이 좀 있어서. 한 열흘은 보기 힘들꺼야. 면접준비 잘 하구 있어."

열흘은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밤새 배에서 생선을 내리고. 정리도 하고. 경매준비도 하고.
경매준비가 끝나면 담배 한대 피우는게 유일한 휴식이었었죠.
그나마 담배만 물면 뭔가 일이 생겨서.
손톱밑엔 언제나 생선 비늘이 가득하고 몸에선 생선비린내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열흘째를 맞았습니다. 돈을 받았어요. 이십오만이천원.


내일은 누나의 첫 면접시험 날입니다.
마지막 퇴근을 하던 아침. 곧장 누나를 시내로 불러냈습니다.

이십오만원으로는 백화점은 갈수가 없어요. 여자 정장 사러 가보신 남자분은 알겠죠.
말없이 누나 손목을 쥐고 대학가 보세 옷가게로 달렸습니다.

"누나. 골라. 젤 이쁜걸루."
"너 엄마 카드 또 훔쳐왔냐."
"내가 고삐리냐. 아픈기억은 잊자. 빨리 골라봐."
엄마 카드는 두번밖에 안 훔쳤습니다. 그것두 다 갚아드렸습니다. 철없는 어린시절 이야기지요.

이십만원짜리 정장과 오만원짜리 구두를 곱게 싼 봉투를 칠렐레팔렐레 흔들며 누나의 자취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옷값 대신이라며 누나가 차려온 밥상에 마주 앉았습니다.
"바른대로 말해봐. 무슨 돈으로 사준거야? 그러구보니 너 생선비린내 난다. 횟집에서 술먹고 싸웠냐."
"내가 쌈닭이냐. 실은. 그게..."

누나의 눈이 벌개지고 있습니다.
그러구보니 정장한벌, 구두한켤레는 제가 사주는 첫번째 선물이기도 했습니다.

"누나 오십만원 잃어버리고 너무 침울한거 같아서 볼 수가 없더라구."
훌쩍.
"좋은거 사주고 싶은데. 좀 모잘랐다. 헤헤헤. 담에 돈 좀 더 벌어서 더 좋은 거 해줄께."
훌쩍.

스윽. 누나가 눈물을 닦습니다.
"오십만원이라는 돈보다 열흘이라는 시간이 훨씬 더 비싼거야. 내 생애에 최고로 비싼 선물이네."



면접시험날 저녁. 누나의 자취방입구.
초조하게 쭈그려앉아있던 제눈에 제일 먼저 보인것은
활짝 웃으면서 두팔을 벌리고 달려오던 누나였습니다.

밤새 우느라 눈이 팅팅 부은채로 면접시험을 봤던 누나는 보란듯이 당당하게 합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우린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시간은 돈이라고 하던가요. 사랑은 돈보다도 더 비싼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사랑이 비싼게 아니라 사랑의 힘이 비싼거겠지요.



======================================================================================
아까 퇴근하다가 남자친구가 사준듯한 옷가게 쇼핑백을 꼬옥 안고 가는 여자분을 보았습니다.
아마 아주 비싼 선물이겠죠. 돈보다도 훨씬 비싼.

사진은 남포동 어느 편의점 총각.
담배피우는 모습에서 수산시장 구석진 자리에 쭈그리고 있던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 누나가 면접시험을 본 회사는.
이주던가 삼주던가 후에. 급작스레 부도가 났습니다.
누나네 교수님 말씀에는 사장이 사기를 당한 모양이었어요.
결국 제 여자친구였던 누나는 첫출근 한번 못해봤습니다.

언제나 따뜻한 말 해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해요.
  • ?
    강신철 2003.07.23 09:00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도네요. 아름다운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있는가 봅니다.
  • ?
    장미란 2003.07.23 09:00
    그래서 진실은 통한다고 하나봐요. 사랑이야기는 언제들어도 짜릿한 감동이 있어요...
  • ?
    채종국 2003.07.23 09:00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그런 사랑.. 저도 하고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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