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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슈와 관련하여 - 재인용하며 가독성을 위해 몇몇 문단을 나누었음을 밝힙니다.]

참 읽기 쉽고 넉넉한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옮깁니다.
오늘 저녁은 좀더 말랑말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21세기 한국의 자연과학과 인문학


이화여자대학교 통섭원 ‘지식의 통섭을 위하여’ 심포지엄 발표문에서 발췌

홍성욱(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중략]


4. 인문학 혹은 과학에 대한 오해의 이유


 과학과 인문학의 거리가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인식은 19세기에 등장했다. 문학비평가 리비스가 스노우의 ‘두 문화와 과학혁명’을 비판함으로써 시작된 소위 ‘두 문화 논쟁’도 19세기 후반의 자연과학자 헉슬리와 인문학자 아널드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의 재판이었다.

스노우는 자신의 강연과 책에서 인문학자들이 열역학 제2법칙은 물론 뉴턴의 법칙과 같은 기본적인 자연과학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지금의 대학교육을 살펴보면 이러한 비판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인문학자들이 고등교육을 통해 과학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고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인문학자들이 과학에 대해서 접하는 통로는 대학에서의 고등 과학교육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자들은 신문에서, 잡지에서, TV에서, 영화에서, 서평을 통해, 일상의 대화에서, 대중강연에서 과학을 접한다.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채널은 정규 수업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최근연구가 보여주고 있는 새로운 사실이다. [중략]


문제는 인문학자들이 접하는 과학의 대부분이 ‘완성된’과학이라는 것이다. 교과서나 과학 대중화 프로그램들, 교양과학 서적을 통해서 접하는 과학은 이미 세상에 나온 지 오래되었고 충분한 검증을 거쳐서 과학 지식의 체계 속에 편입된 것이다.

뉴턴의 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다윈의 진화론 모두가 이러한 과학에 속한다. 이렇게 확립된 지식으로서의 과학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과학이 확실하고, 보편적이며, 논리적(알고리즘적)이고, 실험을 통해 검증되고, 과학철학에서 강조하는 합리적 방법론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막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지식에는 이러한 통상적 과학의 이미지가 잘 들어맞지 않는다.

이 단계의 과학은 불확실하고, 국소적(local)이며, 지저분하고, 실험을 통한 검증이 잘 작동하지 않으며, 과학자들은 과학철학의 교과서에 등장하는 정형화된 과학적 방법보다는 오랜 훈련을 통해 습득한 ‘동물적인’ 감각을 이용해서 과학적 발견에 한 걸음씩 접근한다.

이러한 과학자들의 국소적 실행에는 그를 둘러싼 기술적 요소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문화적인 요소들도 영향을 미친다. [중략]


따라서 인문학자들이 과학에 대해서 흔히 범하는 오류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과학의 확립된 지식체계를 대중적 통로를 통해서 접하는 보통의 인문학자들은 지금 막 생성되고 있는 과학지식도 확립된 과학지식만큼이나 확실하며, 따라서 과학의 사회적 구성과 같은 것은 도대체 말이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이다.

반면에 과학의 불확실성과 사회적 구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지금 만들어지는 과학만이 아니라 이미 잘 확립된 과학마저도 국소적이고 불확실하다고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과학의 연구 프런티어와 과학의 중심을 구별하는 것은 과학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발판이다.


그렇지만 비슷한 오류가 과학자들이 인문학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에서도 발견된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인문학자들의 연구와 인문학의 잘 확립된 지식을 구별하지 못한다.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철학, 역사, 문학비평을 하는 인문학자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시기에 자신의 분야에서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주제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 이러한 연구에는 기존의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해답을 제공하는 연구도 있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탐구하는 것도 있으며, 마치 과학에서 패러다임의 변화처럼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여는 연구도 있다.

이렇게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통찰을 제공하는 인문학의 연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정제되고 걸러져서 인문학 지식 체계로 통합되며, 이는 우리가 인문학의 고전에 대한 해석에, 인문학 교과서들에, 인문학 강의에 녹아 들어가서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을 제공한다.


[중략]


과학에서의 발견에는 과학연구의 결과가 새로운 발견이라고 ‘해석’되는 측면이 있듯이. 인문학의 해석에도 ‘발견’되는 측면이 있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인문학은 주관적이라는 이분법은 과학과 인문학의 대화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이 수행하는 작업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해석인 경우가 많다.


[중략]



6. 맺음말 : ‘통섭’ 전에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중략]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개인의 문제나 사회갈등은 과학기술은 물론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 개인과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 그리고 복잡한 사회의 작동 방식에 대한 복합적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많아졌다.

기업은 엔지니어들에게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라고 요구하며, 문과 전공자들에게는 발전하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감각을 기르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학에서 인문학을 교육하는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본질이 ‘어떻게 살것인가’ 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이는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유의미한 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역사, 철학, 윤리와 같은 인문학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불확실한 기술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과학의 성과에 대해서,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련성에 대해서, 과학적 태도와 탐구 방법의 특성에 대해서, 과학기술의 가능성과 잠재적,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를 해야 한다.
 
인문학은 가치(Value)를 다루고 과학은 사실(Fact)을 다룬다는 이분법을 고수한 상태에서는 인문학과 과학 모두 절름발이일 수 밖에 없다.


오랫동안 서로 다르고 상반되는 것이라고 간주된 한국의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소통은 ‘통섭’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접속’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접촉을 위해서는 몇 가지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는 낯선 사람들과의 대면, 혹은 낯선 문화를 가진 주민들과의 대화에 필요한 태도 이다.

여행을 가서 타인을 만났을때 직장 동료를 마주쳤을때 보다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과 흡사하다.
우선 인문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은 서로에 대해서 서로의 학문이 가치 있는 것임을 가정해야 한다. 데리다와 푸코에 대한 신문에서의 서평을 바탕으로 이들의 철학이 ‘포스트모던 쓰레기’라는 식으로 간단히 매도하는 태도는 서로의 대화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는 초끈 이론을 이해하지 못한 인문학자가 자신의 작은 경험을 확장해서 ‘과학 연구의 대부분은 과학자 개인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상대방의 분야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을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인문학자들에게 관심이 있을 만한 자신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하고, 역으로 인문학자들은 과학자들이 흥미를 끌만한 주제에 대해서 화두를 던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전공자들의 영역에 자신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성급한 기대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전공에 접근하는 것은, 다른 언어를 쓰는 다른 문화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타인의 언어를 잘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타인도 나의 언어에 대해서 생소한 심정과 심지어 경계심을 가지고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지식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해도, 상대방이 내가 설명한 내용의 미묘한 점을 이해했다고 기대하거나 나의 언어로 내게 유용한 피드백을 즉각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은 조급하다.


서로 다른 전공의 벽을 깨고 융합으로 얻어지는 창의적인 결과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일단 인문학과 과학이 다른 문화라는 점을 받아 들여야 한다. 다른 문화로 들어가는 것은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이고, 자신이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바이링구얼(Bilingual)'로 변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다른 분야와의 만남도 이와 흡사하다. 인문학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과학자들, 과학과의 소통을 주장하는 인문학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상대에게 내 지식을 가르치겠다는 교사의 태도가 아니라, 낯선 문화를 탐구하는 여행자의 태도이다.


[후략]

  • ?
    우성범 2011.05.18 01:06
    [흑백시대 가로지르기]'자연과학-인문학은 남남인가' 중에서

    홍성욱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나눠지면 인문계 쪽은 자연과학은 몰라도 된다고 하고, 이공계쪽은 인문학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홍 교수는 이런 현상은 지극히 20세기적인 것이라며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뉴턴과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영역 파괴’를 예로 들었다.

    "뉴턴은 자신을 자연과학자가 아닌 철학자로 생각했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파악하는 과정을 신의 섭리를 이해하고 이를 널리 전파하는 행위로 인식했지요."

    "괴테는 이와 반대로 시인보다 과학자로서 자부심을 지녔습니다. 그는 특히 색깔이 빛 속에 있다는 뉴턴의 광학이론을 비판한 저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어요."

    이처럼 좁았던 뉴턴과 괴테의 거리는 사회가 분업화 전문화하면서 엄청나게 벌어졌다.

    과학 용어를 이론에 적용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와 과학사회학자를 격렬하게 비판했던 미국 물리학자 앨런 소칼의 저서 ‘지적 사기’는 그런 분열증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철학자나 사회학자가 자연과학 용어를 부풀려 사용하거나 오용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자연과학자가 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채 비판하는 일도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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