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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길 동아사이언스 과학문화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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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아인슈타인이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던 그해, 조선교육협회가 아인슈타인을 초청했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고, 조선에 민립대학을 세우려고 했던 지식인들의 꿈은 무너졌다.
83년 전 있었던 아인슈타인 초청 비화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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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인슈타인 씨가 온단 말이요.”
“그렇다니까요. 여기 오늘 아침 동아일보 좀 보시오.” 중절모를 쓴 신사는 탁상 위에 신문을 올려놓더니, 손가락으로 관련 기사를 가리켰다.
‘아인슈타인 씨 11월경 방일(訪日), ‘가이조’(改造) 사의 초빙으로’.
그때 뒤에 서서 이야기를 듣던 한 젊은이가 참을 수 없었던지 뛰어 나와 신문을 집어들고는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지난 해부터 가이조 사는 사원을 백림(베를린)에 특파하여 아인슈타인 교수를 초빙하고자 교섭해 왔으며, 이번에 양자 사이에 원만히 계약이 성립되었다. 아인슈타인 교수는 9월 21일 라이프치히에서 개최되는 독일 자연학협회 창립 기념 학술강연을 마치고, 동시에 여장을 정돈하여 부인을 동반하고 백림을 출발해 일본으로 향한다. 일본에 도착하기는 아마 11월 중순일 것이며, 1개월 정도 체류할 것이다. 특별강연은 도쿄제국대학에서 있으며…, 보통강연은 도쿄, 교토, 오사카 등 이름난 대학 소재지에서 각 1회씩 개최할 터인데 누구나 들을 수 있다더라.”

숨도 돌리지 않고 거침없이 신문을 읽던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무릎 치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온 겁니다.”1922년 6월 26일 아침, 경성 수표정 42번지(현재 서울 중구 수표동 을지로3가역 근처) 조선교육협회 사무실에서 울려 퍼졌던 환호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민립대학을 세우자






















1921년 뉴욕 시민들이 미국을 처음 방문한 아인슈타인을 위해 환영행사를 벌이고 있다.
늘 인구에 회자되던 아인슈타인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사 속의 슈퍼스타처럼 느껴진다. 한국과 맺은 특별한 인연이 없고, 한국사에 미친 영향도 크지 않은 까닭이다. 그저 과학을 전공했거나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좋아할 따름이다. 그러나 잊혀졌을 뿐, 아인슈타인은 우리 역사 속에 한 페이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83년 전 조선교육협회가 아인슈타인을 초빙하면서, 그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변수가 됐던 것이다.

조선교육협회(또는 조선교육회)는 3·1 운동 이후 일어난 대표적인 민족단체였다. 1920년 6월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낸 월남 이상재, 대한제국 참정대신으로 제2차 한일협약(일명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했던 강석 한규설과 같은 원로들이 앞장서고, 동아일보 초대 주필이었던 설산 장덕수를 비롯해 90여 명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참여해 만들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우며 일본과 동일한 교육제도를 확립하겠다며 조선 민중을 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눈속임이요, 입발림이었다. 조선인들은 여전히 고등교육에서 차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조선교육협회가 한국인 차별교육 철폐, 학교에서의 일본어 사용 폐지, 한국사 과목 개설 등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인재 육성을 위해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 계획이 협회를 무너뜨릴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조선교육협회는 왜 민립대학 설립에 나섰을까. 그 배경을 최근 ‘한국 근대 과학기술 인력의 출현’이란 책을 펴낸 김근배 전북대 교수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1920년대 지식인들은 민립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1910년 한일 합방이후 1919년 3·1 운동 때까지 10년 동안 도쿄제국대학을 나온 조선인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겨우 와세다 대학을 나온 분들이 몇 있는 정도였죠. 조선에서의 학제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일본 유학이란 꿈꿀 수 없었습니다.” 조선에는 들어갈 대학이 없고, 그나마 일본 대학은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교육협회는 민립대학 설립안을 만들고, 아인슈타인을 초빙하고자 했다. 왜 그를 모시려 했을까. 이를 알려면 그가 당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인슈타인이 일본에 오기 1년 전의 일이다. 그는 1921년 4월 1일부터 5월 30일까지 세계 시오니스트협회장이었던 차임 바이츠만(러시아 출신 화학자로,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예루살렘에 유대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힘든 여정에다 ‘상품으로 나온 황소’가 된 기분까지 겹쳤지만, 동포를 위해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일념으로 참아냈다. 그는 미국 방문에서 모두 75만달러를 모금했다.

“재능 있는 많은 유대인 자손들이 고등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습니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곧 조선교육협회 회원들이 가슴에 묻고 있던 한 맺힌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조선교육협회는 아인슈타인이 모금을 통해 자신의 동족에게 대학을 설립해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가 지구 반대쪽에 있는 일본을 방문하는 것도 대학 설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최고의 스타






















아인슈타인이 모금 운동을 벌여 예루살렘에 세운 히브루대.
아인슈타인은 1920년대 최고의 스타였다. 그가 언제부터 조선에 알려졌는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에는 이듬해 5월 19일자 3면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첫 기사의 제목이 “회생하려는 유태족(유대인)이 성지에 대학을 설립”이었다.

내용은 이렇다. “상대성 이론을 만든 아인슈타인 박사와 강렬한 폭약을 발명한 바이츠만 박사가 예수가 탄생한 성지 팔레스타인을 다시 유대 사람의 손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번에 예루살렘에 설립한 유대 대학의 자본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미국에 왔다. 유대 대학이 세워질 위치는 예수가 산상복음을 전한 감람산으로, 1914년에 사서 1918년에 상량식을 행하였다. 학교 건물은 어느 정도 완성되고 도서관에는 3만 권의 서적을 장만하였다. 그러나 아직 자본이 충분하지 못해 기부금을 모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학이 완성되면 동서양에 유력한 대학이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을 처음 소개한 이 기사야말로 조선교육협회 회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협회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민립대학 설립금 모집 아이디어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1922년은 아인슈타인에게는 영광의 해요, 조선 민중에게는 아인슈타인을 이해하는 해가 됐다. 그해 1월 1일 동아일보는 ‘세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10명’을 뽑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다. 동아일보는 그에 대해 “늬우톤(뉴턴)의 인력설을 파하고 과학계에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치사했다. 이어 2월 23일부터 3월 3일까지 7회에 걸쳐 1면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연재했다. 글을 쓴 이는 객원기자였던 공민(公民) 나경석이었다.
공민은 아인슈타인을 ‘세계의 3대 괴물’ 중 하나로 소개했고, 이어 천문학의 혁명, 에텔(에테르) 부인설, 철학상 의의, 최대속도, 시간과 공간의 관념 등 5개 영역을 나누어 그의 상대성 이론을 쉽게 짚어냈다.

아인슈타인이 일본에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잔뜩 부풀어 있을 때, 동아일보는 11월 4일 ‘아인슈타인 씨 일본 도착 기일’을 보도한다. 이때부터 조선교육협회는 바빠졌다. 아인슈타인을 초빙하기 위해서였다. 11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상대성 박사를 초청-조선교육협회 주최로’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보도했다.

“‘이 세상에는 무엇이든지 절대는 없다. 일월성신(日月星辰) 등의 천문에 관한 일을 위시하여 우주의 모든 현상은 모두 상대적 이치로 되어 있다’는 이치를 발견하여 과학으로는 물리학의 원리와 법칙을 뒤집어엎는 동시에 철학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한 유명한 유대인 학자 아인슈타인 박사가 방금 일본에 온 것을 기회로 하여 경성에 있는 조선교육협회에서는 이 세계적인 학자를 조선에 소개하는 것이 우리 학계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오늘 오전 10시 남행열차로 강인택 씨를 파견하여 박사를 청하여 오리라더라.”
같은 날 아인슈타인은 1921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결정됐고, 그 내용은 3일 뒤인 11월 13일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






















일본과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아인슈타인이 1923년 7월 뒤늦게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노벨상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1922년 10월 8일 기타노마루 호를 타고 마르세이유 항을 출발했다. 그리고 11월 13일 상하이를 거쳐 11월 17일 오후 4시 고베 항에 들어섰다. 40일에 이르는 긴 항로였다. 고베 항에 들어설 때 이미 그에게는 상대성 박사라는 타이틀 외에 노벨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이 하나 더 달렸다.

동아일보는 다음날 ‘상대성 박사 17일 도착’이란 제목으로 아인슈타인 박사 부부가 고베 항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20일까지 3회에 걸쳐 ‘아인슈타인은 누구인가’라는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글을 쓴 이는 베를린에 머물고 있던 황진남 씨였다. 재미교포였던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도산 안창호와 함께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분이다.

황진남 씨는 아인슈타인이 동아시아를 여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대성 이론과 아인슈타인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아일보에 원고를 보냈다. 그는 글을 쓰며 5년 전 취리히 대학에서 공부할 때 아인슈타인을 잘 모른다고 했다가 한 여학생으로부터 수모를 당했던 이야기, 그리고 한국인 최초로 독일에서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중세 씨의 소개로 그해 2월 독일 과학아카데미에 참석해 아인슈타인을 만났던 이야기 등을 전했다. 동아일보가 이처럼 아인슈타인에 대해 크게 보도한 것은 그에 대한 관심이 일본 열도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뜨거웠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만들어진 것은 11월 23일로, 동아일보가 아인슈타인 특집기사를 게재하던 즈음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일본행은 처음이자 마지막 아시아 여행이었다. 그를 유럽의 반대쪽 일본에까지 끌어들인 사람은 ‘가이조’라는 잡지를 출판하는 야마모토 사네히코였다. 정부도 아닌 작은 신생 출판사의 사장이 엄청난 돈을 써서 아인슈타인이라는 슈퍼스타를 초청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아인슈타인은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11월 19일 게이오 대학을 시작으로 43일간의 일본 학술 강연 여행에 나섰다. 도쿄, 센다이, 닛코, 나고야, 교토, 오사카, 고베, 나라, 미야지마 등에서 대중 강연도 실시했다. 그런데 11월 20일까지 그토록 요란했던 동아일보 기사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아인슈타인이 12월 29일 규슈의 모지 항을 떠나면서 일본 방문을 마칠 때까지 ‘상대성 첫 강연’(11월 21일), ‘아 박사의 그후 활동’(12월 13일), ‘아 박사 귀국시기’(12월 14일) 등 단 3건의 단신만 게재됐을 뿐이었다. 남의 잔치에 숟가락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동아일보가 깨달았던 게 분명하다. 아니면 일본으로 건너간 강인택 씨가 아인슈타인 초청은 불가능하다는 일이라고 전했을지도 모른다.

조선의 초청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이 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일본 긴키대학의 스기모토 겐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가이조 사는 아인슈타인을 초빙하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돈을 줬습니다. 하지만 조선에는 그만한 돈이 없었을 것입니다.”겐지 교수는 아인슈타인 전기 작가로 유명하며, 240 조각으로 나뉜 아인슈타인 뇌의 일부를 보관하고 있기도 하다.


무너진 꿈






















1922년 12월 25일 일본 기타큐슈의 교회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모임에 참석한 아인슈타인이 바쁜 일정으로 피곤했음에도 어린이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조선인들이 민립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꿈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일제는 겉으로 문화정책을 편다면서도 속으로는 조선인들이 대학을 설립해 그들에 의한 교육이 이뤄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일제의 방해 공작은 노골적이었다. 우선 조선교육협회에 대한 인가를 내주기까지 거의 1년 반을 끌었다. 그리고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경성제국대학 설립안을 만들어 1924년 5월 지금의 서울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자리에 문을 열었다. 이른바 물타기였는데, 그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아인슈타인을 초청하기 위해 일본을 다녀온 강인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에게 터럭만치라도 권리가 있다 하면 벌써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다. 온갖 방해공작에 나선 일제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려는 지방 유지들을 회유해, 오히려 총독부가 주도하는 교육운동에 돈을 내도록 했다. 또한 조선교육협회 지식인들을 협박해 내선융화운동에 협조하게 만들었다.

결국 전국 조직을 갖추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펼쳤던 조선교육협회는 점차 유명무실해지더니 1927년 신간회가 생기자 해체되고 말았다. 물론 아인슈타인을 초청해 민립대학 설립 자금을 모으겠다는 계획도 역사 속에 묻혔다.


- 자료출처 과학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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