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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선생님께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강연내용 전문을 보내주셨습니다.김용규선생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새삼스레 왜 다시 신인가?


 


 


안녕하세요? 김용규입니다. 우선 오늘 이렇게 귀한 자리에 저를 불러주신 박용태 PD님과 추운 날씨에도 참석해주신 백북스 회원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인간이 신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을 통해서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통해서이지요. 어느 종교에서든 신을 신앙의 언어로 이해하고 설명하면 무척 은혜롭지만 자폐적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신앙공동체 안의 사람들에게는 은혜롭지만 그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을 준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이성의 언어로 신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설득적이지만 은혜롭지는 못합니다.


제 책은 후자를 취했는데요, 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책의 성격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제 책이 은혜롭기보다는 설득적이기 위해 애썼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당연히 책과 연관한 오늘 저녁 강연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때문에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신앙 안에서 드러나는 신의 모습, 즉 신의 은혜로운 모습에 대해 듣기를 기대하시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이 계신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물론 언젠가 여러분들께 신의 은혜로운 모습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주어지길 바라는 마음은 간절합니다.


 


 


1


 


저는 우리의 이야기를 1882년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1844~1900)는 그의 《즐거운 학문》에서 역사상 유래 없는 열광적인 문체로 신의 죽음을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당신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해범이다!”라고 아주 비장하지만 무척 당당하게 외쳤지요. 그것은 16, 17세기에 과학혁명과 18세기에 시민혁명, 그리고 19세기에 산업혁명을 이뤄낸 당시 서구의 시대상을 대변하는 선언이자 상징이었습니다. 당시에 이 같은 풍조가 만연했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니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던 영국의 문인이자 실증주의자인 모티머 콜린스(M. Colince)는 신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생명과 우주는 자발성을 보여 주노니,


신이라는 헛소리는 이제 사라져다오!


교회와 교리는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나니,


진리는 실증주의자에게서 찾아야한다.


콩트, 헉슬리, 틴들, 몰리, 해리슨


실증주의의 지혜로운 스승들이여,


이 빛나는 전사들의 명단에


그 누가 감히 끼어들쏘냐?


 


그랬습니다. 바로 이 같은 생각들이 서양문명에서 신을 몰아냈지요. 그리고 그 자리에는 계몽주의, 과학주의, 실증주의를 내세운 인간의 이성을 올려 앉혔습니다. 그러고도 이제 100 여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가 왜 새삼스레 다시 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걸까요? 바로 이것이 오늘 밤 제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성급한 것 같지만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신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이미 보편화된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지름길일 뿐 아니라, 우리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들―즉,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등―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사실상 신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문제, 특히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각종 위험에 관한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철학자의 임무란 본디 삶과 세계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저도 오늘 밤 여러분들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한 가지 제 나름의 관점을 전하고 싶은데요, 그것은 인간은 신이 없이는 필연적으로 난관과 파국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지금 이 말을 듣고 여러분들 가운데서는 “아니, 철학자라는 사람이 무슨 길거리의 예수쟁이들이나 하는 말을 하는가? 저 사람이 지금 기독교를 선교하려고 하는가?”라고 의아해 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요, 그런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제 차츰 드러나겠습니다만, 제가 오늘 밤 언급하는 ‘신’이라는 말은 ‘가치’, 곧 진리, 선함, 아름다움, 생명, 정의, 위대함 등과 같이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들의 정점(頂點)’으로 규정하고자 합니다. 이유는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신학과 서양문명 안에 신을 그렇게 규정해온 전통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려는 가치의 위기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오늘밤 여러분들에게 예컨대 “신이 인간을 구원한다.”라고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은 “진리, 선함, 아름다움, 생명, 정의, 위대함 등과 같은 가치들이 인간을 구원한다.”라고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전에 제가 한 말―곧, 인간은 신이 없이는 필연적으로 난관과 파국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도 인간은 이 같이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가치’들을 배제하고는 필연적으로 난관과 파국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며, 지금 우리가 바로 난관과 파국에 봉착했다는 뜻인데요. 그것이 정말인지 지금부터 알아볼 겁니다. 우선 신을 죽인 인간, 다시 말해 신과의 유대를 끊어버린 근대적 인간이 그 후 어떻게 되었나를 볼까요? 그 지긋지긋한 신의 억압에게서 해방된 후 한껏 자유를 누렸을까요? 과학주의, 계몽주의, 실증주의와 함께 마냥 행복해졌을까요?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세요?


그래요, 근대적 이성에 긍적적인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무한한 풍요’, ‘무제한적 자유’, ‘무차별적 평등’을 약속했던 계몽적 이성과 함께 인류는 확실히 이전보다 자연을 더 잘 다스리게 되었고,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그리고 물질적으로는’ 전보다 더 풍요로운 사회에 도달했습니다. 또한 보기에 따라서는 전보다는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세계에 확산시켰지요. 그렇다고 해서 근대인들이,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이성을 통해 전보다 더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나요?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세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잠시 돌이켜 보면, 니체가 세상을 뜰 때 즈음, 그러니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구 사람들은 ‘이성의 완전성’과 ‘계몽에 대한 기대’, ‘과학에 대한 신뢰감’,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이루어질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에 한껏 들떴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1904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 자유사상가 대회>에서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헤켈, 영국의 사회학자 홉하우스, 노먼 에인젤같이 당시 서구를 대표하던 지성인들은 인간의 정신이 새로운 단계로 진화했고, 이로써 인간의 미래가 이미 이성의 통제 아래 들어갔기 때문에 앞으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이기도 했던 자유․평등․박애, 그리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유토피아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사라예보 사건이 나고, 세계 제1차 대전이 터져 군인 사상자만 3,500만 명에 이르렀지요. 아시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은 더 참혹 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로 상징되는 제노사이드, 즉 민간인 집단학살의 현장들은 인간의 이성이 가진 칠흑 같은 어둠을 여실히 증명했습니다. 진화된 정신, 계몽된 이성을 내세워 과거 어느 세기보다 더 인간성의 승리를 외쳐댔던 20세기에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야만적인 집단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진정 궁금한 것은 도대체 사람의 가죽을 벗겨 구두를, 체지방으로 비누를, 머리털로 담요를 만드는 야만적 광기가 계몽적 이성이 지배하는 20세기 문명국가에서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겁니다.


이에 대한 그 해답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20세기 후반에 소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낱낱이 파헤쳐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그 보다 거의 100년이나 전에 니체가 이미 그 해답을 분명히 제시했지요. 어떤 의미에서든 니체는 번뜩이는 예지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의 죽음을 선포한 바로 그 자리에서 신을 죽인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들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우리가 거대한 바다를 마셔 말라버리게 할 수 있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가없는 수평선을 지워버릴 수 있는 지우개를 주었을까?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풀어놓았을 때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이제 지구는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위와 아래가 있는 것일까?


무한한 허무를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허공이 우리에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밤과 밤이 연이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낮에도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니체가 옳았습니다. 신을 죽인 후, 인간에게는 확실히 허공이 한숨을 내쉬었고, 한파가 몰아닥쳤지요. 밤과 밤이 연이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대낮에도 등불을 켜야만 했지요. 바로 이것이 답입니다! 신을 죽인 인간, 다시 말해 인류 보편적 가치를 상실한 인간은 마치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지구처럼 방향을 잃고,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추락하며, 무한한 허무와 어둠 속을 해맬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요지입니다.


근래에는 ‘인종청소’라는 말도 사용합니다만, 제노사이드는 그들이 잘못을 했든 안했든 간에, 단지 그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민간인들을 무조건 살해하는 대량 집단학살을 말하지요. 혁명기의 러시아나 2차 대전 중 나치점령지에서는 거의 일천만 명에 달하는 제노사이드가 각각 행해졌습니다.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제3의 침팬지》에 의하면, 20세기 안에 벌어진 제노사이드 가운데 백만 명이 넘는 규모만도 열 건 가깝습니다.


1915년 아르메니아에서, 1941년부터 발칸반도에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북 수단에서, 1971에서 1979년까지 우간다에서, 1960년대부터 부룬디, 르완다 등에서,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그리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에서, 1971년 방글라데시에서, 1975년부터 1979까지 캄보디아에서 수십만 또는 수백만씩 양민들이 집단적으로 학살되었습니다. 또 1990년대에 발칸반도에서는 어땠나요?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다 지나간 일이 아닌가? 그 케케묵은 옛 이야기는 왜 다시 꺼내는가? 우리는 이미 21세기 탈근대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는 이미 각성했고 그 같은 비이성적 폭력은 충분히 경계하고 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정말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인류가 진화했고 사회가 진보했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21세기 벽두에 일어난 9.11테러와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침공이 그 좋은 반증이지요.


오늘 저는 이 강연에서 폴란드 출신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 Baumann)의 말을 자주 인용할 건데요, 그것은 제가 90살이 다 되어가는 이 노학자의 현실인식에 크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우만에 의하면, 지금도 인류는― 아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역시―언제든지 다시 아우슈비츠와 굴락 수용소에서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 적당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기꺼이 그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는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언제든 우리의 머리 위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도 있는 자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것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존재들이지요. 제 생각에는 근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해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들에도 그 불안한 씨앗은 은폐되어 있습니다. 아닌가요?


그래요. 설사, 백번 양보해서 아우슈비츠, 굴락, 히로시마에서와 같은 참혹한 일이 우리 세대에, 우리에게는 다시 일어나지 않다고 가정하지요. 또 한걸음 더 나아가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해전’도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6.25 때처럼 전면전이나 민간인 집단학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도 가정합시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들은 어떠세요? 모두 안녕들 하신가요? 행복하세요? 또 지금 살고 있는 우리사회가 과연 근대인들이 꿈꾸던 자유․평등․박애, 그리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유토피아인가요? 아니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 같은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부분 사람들의 대답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절망스럽고 공포스럽기도 하지요.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또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악하고 공격적인 것이 어디 어제 오늘 일인가? 고대나 중세 문명에서도 끔찍한 참사는 숱하게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 그때보다 더 절망스럽고 공포스럽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설사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제 세계가 변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은 지난 300년 동안 바로 우리가 세계를 그렇게 절망스럽고 공포스럽게 만들었지요.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이 경고한대로, 세계는 이제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사회적 재난들이 삽시간에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위험사회’로 진입했습니다. ‘문명의 자기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 사회에서는 개별적이고 국지적인 위험이 국민국가적 차원에서는 극복될 수 없는 전지구적 재앙으로 곧바로 확산되지요. 벡은 1986년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를 예로 들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험은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심각합니다.


설령 여러분이나 제가 아직은 직접 경험하지 못했을지라도, 우리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직장을 없애고, 생명마저 위협하는 경제위기, 자연재해, 환경오염, 전쟁과 테러가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다가오고 있지요. 예컨대 2001년에 일어난 9.11테러, 2004년 발생한 인도네시아 쓰나미, 2008년에 뉴욕의 월가로부터 시작한 세계 금융대란, 그리고 2009년에 세계를 휩쓴 신종인플루엔자의 확산, 또 2010년에 일어난 멕시코만 원유유출사고 등이 잘 알려진 예입니다. 언젠가는 최악의 경우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테러나 전쟁이 일어나거나, 조류독감(AI)의 맹렬한 독성과 신종플루(SI)의 통제하기 어려운 감염성을 동시에 가진 새로운 바이러스가 우리를 공격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인류는 회복하기 어려운 파국에 당면할지도 모릅니다. 아닌가요?


무한성장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자연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것이 지구 온난화에 의한 각종 재난을 통해 뚜렷이 밝혀졌습니다. 파괴된 자연 속에서는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은 통제하기 어려운 질병들이 이미 범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데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식품조차 없다는 데에서 여실히 체험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해에도 구제역과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의해 이미 수백만 마리의 가축들을 매몰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온 나라에서 생명들이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정부는 지하수와 농작물 오염 같은 2차 감염을 우려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정보공학기술, 생명공학기술 같은 과학기술의 진보가 더 나은 삶을 약속하고 있지만, 그로 인한 문화의 하향평준화, 인간 존엄성의 파괴, ‘통제하기 어려운 전염병들’을 일으키는 ‘수평적 유전자전이(horizontal gene transfer)’, 그리고 정치적 열광주의 내지 전체주의의 위험이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것도 이미 상식이 되었습니다. 경제적 발전은 점점 더 풍요한 나라와 부유한 국민에게 한정됨으로써,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간격이 한층 더 넓어졌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부가 증대하고 있는데도, 사회는 더욱 불안해졌다는 것, 극단적인 개인범죄의 증가뿐만 아니라, 생화학무기나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테러와 전쟁의 위험이 더욱 높아졌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제 우리의 삶과 사회에는 공포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직장에도, 거리에도, 공포가 퍼져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포는 어두운 거리에도 있고, 반대로 빛나는 텔레비전 화면 안에도 있습니다. 침실에도 있고, 부엌에도 있지요. 우리들의 일터에도 공포가 기다리고, 그곳을 오가기 위한 지하철에도 공포가 도사립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도, 우리가 소화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에도, 공포가 숨어 있습니다.”


“발전소가 폭발하고, 석유매장량이 동이 나며, 주식시장이 붕괴하고, 온갖 대기업들이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당연한 것처럼 누리던 여러 서비스가 끊기는 한편, 든든해 보이던 수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져 버리고, 제트기끼리 충돌하여, 수천 개의 화물과 수백 명의 승객들이 공중에서 쏟아지고, 시장가격이 미쳐버려 가장 귀하고 소중했던 자산들이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되어 버립니다.” 이제 세계 안에는 온갖 상상할 수 있는, 또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재난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고 있지요. 아닌가요?


인류의 종말을 알리는 ‘운명의 시계’가 점점 더 앞당겨지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명 전반에 걸친 ‘패러다임의 대전환’만이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살 길이라는 경고도 이제 나올 만큼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냉소주의에 물든 우리들은 끄떡도 하지 않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데요.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독일의 현대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 Sloterdijk)의 《냉소적 이성비판》에 의하면, 우리는 계몽되었지만 우리는 무감각해졌습니다. “아,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렇다고 어쩌겠어. 당신도 별 수 없잖아.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고 있느니 차라리 그날그날 즐기면서 살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뭐 이런 생각들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속물근성입니다. 냉소주의와 속물근성은 자주 붙어 다니지요. 계몽의 실패에서, 혁명의 실패에서, 유토피아의 실패에서 나온 이 냉소주의는 미계몽나 미신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갈 길을 잃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의 이러한 정황은 루이스 캐럴(L. Carrol, 1832~1898)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를 빌려 전하자면 대강 이렇습니다.


 


엘리스 : 토끼야, 내가 어떤 길로 가면 좋을 것인지 가르쳐 줘!


토끼 : 그것은 네가 어디에 가고 싶은지에 달려있지.


엘리스 : 난 어디에 가도 좋아.


토끼 : 그러면, 넌 어떤 길로 가도 좋아.


 


아마도 이래서, 바로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관능과 쾌락만을 탐닉하는 향락주의, 소유와 소비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 누구에게나 안락한 도피처를 제공하는 각종 상대주의, 모든 것을 시큰둥하게 만드는 냉소주의, 아니면 오히려 정 반대로, 정치․연예․스포츠․레저․종교 등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열광주의, 이들 가운데 각자의 처지나 취향에 따라 하나둘씩 골라잡고, 이것저것 번갈아 하루하루를 자위하고, 적어도 겉으로는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가야할 곳이 없는 사람은 어떤 길로 가도 좋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의 이런 모습, 곧 ‘살기 위해서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린 모습’, ‘살아가지만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잊어버린 우리의 이런 모습’은 일찍이 키르케고르가 그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하여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경우”로 규정하고, “말기 폐병환자”가 가장 위험한 상태에서 가장 기분이 좋아지고 타인에게도 건강해진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고 진단했던 바로 그 상태가 아닌가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아마 여러분들도 때때로 또는 암암리에 저와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1000년 전 중세인들이나 300년 전 근대인들보다 더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며, 냉소적입니다. 게다가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요. 그래서 누구나 이야기만하지 않을 뿐 각자 나름의 공포에 암암리에 떨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난 300년 동안 이성을 신으로 모시며, 계몽을 은총으로 믿고 살아온 21세기 우리들의 초상화이지요. 이성의 한낮은 이미 지나갔고, 황혼과 함께 공포가 스물거리며 찾아와,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 어둠을, 이 공포를 쫒아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저무는 해를 다시 중천에 띄울 수 있을까요? 누가, 무슨 수로 석양을 잘라내며, 땅거미를 지울 수 있을까요?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같은 공포, 즉 우리가 신과의 유대를 단절하고, 스스로 삶을 통제하기로 한 근대적 이성이 만들어낸 공포, 때문에 도저히 피할 수도 없으며,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공포를 ‘액체공포’ 또는 ‘유동하는 공포’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요.


“다가오는 공포, 우리의 힘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공포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의 시작은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뿌리를 잘라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당면한 위험과 공포에 대처하는 방법은 자고로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똑바로 보고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동의하세요? 그럼, 이제부터 같이 해 볼까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유익하고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2


 


제 책이 출간된 다음 받은 질문들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요, 어떤 잡지사 기자가 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책에서는 신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도 없고 언급할 수도 없는 존재라고 하셨는데, 선생님은 그 신에 대해 어떻게 800쪽이 넘는 책을 쓰셨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요? 맞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신 자체’는 초월적 존재여서 신앙의 대상일 뿐, 우리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도 없고 언급할 수도 없는 ‘불가해의 심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언급해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잘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자체’가 아니라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신학과 서양문명 안에 나타난 ‘신 개념’에 관해서는 우리가 분명히 이해하고 언급할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서 제 책에서는 신을 ‘존재로서의 신’, ‘창조주로서의 신’, ‘인격자로서의 신’, ‘유일자로서의 신’ 등으로 구분하여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만, 오늘 밤 이야기와 연관해서는 저는 신을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들의 정점(頂點)’ 또는 ‘궁극적 가치’로 규정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컨대 기독교에서 “신은 선하다”라고 할 때, ‘선하다’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우리가 “철수는 선하다”라고 했을 때와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철수가 선한 것은 우리가 ‘선에 대한 어떤 기준’을 갖고 철수의 언행을 판단한 것인데, 신은 도무지 불가해해서 그렇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기독교에서 하는 “신은 선하다”라는 말은―그것이 무엇인지 규정할 수는 없지만―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선’을 근거로 그것의 최고의 형태, 완전한 형태, 곧 ‘최고 선’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같은 방법으로 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긍정신학이라고 하는데요,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은 선하다”라는 말을 우리는 단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선의 최의 형태, 곧 ‘최고 선’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 신학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가 바로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입니다.


 


1000쯤 전에 프랑스 북부 노르만디에 있는 어느 수도원 기도실에서 한 사내가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습니다. 굻었던 무릎이 펴지질 않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고 짐작할 따름입니다. 그가 기도를 마치고 방을 나섰을 때는, 북구의 차가운 밤공기가 삽시에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정신이 번뜩 났지요. 하늘엔 별이 총총했습니다. 그는 12기둥이 떠받치는 기나긴 수도원 주랑을 지나 빠른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정원 한복판에 있는 조그만 연못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을 뿐입니다. 연못에 괴인 물 위에는 별이 떠 있었습니다.


자기 방에 들어서자 그는 벽에 걸린 십자가 밑에 다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지요.


“주여, 조그만 연못 안에 거대한 별이 들어 있듯이, 유한한 내 정신 안에 무한한 당신이 계십니다.”


짧게 기도를 마치고 일어난 그는 마침내 결심한 듯 서랍에서 날카로운 칼을 꺼내 한 손으로 힘껏 틀어쥐었습니다. 다른 손으로는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긴 머리칼을 냉큼 움켜잡은 다음, 한 뺨 가량만 남기고 삭뚝 잘랐지요. 남은 머리는 바싹 잡아당겨 끈으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필을 들고 뭔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좋은 것,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것이 존재한다.”



제 생각에는 노르만디에 위치한 베네딕트 파 소속 베크 수도원의 부원장이자 수도원학교 교장이었던 안셀무스가 1077년 출간 한 《모놀로기온》의 첫 문장은 이렇게 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쓴 계기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는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동료 수사들의 간절한 요청에 못 이겨 이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요, 매우 특이하게도 그들은 어려운 청원을 하면서도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것은 글 안에서 아무 것도 성서의 권위를 빌려 주장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명확한 논리형식과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논증, 그리고 단순한 설명을 통해 성서의 진리를 이성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너그러운(?) 단서도 덧붙였는데요, 설사 그가 거의 바보 같은 논증을 하더라도 업신여기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셀무스는 이 일이 가진 위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각에 자기가 믿는 신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파악되기에는 너무나 위대하고, 너무나 크고, 너무나 높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교황청에서는 그 같이 이성만으로 신을 설명하는 일을 엄격하게 금했지요. 그의 스승도 바로 그 문제로 징계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 일은 어찌하든 간에 신과 교회 앞에서는 죄가 되고, 사람들 앞에서는 수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요리조리 기피하고 이 핑계 저 핑계로 사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화와 같은 요청이 끊이지 않자, 그는 마침내 기도로 신에게 용서를 구한 다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기록에 보면, 죄 되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작업은 어차피 세상에 나오자마자 마치 값싼 물건이 시장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곧바로 잊혀 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도 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글을 쓰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신의 뜻은 사람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안셀무스의 글은 나오자마자 곧바로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베껴감으로써 이 책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나중에 영국 국교회의 수장인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안셀무스가 이 책의 서두에서 언급한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좋은 것,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것’은 당연히 신입니다. 이것이 그가 동료들의 요청대로 성서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이성만으로 파악한 신의 모습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은 부르기 편하게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줄여 말하기 합니다. 그러나 안셀무스 자신은 결코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더 장황하게 늘여서 신을 “최고 본질,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최고 선, 최고 위대성, 최고 미, 최고 불사성, 최고 불변성, 최고 복락, 최고 영원성, 최고 권능, 최고 일자성(一者性)”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베일’을 벗고 ‘이성이라는 거울’ 앞에 나타난 신의 모습은 바로 이렇게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정점(頂點)’, 곧 ‘최고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이성, 행복, 정의, 지혜, 진, 선, 미, 복락 등과 같은 인간적인 것도 있고, 생명, 위대성, 불사성, 불변성, 영원성, 권능, 일자성 등과 같은 신적인 것도 있지만, 어쨌든 인간이 바라고 원하는 가치들 가운데 신에게 속하지 않는 가치가 없고, 그보다 더 높은 가치도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같은 생각을 안셀무스가 홀로 창안해낸 것은 아닙니다.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를 동일시하는 사유는 일찍이 플라톤이 《국가》에서 당시 사람들이 신으로 여기던 일자(一者)를 ‘선자체’라고 규정하면서 체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신플라톤주의를 기반으로 초기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예컨대 오리게네스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교부들이 신을 ‘존재자체’, ‘진리자체’, ‘선자체’, ‘아름다움자체’라고 부름으로써 기독교 안에 정착되었지요. 그 때부터 서양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사회제도에서도, 관습에서도, 생활규범에서도, 학문에서도, 또한 문학, 미술, 조각, 건축, 음악, 공연 같은 예술에서까지 바로 이 가치들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세기에 안셀무스가 인간이 추구하는 세속적인, 그리고 신적인 가치들을 낱낱이 지적하며 그것들 모두의 정점으로 신을 명명했을 때, 바로 이러한 가치들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고, 부단히 이끌어가며, 마침내 파탄에서 구원한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가치들이 아니었으면 인간과 세계는 시작하지도 않았고, 인간과 세계로서 유지될 수도 없으며,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명시적으로 선포되었던 겁니다.


한마디로 안셀무스는 “신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라는 말을 “최고의 가치가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라는 말로 바꾸어놓은 셈인데요, 바로 이것이 서양문명의 ‘신중심주의’가 ‘가치중심주의’라는 것을 대변해 줍니다. 돌이켜보면 서양사의 위대한 순간들은 언제나 이러한 가치들이 존중받던 시대였습니다. 이 말은 조금에 언급했던 신의 죽음 이후 몰아닥친 20세기의 숱한 인간성 말살의 현장과 연관하여 떠올려 보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애석하게도 신의 죽음을 선포한 근대와 함께 서양문명은 신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역사를 맞고 있습니다. 이제 신과 그의 이름으로 추구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사회제도에서도, 관습에서도, 생활규범에서도, 학문에서도, 예술에서도 점차 분리되어 잊혀져가고 있지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서양문명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주된 원인입니다. 어디 서양문명뿐인가요? 이제 ‘가치의 위기’는 범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통념이 되었고, 이에 대한 무관심, 방기, 폄하, 비아냥거림은 하나의 지적 유행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들도 대부분 바로 여기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3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근대 이후 서양문명은 신 대신 자연과 인간에 눈을 돌려 그것들을 연구하고 표현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특히 19세기 말엽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이른바 “최고의 가치의 탈가치화”가 보다 공공연하고 철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최고의 가치들’ 대신 이성, 계몽, 과학의 발전, 사회적 진보, 민중해방, 인본주의와 같은 ‘세속적 가치’들이 등장했지요. 근대인들은 그 같은 가치들에 의해 ‘천상에서의 낙원’ 대신 ‘지상에서의 낙원’이 이뤄질 것을 진심으로 믿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대로 당시 사람들의 부풀었던 기대와는 달리 ‘최고의 가치’를 대체하고 승승장구하리라고 믿었던 ‘세속적 가치’들이 곧바로 위기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바꿔 말해 ‘최고의 가치의 탈가치화’는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의 탈가치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지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따져보면 그것은 논리적 귀결이고 돌아보면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선 논리적으로 따져 볼까요? 우리가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를 따라 신을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의 정점’이라고 규정한다면, 신을 배제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요? 한 마디로 가치를 배제한 인간, 곧 무가치한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신을 배제한 이성, 사회진보, 민중해방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무가치한 이성, 무가치한 사회진보, 무가치한 민중해방이지요. 이런 것들은 당연히 우리가 원하는 이성, 진보, 해방이 아닙니다. 학문도, 예술도 마찬가지이며, 문명 자체가 매일반입니다.


《신을 옹호하다》를 쓴 테리 이글턴도 같은 이야길 했습니다만, 예를 들어 근대 이후 우리는 중세의 신본주의(神本主義) 대신에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내세웠습니다. 따라서 이때 말하는 인본주의는 당연히 ‘무신론적 인본주의’이지만, 신이 모든 인간적 가치들의 정점이라고 한다면, 이 말은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를 배제한 인본주의는 이미 인본주의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블라드미르 레닌(V. I. Lenin)은 1920년에 행한 한 연설에서 “진실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외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내용을 불문하고 모든 지혜와 책략과 술책에 호소하고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사실을 은폐 또는 왜곡시킬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변했지요. 그렇지만 바로 이때, 그가 혁명이라는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진실왜곡, 불법, 폭력 등이 정당화 된다고 외쳤을 때, 다시 말해 그가 인민을 위한 혁명을 위해서는 인류 보편적 가치들마저 훼손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그 혁명은 더 이상 인민을 위한 혁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잉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년 동안 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최고의 가치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퇴치하고 근대 이후 활발히 전개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은 곧바로 스스로를 최고의 가치인양 정당화했습니다. 이른바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F. Lyotard)가 말하는 ‘정당화 담론’(discours de lgitimation)인데요, 근대 이후 개발된 각종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적 지식과 신념들, 예컨대 계몽주의, 과학주의, 사회다윈주의, 자본주의, 헤겔의 변증법, 역사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과 같은 한갓 ‘작은 이야기(petit rcit)’들이 진리로 정당화됨으로써 스스로 ‘큰 이야기(grands rcit)’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보편성 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각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각종 다른 영역에 침범하여 주인으로 행세하며 폭력을 행사했지요.


우리나라 속담에 無虎洞中猁作虎라는 말이 있지요?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는 승냥이가 왕노릇을 한다는 뜻인데, 그러자 세상은 더 무섭고 엉망이 되었지요, 바로 이것이 20세기 후반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신랄하게 고발한 ‘근대성(modernity)’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연출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우리는 굴뚝으로 독극물을 투입한 구소련의 굴락 수용소, 샤워실로 가스를 주입한 아우슈비츠, 민간인들의 머리 위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확인하고 전율했던 겁니다.


이후 라캉, 푸코,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들을 시작으로 리오타르, 하버마스, 로티와 같은 포스모던 철학자들이 이 무참한 야수를 해체하려고 실로 영웅적인 노력을 기우렸지만, 아직은 미완이지요. 게다가 새로운 위험들도 속속 자라고 있습니다. 근래에 유전공학, 진화생물학 등과 함께 부활하고 있는 과학주의가 ‘통섭’이라는 미명 아래 다시 큰 이야기로 등극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작은 이야기들 역시 큰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또 다시 無虎洞中猁作虎가 되어가는 추세라는 겁니다!


저는 전근대(고대와 중세)를 ‘신중심시대’, 근대를 ‘인간중심시대’, 그리고 탈근대를 ‘개인중심시대’라고 부르는데요, 21세기, 탈근대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개인의 심리, 성적 취향,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 등 탈근대적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교보문고의 인문 베스트 목록을 보면 바로 이 같은 테마를 다루는 책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마땅히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나 한 개인’의 심리나 취향이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보다 더 중요하고, ‘나 한 개인’의 존재가 우주 전체의 존재보다 덜 소중하지 않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라캉과 푸코가 충분히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 대로, 우리는 개인의 심리와 취향,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과 같은 ‘작은 이야기’들에 대해서 부지런히 이야기해야만, 신이니, 자기희생이니, 이성이니, 혁명이니 하는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들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그런 작은 이야기들만 할 뿐 ‘큰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과 영웅들의 이름으로 추구되던 최고의 가치들과 그것들을 위한 인간의 자기희생과 헌신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에서 이야기 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 그리고 그것들을 위한 인간의 연대와 협동에 대해서는 ‘근대적’이라 해서 입을 닫고 있습니다.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개인적인 것,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바로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까요? 잘 아시다시피, 오늘날 인류는 그들이 지구상에 존재한 이래 최고의 생산기술과 최상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쓴 장 지글러가 일한 ‘유엔인권위원회’나 ‘세계식량기구’와 같이 믿을만한 국제기구들의 보고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는 60억이지만 매년 120억이 먹고 남을만한 식량이 생산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세계에는 매일 10만 명 이상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고, 썩은 물과 진흙쿠키를 먹는 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5초마다 1명씩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분명 뭔가 잘 못된 것이지요?


최근에 국내에 번역된 크리스 하먼의 《21세기의 혁명》을 보면, 세계 최고의 부자 3명이 가진 부가 가난한 나라 48개국의 부와 맞먹고, 다국적 기업 200개의 매출이 세계 총 생산량의 1/4에 달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5달러짜리 백신은 그만두고 1달러짜리 모기장이 없어 한해 수백만의 아이들이 말라리아로 죽어가고, 9억에 가까운 성인들이 문맹이며, 3억이 넘는 학령기 아동들이 교육을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바로 이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만일 우리가 나 개인의 심리나 취향, 다문화적 요리와 놀이, 그리고 주거, 관광, 레저와 같은 탈근대적 이야기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닌가요?


그러다보니, 다시 말해 우리가 그렇게 살다보니, 갈 길을 잃은 것입니다. 인간의 삶과 세계의 역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주며, 삶을 위협하는 다양한 공포들로부터 방어막이 되어주던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지요. 자기희생과 헌신을 이끌어내 인간과 세계를 가치 있게 하던 신은 죽어버렸고, 인류애와 연대를 통해 사회를 진보시킬 이성과 주체도 소멸해버렸다는 말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바다를 갈랐던 모세의 지팡이는 부러졌고, 유토피아를 향해 치켜들었던 레닌의 팔은 잘려버렸습니다.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들을 한하나 차례로 몰아내고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됨으로써, 시대마다 유효했던 ‘공인된 처방’들이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새롭게 등장한 문제는 ‘개인책임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사회적․경제적 재난들이 삽시간에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위험사회’에서 이제 여러분과 나는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자’로서 모든 당혹스러운 일을 해결해야할 책임을 홀로 떠맡게 되었습니다. 신적인 사랑과 헌신도 없고, 이성적 인류애와 연대가 없는 세상에서는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만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고로 위험과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이지요. 지혜는 본디 신에 속한 것으로서 전근대적 개념이고, 신념은 원래 이성에 속한 것으로서 근대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개별적이고 상대적인 탈근대적 이야기 안에는 이 두 가지 모두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들처럼 혹은 의사 없는 환자들처럼 허둥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게 된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죽은 신을 다시 불러와야 할까요? 아니면 폭력배 같은 이성을 다시 내세워야 할까요? 약방문은 분분하지만 ‘공인된 처방’은 아직 없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도 근래 우리나라에 ‘모두스 비벤디’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그의 저서 《유동하는 시대》에서 나름의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전근대, 근대, 탈근대라는 역사적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특성을 각각 ‘사냥터지기’, ‘정원사’, ‘사냥꾼’에 비유해 설명했지요.


바우만에 의하면, 전근대는 자연이 사냥터이고, 인간이 사냥터지기로 활동했던 시기입니다. 사냥터지기의 임무는 신이 만든 사냥터를 잘 보존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근대는 인간이 정원사로 일했던 시기이지요. 정원사는 자기가 가꾸는 정원을 설계한 다음, 그에 적합한 식물들은 성장하게 하고, 적합하지 않은 잡초들은 제거하는 일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사냥꾼의 시대입니다. 사냥꾼은 하나의 ‘개인’으로서 사냥터나 동료야 어찌 되든 사냥감만 많이 잡으면 그만입니다. 그럼으로써 세계는 점점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바우만은 세계가 이처럼 지옥이 된 원인이 “정원사가 사냥꾼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간파하고, 그것을 되돌릴 것을 촉구했지요. 이것이 그가 제시한 약방문입니다. 그에 있어 유토피아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원사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시 정원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지옥을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한다는 겁니다.


제 생각에도 그의 말이 일면 옳습니다. 오늘날에도 계몽, 연대, 개혁, 혁명은 여전히 필요하고 또한 유효하지요. 그럼에도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근대를 지나며 우리는 훌륭한 정원사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적합한 식물들은 성장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잡초들은 제거하는 일에 우리는 소스라치게 폭력적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제할 믿을 만한 처방도 없이 다시 정원사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또 다른 아우슈비츠, 굴락, 히로시마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상기하기 위해 독일의 현대 시인 한스 엔첸스베르거(H. M. Enzensberger, 1929~)의 작품 하나를 볼까요? 그는 그의 시 〈대책〉에서 우리가 정원사로서 일할 때의 위험을 다음과 같이 반어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처단되면 세상은 부지런해지리.


추악한 사람들이 처단되면 세상은 아름다워지리.


멍청한 자들이 처단되면 세상은 현명해지리.


아픈 자들이 처단되면 세상은 건강해지리.


슬픈 자들이 처단되면 세상은 즐거워지리.


늙은 자들이 처단되면 세상은 젊어지리.


대항하는 자들이 처단되면 세상은 친절해지리.


악한 자들이 처단되면 세상은 선해지리.”


 


어떠세요? 두렵지 않으세요? 여러분은 자신이 언젠가는 게으르다고, 멍청하다고, 추악하다고, 아프다고, 슬프다고, 늙었다고, 대항한다고, 악하다고, 처단되지 않을까 두렵지 않은가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성적인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그런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성은 상반된 공포도 반영하지요. 어쩌면 그것이 더 심각하고, 사실상 그것이 더 심화된 반성에서 나온 공포인데요, 그것은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멍청하다고, 추악하다고, 아프다고, 슬프다고, 늙었다고, 대항한다고, 악하다고 처단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입니다. 이렇게 양날을 가진 우리의 공포를 해소시킬 ‘믿을 만한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다시 정원사로 돌아갈 수 없고, 또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가야할 새 길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우리에게 그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전망은 그리 밝지 않습니다.


 


 


4


 


여기서부터는 제 생각인데요, 우리가 당면한 이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요컨대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들도 함께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하는 ‘폭력성’도 차단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성’도 제거됩니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고 외치면서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을 종합했던 칸트를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함께 함으로써 그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또 서로 보완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이것이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닙니다. 이미 1,600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탐욕을 치료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틀의 처방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원래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하며, ‘자기 자신’과 ‘물질’을 사랑하는 것은 죄로 몰아 금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기 자신’과 ‘물질’을 향한 끈질긴 탐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기독교 교리와는 사뭇 다른 처방을 내렸지요. 그는 우리가 사랑해야할 것이 모두 네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위에 있는 신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며,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이고, 넷째는 아래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교회가 첫째인 ‘하나님 사랑’과 셋째인 ‘이웃 사랑’만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가 둘째인 ‘자기 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두 가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사랑이 모두 합해져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 안에서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줍니다.


제가 도모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모두 함께 함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온전한 담론’이 되게 하자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 뒤 따르는 문제들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곧바로 예상되는 난제가 서로 상반․대립하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한데 아우를 수 있는가, 다시 말해 파편화 된 채 서로 충돌하는 (최고의 가치)와 근대적 가치(세속적 가치), 그리고 탈근대적 가치(개인적 가치)들을 어떻게 종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일 겁니다. 그 가운데 우선 생각나는 몇 가지 테마만 예로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원성을 인정하되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보편성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개별성이 각자의 논리만을 주장하는 폐쇄성에 벗어서 통일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없을까?


바꿔 말해, 보편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주의에 빠지지 않고 다원성을 살려낼 수는 없을까?


Who's 박용태

?

산처럼 물처럼

  • ?
    김금순 2011.02.14 21:29
    공감합니다 .공부잘했읍니다 .감사합니다.
  • ?
    문병희 2011.02.14 21:29
    좋은자료 감사하고 다시한번 더 되세겨야 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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