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말마다 집을 나서는 까닭은...

by 홍종연 posted Feb 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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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기차를 탄다.
지난 해, 천안에서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새벽열차를 타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보다는 조금의 시간 여유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먹을 새도 없이 허둥지둥 집을 나선다.


열차 안에 몸을 싣고 나면,
이제부터는 온전한 내 시간이다.
동터 오는 창밖을 보다가, 책을 읽다가, 지난 강의를 뒤적이다가,
문득 생각에 빠져든다.



어제는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얼굴을 보자는데 굳이 주말이다.
강의 들으러 가야하니 도저히 안되겠다고 했더니
뒤늦게 무슨 공부를 하느냐고, 그렇게 먼 길을 가서 뜬금없이 뇌과학이라니,
배워서 뭐할거냐고 묻는다.
그러게. 나는 왜 매주 미친듯이 이 길을 달려가는가.



그러다가 가만히 머리를 매만진다.
지금 이러한 생각의 틈바구니에서, 외우려고 펼쳐둔 코돈표와 씨름하는 동안
내 시냅스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들이 잠시 상상이 된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달리고 부딪치고 있을 전기적 흐름들도 그려진다.
입력된 정보가 장기기억으로 구워지려면 유전자가 발현되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반복된 자극이 중요하다는 것.
외우기 위해 열심히 되뇌이는 동안에 내 신경세포에서도 유전자가 “ON” 되고
새로운 소극이 생겨나고 있을 거라는 상상.
통통해진 소극들이 분열하는 모습도 그려진다.



난 유난히 암기에 약하다. 거기에 덧붙여 숫자에도 약하다.
어디를 방문할 때도 번지나, 동 호수가 나의 취약점이었다.
주소를 기억하기보다 나의 몸이 그 위치를 기억하게 하는 게
더 쉬울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암기라는 부분 때문에 자연과학의 모든 영역을 다 싫어했던 것 같다.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할 때도 많았다.
암기 위주의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공연한 성토를 할 때도 있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한번에 깨어져 나간다.
그동안 내가 무엇을 놓치며 살아오고 있었는지 깊이 깨닫게 된다.
내가 왜 공부를 못했었던가 하는 원인도 알게 된다.



그렇게도 싫어했던 암기의 필요성이 절감되니까,
외우려는 노력이 힘들지가 않게 된다.
정보의 축적. 기억이 창의성을 불러온다는 말씀에 깊이 고개를 끄덕인다.
전혀, 관심도 두지 않았던 생소한 세계가 내게 불러온 변화는
내 삶의 궤적을 바꾸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이루어볼 용기도 가지지 못한 채
오랫동안 막연하게 품고만 있었던, 꿈을 향해 조심스런 한걸음을 내딛는다.
시작의 설레이는 몰입이 다시 심장을 뛰게 하고
서울로 가는 4시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한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한 순간을 이제야 만나는 분함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만나서 너무 많이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