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지상 최대의 쇼'에 닥친 재앙

by 이정원 posted Jan 03, 201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새해 첫날부터 푹 빠져있던 책은 『지상 최대의 쇼』.
2010년 1월 1일 아침으로 선택한 메뉴는 새우탕큰사발면이었다.
(떡국은 2일 아침에 맛있게 먹었다. 아내가 끓여준 떡국이 최고~^o^)
사발면을 먹으면서도 책을 놓치 못하고 200 페이지 근처의
'잃어버린 고리? 뭘 잃어버렸단 말인가" 챕터를 열심히 눈으로 쫓고 있었다.


면을 다 건져먹었을 무렵,
나의 사랑스런 지상 최대의 쇼에 닥칠 재앙을 예고하듯, 불쑥 아내의 손이 나타난다.
식탁 맞은편에서 국물 한 모금이 맛있을 것 같다며 영주 씨가 사발면을 들고 간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 영주 씨가 사발면을 다시 나한테 내미는 순간..
아뿔사, 사발면이 손에서 튕겨나온다.
사발면은 국물을 내게로 쏟아냈고,
'앗' 소리와 함께 지상 최대의 쇼 400페이지 정도의 두께가 이미 침수되었다.
지상 최대의 쇼를 만나 한차례 소용돌이를 일으킨 국물은 내 무릎으로 똑.똑. 떨어졌다.


앗! 소리와 함께 드는 생각은 '내 책~~'.
예전같으면 당장 나가서 새 책을 사왔을 법도 하지만 내가 약간 바뀐 것도 같다.
한참 시간이 지나 국물이 마른 뒤 책을 살펴보니 생각보다 많이 스며들진 않아서
그냥 볼 만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뜻밖에도.
나는 꿋꿋이 국물젖은 책장에 형광펜을 좍좍 그어가며 계속 읽어나갔다.


하루가 지난 오늘 저녁 홈플러스 서점에 들러 책을 새로 살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사지 않았다.
도킨스의 책에는 재앙인지 몰라도 나는 추억 하나를 얻었다.
국물은 추억이다.


새해 첫날 『지상 최대의 쇼』에 닥친 재앙 이야기는 여기까지.


지상 최대의 쇼를 읽으면서 '이런 책이라면 나도 번역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번역자의 블로그를 찾았다.

올해 아홉 권의 책을 번역했다는 전문번역가 김명남 님.
언젠가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 저술가의 책을 번역해 보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뛴다는 번역자,
어려울 때 굴드와 도킨스의 책을 번역하며 위안을 찾는 번역자,
폴리니의 연주를 들으며 폴리니와 도킨스에게 자신의 수명을 20년 정도 떼어주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는 번역자.

번역작업은 그가 바치는 최고의 오마쥬일 것이다.



        『지상 최대의 쇼』를 번역한 김명남 님의 블로그 中 에서





늦여름에 이 책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눴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가을을 하도 뜨겁게 불살라서인지 그게 아주 먼 옛날 같다. 올 가을이 나는 참 괴로웠는데, 굴드와 도킨스께서 나를 꽉 붙잡아주셨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두 천재에게 서비스를 마저 제공하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었으므로...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하느님은 아시겠지 - 라고 쓰려 했으나 도킨스 홍보 기간에는 나도 공식적 무신론자이므로 그냥 넘어간다. 그러나 물론 정말이고, 진심이다.

 



하루종일 폴리니의 평균율을 들었다. 내 수명에서 20년쯤 떼어서 폴리니 할아버지(!)에게 드리면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일 것이다.

물론 도킨스에게도 드리고 싶다.

 


내가 실력 변변찮은 주제에 뭉기적뭉기적 버티며 과학책 번역을 계속하는 것은, 언젠가 세계 최고 과학자/저술가들의 글을 번역해보고 싶어서다(현재의 '파트너'들도 다 멋지지만, 내 기준에 '대가' 또는 '천재'에 대한 로망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포티 님도 내 접신 요망 목록에 올라 있다. 그래, 언젠가는!

그리고 이렇게 화석들 사이를 누비고 걸어간 끝에는 올 가을 프로젝트인 굴드 님 번역이 있다. 굴드 님은 와중에 죽은 양반이라 책 수도 한정되어 있는데, 그 한 권을 작업하게 되었으니, 이 가문의 영광에는 어휘가 부족해서 감사를 다 할 수가 없다. 보고 읽는 것마다 우연스럽게 필연스럽게 한 곳으로 수렴하는 이 현상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거지 싶다. 아, 오늘 아침에 정말 엄청 행복했다는 것 아닌가.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