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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원동력, 변이











나는 이 시리즈의 첫 글에서 플라톤에 의해 ‘전형으로부터의 일탈 또는 편향’으로 취급되던 변이(variation)가 다윈을 만나 진화의 원동력으로 재조명 받게 된 경위를 설명한 바 있다. 변이는 더 이상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생명의 역사 한복판에서 변화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변이가 없으면 애당초 선택도 없다. 자연선택은 변이를 먹고 산다.

 


 














염색체에는 각각의 유전자가 앉는 자리(locus)가 있다. 인간을 포함한 많은 생물들은 각 세포 안에 한 쌍의 동일한 크기와 모양을 가진 상동염색체들을 갖고 있다. 인간은 하나의 세포 안에 모두 23쌍 즉 46개의 염색체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난자와 정자를 만들려고 감수분열을 하기 전에는 언제나 염색체를 쌍으로 갖고 있는 이배체(diploid) 생물이다. 이 때문에 각각의 유전자 자리마다 하나 또는 두 종류의 대립인자(allele)를 지닌다. 만일 두 상동염색체의 동일한 유전자 자리에 동일한 대립인자를 갖고 있으면 동형접합(homozygous) 상태라고 하고 다른 대립인자들이 앉아 있으면 이형접합(heterozygous) 상태라고 한다. 따라서 한 개체는 각 유전자 자리에 최대 두 종류의 대립인자까지 지닐 수 있지만 개체군 전체를 놓고 보면 그 한 유전자 자리에 앉을 수 있는 대립인자는 두 종류 이상일 수 있다. 한 유전자 자리에 앉을 수 있는 대립인자의 수가 많을수록 유전적 변이가 다양한 것이다. 이 같은 서로 다른 종류의 대립인자들의 총합이 바로 유전자군(gene pool)을 이룬다. 







 


 





















자, 달랑 한 문단으로 일반유전학 강의를 서둘러 마쳤으니 본격적으로 변이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하자. 이제 머지않아 저녁 TV 뉴스에서 흰 옷을 입은 천사들이 살아 있는 닭들을 땅속에 생매장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연례행사처럼 벌이고 있는 조류인플루엔자 방역에 우리 보건복지가족부는 엄청난 규모의 국고를 쏟아 붓는다. 그리곤 연신 철새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철새 도래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조류인플루엔자가 발발하고 그 지역을 찾은 철새들의 분변(糞便)에서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 그 두 사건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도 없는 상태건만 철새들은 속수무책으로 혐의를 뒤집어 쓰고 만다. 그래서 나는 몇 년 전 직접 신문에 기고할 능력이 없는 그들을 대신하여 ‘철새들을 위한 변호’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기도 했다.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철새들의 분변에서 검출되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전혀 아니다. 철새는 물론 텃새들도 수천, 수만 년 동안 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해마다 몇 마리씩은 죽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 세계에서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뿐이다. 좀처럼 엄청난 규모의 집단 죽음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닭장 속의 상황은 다르다. 한 마리만 비실거리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닭장 안의 모든 닭들이 감염될 수 있다는 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직 멀쩡해 보이는 닭들까지 몽땅 끌어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야생조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 우리가 기르는 닭들에게는 이처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일까? 이 문제의 핵심에 바로 변이의 중요성이 있다. 야생조류의 개체군은 유전적으로 다양한 개체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그들 중 한두 마리가 감염되어도 좀처럼 전체로 번지지 않는다. 그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부족한 개체들 중 일부가 죽어나갈 뿐 유전적으로 다른 대부분의 개체들은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려 죽은 개체들이 비워준 공간을 메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기르는 닭은 오랜 세월 알을 잘 낳도록 인위선택(artificial selection) 과정을 거치는 바람에 비록 유전자 복제기술에 의해 만들어지진 않았어도 거의 ‘복제닭’ 수준의 빈곤한 유전적 다양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일단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닭장 안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모든 닭들이 감염되는 건 시간 문제일 뿐이다.


 


 












우리가 지금 기르고 있는 닭은 원래 동남아시아 열대림에 서식하는 붉은 멧닭(red junglefowl)을 가축화한 것인데 이제는 더 이상 자연의 동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들은 그저 알 낳는 기계일 뿐 더 이상 자연계에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다. 알이란 우리 식탁에 올려주기 위해 닭들이 낳아주는 게 아니라 병아리, 즉 자식을 얻기 위해 낳는 것이다. 도대체 자식을 하루에 하나씩 낳는 동물이 이 세상 천지에 어디 또 있단 말인가. 닭은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괴물’이다. 그 괴물이 이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그들을 공격하던 바이러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인간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류인플루엔자를 우리가 이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사람과 동물을 모두 감염시킬 수 있는 인수(人獸) 공동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나는 조류인플루엔자에 관한 토론회에서 이 같은 생물학적 사실을 설명하고 매년 예산낭비를 되풀이할 게 아니라 기초연구를 통해 근본적인 방제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하지만 장기간의 기초연구라면 두드러기 증상을 내보이는 우리 정부 관계자들의 득달에 즉시 사용 가능한 방안을 하나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구체적인 방법은 어찌 되었든 닭장 안의 유전적 변이를 높이는 게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야생에 사는 새들처럼 닭장 안의 닭들도 유전적으로 다양한 변이를 갖게 된다면 실제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닭들만 제거하면 될 뿐 닭장을 통째로 초토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전적 변이가 개체군의 건강성을 담보한다. 섞여야 건강하다.







 


 












조류인플루엔자의 문제는 이미 벌어지기 시작했지만 조만간 머지 않은 미래에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는 또 다른 문제를 짚어보자. 유전자 과학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며 이른바 ‘맞춤 유전자’에 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질병의 위험을 미리 제거한 맞춤 난자와 맞춤 정자로 제작해낸 맞춤 아기의 탄생에 관한 뉴스가 종종 들려오고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대부분의 임산부부에게 현실로 나타나리라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지금은 초음파 사진을 보고 심장 박동소리를 듣는 게 고작이지만 그리 머지 않은 장래에는 태어날 아기의 유전자 지도 전모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스크린 가득 끝없이 반복되는 A, G, T, C 등 유전자 염기 부호들을 가리키며 의사 선생님이 말한다. “아주 예쁜 따님을 얻으셨습니다. 축하 드립니다.” 영어 알파벳으로 적혀 있는 염기의 서열이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알 길조차 없는 부모들에게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진다. “따님은 아주 건강합니다. 다만 이 부분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만…” 복잡한 염기서열의 어느 한 부분을 붉은 색으로 강조하며 의사 선생님은 말꼬리를 흐린다. “너무 걱정하실 바는 아닙니다만 따님이 중년이 되셨을 때 희귀한 유전병에 걸릴 확률이 아주 적게나마 있어 보입니다. 억지로 수치를 대라면 그저 0.02%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니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만…” 0.02%라면 1만분의 2의 확률이 아닌가? 하지만 이 순간에 통계학적 분석에 입각하여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부모가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교통사고로 또는 벼락을 맞아 죽을 확률이 더 클지 몰라도 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은 다를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붙들 마음으로 의사 선생님에게 매달릴 것이다. 제발 우리 아기를 살려달라고. “저희 병원에 따님이 갖고 계신 문제의 유전자와 치환할 수 있는 맞춤 유전자가 있긴 합니다만… 가격이 좀…” 이 순간에 돈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부모 또한 별로 없을 것이다. 빚을 내서라도 내 아기를 완벽하게 만들어주고 싶어할 것이다.


 


 












또 다른 시나리오를 가상해보자. 서울의 어느 종합병원에서 갈아 끼우기만 하면 수명을 건강하게 20년이나 연장해줄 맞춤 유전자를 개발하여 보유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고 하자. 그 병원의 홈페이지는 접수 폭주로 인해 작동이 멈출 것이고 다음날 그 병원 근처의 교통은 완전히 마비될 것이다. 가격이 좀 세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비싸다고 유전자 치환을 포기할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 건강하게 20년을 더 산다면 그 정도의 돈을 충분히 벌 수 있을 테니까. 하늘이 내린 운명을 거역하기 싫다는 식의 철학적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면 이런 유전자 치환을 거부할 까닭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지독하게 남 따라 하기 좋아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새로운 맞춤 유전자가 나올 때마다 전국민이 그걸로 갈아 끼우는 유행이 광풍처럼 몰아칠 것이다.


 


 












여기에 기막힌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문제의 소지를 갖고 있는 유전자를 기능적으로 훨씬 우수한 맞춤 유전자로 갈아 끼운 개인은 개선된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 개선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즉 개체군의 상황은 어떤가? 각 개인은 확실히 더 우수해졌는데 모두가 동일한 유전자를 지니게 되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상황이 아니던가? 예전에 비해 훨씬 알을 잘 낳는 닭, 즉 훨씬 개량된 닭들이 모여 있는 닭장과 다를 게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라. 만일 우리 국민 전원이 어떤 하나의 맞춤 유전자로 치환된 상태에서 공교롭게도 그 유전자만을 골라 공격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한반도에 상륙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닭장 전체를 순식간에 삼키듯 대한민국도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될 수 있다.


 


 












참으로 기막힌 모순이다. 유전자 치환은 개체는 보다 탁월하게 만들어줄지 모르지만 개체군은 더없이 취약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다. 자연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유전자를 섞어왔다. 유전적으로 단순한 그러나 탁월한 개체군은 환경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기간에는 성공적으로 영역을 넓혀갈 수 있다. 그러나 환경은 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해왔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개체군은 바로 유전적 변이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섞여야 건강하다.


 


 


 


관련글 :  돌연변이 맹신의 허점


 


 



 


 



  




 
 
  • ?
    이병록 2009.03.06 00:48
    닭을 개량하듯이 인간의 유전자가 개량된다는 비유는
    전혀 생각치 못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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