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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하는 ‘패러다임’은 그 의미가 아주 광범위하고 그리고 애매하다. 과학 분야에 문외한에겐 말할 것도 없이 어렵다. 사실 오늘날 패러다임이란 용어는 과학 뿐 아니라 문화 예술, 사회의 여러 현상을 아우르는 매우 다양한 문맥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쿤의 패러다임을 어떤 관점에서 끌어다 보아야 할지 난감했다. 지난 창디모임에서 읽었던 저자 홍가이의 <현대 미술·문화 평론>에서 ‘예술의 양식 혹은 전형’의 문제는 이 패러다임의 논리와 맞닿아 있어 실마리가 보일 듯도 싶었다. 그러다 1월 모임에서 김억중교수님께서 나누어주신 경험과 건축양식의 강의에서 조금씩 갈피를 잡는다.  




먼저 ‘패러다임’ 개념의 대강을 추려보면 이렇다. 쿤의 책에서 패러다임은 ‘모형’ 또는 ‘유형’, 혹은 ‘패턴’으로 달리 표현되기도 하며, 하나의 ‘표준예’로서 한 분야의 기본 법칙과 이를 적용하는 표준적 방법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한 분야의 지배적인 가치와 그 구성원 사회의 관습과 세계관을 포함한다. 이런 패러다임은 예술에서 스타일 혹은 전형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며, 한 시대, 한 집단에 고유한 문화양식이나 가치 기준, 생각의 틀을 의미한다.




‘새로운 전형은 낡은 전형과 전혀 다른 것인가?’


다시 예술의 전형 문제로 돌아가 보자. 홍가이는 과거의 문화적 패러다임이 거부되는 상황에서 태동되는 예술의 혁신적인 표현양식을 토머스 쿤과 뵐플린의 입장에 견주어 분석한다.


토머스 쿤의 입장에 따르면, 새로운 전형은 이전의 전형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물리학에서 뉴톤의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처럼 전혀 별개의 패러다임이며, 천동설과 지동설처럼 완전히 다른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다.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전혀 다른 문법과 가치 기준을 가진다. 따라서 두 전형이 한 시대에 양립하기는 어려우며 서로 소통은 불가능해 보인다.



한편, 뵐플린은 뒤러와 렘브란트의 예술을 예로 들어 ‘선적 양식’에서 ‘회화적 양식’으로 발전하는 어떤 역사적인 논리를 인정한다. 말하자면 렘브란트의 회화적 양식은 뒤러의 선적 양식이 선행되었기에 가능하다고 보며, 예술은 전형들이 어떤 연속성에서 축적되어 발전한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뵐플린에 대해서는 창디의 다음 모임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단절의 예술


예술에서 새로운 전형과 과거의 전형 사이는 흔히 ‘단절’과 ‘계승’의 관점에서 설명된다. 홍가이가 서구의 문화적 패러다임 상태를 “오랜 세월을 두고 덧칠한 성당벽화”에 비유하며 모더니스트 화가들의 예술이 ‘이 덧칠을 뜯어내는 작업’이라고 평하는 것은 ‘단절’의 예이다. 미국의 화가 잭슨 폴락과 프랭크 스텔라는 대상과 자연의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전통 양식과의 극단적인 단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대형 캔버스에 아무런 형태도 없이 온통 물감을 흩뿌린 폴락의 작품과, 아무 것도 그려있지 않은 텅 빈 화폭에 캔버스의 고정된 사각 틀을 해체하고 캔버스의 모양을 다양하게 구성한 스텔라의 작품은 ‘그림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회화의 본질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그림에 대한 감상자의 관념을 뒤집어 놓는다.
 




‘거꾸로 보이는 렌즈를 낀 사람’


토머스 쿤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개척자를 이렇게 특징짓는다. 똑같은 대상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뒤집어 보는 것이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처럼 생각의 틀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상을 거꾸로 보여주는 렌즈의 관점은, 쿤이 비유적인 예로 들었듯이, 심리학의 게슈탈트 전환과 유사하다. 게슈탈트 전환이란 알다시피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동일한 그림이나 형상이 토끼처럼 혹은 오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소녀의 모습에서 노파의 얼굴로 변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패러다임의 변화에서는 친숙한 상황에서 눈에 익은 ‘오리’의 형상과 이런 틀에서 벗어난 시각에서 발견되는 ‘토끼’의 형상은 전혀 다른 별개의 대상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이전처럼 ‘오리’로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보는 것은 그릇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습관적인 지각의 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토머스 쿤은 우리가 무엇을 보는가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전의 시각 경험과 개념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도록 가르쳤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과학에서 교과서를 통해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을 익히고 과학자 사회에서 인정된 유형과 규칙에 친숙해짐으로써 대상을 지각하는 방식이 결정되는 셈이다. 예술에서 보면 주류예술의 양식이나 전형의 틀에 의해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려는 입장이다.



여기서 잠시 잭슨 폴락의 전기영화에서 본 장면을 떠올려본다. 폴락의 그림을 그의 아내 리 크래스너가 큐비즘, 오토마티즘, 초현실주의 등의 관점과 비교하는 장면인데, 크래스너는 같은 추상화가이지만 내적 경험이나 자연의 이미지를 그리지 않는 폴락의 추상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폴락은 그림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고 말한다. 너무 복잡하게 그림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폴락의 제안은 어쩌면 고도의 추상 회화를 감상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Male and Female 1942, Oil on canvas, 73 1/4 x 49)

그런데 실제로 폴락의 위 그림을 눈앞에서 보면 어떠할까.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를 읽어야 한다면 어떠할까. 작품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크래스너 처럼 유사한 전형들의 잣대를 들어대거나 관련 이론들에 대한 검색부터 하게 되지 않을까. 전형들에 대한 사전 지식은 특히 난해한 현대 예술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하나의 정형화된 틀에 고정된 시선으로 작품에 접근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거꾸로 보이는 렌즈’의 관점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
 




전통적인 과학사에 대한 비판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서 생각에 가장 많이 남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과학사는 역사기술의 방식에서 그 당대에 그 패러다임이 형성되는 역사적 정당성을 설명하며, 현재 과학과의 연관성 보다는 해당 패러다임과 관련되는 동시대 분야들과의 관계를 연구한다. 우리가 대학에서 배운 예술사와 문학사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로 대개 이런 역사주의적 관점 아래 하나의 전형에서 다른 하나의 전형으로 바뀌는 연속을 보여준다. 그러나 쿤의 과학혁명은 전형의 연속성에 대한 오랜 고정관념을 끊고, 하나의 전형이 다른 전형에 이어 나타나는 것을 ‘우연’으로 설명한다. 새로운 전형과 과거의 전형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으며 시대적 여건이 무르익으면 새로운 전형이 과거의 전형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나타날 수도 있다는 논리이다. 주류 패러다임에 대한 믿음은 이제 설득력을 잃고 각 전형들의 독자성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새롭게 부각된다. 아직도 타 집단에 군림할 수 있는 주류문화와 주류가치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번역자’의 역할


시인 정현종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했고, 어느 외국시인은 사람이 바로 섬이라고 하였다. 과학에서 전형과 전형처럼 서로 다른 문화적 전통의 집단과 집단이 한 사회에서 섬처럼 외따로 있다. 현대 사회는 이렇게 서로 건널 수 없는 무수한 섬으로 조각나 있는 모습이다. 토머스 쿤은 언어와 문법, 가치와 세계관이 전혀 다른 전형들 사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과학사학자가 수행해야 할 과제라고 한다. 낯선 전형의 이론과 적용을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여 번역하고 자신이 속한 전형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다른 언어로 옮기는 ‘번역자’의 역할은 예술과 문화, 사회 전반적인 현상으로 확대하면 그 의미가 크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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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희 2011.02.06 00:17
    교수님 말씀에 재충전할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스스로 설명이 필요하다 보니 쓸데없이 글이 길어지진 않았나 싶었습니다. 공부하면서 조금씩 더 나아지겠지요. 오늘 뵐플린의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미술사의 기초개념>에 앞서 <뒤러의 예술>을 먼저 펼쳐봅니다.

    3월 정기모임은 셋째주 토요일인 19일 오후 3시가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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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광준 2011.02.06 00:17
    3월이 아니라 2월이겠죠? ^^ 그렇다면 맞는가 봅니다.ㅎㅎ 당분간 저는 게시판 코멘트를 통해 부지런히 인사드려야겠습니다. 류은희 선생님의 글과 김억중 교수님의 코멘트에 자극받아 비록 혼자라도 목록에 있는 책들을 읽어보며 주파수를 맞춰보겠습니다. 작년 가을 논의됐던 작고 탄탄하면서도 지속성 있는 창디모임,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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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희 2011.02.06 00:17
    아, 3월이 아니라 이번달 2월입니다. 제가 숫자 혼동을 자주 하다보니 그만..
    전감독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혼자 책읽기가 힘드실 때, 가끔 시간이 허락하실 때 모습을 보여주세요. 모두 행복해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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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진 2011.02.06 00:17
    에세이 잘 읽어보았습니다. 폴락의 그림을 더 찾아볼까 했는데, 이렇게 공유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번 연휴에 홍가이의 책을 다시 제대로 읽어봤습니다. 그 동안 휴식을 목적으로 한 쉬운 책에 길들여진 탓에, 머리가 지끈지끈했지만 쿤의 책과 패러다임에 관한 토론 덕분인지 한결 진전된 눈으로 흡수되는 것이 느껴져서 성취감으로 뿌듯합니다. 함께 음독했던 Sharing (p.59-62) 부분에선 뒤늦은 감동과 공감을 느꼈다지요. 독서 지도의 출발점으로 선정된 입문서답게 앞으로 읽어나갈 책들이 다시 이 책의 구석구석을 noticing 하리라 믿습니다. Shakespeare Vacation을 간절히 원하게 되는 연휴의 끝자락이네요. 저도 이제 뵐플린으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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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희 2011.02.06 00:17
    저 역시 홍가이 선생의 예술론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술은 '자신의 놀라운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며, 그것도 '아무런 타산도 없이 가장 순수하게 인간 공동체의 정신적 결합'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토머스 쿤이 말한 '번역자'의 역할과 닮았지요. 실제 예술가의 작품활동을 겉에서 바라보면 홍가이의 예술론은 이상주의적으로 비쳐지기도 합니다만, 그 정신은 참으로 고귀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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