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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교습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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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자연 이분법은 학문 토양을 척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균형은 센 곳을 사하고, 약한 곳을 보하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은 자연 쪽이 세 보이고, 학자는 인문 쪽이 세 보입니다.
얼마 전 책 읽으면서 노트한 건데, 조금 옮겨 봅니다.
또 다른 교양 - 에른스트 페터 피셔
-- 인용 시작 --
문학이나 예술의 길에는 교양을 성장시키는 숙고와 정신적인 기쁨이 있다고 본다.
한편, 믿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지만, 자연과학적 관점을 이해하거나 도달하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을 통해 느끼는 정신적 풍요, 자연과학에 대한 즐거움, 느껴본 사람들에게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이 즐거움을 사람들 스스로 체험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경우에 편견이 생긴다.
자연과학의 한계라기 보다 자연과학에 대한 좁은 시야.
과학적 이해가 상식과 충돌하는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과학을 멀리하는 편견은 편식 습관에 비유될 만 하다.
수학은 과학을 담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열쇠일뿐이다.
수학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서,
과학자가 깨닫게 된 사실과 지식을 재현하는 새로운 그림이나 상징을 찾아내야 한다.
지식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즉, 이해나 기억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형상은
그림이나 다른 상징을 통해서 형성될수 있다.
표상, 외부에서 들어와 만들어진 표상과 내부에서 만들어진 표상의 물결들이 서로 만나며,
이 현상을 영혼이라고 불렀다고 추측된다.
과학 발견에 들이는 노력만큼 공을 들여 과학적 형상을 만들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는 아인슈타인이 이해했던 것처럼
우주를 이해하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 인용 끝 --
(노트할 때, 그대로 옮기지 않고, 제가 이해한 대로 적는 습관이 있어서, 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의미도 그렇고, 현실적인 토양도 그렇고 그래서,
자연과학 '편향'해서 학습하는 독서회가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백북스는 자연과학 편향이어서 오히려, 인문의 균형을 이루어 간다고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감상적인 고백을 하자면, 공부에서나 삶에서나 이 말 앞에서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先入者主.
주객을 극복하고, '참'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좌절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後入者主라는 말로 바꾸워도, 그럴 듯합니다.
인문이라서 그런가 봅니다.(농담)
제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先入이든 後入이든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선이든 후이든 主가 되었다가 非主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합니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말도 다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아인쉬타인이 천재적인 물리학자이고,
그가 난해한 수학공식으로 상대성원리를 설명했다 하더라도,
아인쉬타인이 이해한 우주는 진실과 거리가 멀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인쉬타인은 여전히 위대합니다.)
자연(A)은 인문과 자연(B)을 구분하지 않습니다.(A와 B는 다름)
오직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에게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과학은 선대의 과학적 선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의심하고 회의함으로써
새로운 혁명에 도달했다고 보는 것이 진리에 가깝습니다.
그 점에서도 피셔는 틀렸습니다. (=나와는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는 음식의 맛을 보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미술을 감상하듯이
과학을 즐기면 됩니다. 과학자들도 어짜피 "지극히 협소한" 자기 연구분야에 대해서만 깊이 알 뿐,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어쩌면 일반인보다 이해의 폭이 적을 수 있습니다.
제가 지인으로 아는 박사들을 보면 사실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