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지상주의-일체유심조 불교-대체의학-기와 한의학 오행설 비판

by 미선 posted May 1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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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지상주의-일체유심조 불교-대체의학-기와 한의학 오행설> 비판
 
 
 
 
<마음지상주의>와 ‘일체유심조’라는 주문
 
개인적으로는 <유물론적 환원주의>만큼이나 <유심론적 환원주의> 또한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유물론적 환원주의와 유심론적 환원주의는 각각 <뇌지상주의>와 <마음지상주의>에도 유비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현대 뇌과학 진영에는 모든 사안들을 뇌의 생리학적 작용으로 환원시켜 설명해보려는 입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선 이미 일전에 잠시 언급한 바 있다. https://100books.kr/?no=18698 참조.
 
그런데 마찬가지로 또 다른 한 쪽 반대 진영인, 관념론적이고 유심론적인 <마음지상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는 다소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음을 말씀드린다.
 
예컨대, 불교철학의 경우에도(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마음의 절대화를 일삼는 마음지상주의의 흔적들이 보이고 있는데, 이들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보거나, 일체법은 마음법이며, 일체의 명칭은 마음의 명칭이요, 마음이 만법의 근본”이라고 말할 정도로 마음이 알파요 오메가로 자리하는 경가 많다고 하겠다.( 윤원철, “마음을 가져와라”, 『마음, 어떻게 움직이는가』(서울: 운주사, 2009), pp.127-195)
 

마음지상주의자들에 대한 필자의 비판은 나 혼자만의 견해가 아니며 이미 불교진영 안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비판이라는 사실을 필히 기억했으면 한다(각묵스님, “‘마음의 절대화’ 유감”, 『불교신문』(2480호) 11월29일자 글 참조). 또한 불교학자 박성배 교수 역시 불교인들 중에는 마음을 하나님처럼 절대화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박성배, 『몸과 몸짓의 논리』(서울: 민음사, 2007), 참조)
 

특히 화엄경의 핵심사상에도 속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용어는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존재의 본체를 마음에 두고 있는 언명에 해당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 같은 일체유심조를 철썩같이 믿고 여전히 주문처럼 뇌까리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마치 론다 번(Rhonda Byrne)의 대중 히트작인 『시크릿』the Secret이라는 책의 유행처럼 번져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알고 보면 사회 체제 구조의 문제는 탈각된 채로 철저히 자본주의 성공 신화의 욕망에 대한 실현으로 유도되고 있을 따름이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자기계발서가 지닌 한계이기도 하다(미키 맥기, <자기계발의 덫>(모요사) 참조).
 

'자기계발'이라고는 하나 세계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분명한 현실 삶의 문제들은 회피한 채 인간이 지닌 <계급 상승에 대한 욕구>와도 곧잘 맞물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또한 마음치유라고는 하나 현실 삶의 구조적 변혁의 문제는 탈각된 채로 온전한 몸치유가 되지 못하면서 힘든 이 땅의 현실에선 되려 아편적 기능으로 이어지는 경우 역시 많다.
 
만일 <일체유심조>라는 개념이 단지 마음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적 차원이라면 나 또한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만에 하나 마음에 대한 존재론적인 선차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엔 아직까지도 이 구분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질 않은 채로 순진스럽게도 정신적인 마음 작용의 존재론적인 단독적 선차성으로서 부지불식간에 이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매우 다분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는 불교 진영 전체가 그렇다고 보질 않으며 다만 일부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언어나 문자가 갖는 파생적 효과마저 인지한다면 가급적 이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소통 노력 역시 필요하기에 좀 더 개선된 수정 역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대체의학>에서도 나타나는 마음지상주의
 
불교뿐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 진영에도 마음지상주의자들의 허다한 위험성이 엿보이고 있는데, 이들은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다.

이들이 보는 “마음은 몸과 별개로 존재한다. 마음은 몸과 독립적이기 때문에 유체이탈이 가능하며 죽음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는다. 마음과 몸은 독립적이며 사후의 마음은 유전되고 재생된다. 진화의 주체는 마음이며, 인식의 주체 역시 뇌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까지 주장할 정도다. 강길전/이기환/홍달수 공저, 『대체의학의 이론과 실제』(서울: 가본의학, 2008), p.44-49. 그야말로 정말 서프라이즈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말그대로 뇌지상주의자들과는 또 다른 반대 진영의 극단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구체적 검증과 실험을 중요시하는 서구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같은 대체의학 분야를 비판적으로 대하거나 논란이 되는 측면이 있다.

나는 지금 대체의학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임상적으로 하나도 효과가 없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적어도 대체의학이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잘못된 철학적 언명과 그 명제들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명상이 갖는 기본적인 분명한 치유적 효과가 있다. 심지어 나는 상상치유의 물질적 효과 역시 어느정도는 긍정한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상상을 통한 치유 방법들도 일정한 효과도 있을 순 있으나, 실제 구조화된 부조리의 현실 조건들까지 바꾸기에는 그 역시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뇌에 온전한 약물 투여 치료만큼이나 마음을 가다듬으며 치유를 추구하는 것도 필요하며, 또한 몸에 대한 물리적인 환경과 조건들을 개선하는 작업 역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생활반경 및 세계사회 역시 내 몸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치유는 전인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아편적 치유나 플라시보(placebo)가 아무리 일말의 효과가 있다고 해도 그것 역시 여전히 일정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지속적인 치유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온전한 방법이라는 생각지 않는다.
 
철학사에서는 오랜 동안 물질이냐? 정신이냐? 하는 문제로 유물론과 관념론 진영이 싸워왔지만, 철학적 맥락에서 볼 때 대체의학을 포함해 이러한 마음지상주의자들은 거의 대부분 관념론적 진영에 속하고 있다. 심지어 이상한 종교화로도 이어지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탈속화된 초월과 영성을 주장하며, 세상사에 초연한 도인들도 매우 많다.

따라서 설령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의 그리스도적 영성으로 드러나든 혹은 불교의 간화선 수행으로 드러나든 혹은 그 어떤 테라피 방법이나 심리치유 기제들과 시스템으로 표현되든 간에 우리는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관념론적 병폐와 아편적 특성으로서의 기질들까지 우리는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도 있을 걸로 본다.

겉으로는 고통에 대한 치유를 표방하나 결국은 그러한 치유 방법 그 자체에 대한 중독으로 넘어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관념적 종교를 계속적으로 끊지 못하거나 테라피 자체에 대한 중독 현상들 역시 이에 속한다. 내가 중독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실상 몸의 고통 자체를 온전히 해결하고 있진 않은 채로 그저 수렁에만 계속적으로 빠지도록 할 뿐이기 때문이다.
 
기(氣)의 실체와 오행설을 현대과학적으로 밝힌다?

언젠가 필자는 우연히 실제 기공술 강의 수업을 직접 들은 적이 있는데, 한 번은 그 기공술 강사가 포즈를 취하며 손으로 이리저리 휘젓더니 지금 강원도의 신선한 공기를 자신이 이 강의실에 끌어왔다면서 이것이 느껴지지 않냐고 말하길래, 나로선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자, 기가 아직 부족하거나 마음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얘길 듣고 조금 황당스럽기도 했다. 도대체 그것이 진짜 강원도 자락의 공기인지 그리고 또 내가 그렇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고 객관화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면서 그 강사는 흔히 뉴에이저들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한 양자물리학을 들먹이면서, 지금 기의 변화로 강원도의 신선한 공기를 이곳 강의실에 들여온 것은 매우 과학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라며 구라를 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을 참석하다가 도무지 황당스런 주장들에 결국은 나왔지만, 어이없게도 정말로 이를 믿고 체험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나와서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솔직히 나 자신은 일부 동양의학 연구가들이 시도하는 것처럼 동양형이상학적인 개념의 기(氣)를 실증적인 과학으로 밝히겠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본인은 매우 회의적인 입장에 서 있다. 사실은 왜냐하면 그럴 필요조차도 없는 게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은 결코 일대일 대응의 관계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기(氣)는 전적으로 고대 동양인들이 생각해낸 형이상학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철학의 기 개념은 고대 동양인들이 광범위한 일반성에 대한 사유의 탐험에서 직관적 사유로서 붙잡은 궁극적 가정으로서의 철학적 개념일 뿐이다. 하지만 자연과학이 수용하는 이론은 인류가 도달한 측정 범위 내에서의 일반성을 지향한 것이기에 실은 학문의 범주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한때 봉한학설 해프닝을 통해서도 볼 수 있었듯이 마치 기(氣)를 과학적으로 발견했다고 떠들어댄다면 이는 그야말로 무지몽매한 처사일 뿐이다.

기(氣)라는 개념을 일종의 유비적 의미로선 받아들일 수 있으나 과학적인 측정 장치와 추론을 통해 발견된 그 무엇을 가리키며 이를 곧 기(氣)라고 선언한다면 이는 동양인들 안에 깃든 서양과학에 대한 콤플렉스 반응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철학은 과학을 통해 예증되거나 수정되어질 뿐이지 그 자체로 일대일 대응 관계가 성립되진 않는다.

동양철학의 위대함은 일찍이 고대로부터 예리하게 간파했던 그 직관적인 통찰력에 있다. 고대 동양인들은 존재의 생성 소멸과 사물의 형성이 관계적이고 역동적인 변화 과정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매우 일찍부터 직관적으로 간파했던 것이다.

또한 동양의 한의학 분야에선 거의 교리 수준의 대전제로도 작동되는 음양오행(陰陽五行說), 특히 오행론(五行論)에 대해서도 (그 오행의 본뜻이 실제적인 의미든 기능적 의미든 간에) 다소 미심쩍게 보는 입장에 서 있으며, 실제로 어떤 이는 동양의 오행 개념을 현재 이론물리학에서 말하는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의 다섯 유형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이경숙 지음, 『기의 여행』(서울: 구름, 2009) 참조.)
 
아..동양철학의 오행설이 현대 물리학의 초끈 이론의 다섯 유형과 연관된 것이었다니..정말 새로운 부활이다!
어찌보면 참으로 놀라운 끼워맞추기 발상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오행론은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4행, 8행, 9행, 12행도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동양철학자들 중에서도 내가 알기에 다산 정약용과 혜강 최한기 선생님도 오행설을 비판한 것으로 안다. 결국 이러한 오행설을 현대의 몸 이해에 있어 교리적인 대전제를 삼기에는 논란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이 때문인지 서양의학을 전공한 연구자들 중에는 한의학은 결코 과학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며 극단적으로 배제하는 입장을 표방하기도 한다.

물론 서양의학의 한계를 보완한다는 점에서 대체의학이든 동양의학이든 그 연구 자체에 대한 필요성만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내가 볼 때 기존의 한의학 전제들은 그 방법론적 토대부터 다시금 살펴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알다시피 수천 년 전에 쓴 고대 중국의 <황제내경>은 지금도 한의학 진영에선 거의 성경급으로 취급할 정도인데, 이제는 정말 새롭게 업그레이드가 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자는 4체질론, 8체질론 등등 이러한 체질론을 오히려 업그레이드로 생각하는 이도 있는데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도 별로 동의하고 있진 않다. 참고로 소설가 김태연은 한의학 비판 장편소설인 ‘반인간’에서 한의학의 공상과 허구를 비판한 바도 있다.
 
생각건대, <유물론적 환원주의>나 <유심론적 환원주의>나 어차피 양 극단은 균형을 잃은 것이다. 인간 이해에 있어 <뇌지상주의>든 <마음지상주의>든 균형을 잃은 한 쪽 극단으로서의 이해는 아무래도 매우 오류와 병폐를 낳을 위험이 있다고 여겨지며, 가능하면 인간 이해에 대한 파편화된 영역들을 일관된 통합으로서 엮어내는 연구 작업들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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