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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8 18:39

글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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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곧 그 사람은 아니다 .............................................. 마광수(연세대 국문과)





어느 헌 책방에서였다. 이 책 저 책을 뒤지고 있던 내 손에 아주 낡은 책 한권이 무심코
집혀졌다. 『여성과 교양』이라는 책이었는데, 겉장을 들여다본 나는 그 책의 저자가 이
승만 정권 때의 실권자였던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인 것에 놀랐다. 박마리아라면 지금까
지도 세상 사람들 입에 ‘나쁜 여자’로 오르내리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4. 19 혁명이 있기
몇 년 전에 쓴 책이었던 것이다.

속 겉장엔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 박마리아’라고 되어 있었고, 이화여대 출판부에서 간
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본문 앞에는 당시의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의 서문이 들어 있었고,
박마리아를 대단히 칭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책의 내용을 훑어보니 박마리아 자신
의 성장기와 신변적인 얘기를 써나가면서 교양 있는 여성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었다.

나는 그 책을 보고 나서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다. 그 책에 씌어 있는 글 자체를 놓고 박마
리아를 평가한다면 누가 그녀를 악인이라 할 것인가? 그만큼 그 책은 품위 있는 내용의
글들로 채워져 있었다. 책이 출판됐을 당시에 그 글을 읽은 독자들은 박마리아의 인품을
흠모했을 게 분명하다. 박마리아의 인격과 그 글을 분리시켜 놓고 생각해 본다면, 그 글
자체는 너무나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마리아의 존재가치가 떨어진 요즈음, 사람들은 숫제 그 책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을 쓸 당시에는 박마리아가 한없이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
이었다가 그 후에 나쁜 사람으로 변한 것일까? 그럴 수는 없는 게 아닌가. 한 사람의 인간
성이 그토록 쉽게 바뀔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박마리아가 정말로 나쁜 사람인
지 아닌지는 함부로 속단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그녀를 일단 역사적 통념으로 평가한
다고 할 때, 박마리아가 쓴 글은 인격적으로 불완전한 사람이 가식적으로 쓴 글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글 자체가 그 글을 쓴 사람의 인격의 허위성 유무(有無)를 판별해 줄 수 있을까? 그것은
힘든 일이다. 박마리아가 쓴 글은 4. 19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개입하면서 판별이 쉽
게 이루어진 경우인데, 그것도 사실 확실히 믿을 것은 못 된다. 일반적인 글이라면 시간
이 흘러가 작자의 생애와 배경과 인간관계 등 주변적인 자료들이 다 조사된 다음에라야
어느 정도의 판별이 가능한데, 그것 역시 정확한 것이 될 수는 없다.

바로 이 점에 의외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즉 우리가 책이나 신문,
잡지 등을 통해서 대하고 있는 글들이 모두 다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모순투성이의 글들
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별로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문의 칼럼이나 잡지의 사회비평 같은 것을 읽으면서, 그 글이 갖고 있는 ‘품위’
와 ‘조리’에 홀려 글을 쓴 필자의 인격을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 하나만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포
함하고 있다. 곧 ‘자신의 인생을 산다’와 ‘글을 통해 타인의 인생을 산다’가 그것이다. 다
시 말해서 인간은 자신의 삶 이외에 ‘글 속에서의 삶’을 하나 더 살고 있는 것이다.

‘글을 통해 사는 타인의 인생’은 곧 ‘문자적 경험’을 의미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문자적
경험 (즉 간접경험) 이 실제적 경험 (즉 직접경험) 보다 인간의 인식에 더욱 뚜렷한 인상
을 주어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실제적 경험과 문자적 경험의 차이는 크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끔 만성이 되어버렸다. 아니 문자적 경험을 실제적 경
험보다 오히려 더 신뢰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여기에 글의 모순이 있다. 아니 글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여지껏 글에 대
해서 갖고 있던 인식에 모순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을
철저하게 믿어왔었다. 거의 모든 작문 교과서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은, 많은 사람들 머
릿속에 큰 비중을 갖고서 주입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말에 부합되지 않는 사례가 많
다. 아니 거의 모든 글이 다 이 말에 부합되지 못하는 것 같다. 앞에서 예로 든 박마리아
의 글이 좋은 보기이다.

물론 글로 표현된 자아(自我)는 그 글을 쓴 사람의 ‘표면적 자아’가 아니라 ‘심충적 자아’
이고, 그런 심층적 자아가 필자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 결과물이 곧 글이라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우선 글이 담당하고 있는 ‘전달자’로서의 기능을 생각해 볼 때, 글이
갖고 있는 위선성과 과장성, 그리고 안이성과 허위성이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자못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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